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게 타오르는 화망(火網)이 협곡의 깎아지른 절벽을 피처럼 붉게 물들였다. 밤바람은 뜨거운 열기와 비릿한 쇠 냄새를 실어 날랐다. 천 명의 무인이 뿜어내는 살기는 뇌각령의 밤하늘마저 무겁게 짓눌렀다. 흐르는 침묵 속에서 오직 불꽃이 탁탁 튀는 소리만이 귀를 자극했다.
"마두 혁린과 배신자 제갈휘는 들어라! 이곳이 너희의 무덤이다!"
철검문주의 호통이 협곡을 흔들었다. 혁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손가락이 천뢰검의 검자루를 타고 흐르는 뇌전의 미세한 떨림을 감지했다.
심장 깊은 곳에서 뇌적(雷積)의 불꽃이 욱신거리며 경고를 보냈다. 검을 뽑는 순간 수명은 다시 깎여 나갈 것이다. 그러나 혁린의 눈빛에는 한 뼘의 망설임도 없었다. 밑바닥 표사 시절부터 그를 지탱해 온 것은 오직 하나, 짓밟히지 않겠다는 처절한 생존 의지뿐이었다.
"제갈 소협."
혁린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의 시선은 전방의 빽빽한 검진을 고정하고 있었다.
"가문을 위해 죽으러 온 길치고는 너무 시끄럽지 않소?"
옆에 선 제갈휘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의 손바닥은 이미 피로 물들어 있었다. 부러진 검자루를 꽉 쥔 손가락 끝이 하얗게 바래 있었다. 품속 깊은 곳, 붕괴해 가는 제갈세가의 서신이 살을 비집고 들어오는 것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가문을 살리기 위해 무림맹의 사냥개가 되어야 했던 그의 운명이, 이제는 혁린이라는 기이한 괴물과 함께 생사의 기로에 서 있었다.
"죽으러 온 것이 아니오."
제갈휘의 검에서 청색의 가전 검기가 피어올랐다. 부러진 검신임에도 불구하고, 그 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살아서 가문의 이름을 되찾기 위해 온 것이지."
"그럼 길을 열어라."
혁린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천뢰검이 허공을 갈랐다.
콰르릉!
마치 하늘이 갈라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푸른 뇌전의 줄기가 협곡의 어둠을 찢었다. 뇌신무예 1성 '뇌전일섬'의 궤적이 철검문의 전열을 향해 뻗어 나갔다. 눈이 멀 것 같은 백색의 섬광이 폭발하자, 전방에 늘어섰던 방패막이들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사방으로 날아갔다.
"흩어지지 마라! 검진을 유지해라!"
열화당의 장로들이 소리쳤지만, 이미 그들의 대열에는 거대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제갈휘가 신형을 날렸다. 부러진 검이 허공에서 수십 개의 원을 그리며 무시무시한 광풍을 만들어냈다. 제갈세가 가전의 신풍(神風)이 뇌전의 흔적을 타고 휘몰아쳤다. 부러진 검 끝에서 일어난 풍압은 단순한 바람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위마저 가루로 만드는 무형의 칼날이었다.
슈우우웅! 쾅!
"끄아악!"
바람과 번개가 뒤엉켰다. 혁린의 뇌전이 적들의 눈을 멀게 하고 기를 흔들면, 제갈휘의 광풍이 그들의 목과 사지를 사정없이 후려쳐 길을 만들어냈다. 천 명의 포위망이 단 두 명의 검끝에 의해 종잇장처럼 찢겨 나갔다. 무림맹이 자랑하던 삼대 방파의 정예들은 수수밭의 수수처럼 허무하게 쓰러졌다.
"이, 이 무슨 괴물 같은 놈들이……!"
철검문주가 가래 끓는 소리를 내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그들의 눈에 비친 두 사람은 무인이 아니라 천재지변 그 자체였다.
하지만 포위망은 집요했다. 쓰러진 이들의 빈자리를 메우며 수백 개의 화살이 밤하늘을 까맣게 뒤덮었다. 열화당의 독화살이 불꽃을 품고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피할 곳 없는 협곡의 외길. 화살비가 일행의 머리 위로 사정없이 쏟아지는 일촉즉발의 순간이었다.
"뒤는 걱정 마라!"
칼바람을 뚫고 앙칼진 목소리가 협곡을 때렸다. 백소진이었다.
