허공을 가득 메운 은빛 눈동자들이 일제히 명멸했다.
마천의 장벽 들머리, 짙은 안개마저 얼어붙게 만드는 사공도의 환영안술(幻影眼術)이 마침내 그 기괴한 촉수를 뻗었다. 수천 개의 은빛 가닥들이 얽히고설켜 거대한 은빛 살상망(殺傷網)을 형성하더니, 절벽 아래로 사정없이 내리꽂혔다. 그것은 단순한 초식이 아니었다. 상대의 기혈을 옭아매고 종내에는 영혼까지 삭탈하려는 무림맹 극고의 비술이었다.
쿠구구구구!
절벽의 암반이 쩍쩍 갈라지며 은빛 그물이 사방을 조여 왔다. 그 무자비한 궤적에 가장 먼저 걸려든 것은 용호표국의 도주 수레였다.
콰지직! 콰앙!
만년한철과 기괴한 법안의 기운이 뒤섞인 은빛 그물이 채찍처럼 휘둘러지자, 두꺼운 참나무로 짜인 수레의 바퀴가 단숨에 박살 나며 비산했다. 사방으로 튀는 나무 파편들이 칼날처럼 허공을 갈랐다. 표국의 식솔들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갔다. 도망칠 길을 원천 차단하겠다는 사공도의 악랄한 계산이었다.
"미천한 것들이 감히 맹의 권위에 도전하더니, 결국 이 벼랑 끝에서 개처럼 죽는구나."
사공도의 나직한 음성이 안개 너머에서 울려 퍼졌다. 자비로운 장로의 가면을 벗어던진 그의 얼굴은 탐욕스러운 아귀의 형상과 다름없었다.
혁린은 부서진 수레바퀴의 잔해 너머로 한 걸음 내딛었다. 가슴 깊은 곳, 심장에 똬리를 틀고 있는 뇌적(雷積)의 저주가 시뻘건 불길처럼 타올랐다. 검을 잡은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으나, 그의 눈빛은 오히려 한겨울의 서리꽃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대로 얽매여 죽을 수는 없다.'
약육강식의 비정한 강호에서 그가 배운 유일한 진리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밟히기 전에 먼저 상대를 짓밟아 뭉개는 것.
혁린이 거머쥔 신검 천뢰(天雷)가 낮게 울부짖었다. 검신을 따라 흐르는 푸른 뇌전이 그의 혈관을 타고 역류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육신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파괴적인 에너지가 무맥을 강제로 확장시키며 근육을 초인적인 상태로 재구성했다. 동시에 가슴을 찌르는 극심한 방전의 고통이 엄습했다. 수명을 갉아먹는 뇌적의 침투였으나, 혁린은 이빨을 악물며 그 고통을 힘으로 치환했다.
터엉!
혁린이 신검 천뢰를 부서진 땅 바닥을 향해 거꾸로 처박았다.
"뇌락지류(雷落地流)!"
그의 목구멍을 뚫고 나온 짐승 같은 포효와 함께, 검끝에서 뿜어져 나온 고밀도의 전류가 대지 아래로 깊숙이 스며들었다. 파고든 뇌전은 지표면 아래에서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거대한 그물망을 형성했다. 사공도의 은빛 살상망이 혁린의 머리 위를 완전히 덮치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터져라."
혁린이 검자루를 잡은 손에 극성(極盛)의 내력을 주입했다.
콰르르릉! 쾅!
땅속에 묻혔던 뇌전의 지류들이 일제히 지표면을 뚫고 하늘을 향해 폭발하듯 솟구쳤다. 그것은 단순한 번개가 아니었다. 혁린이 가슴속 뇌적의 압박을 벼랑 끝까지 견뎌내며 응축시킨, 피와 벼락의 합작품이었다. 고밀도로 압축된 청색의 전류가 은빛 그물과 격돌하는 순간, 공간 자체가 비틀리는 굉음이 협곡을 흔들었다.
쩌어어억!
하늘을 뒤덮었던 수천 개의 은빛 눈동자들이 일제히 균열을 일으키며 깨어져 나갔다. 사공도가 펼친 파쇄의 은망은 혁린이 역류시킨 거대한 뇌화공주(雷火空柱, 번갯불 기둥)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 차가운 절벽 위로 붉고 푸른 불꽃 기둥이 밤하늘을 찌를 듯이 솟구쳐 올랐다.
