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쿵-!

지진이 일어난 듯, 표국 대지 전체가 묵직한 진동과 함께 아래로 가라앉았다. 대기를 압도하는 그의 무거운 검의(劍意)가 혁린의 전신을 정면으로 압박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표국 담벼락 청기와 위에 한 자루 청강검을 검집째 올린 채, 서늘한 눈매로 이 모든 무참한 광경을 지켜보던 제갈휘가 허공에서 지면을 내리누른다.

비바람이 사납게 몰아치는 마당 한가운데, 흙먼지와 빗물 섞인 수증기가 원형으로 퍼져 나갔다. 제갈휘의 신형은 추호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빗방울조차 그의 몸 주변 한 자 범위 안쪽으로는 침범하지 못한 채 허공에서 퉁겨져 나갔다.

혁린의 어깨에 걸쳐져 있던 백소진의 무명 겉옷이 서늘한 기풍에 사시나무 떨듯 흔들렸다. 백소진은 숨을 들이키며 혁린의 등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손끝이 덜덜 떨리는 와중에도 그녀의 두 눈은 혁린의 피투성이 어깨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린아…… 저자는……."

"뒤로 물러나 있어."

혁린이 낮게 읊조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감정이 배제되어 있었다. 기겁할 만한 기세가 허공을 짓누르고 있었으나, 혁린의 눈동자는 깊은 심연처럼 고요했다. 오히려 가슴팍에 새겨진 검무늬가 제갈휘의 등장과 동시에 맹렬하게 요동치며 맥박을 두드렸다.

제갈휘는 널브러진 무림맹 살수들의 시신과 사풍검의 잘려 나간 수급을 묵묵히 응시했다. 그의 검은 눈동자 위로 서글픈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이내 그 빛은 얼음장 같은 냉정함으로 덮어 씌워졌다.

"무림맹 징수단의 악행은 내 이미 익히 들었소. 법도를 빙자해 사리사욕을 채우고, 민초들의 고혈을 빠는 자들이었지. 그들의 죽음은 자업자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오."

제갈휘가 청강검을 쥔 왼손을 천천히 들어 올려 혁린을 가리켰다.

"허나, 그들이 아무리 썩었다 한들 무림맹의 공식 수패를 지닌 자들. 사사로이 그들의 목을 베고 맹의 권위를 무너뜨린 죄는 결코 가볍지 않소. 게다가 귀하가 쥔 그 신검…… 그것은 강호의 화근이 될 물건이오."

"말이 길군."

혁린이 천뢰를 비스듬히 내리깔았다. 검신을 타고 흐르는 자색의 뇌전이 빗물과 만나 파지직 소리를 내며 대지에 불꽃을 튀겼다.

"정파의 명숙이라는 자들은 언제나 주둥이로 대의를 말하지. 하지만 내 눈에는 그저 남의 물건을 탐내는 도둑놈들의 우두머리로 보일 뿐이다."

"오해라 해도 상관없소. 내게는 완수해야만 하는 명이 있고, 지켜야만 하는 가문이 있으니."

제갈휘의 눈매가 날카롭게 좁혀졌다.

"나 제갈휘, 제갈세가의 이름을 걸고 귀하에게 일기토(一騎討)를 제안하오. 검을 들어 내 검강을 막아내 보시오. 만약 피한다면, 이 표국에 살아 있는 그 누구도 오늘 해를 보지 못할 것이오."

스릉-!

청강검이 검집을 벗어나는 소리는 맑고 청아했으나, 그 강도는 태산이 무너지는 듯한 중압감을 동반했다. 시퍼런 청풍 검강(靑風劍罡)이 검신을 감싸 안으며 사방의 빗줄기를 단숨에 증발시켰다.

위이이잉!

매서운 바람 소리와 함께 제갈휘의 신형이 움직였다. 그것은 단순한 찌르기가 아니었다. 대기 중에 흐르는 바람의 흐름 전체를 지배하여 상대를 구속하는 절대적인 속박의 검세였다.

혁린은 본능적으로 신검 천뢰를 횡으로 그었다.

자색의 뇌기가 호를 그리며 뻗어 나갔다. 번갯불의 궤적이 허공을 가르는 찰나, 제갈휘의 청풍 검강이 자로 잰 듯 정확하게 그 궤적의 중심을 차단해 왔다.

쾅-!

뇌전과 바람이 격돌하며 귀를 찢는 파열음이 일어났다. 혁린의 발목이 진흙 바닥으로 반 자 이상 푹 꺼졌다. 제갈휘의 검강은 예리하고 정밀했다. 벼락이 가진 폭발적인 파괴력의 흐름을 미리 읽고, 바람의 결을 이용해 그 힘을 흘려보내는 기예였다.

"과연, 하늘이 내린 기연이군."

