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천재의 칼끝이 다시 살벌하게 맞닿아 광풍을 지피는 순간, 무림맹 본단 소속 철갑 기갑부대 삼백 명이 은밀히 표국 전체를 에워싼다.
질척이는 폭우 속에서 밤공기가 급격히 냉각되었다. 빗방울이 가죽 갑옷을 때리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사방의 어둠 속에서 차가운 쇳내가 진동했다. 흑철로 온몸을 감싼 기갑병들의 안광이 투구 틈새로 붉게 타올랐다. 그들이 든 살상용 대형 쇠뇌들이 일제히 현을 팽팽히 당기며 기괴한 마찰음을 내뿜었다.
"조준(瞄)!"
기갑대장의 건조한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방이 터질 듯한 침묵으로 가득 찼다.
혁린과 제갈휘의 시선이 허공에서 교차했다. 두 사람의 발밑 진흙탕이 그들의 내뿜는 기운으로 인해 부르르 떨렸다. 사공도의 음모가 이들의 목덜미를 조여 오고 있었다. 제갈휘의 손바닥에서 흘러내린 선혈이 검자루를 타고 빗물과 함께 흘러내렸다.
"사격하라(射)!"
지이익, 팽!
허공을 찢는 파열음과 함께 수백 발의 강철 쇠뇌살이 폭우를 뚫고 쏟아졌다. 그것은 혁린을 향한 포위망이 아니었다. 무림맹의 이름으로 검을 뽑았던 제갈휘조차 그 살상의 범위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사방에서 날아드는 철화(鐵花)들이 두 사람의 퇴로를 완벽히 차단했다.
"이, 무슨……!"
제갈휘의 청강검이 급격히 흔들렸다. 무림맹을 향했던 그의 맹목적인 믿음이 허공에서 산산조각 나는 소리였다. 검기가 흐트러진 찰나, 그의 무방비한 등 뒤로 대여섯 발의 묵직한 쇠화살이 음산한 파공음을 내며 쇄도했다.
콰르릉!
자색의 번갯불이 어둠을 가르며 제갈휘의 등 뒤를 후려쳤다. 혁린의 신검 천뢰가 허공에 자색의 궤적을 그리며 쇠화살들을 흔적도 없이 그슬려 버렸다. 벼락에 구워진 철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며 빗물에 기화하는 비명이 울렸다.
"정신 차려라. 가문의 영예를 외치던 혀가 벌써 굳었나."
혁린의 낮고 서늘한 축객령이 제갈휘의 귓전을 때렸다.
"큭……!"
제갈휘는 수치심에 이를 악물며 청강검을 가로질렀다. 푸른 검기가 부챗살처럼 펼쳐지며 이번에는 혁린의 사각지대인 왼쪽 어깨를 노리고 날아들던 강철 화살 다발을 쳐냈다. 깡! 깡! 깡! 날카로운 철음이 고막을 찢을 듯 울렸다.
서로의 목을 베려던 적수들이, 졸지에 서로의 사각지대를 메우며 등을 맞댄 형국이 되었다.
천뢰검이 혁린의 손안에서 미친 듯이 진동했다. 검신을 타고 흐르는 전류가 그의 무맥을 자극하며 숨겨진 힘을 강제로 각성시켰다. 뇌신무예의 본능이 그의 전신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혁린은 단숨에 대지를 박차고 올랐다. 진흙바닥이 그 반동으로 깊게 패였다.
파아앗!
혁린의 신형이 번개처럼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천뢰를 휘두를 때마다 자색의 전류가 그물이 되어 전방의 철갑병들을 옭아맸다. 고열에 달아오른 흑철 갑옷이 비명을 지르며 붉게 변했다. 강철마저 녹여버리는 벼락의 힘이었다.
혁린은 그 아수라장 속에서 포위망의 중심에 우뚝 서 있던 기갑대장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커헉……!"
거구의 대장이 허공으로 가볍게 들어 올려졌다. 대장의 가슴팍에는 무림맹 장로 사공도의 인장이 찍힌 밀령서가 꽂혀 있었고, 그의 허리춤에는 은빛으로 빛나는 통신용 전음옥(傳音玉)이 매달려 있었다. 혁린은 망설임 없이 대장의 손목을 꺾고 품 안의 물건들을 탈취했다.
전음옥을 거칠게 움켜쥐자, 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소름 끼치도록 가식적이고 온화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공도의 목소리였다.
- ...제갈휘가 혁린과 함께 죽어준다면 가장 좋으나, 설령 살아남더라도 살려두지 마라. 제갈휘가 혁린과 결탁해 무림맹의 군세를 공격했다는 명분을 만들면 된다. 제갈세가는 반역의 가문으로 몰려 완전히 해체될 것이다. 나는 이미 뇌정전의 비사인 '뇌신령'의 붉은 조각을 입수했으니, 이제 남은 것은 천뢰검뿐이다. 흔적을 남기지 말고 쓸어버려라.