"크윽……!"
안개 너머에서 사공도의 신음 섞인 헛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제 아무리 무림맹의 고수라 한들, 천벌의 기운을 그대로 담아 역류시킨 뇌신무예의 일격을 정면에서 감당해 내기는 어려웠으리라. 일시적으로 법안의 연결이 끊어진 사공도의 기세가 꺾이며 안개가 뒤로 밀려났다.
혁린은 피가 배어 나오는 입술을 소매로 훔치며 천뢰를 거두어들였다.
그때, 그의 귓가로 오직 그에게만 들리는 차갑고 변덕스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심검의 영체, 뇌령(雷靈)의 조소였다.
- 크하하하! 제법이구나, 혁린. 하지만 보았느냐? 저 늙은 여우의 몸뚱이 속에서 풍기는 썩은 냄새를.
뇌령의 목소리에는 소름 끼치는 흥분과 멸시가 동시에 담겨 있었다.
- 저놈이 지닌 가공할 장수의 비결이라는 것, 그 실체가 무엇인지 아느냐? 저것은 뇌정전 아래 갇혀 끝없는 침묵 속에 썩어가는 신수(神獸)의 유해를 무분별하게 빨아먹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위선적인 정파의 거두가 신수의 시체를 뜯어먹고 연명하다니, 참으로 가소롭지 않으냐!
혁린의 미간이 좁아졌다. 사공도가 뇌정전과 신검의 비밀에 이토록 집착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단 말인가.
- 더 써라, 내 힘을 더 가져다 써라! 저 위선자의 목을 베고 그 피로 네 뇌적을 씻어내라. 그러면 너는 이 천하를 지배할 진정한 뇌신이 될 것이다!
뇌령의 속삭임은 달콤한 독약과도 같았다. 혁린은 가슴을 짓누르는 통증을 느끼며 뇌령의 전음을 차단했다. 힘을 쓸 때마다 명줄이 줄어든다. 그러나 지금은 물러설 곳이 없었다.
밤이 깊어지자, 맹의 추적을 피해 간신히 몸을 숨긴 곳은 마천의 장벽 초입에 위치한 허름한 동굴 안이었다.
동굴 밖은 칼바람이 몰아치며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사공도의 습격을 간신히 모면했으나, 용호표국의 식솔들은 추위와 공포에 질려 몸을 떨었다.
"추워…… 너무 추워……."
백소진이 얇은 담요를 어깨에 두른 채 이빨을 딱딱 부딪히고 있었다. 평소에는 혁린에게 잔소리를 퍼붓던 억척스러운 그녀였지만, 불어닥치는 칼바람과 죽음의 공포 앞에서는 그저 한 명의 연약한 여인일 뿐이었다.
혁린은 동굴 구석에 홀로 앉아 칼날을 다듬고 있었다. 타인에게 곁을 주지 않는 그의 고독한 성정은 이런 순간에도 빛을 발했다. 누구도 믿지 않는다. 그것이 삼류 표사 시절부터 뼈에 새겨진 그의 생존 원칙이었다.
하지만 떨고 있는 백소진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품속에 넣어둔 반쪽짜리 용호철전이 그의 살결에 닿아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건넨 신뢰의 무게였다.
혁린은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백소진의 등 뒤로 걸어가 아무런 말도 없이 가만히 자리에 앉았다.
"어……? 혁린?"
백소진이 놀란 눈으로 그를 돌아보려 했다.
"움직이지 마시오."
혁린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덤덤하고 차가웠다. 그러나 그녀의 어깨너머로 뻗어 나간 그의 두 손에는 따뜻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스으으으.
혁린은 자신의 체내에서 정화된 온화한 뇌천기(雷天氣)를 은밀하게 끌어올렸다. 파괴적인 벼락의 성질을 죽이고, 오직 따스한 온기만을 남긴 기력이 백소진의 등을 타고 그녀의 전신으로 흘러들었다. 얼어붙었던 그녀의 혈맥이 서서히 풀리며, 창백했던 뺨에 붉은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바보같이…… 자기 몸도 성치 않으면서 왜 이런 짓을 해……."
백소진은 눈물이 핑 도는 것을 참으려 고개를 숙였다. 혁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겉으로는 고독을 자처하며 타인을 멀리하려 했지만, 그의 손길에 담긴 정성만큼은 밤새도록 식지 않고 그녀를 감싸 안았다.
