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윽……!"

가슴팍을 도끼로 찍어 내리는 듯한 격통이 뇌리를 때렸다. 심장이 한 번 고동할 때마다 이글거리는 쇳물이 혈관을 타고 전신으로 뿜어지는 착각이 일었다. 피가 끓다 못해 살가죽을 태우는 고통에 혁린은 무릎을 꿇을 뻔했다. 거칠게 쓸어내린 가슴팍 옷자락 사이로, 핏빛보다 붉은 검 모양의 낙인이 기괴하게 꿈틀거리며 솟아오르고 있었다.

-키득키득! 어떠냐, 필멸자여. 신의 권능을 함부로 탐한 대가가? 그것은 수명을 갉아먹는 천벌, '뇌적(雷積)'이니라! 네가 번개를 부릴 때마다 저 낙인은 심장을 향해 파고들 것이며, 결국엔 온몸이 재가 되어 바스러지리라!

머릿속을 헤집는 뇌령의 음성은 광기로 가득 차 있었다. 비웃음과 갈망이 뒤섞인 그 목소리가 쏟아지는 폭우보다 날카롭게 고막을 찔렀다.

"닥쳐라."

혁린은 이가 깨질 정도로 악물며 천뢰(天雷)의 자루를 꽉 쥐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가 웅풍곡의 좁은 입구를 짓누르고 있었다. 수십 개의 횃불이 빗속에서도 꺼지지 않은 채 붉은 뱀처럼 기어오고 있었다. 추격대의 살기가 피부를 찔러왔지만, 정작 혁린을 파멸로 몰고 가는 것은 체내에서 통제력을 잃고 날뛰는 뇌전의 독기였다.

이대로는 저들과 칼을 맞대기도 전에 심장이 터져 죽는다.

전신을 찢어발기려는 번개의 흐름을 강제로 비틀어 방출해야만 했다. 혁린은 단전에 뭉쳐진 기운을 거칠게 폭발시키며 천뢰를 거꾸로 쥐고 대지 위로 솟구쳤다. 뇌신무예의 심법이 그의 뼈와 근육에 새겨지며 본능적인 움직임을 이끌어냈다.

파앗!

신형이 허공을 가르며 우뚝 솟은 웅풍곡의 거대한 암벽 앞으로 비산했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폭우를 뚫고, 혁린은 천뢰의 검끝을 깎아지른 절벽을 향해 내질렀다.

"하압!"

쿠르릉! 쾅-!

푸른 뇌전이 검끝에서 뿜어져 나와 거대한 용의 형상으로 암벽을 강타했다. 전신을 불태우던 뇌전의 독기가 검신을 통해 한꺼번에 방출되는 분출구가 된 것이다. 천지를 뒤흔드는 폭음과 함께 눈이 멀 것 같은 섬광이 협곡을 가득 채웠다.

지진이 일어난 듯 발밑의 대지가 요동쳤다. 수백 년 동안 거센 비바람을 견뎌온 거대한 암벽이, 단 한 번의 격돌로 인해 형체도 없이 부스러져 내렸다. 돌가루가 안개처럼 피어오르며 매캐한 먼지구름이 빗속으로 흩어졌다. 거대한 암벽이 순식간에 고운 먼지로 화하여 공중으로 비산하는 기적 같은 광경이었다.

"허억, 헉……."

혁린은 대지에 내려서며 검을 지팡이 삼아 몸을 지탱했다. 가슴을 짓누르던 타는 듯한 통증이 한풀 꺾였으나, 가슴팍의 붉은 검무늬는 여전히 심장 언저리에 완연히 박혀 있었다. 임시방편으로 독기를 방출했을 뿐, 본질적인 해결책이 아님을 전신의 맥박이 경고하고 있었다.

"혁린…… 너, 방금 그게……."

뒤에서 백소진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먼지구름을 헤치고 다가오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지독한 공포와 경외심이 교차하고 있었다. 삼류 표사였던 동료가 천지를 개벽할 힘을 휘두르는 모습을 목도한 충격은 가늠하기조차 힘들 터였다.

혁린은 본능적으로 검자루를 뒤로 숨기며 그녀를 경계했다. 강호에서 힘을 드러낸다는 것은 곧 표적이 된다는 뜻이다. 아무리 오랜 세월을 함께한 동료라 해도, 깊은 불신과 생존 본능은 그의 마음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오지 마라."