빗소리 사이로 흘러나오는 사공도의 음모는 빗물보다 차가웠고, 비수보다 날카로웠다.
"거짓…… 말이다."
제갈휘의 손에서 청강검이 힘없이 낙하했다. 질척이는 진흙탕에 검날이 처참하게 박혔다.
그를 지탱하던 가문의 재건이라는 평생의 대의, 맹을 향한 충성, 그리고 사랑하는 누이와 일족을 지키겠다는 비장한 각오가 단 한 통의 밀령으로 인해 철저히 조롱당했다. 사공도에게 제갈휘는 가문을 구원할 영웅이 아닌, 쓰고 버릴 사냥개에 불과했다.
"사공도…… 네놈이 어찌 우리 가문을…… 내 누이의 목숨을 이딴 식으로……!"
제갈휘가 무릎을 꿇었다. 가슴을 짓누르는 거대한 배신의 무게에 숨이 막히는 듯, 그의 어깨가 밭은 숨을 몰아쉬며 격렬하게 떨렸다. 검자루를 너무 세게 쥐어 찢어진 손바닥에서 흘러내린 피가 빗물에 씻겨 허무하게 흩어졌다. 심검(心劍)이 무너진 무인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고 흐려졌다.
혁린은 그 무참한 몰골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의 뇌리 속으로 어두운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가진 것이 없어 무조건 짓밟혀야 했던 삼류 표사 시절의 고독. 정파의 명숙들이 의(義)를 논하며 내밀었던 손바닥 뒤에 숨겨져 있던 차가운 가식의 칼날들.
제갈휘의 무너진 눈빛은, 과거 자신이 수없이 흘렸던 피눈물의 잔영과 완벽히 겹쳐졌다.
'결국 너 또한…… 저들의 아가리에 던져진 먹잇감이었을 뿐이군.'
혁린의 가슴 깊은 곳에서 거대한 분노가 들끓었다. 철저한 고립주의와 불신으로 똘똘 뭉친 그였지만, 눈앞의 천재가 겪는 이 참담한 배신을 묵과할 수 없었다. 적을 죽여 자신의 안위를 챙기는 구차한 생존은 혁린의 무도(武道)가 아니었다. 판을 짜놓고 뒤에서 웃는 위선자들의 아가리를 찢어발기는 것, 그것이 그가 정한 새로운 질서였다.
"일어서라, 제갈휘."
혁린이 천뢰검을 비스듬히 내리깔았다. 검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자색의 전류가 떨어지는 빗방울을 증발시키며 백색의 연무를 피워 올렸다.
"너를 베는 것은 내 검이다. 저딴 위선자들이 짜놓은 올가미 따위가 아니란 말이다."
"혁…… 린."
제갈휘가 붉게 충혈된 눈으로 혁린을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지휘관을 잃은 철갑 기갑부대가 다시 한번 수패를 치켜들며 밀어닥쳤다. 쇠사슬과 철갑이 부딪치는 둔탁한 소리가 표국 마당을 가득 메웠다. 그들의 눈에는 오직 명령을 완수하겠다는 맹목적인 살기만이 번뜩였다.
"죽여라! 장애물은 모조리 쓸어버린다!"
새로운 부대장의 고함과 함께 삼백 명의 철기병들이 쇠도끼와 참마도를 치켜들고 파도처럼 들이쳤다.
혁린의 눈이 자색 서광으로 물들었다. 심장을 옥죄어오는 뇌적(雷積)의 고통이 혈관을 타고 찌릿하게 퍼졌지만, 지금은 멈출 때가 아니었다. 뇌신령의 파편을 가로챈 사공도와, 그의 위선 아래 움직이는 이 더러운 군대를 단죄해야만 이 질긴 인과의 사슬을 끊어낼 수 있었다.
"똑똑히 보아라. 정파가 자랑하는 그 알량한 힘의 종말을."
쿠구구구둥-!
하늘이 찢어지는 듯한 굉음이 대지를 흔들었다. 혁린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온 자색의 뇌전이 거대한 기둥이 되어 폭우를 뚫고 수직으로 솟구쳤다.
뇌신무예 제2성, 뇌락강림(雷落降臨).
허공을 가득 메운 먹구름이 소용돌이치며 지상으로 벼락의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콰르릉! 쾅! 쾅! 쾅!
수십 갈래로 갈라진 자색의 번개 줄기들이 표국 마당을 무자비하게 내리쳤다.