제갈휘가 검을 맞댄 채 낮게 읊조렸다. 그의 얼굴빛은 창백했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비장함을 더했다.

"하지만 그 힘은 스스로의 생명을 갉아먹는 독배. 가당치 않은 힘에 취해 파멸의 길로 걸어 들어가지 마시오."

"독배든 뭐든, 내 목숨을 노리는 자들의 목을 벨 수 있다면 상관없다."

혁린이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가문을 지키기 위해 개가 되었다고 했나? 제갈세가의 천재라는 자가 무림맹의 썩은 부사 사공도의 사냥개가 되어 움직이는 꼴이라니. 참으로 눈물겹군."

그 말에 제갈휘의 검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의 가슴 안쪽, 도포 내부에는 무림맹주 사공도가 보낸 밀약의 서신이 들어 있었다. '혁린을 제압하고 신검을 회수한다면, 멸문 위기에 처한 제갈세가의 존속을 보장하고 맹의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겠다'는 내용의 서신이었다. 가문의 존망을 어깨에 짊어진 젊은 가주로서, 그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정파의 명숙들이 뒤에서 수군거리는 멸시와 조롱을 견디며, 스스로 악역이 되기를 자처한 무거운 사조(師祖)가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닥치시오!"

제갈휘가 청강검을 회수하며 신형을 뒤로 물렸다. 그의 주위로 수십 갈래의 바람 장막이 형성되었다.

"귀하가 어찌 밑바닥의 삶만을 보고 천하의 대의를 논한단 말이오! 붕괴하는 가문을 살리기 위해, 수백 명의 가솔들의 생사를 책임져야 하는 그 무게를 귀하가 어찌 알겠소!"

"모르지. 알 필요도 없고."

혁린이 냉정하게 대꾸했다.

"내가 아는 것은 단 하나뿐이다. 배가 고프면 쓰레기통을 뒤져야 하고, 살고 싶으면 나를 죽이려는 놈의 숨통을 먼저 끊어야 한다는 것. 네놈의 고결한 가문이 무너지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다. 내 앞길을 가로막는다면 오직 죽음뿐이다."

밑바닥 표사 시절부터 뼈에 사무치도록 겪어온 약육강식의 생존 본능이었다. 혁린에게 있어 명예나 대의 따위는 배부른 자들의 유희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검으로 말하겠소!"

제갈휘가 도포 자락을 펄럭이며 허공으로 솟구쳤다.

스아아아아!

사방의 비바람이 그의 청강검 끝으로 응집되기 시작했다. 제갈세가 전공의 극의, 환풍검세(換風劍勢)였다. 수백 개의 바람 칼날이 환영처럼 번뜩이며 표국 마당 전체를 뒤덮었다. 피할 곳은 존재하지 않았다. 바람이 닿는 모든 곳이 곧 베어지는 도수장이나 다름없었다.

백소진이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감았다. 일반적인 무인이라면 그 무자비한 풍폭(風暴)에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 나갔으리라.

하지만 혁린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눈동자에 자색 광채가 번뜩였다.

'뇌신무예 2성(星)…….'

뇌신검의 기예가 그의 뇌막과 척수를 타고 즉각적으로 각인되었다. 신검 천뢰가 공명하듯 울부짖었다.

파지직! 파밧!

혁린의 신형이 움직였다. 단 한 걸음이었다.

그가 발을 디디는 순간, 뇌신무예의 신묘한 보법이 전개되었다. 제갈휘가 전개한 환풍검세의 틈새, 바람과 바람이 부딪쳐 일시적으로 생겨나는 미세한 진공의 궤적을 혁린의 신체는 초인적인 감각으로 포착해 냈다.

스윽.

마치 공간을 접어 도약한 듯한 기묘한 움직임이었다. 제갈휘의 풍폭이 휩쓸고 간 자리는 텅 빈 허공뿐이었다. 혁린이 원래 서 있던 자리 뒤편의 거대한 석조 기둥만이 바람의 칼날에 힘없이 깎여 나가며 하얀 가루가 되어 부서져 내렸다.

사이다 같은 쾌감이 표국 마당을 강타했다. 정파 십대 천재 중 일인이라는 제갈휘가 온 힘을 다해 전개한 환풍검세의 풍폭이, 혁린의 단 한 계단 보법에 의해 허무하게 빗나가며 뒤편의 돌기둥만을 분쇄해 버린 것이다.

"무엇이……!"

제갈휘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자신의 검세를 완벽하게 읽고 흘려보낸 것도 모자라, 그 폭풍의 중심을 뚫고 자신에게 접근해 오는 혁린의 속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허공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혁린의 신형이 제갈휘의 머리 위쪽으로 치솟았다. 뇌신무예 2성의 강림 기법이었다.

"뇌락강림(雷落降臨)!"