차가운 축객령에도 백소진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지만, 두 눈만큼은 빗속에서도 단단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침내 혁린의 코앞까지 다가온 그녀가 거친 숨을 내쉬며 손을 뻗었다. 뺨을 타고 흐르는 것이 빗물인지, 눈물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바보 같은 놈. 내가 널 고발이라도 할까 봐 그러냐? 무림맹의 개들이 나를 짓밟을 때, 내 곁에서 칼을 뽑아준 건 너 하나뿐이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원망과 함께 깊은 신뢰가 서려 있었다. 백소진은 품속을 뒤적여 낡은 철전 하나를 꺼냈다. 반으로 쪼개진, 용과 호랑이의 문양이 희미하게 새겨진 쇳조각이었다. 용호표국의 가업을 이끄는 신표이자, 그녀의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유산이었다.

"이걸 가져가라."

백소진은 혁린의 차가운 손바닥을 강제로 벌려 철전을 쥐여주었다. 쇠붙이의 차가운 감촉 너머로 그녀의 체온이 스며들었다.

"이건 내 목숨과도 같은 거다. 네가 괴물이 되든, 뇌신이 되든 상관없어. 용호표국은 끝까지 너와 함께한다. 그러니…… 혼자서 모든 걸 짊어지려 하지 마라."

혁린은 손안의 반쪽짜리 철전을 내려다보았다. 묵직한 쇠붙이의 무게가 가슴을 짓눌렀다. 타인을 믿지 못하는 고독한 심장에 가느다란 균열이 생기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는 철전을 품 깊숙이 밀어 넣으며 겉으로는 감정을 억눌렀다.

-흐하하! 가련한 필멸자들의 서약이로구나! 하지만 명심해라, 인간아. 그까짓 쇳조각이 네 수명을 늘려주진 않는다.

머릿속에서 다시금 뇌령의 조소가 울려 퍼졌다. 이번에는 이전과 달리 차갑고 이성적인 압박이 실려 있었다.

-체내의 뇌적을 온전히 소멸시키는 유일한 방편은 세상의 '인과(因果)'를 바로잡는 것뿐이다. 강자가 약자를 짓밟아 생긴 억울한 원한, 저들이 흘린 피눈물의 채무를 네 손으로 직접 집행해라. 탐욕스러운 정파의 위선자들을 처단하고 무고한 이들을 구원할 때에만, 네 심장의 불길이 사그라들 것이다.

인과의 집행. 억울한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는 것만이 뇌신무예의 대가를 치르는 유일한 길이라는 뜻이다.

혁린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강호의 위선자들을 단죄하는 힘. 그것은 자신이 원하던 절대적인 질서의 구축과도 정확히 일치했다.

"그렇다면 번거롭게 찾아다닐 필요도 없겠군."

혁린은 멀리서 다가오는 횃불 무리를 노려보았다. 무림맹의 징수단과 그들이 사주한 마적 떼. 그들이야말로 이 변방의 약자들을 수탈하고 피를 빠는 기생충들이었다.

* * *

웅풍곡의 그 다급했던 밤으로부터 사흘이 흘렀다.

용호표국의 앞마당은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웅풍곡에서의 습격을 피해 표국으로 복귀한 혁린과 백소진은 전력을 정비했다. 그러나 무림맹의 마수는 이미 표국의 턱밑까지 들어와 있었다. 마적단을 뒤에서 사주해 표국을 압박하고, 가혹한 세금을 빌미로 표국을 통째로 집어삼키려는 무림맹 하청 관리들의 동향이 포착된 것이다.

"혁린아, 정말 괜찮겠느냐? 저들은 무림맹의 이름을 빌려 온 자들이다. 우리가 대적하면 반역이 된다."

표국의 늙은 노포(老鋪) 중 하나인 황 노인이 사시나무 떨듯 떨며 말했다. 그의 등 뒤에는 갈 곳 없는 표국의 식솔들과 힘없는 노약자들이 겁에 질린 눈으로 혁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반역이라뇨! 저들이 먼저 우리를 죽이려 했습니다!"

백소진이 칼칼한 목소리로 외쳤지만, 노포들의 안색은 여전히 흙빛이었다. 평생을 밑바닥에서 기어 다니며 강자의 횡포에 길들여진 이들에게 무림맹이라는 이름은 감히 거역할 수 없는 하늘과도 같았다.

혁린은 말없이 표국의 거대한 목조 대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묵직한 빗장을 들어 올려 문을 걸어 잠갔다. 수십 명의 노포들과 식솔들을 자신의 등 뒤에 세운 채였다.