동굴 입구, 어둠이 짙게 깔린 그곳에는 또 다른 사내가 서 있었다.
제갈휘.
그는 검을 땅에 짚은 채 밖에서 불어오는 눈보라를 묵묵히 맞고 있었다. 그의 가슴팍은 이미 사공도의 자객들과 싸우며 입은 상처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붕괴해 가는 제갈세가를 살려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 그리고 무림맹의 위선 사이에서 갈등하던 천재의 등은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쿨럭!
제갈휘가 참지 못하고 검은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 그의 손바닥은 이미 검자루를 얼마나 강하게 쥐었는지 살점이 찢어져 진물과 피가 엉겨 붙어 있었다.
혁린이 인기척을 내며 그에게 다가갔다.
"몸 상태가 말이 아니군."
제갈휘는 겉옷자락으로 입가의 피를 닦아내며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의 눈빛에는 이미 자신의 종장을 예감한 자의 비장함이 서려 있었다.
"혁 형."
제갈휘가 품 안에서 피에 젖은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주머니 속에서 나온 것은 오래된 서책 한 권과 제갈세가의 인장이 찍힌 서신이었다. 사공도가 제시했던 비장하지만 파멸적인 밀약의 흔적, 그리고 제갈 가문의 마지막 자존심이 담긴 물건이었다.
"이것은…… 제갈세가의 비전환무검(秘傳幻舞劍) 참세(斬勢) 비결이오."
혁린의 안색이 변했다. 일대 가문의 명운이 담긴 비전 무공을 타인에게 넘긴다는 것은 무인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가문을 살리기 위해 맹의 개가 되려 했으나, 결국 사공도 그자의 위선에 놀아났을 뿐이오. 내 생명은 이미 다했소. 하지만 제갈세가의 기예마저 저 더러운 위선자들의 손에 더럽혀지게 둘 수는 없소."
제갈휘는 무너져 내리는 무릎을 억지로 버티며, 혁린의 손에 서책을 쥐여 주었다. 그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부디…… 이 무공을 거두어 저들의 위선을 베어 주시오. 약자가 함부로 짓밟히지 않는, 당신이 말한 그 절대적인 질서를 이 강호에 세워 주시오."
그것은 단순한 무공의 전수가 아니었다. 가문의 몰락을 어깨에 짊어졌던 천재가, 자신이 갈 수 없었던 길을 가려는 또 다른 천재에게 건네는 마지막 염원이자 뜨거운 심경의 토로였다.
혁린은 서책의 무게를 느끼며 제갈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 담긴 깊은 슬픔과 비장함이 혁린의 가슴을 때렸다. 혁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서책을 품에 넣었다.
다음날 아침.
마천의 장벽 위로 붉은 태양이 떠올랐으나, 협곡에 몰아치는 눈보라는 그칠 줄을 몰랐다.
동굴 안의 열기가 식어갈 무렵, 혁린은 눈을 떴다.
제갈휘가 서 있던 입구는 비어 있었다. 그가 머물던 자리에는 오직 붉은 혈흔 몇 방울과, 눈밭 위에 깊게 파인 발자국만이 도주하듯 서쪽 절벽을 향해 나 있었다.
"제갈휘……."
혁린이 급히 동굴 밖으로 나섰다.
하얀 눈밭 위로 길게 이어진 핏자국이 안개 낀 절벽 저편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개 너머, 바람을 타고 기괴하고도 구슬픈 멜로디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제갈세가의 무인들이 전장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 부른다는 만가(輓歌)였다.
"……!"
눈보라 속에 섞여 들려오는 그 쓸쓸하고 장렬한 노랫소리는, 제갈휘가 자신의 마지막 남은 생명을 불태워 무림맹의 추적대들을 유인하기 위해 스스로 사지로 걸어 들어갔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혁린의 손이 천뢰의 검자루를 잡았다. 분노와 비장함이 그의 눈동자 속에서 번갯불처럼 번뜩였다.
사그라지는 만가(輓歌)는 바람을 타고 흩어지는 낙화(落花)와 같았다.