혁린이 천뢰를 거꾸로 쥐고 내리찍었다. 단순한 검격이 아니었다. 그의 어깨죽지와 등 뒤의 무맥에서 푸른빛의 낙뢰가 폭발하듯 방출되었다.

콰아아앙-!

하늘에서 떨어진 진짜 벼락과도 같은 파괴력이 제갈휘의 환풍검세를 정면으로 박살 냈다. 제갈휘는 급히 청강검을 횡으로 막아섰으나, 어깨죽지에서 뿜어져 나온 낙뢰의 충격파를 견디지 못하고 지면으로 추락했다.

쿵!

제갈휘의 신형이 마당 진흙 바닥 쓰러졌다. 그의 도포 자락이 그을려 타들어 가고 있었다. 검을 쥔 그의 손등이 파르르 떨렸고, 입가로 한 줄기 붉은 선혈이 흘러내렸다.

혁린은 가볍게 지면에 착지했다. 그러나 승리의 기쁨을 누릴 여유는 없었다. 가슴속 심장이 불덩이를 삼킨 듯 뜨겁게 타올랐다.

'뇌적(雷積)……!'

검을 쓸 때마다 몸에 쌓이는 천벌의 기운이 다시금 그의 혈관을 태우기 시작한 것이다. 숨결이 가빠지고 시야가 붉게 물들어가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 흐흐흐흐…….

머릿속에서 소름 끼치도록 차갑고 변덕스러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신검에 깃든 영(靈), 뇌령이었다.

- 어떠냐, 혁린? 저 애송이의 눈을 보아라. 가문을 살리겠다고 바동거리는 꼴이 참으로 우습지 않느냐? 하지만 저놈은 모른다. 사공도 그 늙은 뱀이 저놈을 이곳으로 보낸 진짜 이유를.

혁린은 내력을 운기해 뇌적의 고통을 억누르며 속으로 물었다.

'무슨 소리냐?'

- 저 애송이가 품고 있는 비장함 뒤에 감춰진 진실을 보아라. 사공도는 애초에 저놈이 너를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제갈휘를 사지로 몰아넣어 제갈세가를 완벽히 주저앉히고, 그 혼란을 틈타 너를 천하의 공적으로 만들어 신검 천뢰를 독식하려는 계책이지. 크하하하! 인간들의 탐욕이란 참으로 달콤하고도 잔혹하구나!

뇌령의 조소 섞인 설명에 혁린의 눈매가 사납게 구겨졌다.

제갈휘의 눈동자에 깃든 서글픔과 필사적인 의지는 위선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가문을 위해 목숨을 바치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고결한 의지조차 사공도라는 거대한 악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장기말에 불과했다.

"사공도…… 그 위선자 늙은이가."

혁린이 이를 갈았다.

지면에서 간신히 몸을 일으킨 제갈휘가 청강검을 다시 꼿꼿이 세웠다. 그의 손바닥은 이미 검자루의 마찰로 인해 찢어져 피가 흐르고 있었으나, 그의 눈빛만큼은 꺾이지 않았다.

"아직…… 끝나지 않았소."

제갈휘가 밭은 기침을 토해내며 검을 겨누었다. 그의 주위로 다시 한번 푸른 검기가 거칠게 일렁였다. 가문의 존망을 짊어진 무인의 마지막 자존심이자, 비장한 투지였다.

혁린 역시 천뢰를 고쳐 쥐었다. 비록 사공도의 음모가 얽혀 있다 한들, 눈앞의 적을 쓰러뜨리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다. 그것이 강호의 법칙이었다.

두 천재의 칼끝이 다시 한번 허공에서 살벌하게 대치했다. 빗방울이 칼날에 닿아 증발하는 순간, 대기가 터질 듯한 팽창을 시작했다. 서로의 목숨을 건 마지막 일격이 교차하려는 찰나였다.

스스스스-.

돌연, 표국 담벼락 너머와 어둠 속에서 기괴한 쇠사슬 소리와 일사불란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단순한 소리가 아니었다. 대지를 진동시키는 묵직한 철갑의 마찰음이었다.

사방의 어둠 속에서 붉은 안광을 뿜어내는 존재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평범한 무인이 아니었다. 전신을 차가운 흑철 갑옷으로 무장하고, 손에는 살상용 쇠뇌와 거대한 참마도를 든 자들이었다.

"이것은……!"

제갈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들어갔다.

무림맹 본단 소속의 정예 중의 정예, 철갑 기갑부대(鐵甲 騎甲部隊)였다. 오직 맹주의 직속 명령으로만 움직이는 살육의 군대.

그들의 수는 어림잡아 삼백 명에 달했다. 그들은 소리 없이 표국 담벼락을 에워싸고, 활시위를 당긴 채 혁린과 제갈휘 두 사람 모두를 겨냥하고 있었다.

포위망의 중심에서, 차가운 쇠사슬 소리가 표국의 기괴한 침묵을 깨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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