그녀는 양손에 용호표국의 가업 징표인 '반쪽짜리 용호철전'을 쥔 채, 표국의 잔존 무인들을 이끌고 있었다. 그녀의 거친 입담 뒤에 숨겨진 차분함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백소진은 가슴 안쪽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를 억누르며, 표국의 식솔들을 바위 그늘 아래로 신속하게 대피시켰다.
"멍청하게 서 있지 말고 방패를 올려라! 고개 숙여!"
백소진이 날카롭게 소리치며 손을 휘둘렀다. 그녀의 손끝에서 발사된 수십 개의 암기가 허공을 날아오는 화살들의 촉을 정확히 맞춰 떨어뜨렸다. 타당탕! 쇠와 쇠가 부딪치는 파열음이 사방에서 울렸다.
그녀의 눈은 오직 한 사람, 혁린의 등만을 쫓고 있었다. 피투성이가 되어 검을 휘두르는 그의 넓은 어깨를 보며, 백소진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도제식 영웅들이 외치는 낡은 충의나 대의명분 따위는 그녀에게 아무런 가치도 없었다. 오직 저 고집스럽고 의심 많은 사내가 살아서 이 지옥을 나가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죽지 마라, 혁린. 절대로.'
그녀는 소리 내어 응원하는 대신, 품에 지닌 반쪽짜리 용호철전을 더 세게 쥐었다. 철전의 차가운 감촉이 그녀의 손바닥에 새겨진 굳은살을 파고들었다. 그것은 고독한 길을 걷는 혁린에게 보내는 그녀만의 무언의 약속이자 신뢰의 끈이었다.
화살의 기세가 더욱 거세졌다. 삼대 방파의 궁수들이 일제히 활시위를 당겼다. 이번에는 단순한 화살이 아니었다. 내력을 실어 쏘아 보낸 철전시(鐵箭矢)들이 공기를 찢는 굉음을 내며 혁린의 전신을 겨냥했다.
제갈휘가 풍압으로 막아내려 했으나, 쉴 새 없이 밀려드는 적들의 파도에 내력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의 검자루를 쥔 손이 잘게 떨렸다.
"여기까지인가……."
제갈휘가 나직하게 중얼거린 순간, 혁린이 그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물러서시오."
혁린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의 심장 속 뇌적이 요동치며 혈관을 불태웠다. 극심한 고통이 전신을 엄습했지만, 그의 눈은 오히려 푸른빛으로 타올랐다. 천뢰검에 새겨진 천고의 기예가 그의 뼈와 근육에 즉각적으로 각인되며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
뇌신무예(雷神武藝) 3성.
"뇌왕개갑(雷王鎧甲)."
혁린의 구결이 떨어지자마자, 그의 전신에서 파란색 강전기(强電氣)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치지직! 파지직!
그것은 단순한 기의 방어막이 아니었다. 벼락의 정수가 그의 피부 위에 겹겹이 쌓여 정교한 푸른빛의 갑옷 형상을 이루었다. 어깨와 가슴, 팔뚝을 감싼 전기의 장갑은 푸른 불꽃을 튀기며 주변의 공기를 왜곡시켰다.
슝! 슈슈슉!
수백 개의 철전시가 그의 몸을 향해 쏟아졌다. 그러나 화살들이 혁린의 몸에 닿기도 전에, 뇌왕개갑의 강력한 탄성에 가로막혔다.
쩌어어억!
화살들은 푸른 전기에 닿는 순간 사방으로 튕겨 나가거나, 그 자리에서 재가 되어 바스러졌다. 단 한 발의 화살도 혁린의 옷자락을 스치지 못했다.
"이, 이게 무슨 무공이냐!"
"인간의 무공이 아니다! 요술이다!"
신풍방의 무인들이 경악과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질렀다. 그들이 평생 쌓아온 무학의 상식이 송두리째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뇌왕개갑을 두른 혁린의 신형이 움직였다. 그의 움직임은 바람보다 빨랐고, 번개보다 잔혹했다. 한 번의 발걸음에 수십 장의 거리가 단숨에 좁혀졌다.
콰아아앙!
혁린이 천뢰검을 내리칠 때마다 뇌각령의 대지가 뒤집혔다. 푸른 전격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적들을 삼켰다. 제갈휘 역시 그의 뒤를 따라 부러진 검으로 바람의 궤적을 그리며 잔당들을 소탕했다.