"안에서는 아무도 나오지 마십시오."

혁린의 음성은 낮고 차분했다. 그러나 그 안에는 거역할 수 없는 위압감이 실려 있었다.

쿵, 쿵, 쿵!

그때, 굳게 닫힌 표국의 대문 밖에서 거친 발길질 소리가 들려왔다.

"문 열어라! 무림맹의 명을 받든 징수단이다! 용호표국은 밀린 세세(稅稅)를 납부하고 반역의 혐의에 대해 해명하라!"

사납게 소리치는 자들은 무림맹의 하청 관리들과 그들이 고용한 삼류 무인들이었다. 대문 틈새로 그들의 악랄한 미소가 비쳤다.

혁린은 천천히 대문 빗장을 풀고 문을 열었다. 들이치는 밤바람이 그의 도포자락을 세차게 흔들었다.

"세금은 없다. 돌아가라."

혁린의 냉랭한 한마디에, 앞장서 있던 징수원들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이 삼류 표사 놈이 눈에 뵈는 게 없구나! 맹의 법도를 어기고 목숨을 보전할 줄 알았더냐? 저놈의 사지를 잘라라!"

서너 명의 무인이 일제히 병장기를 뽑아 들고 쇄도했다. 시퍼런 칼날들이 혁린의 목과 가슴을 겨냥해 사정없이 들이닥쳤다. 일류 고수들조차 난감해할 만한 자비 없는 합격술이었다.

그러나 혁린의 눈에는 그들의 움직임이 멈춘 것처럼 느리게 보였다.

웅-.

혁린은 체내의 진기를 급격히 회전시켰다. 뇌신무예를 각성한 이후, 그의 무맥은 번개의 마찰 에너지로 기경팔맥의 독기를 순식간에 정화하는 가공할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전신을 순환하는 기뢰(氣雷)가 손끝으로 응집되었다.

스윽.

그는 검을 뽑지도 않았다. 그저 가볍게 손을 뻗어, 쇄도하는 칼날의 측면을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스쳤을 뿐이다.

바지직!

순간, 보이지 않는 푸른 전류가 적들의 무기를 타고 무서운 속도로 번져나갔다.

"으아아악!"

"내, 내 몸이……!"

단 한 차례의 마찰로 발생한 강력한 뇌전의 기운이 그들의 전신 신경을 완벽하게 마비시켰다. 무기를 쥐고 있던 손아귀가 타들어 가듯 마비되며 철검들이 바닥으로 요란하게 떨어졌다. 무인들은 발작하듯 몸을 떨며 마당 구석으로 나뒹굴었다.

손끝 하나로 일류급 무인들의 무기를 무력화하고 전신을 마비시키는 압도적인 무력.

뒤에서 지켜보던 백소진과 노포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수탈을 일삼던 징수원들의 얼굴에는 오만한 미소 대신 지독한 공포가 들어찼다.

"겨우 이 정도 힘으로 무림맹의 이름을 파는가."

혁린의 냉혹한 안광이 남은 무리들을 휩쓸었다. 번갯불이 이는 듯한 그의 시선에 숨이 막힌 징수원들이 뒷걸음질을 쳤다.

그때였다.

두더두더두더-.

표국 앞마당으로 이어지는 가도 너머로, 묵직하고 기분 나쁜 수레바퀴 소리가 대지를 울리기 시작했다. 빗물로 질척이는 흙바닥을 짓이기며 다가오는 거대한 형체.

그것은 쇠창살로 사방이 가로막힌, 시커먼 뇌옥(牢獄)의 형틀 수레였다. 수레의 사슬이 마찰할 때마다 기분 나쁜 쇳소리가 밤공기를 찢어발겼다.

수레를 이끄는 것은 수십 명의 철갑 무인들이었고, 그 중심에는 거대한 도(刀)를 어깨에 얹은 거구의 사내가 서 있었다. 무림맹 소속의 부패한 세금 징수 대장이자, 가혹한 고문으로 악명이 자자한 '팽조(彭朝)'였다.

그가 이끄는 군세가 표국 앞마당의 흙먼지를 자욱하게 일으키며 등판하자, 가라앉았던 살기가 다시금 폭풍처럼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팽조는 피비린내 나는 미소를 지으며 혁린을 바라보았다.

"여기 반역의 무리들이 모여 있군. 저 형틀에 처넣을 목숨이 아주 가득해."

팽조의 거친 음성이 표국을 뒤흔들었다. 새로운 심판의 시간이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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