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웅풍곡(雄風谷)의 바람은 비명 지르는 짐승의 울음소리를 닮아 있었다.

절벽 사이로 몰아치는 칼바람이 젖은 흙먼지를 사정없이 흩뿌렸다. 질퍽이는 진흙 바닥 위에 붉은 선혈이 빠르게 번져 나갔다.

두꺼운 무쇠 도끼날이 허공을 가르고 내려와 혁린의 복부를 사정없이 짓밟았다.

콰웅!

"커헉……!"

찢어진 가죽 갑옷 사이로 뜨거운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입안 가득 고인 비린 피를 진흙 바닥에 뱉어내며 혁린은 이를 악물었다. 부러진 갈비뼈가 폐부를 찌르는 극통이 밀려왔으나, 신음조차 사치였다.

그의 눈앞에 선 자들은 무림맹의 정찰 지령을 받고 조사를 나왔던 태산마적(泰山馬賊)의 무리였다. 삼십여 명에 달하는 흉도들이 그를 겹겹이 에워싼 채, 사냥감을 구경하듯 잔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무림맹 놈들의 사냥개 노릇을 하더니 꼴이 좋구나, 삼류 표사 놈."

마적 무리의 두령이 피 묻은 도끼를 어깨에 걸치며 가래침을 뱉었다.

혁린의 시야가 가파르게 흔들렸다. 손끝의 감각이 마비되어 가고 있었다. 무림맹의 고고하신 명숙들은 자신들을 방패막이로 삼아 사지로 밀어 넣었다. 위험한 정찰 임무에 가장 먼저 투입되는 것은 언제나 끈 떨어진 용호표국의 삼류 표사들이었다. 힘이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짓밟히고, 버려지며, 개처럼 죽어가는 운명.

'이대로…… 끝날 수는 없다.'

찢어진 입술 사이로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혁린은 손가락 뼈마디가 하얗게 질리도록 진흙을 움켜쥐었다. 밑바닥 인생을 살아오며 뼛속 깊이 새겨진 생존 본능이 뇌리를 두드렸다.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할 생각 따윈 없었다. 오직 살아서, 자신을 이 사지에 밀어 넣은 위선자들의 목을 처단하겠다는 지독한 증오만이 육신의 고통을 간신히 붙잡고 있었다.

그때, 하늘이 뒤집혔다.

우르릉, 쾅!

돌연 먹구름이 소용돌이치며 웅풍곡의 상공이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대기를 가득 채운 습기가 순식간에 메마르고, 사방의 나뭇잎들이 바싹 타들어 가며 부스러졌다. 기이한 침묵이 골짜기를 지배한 순간, 하늘의 심장부가 갈라졌다.

적색(赤色) 벼락이 수직으로 격하했다.

콰르르릉! 황천의 문이 열린 듯한 폭음이 고막을 찢었다.

대지가 반으로 갈라지며 엄청난 충격파가 마적들을 사방으로 날려 보냈다.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그 균열의 중심에, 기이한 형상의 검 한 자루가 꽂혀 있었다.

검신 전체에 푸르고 붉은 전뢰(電雷)가 살아 움직이는 뱀처럼 꿈틀대고 있었다. 고대 유적인 뇌정전의 신검, 천뢰(天雷)였다.

그와 동시에 혁린의 머릿속으로 소름 끼치도록 차갑고 변덕스러운 음성이 파고들었다.

-크하하하! 기어이 피비린내를 맡고 깨어났구나. 살고 싶으냐, 벌레만도 못한 인간아? 그렇다면 그 손을 뻗어 나를 쥐어라.

신검의 영성, 뇌령(雷靈)의 목소리였다. 조롱과 탐욕이 뒤섞인 음성이 뇌수를 헤집었다.

혁린은 망설이지 않았다. 눈앞의 검이 아군이 아니라는 것쯤은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자신을 감시하고 시험하려는 잔혹한 존재일지라도 상관없었다. 당장 심장을 멈추게 할 독배라 해도,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삼켜야 했다.

그가 피투성이 손을 뻗어 천뢰의 검자루를 움켜잡았다.

그 순간, 전율이 전신을 관통했다.

쿠구구궁!