단 두 명의 낙오자로 취급받던 이들이, 무림맹 휘하 삼대 방파 천 명의 정예를 말 그대로 유린하고 있었다. 뇌각령의 흙바닥은 흘러내린 피로 붉은 진흙탕이 되었고, 타오르던 횃불들은 흩어진 시체들과 함께 짓밟혀 꺼져갔다.
"괴물…… 괴물이다!"
살아남은 무인들은 이미 투지를 잃고 무기를 버린 채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무림맹의 엄명도, 가문의 영예도 벼락 앞에서는 그저 한 줌의 먼지에 불과했다.
혁린은 도망치는 자들을 쫓지 않았다. 그의 전신을 감싸고 있던 푸른 뇌왕개갑이 서서히 흩어지며 연기를 피워 올렸다.
"컥……!"
혁린이 가슴을 움켜쥐며 한 걸음 비틀거렸다. 목구멍까지 차오른 핏물이 입술 틈새로 흘러내렸다. 뇌왕개갑을 유지한 대가로 심장에 쌓인 뇌적이 혈관을 사정없이 쥐어짜고 있었다. 수명이 타들어 가는 고통에 눈앞이 잠시 아득해졌다.
"혁린!"
백소진이 황급히 달려와 그의 팔을 부축했다. 그녀의 손길은 거칠었지만, 혁린의 몸을 지탱하는 힘에는 간절함이 실려 있었다.
"괜찮소."
혁린은 그녀의 손을 밀쳐내지 않았다. 평소라면 타인의 호의를 의심하며 거리를 두었을 터였으나, 지금만큼은 그녀가 전해주는 온기가 필요했다. 품속에 있는 반쪽짜리 철전이 그의 차가운 가슴속에서 미세하게 공명하는 듯했다.
"아직 끝난 것이 아니오."
제갈휘가 검끝을 땅에 박은 채 전방을 주시했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마천의 장벽으로 들어가는 입구이자, 짙은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절벽의 좁은 길이었다.
탁. 탁. 탁.
기분 나쁜 쇠사슬 소리가 안개 속에서 울려 퍼졌다.
"……!"
혁린의 눈이 가늘어졌다.
짙은 안개 너머로 거대한 그림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무림맹의 직속 처단자이자, 정파의 상급 집행자들이었다. 검은 예복을 입고 얼굴을 가면으로 가린 그들의 손에는 굵은 철사슬 족쇄가 들려 있었다.
스스스스스.
상급 집행자들이 길바닥을 따라 철사슬을 길게 늘어뜨렸다. 그 쇠사슬은 평범한 철이 아니라 만년한철로 제련되어, 뇌전의 기운마저 흡수하도록 만들어진 특수한 병기였다. 그들의 목을 매달고, 뇌신검을 봉인하기 위한 무림맹의 최종 병기들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마두 혁린. 그리고 가문을 저버린 역적 제갈휘."
집행자들의 중심에서, 늙고 온화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 온화함 뒤에는 뼈를 깎는 듯한 냉혹함이 숨겨져 있었다.
안개가 서서히 걷히며 한 장로의 형상이 드러났다.
사공도(司空圖).
무림맹의 장로이자, 이 모든 음모를 막후에서 조종한 위선자가 마침내 그 가증스러운 얼굴을 드러낸 것이다. 그의 눈빛은 평소의 온화함 대신, 소름 끼치는 탐욕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여기까지 잘도 도망쳐 왔구나. 하지만 마천의 장벽은 너희의 무덤이자, 내 위업의 시작점이 될 것이다."
사공도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소매 사이로 기괴한 법안(法眼)이 세겨진 손바닥이 드러났다. 그의 차가운 눈동자가 은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더니, 이내 그 주변의 공간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스아아아아!
사공도의 등 뒤로, 은빛으로 빛나는 환영의 눈술(眼術) 수천 개가 허공에 동시에 떠올랐다. 수천 개의 은빛 눈동자들이 일제히 혁린과 제갈휘를 내려다보며 기괴한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 압도적인 기세에 협곡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뇌각령의 절벽 끝, 도망칠 곳 없는 안개 속에서 사공도의 기괴한 술법이 그들의 숨통을 조여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