"아아아악!" "살려다오! 으아악!"
단단하기 이를 데 없다던 흑철 갑옷은 벼락의 초고열을 견디지 못하고 붉은 쇳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삼백 명의 철기병들은 단 한 걸음도 비켜서지 못한 채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갔다. 대지를 가르는 자색 폭풍 속에서 무림맹의 위엄은 한 줌의 재로 화할 뿐이었다.
제갈휘는 넋을 잃은 채 그 압도적인 파멸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목숨 바쳐 지키려 했던 무림맹의 정예가, 단 한 명의 사내와 그의 신검 앞에서 이토록 무력하게 바스러질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것은 경외를 넘어선 신의 심판과도 같았다.
폭풍이 잦아들고, 사방에는 지독한 탄내와 매캐한 연기만이 진동했다. 삼백 명의 기갑부대는 단 한 명도 온전히 서 있지 못했다.
"후우……."
혁린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심장을 불길로 지지는 듯한 뇌적의 통증이 이전보다 훨씬 묵직하게 가슴을 짓눌렀다. 쿨럭, 입안으로 비린 핏물이 가득 고였다. 하지만 심경의 한 자락이 열리며, 뇌적이 희미하게 정화되는 기묘한 해방감 또한 동시에 느껴졌다. 위선을 벌하고 은원을 갚은 인과의 보상이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쉬이이익-!
동쪽 하늘을 가르며 수십 발의 불화살이 폭우를 뚫고 솟구쳤다. 밤하늘을 붉게 수놓은 불꽃들은 허공에서 거대한 대역(大逆)의 문양을 그리며 사방으로 흩어져 내렸다.
그 방향은…… 백소진과 용호표국의 식구들이 몸을 피한 비밀 거처가 있는 곳이었다.
불화살들이 떨어져 내린 자리에서 붉은 불길이 빗속에서도 꺼지지 않고 치솟기 시작했다. 사공도의 직속 살수 대장인 혈랑(血狼)이 마침내 움직인 것이다.
"소진……!"
혁린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뒤흔들렸다. 언제나 거친 입담 뒤에 깊은 아픔을 숨긴 채 자신의 피 묻은 손을 닦아주던 그녀의 얼굴이 뇌리를 스쳤다. 저 멀리서 타오르는 불길은 단순한 신호탄이 아니었다. 소중한 이들을 인질로 잡고 뇌신검을 내놓으라는 사공도의 잔혹한 최후통첩이었다.
빗물에 젖은 불꽃이 동쪽 하늘을 붉게 각인시켰다.
혁린의 동공에 그 붉은 빛이 고스란히 박혔다. 천뢰검을 쥔 그의 오른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것은 공포가 아니었다. 뼛속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쳐 오르는, 대지를 태워버릴 듯한 역린(逆鱗)의 분노였다.
"소진……."
나직한 중얼거림이 빗소리에 묻혔다.
언제나 툴툴거리며 그의 상처를 거칠게 싸매주던 손길이, 그의 이기적인 고독을 유일하게 흔들던 그 따스한 잔소리가 가슴을 후벼팠다. 평생을 불신과 경계 속에 살아온 그였지만, 백소진이라는 존재는 그의 메마른 심연에 박힌 단 하나의 말뚝이었다. 그 말뚝이 지금 불타오르고 있었다.
콰르릉!
하늘의 먹구름이 그의 심경을 대변하듯 성난 야수처럼 울부짖었다.
"제갈휘."
혁린이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물속에서 건져 올린 얼음처럼 차가웠다.
"살고 싶다면 여기서 도망쳐라. 무림맹의 사냥개로 죽을 것인지, 아니면 가문의 이름을 더럽힌 반역자로 숨어 살 것인지는 네가 선택해라."
지면을 짚고 간신히 일어선 제갈휘가 청강검을 검집에 쑤셔 넣었다. 그의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피가 검집을 붉게 적셨다. 그의 눈빛은 이미 대의를 잃은 자의 허무함으로 가득 차 있었으나, 그 깊은 곳에는 여전히 꺾이지 않는 불꽃이 명멸하고 있었다.
"도망이라니……."
제갈휘가 서글프게 웃었다.
"가문을 잃고, 명예마저 진흙탕에 처박힌 무인에게 도망칠 곳 따위는 없소. 사공도…… 그 노적(老賊)의 목을 베지 않는 한, 나는 제갈세가라는 성씨를 가질 자격이 없소."
그가 검자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찢어진 살점이 다시 터지며 붉은 피가 흘러내렸지만, 그의 얼굴에는 더 이상 망설임이 없었다.
"나도 가겠소. 표국으로."