혁린의 신형이 백색의 눈보라를 찢으며 허공을 날았다. 초형(超形)의 신법이 펼쳐질 때마다 발끝에서 푸른 뇌전이 불꽃을 일으키며 쌓인 눈을 검게 그을렸다. 가슴속 뇌적(雷積)이 요동치며 폐부를 찌르는 고통을 유발했으나, 혁린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고독을 자처하며 타인의 호의를 조소해 왔던 그였다. 하지만 가문의 몰락이라는 거대한 업보를 홀로 짊어진 채, 스스로 사지로 걸어 들어간 천재 무인의 마지막 긍지를 모른 척할 만큼 심장이 얼어붙지는 않았다.
"제갈휘……!"
협곡의 외길, 벼랑 끝에 다다랐을 때 혁린의 눈에 비친 것은 아수라장이었다.
검은 예복을 입은 사공도의 상급 집행자들이 제갈휘를 겹겹이 포위하고 있었다. 제갈휘는 이미 한 자루 부러진 검을 쥔 채, 흩날리는 백설(白雪)을 붉게 물들이며 버티고 있었다. 전신에서 흘러내린 피가 눈 위에 기괴한 도화(桃花)를 그리고 있었다.
"어리석은 놈. 가문의 재건이라는 허상에 매달려 결국 맹을 배신하는구나."
집행자들의 우두머리가 비웃음을 흘렸다. 그들의 손에 쥐인 만년한철 쇠사슬이 뱀처럼 허공을 가르며 제갈휘의 사지를 옭아매기 위해 사정없이 좁혀왔다.
쇠사슬이 허공을 찢는 소리. 스스스슥!
제갈휘는 대답 대신 실소를 터뜨렸다. 그의 시선이 멀리서 뇌전을 가르며 다가오는 혁린에게 머물렀다. 그의 입술이 눈보라 사이로 소리 없이 움직였다.
'오지 마시오.'
그것은 애원이자, 무인으로서의 마지막 청이었다. 제갈휘는 남은 기력을 쥐어짜며 부러진 검을 하늘로 치켜들었다. 제갈세가 최후의 초식, 비전환무검의 절예가 그의 부서진 무맥을 타고 마지막 광휘를 뿜어냈다.
"가문의 영광은…… 더러운 위선자들의 손끝에 있지 않다!"
콰과광! 쾅!
검영(劍影)이 폭발하며 사방의 집행자들을 쓸어버리는 순간, 저 멀리 안개 가득한 허공에서 사공도의 나직한 비웃음이 다시금 메아리쳤다.
"과연 가상한 기개로구나. 제갈세가의 마지막 불꽃이 이 차가운 협곡에서 꺼지는구나."
그와 동시에, 사공도의 소매 안쪽에서 붉은빛이 번뜩였다. 그것은 그가 과거 뇌정전 외곽에서 훔쳐냈다는 고대 유물, '뇌신령'의 붉은 조각에서 흘러나오는 기괴한 마기(魔氣)였다. 붉은 안개가 제갈휘의 사지를 옭아매며 그의 생명력을 급격히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크아아악!"
제갈휘의 비명이 협곡을 울렸다.
혁린이 검을 휘둘러 그 붉은 안개를 걷어내려던 바로 그 찰나였다.
- 혁린! 뒤다!
뇌령의 소름 끼치는 경고가 뇌리를 때렸다.
같은 순간, 매서운 칼바람을 뚫고 저 멀리 그들이 머물던 동굴 쪽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들려왔다.
"혁린! 살려줘……!"
백소진의 목소리였다.
사공도의 진짜 노림수는 제갈휘가 아니었다. 제갈휘를 미끼로 혁린을 고립시키고, 그사이에 기습적으로 백소진을 납치하려는 양동지계(陽動之計)였던 것이다.
"이 가증스러운 정파의 버러지들이……!"
혁린의 눈동자가 핏빛으로 물들었다.
앞에는 목숨을 잃어가는 가련한 적이자 동지, 제갈휘가 붉은 안개 속에서 사러 가고 있었고, 뒤에는 그가 유일하게 온기를 나누었던 여인, 백소진의 비명이 멀어지고 있었다.
진퇴양난(進退兩難)의 벼랑 끝.
하늘에서는 피빛 번개가 내리치며 사공도의 음흉한 비웃음이 온 협곡을 가득 메웠다. 혁린의 손에 쥔 천뢰가 분노로 미친 듯이 울부짖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