혁린의 손끝을 타고 흘러든 뇌전의 기운이 파괴되었던 단전과 경맥을 무자비하게 헤집었다. 찢어지고 끊어졌던 혈맥들이 강제로 이어 붙여졌다. 뼈가 으스러지고 다시 맞춰지는 골격의 재구성. 우화등선(羽化登선)에 비견될 만한 극단적인 개조가 그의 육체 내부에서 가차 없이 일어났다.

"아아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골짜기를 메웠다.

평범한 삼류 무인의 육신이 천고의 무맥인 뇌신무맥(雷神武脈)으로 강제 재구성되는 과정은 생지옥의 고통이었다. 근육이 풍선처럼 부풀었다가 압축되었고, 뼈마디가 번개의 속도에 맞춰 초적응형 초인의 형태로 변모했다. 그의 가슴팍, 심장 부근의 피부 위로 붉은색 검무늬가 선명하게 낙인처럼 새겨지기 시작했다.

"저, 저놈이 도대체 무슨 짓을……!"

겨우 정신을 차린 마적 두령이 비틀거리며 외쳤다.

사방에 가득 찬 청색 낙뢰가 혁린의 신형을 감싸 안고 있었다. 벼락의 장막 속에서, 죽어가던 나약한 표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오직 먹잇감을 노리는 냉혹한 맹수의 안광만이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혁린! 안 된다!"

그때, 저 멀리 웅풍곡 입구에서 절박한 외침이 들려왔다.

용호표국의 대장, 백소진이었다. 그녀는 혁린이 조난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필사적으로 검을 뽑아 쥔 채 난입하는 중이었다. 흙탕물에 범벅이 된 그녀의 얼굴은 초조함과 공포로 일그러져 있었다. 어떻게든 그의 시신이라도 회수하겠다는 무모한 일념 하나로 달려온 그녀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청색 낙뢰의 폭풍 가운데 서 있는 혁린.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이미 인간의 범주를 넘어서 있었다. 백소진은 숨이 턱 막히는 압도감에 검을 쥔 손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가 알던 유약하고 경계심 많던 삼류 표사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 괴물 놈이! 다들 저놈을 죽여라!"

마적 두령의 악에 바친 비명과 함께, 삼십여 명의 태산마적들이 무기를 치켜들고 혁린에게 쇄도했다. 수십 개의 도끼와 대도가 허공을 가르며 살기를 뿌렸다. 일촉즉발의 위기였으나, 혁린의 눈동자는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그가 천뢰를 가볍게 횡으로 그었다.

스릉.

검이 대기를 가르는 소리는 극히 미약했다. 하나 그 직후에 몰아친 폭풍은 천지를 소멸시킬 기세였다.

콰아아앙!

푸른색 뇌기가 거대한 충격파가 되어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대지를 쓸어버릴 듯한 기세로 뻗어 나간 전뢰의 해일은 달려들던 마적들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치치직! 파지직!

찰나의 순간이었다. 삼십여 명의 마적들이 쥐고 있던 무쇠 도끼와 강철 대도들이 청색 번갯불에 닿자마자 붉은 용암처럼 녹아내리더니, 이내 한 줌의 검은 가루가 되어 허공으로 증발해 버렸다.

"……?!"

마적들은 자신들의 텅 빈 손바닥을 바라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무기만을 정확히 타격해 소멸시키는 초인적인 신체 제어와 뇌기 통제력.

"히, 히익! 번개다! 번개를 부린다!"

"으아악! 괴물이다!"

쇠붙이가 녹아내린 열기에 손을 덴 마적들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자빠졌다. 단 한 번의 휘두름으로 삼십 명의 무장이 완벽히 무력화되었다. 웅풍곡을 가득 채웠던 살기는 순식간에 비참한 공포로 뒤바뀌었다.

혁린은 천뢰를 비스듬히 내리깔았다. 검 날을 타고 흐르는 전류가 대지를 그을리며 매캐한 냄새를 풍겼다.

"돌아가라."

그의 목소리는 낮고 무거웠으며, 거역할 수 없는 위압감을 담고 있었다.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난다면, 그때는 무기가 아니라 너희의 목숨이 먼지가 될 것이다."