두 사내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적으로 만났으나, 이제는 같은 심연을 바라보는 동반자가 된 기묘한 인연이었다.
그 순간, 숲속의 어둠을 뚫고 질척이는 진흙을 밟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허억…… 허억……!"
피비린내와 함께 짓눌린 신음이 가까워졌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사내가 비틀거리며 마당으로 들어섰다. 용호표국의 고참 표사, 장 가(張 哥)였다. 그의 가슴팍에는 거대한 참마도에 베인 자국이 깊게 패여 있었고, 등 뒤에는 불길에 그을린 흔적이 역력했다.
"혁…… 혁린아……."
장 가가 혁린을 발견하고는 그대로 진흙바닥에 고꾸라졌다.
혁린은 신형을 날려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차가운 빗물 속에서도 장 가의 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내장이 파열되어 입에서 검붉은 선혈이 울컥 쏟아져 나왔다.
"어찌 된 일이냐. 표국의 비밀 거처는 철저히 숨겨져 있었을 텐데."
"혈…… 혈랑대다……."
장 가가 혁린의 옷자락을 움켜쥐며 피 섞인 숨을 토해냈다.
"사공도가 보낸…… 살수들이…… 이미 거처를 알아내고 불을 질렀다. 소진 아가씨는…… 아가씨는 그들에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장 가의 고개가 꺾였다. 그의 손이 혁린의 옷자락을 놓치며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마지막 안간힘으로 쥐고 있던 생명의 끈이 끊어지는 순간이었다.
혁린의 호흡이 멎었다.
빗방울이 그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려 턱끝에서 툭툭 떨어졌다. 그의 심장 부근에서 자색의 전류가 통제력을 잃고 거칠게 폭발했다. 지면의 진흙이 순식간에 말라붙어 먼지가 되어 날아갔다.
풍전등화(風前燈火)의 형국이었다.
슈우웅-!
돌연, 어둠 속에서 묵직한 파공음과 함께 무언가가 날아와 혁린의 발치에 꽂혔다.
그것은 검붉은 깃털이 달린 강철 화살이었다. 화살촉에는 피 묻은 비단 천 조각이 칭칭 감겨 있었다. 백소진이 평소에 머리를 묶을 때 쓰던 청색 비단 끈이었다. 그 천 조각 위에는 검붉은 피로 쓰인 조잡한 글씨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뇌신검 천뢰를 품고 마천의 장벽으로 오라. 홀로 오지 않는다면, 계집의 사지를 잘라 장벽 아래로 던질 것이다.]
사공도의 비열한 아가리가 마침내 그 이빨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혁린은 천 조각을 움켜쥐었다. 손아귀의 힘에 의해 비단 끈이 굳어지며 먼지처럼 바스러져 갔다. 그의 눈동자는 이제 자색을 넘어 칠흑 같은 암흑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천의 장벽……."
그곳은 신검이 떨어진 태초의 성역이자, 사방에 천뢰가 들끓는 금단의 영역. 사공도는 그곳을 혁린의 무덤으로 삼으려 하고 있었다.
제갈휘가 청강검을 뽑아 들며 혁린의 옆으로 다가섰다.
"함정이오. 사공도는 이미 마천의 장벽 주위에 무림맹의 사대문파 정예들을 배치해 두었을 것이오. 그곳으로 향하는 것은 사지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것과 같소."
혁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발밑에 누워 있는 장 가의 눈을 감겨줄 뿐이었다.
그의 시선이 동쪽의 불타오르는 하늘을 지나, 저 멀리 거대한 어둠으로 솟아오른 마천의 장벽을 향했다. 그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살을 에는 듯한 뇌전의 냄새를 품고 있었다.
이길 수 없는 전장, 빠져나갈 수 없는 올가미.
하지만 혁린의 가슴 속에서 요동치는 것은 두려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위선과 음모를 벼락으로 내리쳐 가루로 만들어버리겠다는 광포한 살의였다.
"함정이라고 해서 가지 않을 이유는 없다."
혁린이 천뢰검을 천천히 검집에 밀어 넣었다. 철커덕, 쇠붙이가 맞물리는 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묵직하게 울렸다.
"그 위선자의 목을 장벽 꼭대기에 걸어두기 전까지는, 내 검은 멈추지 않는다."
그는 망설임 없이 어둠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등 뒤로, 제갈휘가 묵묵히 뒤를 따랐다. 가문의 생존을 위해 싸우던 천재와, 밑바닥에서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던 삼류 표사. 결코 섞일 수 없었던 두 개의 궤적이 마침내 폭풍우가 몰아치는 마천의 장벽을 향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이 알지 못하는 어둠의 심연 속에서, 사공도가 파놓은 진짜 덫이 아가리를 벌린 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