마적들은 대답 대신 엉금엉금 기어 도망치기 시작했다. 무기를 잃고 전의를 상실한 흉도들은 웅풍곡의 비탈길을 굴러 내려가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사방이 고요해졌다. 오직 거친 빗소리와 웅풍곡의 거센 바람 소리만이 공간을 채웠다.

백소진은 멍하니 서서 혁린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호흡이 거칠게 떨리고 있었다.

"너…… 정말 혁린이 맞느냐?"

그녀의 목소리에는 두려움과 낯설음이 섞여 있었다.

혁린은 천천히 그녀를 돌아보았다. 타인과의 온전한 정을 나누는 법을 잊어버린 고독한 눈동자. 그의 깊은 안광 속에는 여전히 지독한 불신과 경계가 도사리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달려온 그녀의 발을 보는 순간, 가슴 한구석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러나 감상에 젖을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쿵!

갑작스럽게 심장이 터질 듯한 격통이 혁린의 전신을 덮쳤다.

"윽……!"

혁린은 천뢰를 지팡이 삼아 대지에 박아 넣으며 무릎을 꿇었다. 전신을 불태우는 듯한 뜨거운 열기가 심장부로 몰려들었다.

가슴팍을 찢어 발기는 고통 속에서 가죽 갑옷을 헤치자, 심장 부근에 새겨진 붉은색 검무늬가 핏빛으로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뇌전의 기운이 뼈를 깎는 고통을 유발하며 심장을 옥죄어 왔다.

머릿속에서 뇌령의 광기 어린 웃음소리가 다시금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크하하하! 어떠냐? 천하를 얻은 기분이! 하지만 잊지 말거라. 그 힘은 공짜가 아니다.

뇌령의 음성은 차갑게 식어 내렸다.

-검을 쓸 때마다 너의 심장에는 천벌의 기운인 '뇌적(雷積)'이 쌓이게 된다. 그것이 네 수명을 갉아먹어 결국 파멸로 이끌 것이다. 살고 싶다면, 이 세상의 무거운 인과를 네 몸으로 직접 해결해 증명해라. 그렇지 않으면 그 붉은 낙인이 네 심장을 완전히 태워버릴 테니!

가슴의 붉은 검무늬가 살아 숨 쉬듯 꿈틀거렸다.

터질 듯한 심장의 박동 속에서, 혁린은 피 묻은 검자루를 더욱 무섭게 움켜쥐었다. 기연의 대가는 잔혹했고, 수명의 모래시계는 이미 뒤집혔다.

과연 그는 이 저주받은 신검의 굴레를 벗어나 천하의 절대자가 될 수 있을 것인가.

혁린의 일그러진 안광 위로 차가운 빗방울이 사정없이 쏟아져 내렸다.

가슴을 찢는 격통은 뼛속 깊은 곳까지 타오르는 업화(業火)와 같았다.

혁린은 이를 악물었다. 삐져나온 신음 대신 붉은 선혈이 입술 사이로 흘러내려 턱끝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전신을 관통하는 벼락의 기운이 심장으로 수렴될 때마다, 가슴팍의 검무늬가 마치 살아 움직이는 붉은 유충처럼 요동쳤다. 수명을 불사르는 뇌적(雷積)의 저주. 힘을 얻은 기쁨은 찰나였고, 그 대가는 당장 숨통을 끊어놓을 듯 잔혹했다.

"혁린! 정신 차려라!"

백소진이 다급히 걸음을 옮겼다. 진흙을 밟는 다급한 발소리가 고막을 두드린 순간, 혁린의 신형이 번개처럼 반응했다.

쉬익!

천뢰의 서슬 퍼런 검끝이 백소진의 목덜미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차가운 검기가 그녀의 살갗을 스치며 소름을 돋게 만들었다. 벼락에 그을린 검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그녀의 얼굴을 화끈거리게 했다.

"……!"

백소진은 걸음을 멈춘 채 숨을 들이켰다. 자신을 향한 검끝 뒤로 보이는 혁린의 눈동자는 지독하리만치 차갑고 고독했다. 밑바닥 표사 시절부터 뼛속 깊이 각인된, 세상 모든 것에 대한 불신과 생존 본능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아무리 가까운 조력자라 한들, 약해진 틈을 타 자신을 찌를지도 모른다는 야수 같은 경계심이었다.

"오지…… 마라."

혁린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내 몸에 손을 대는 자는, 누구든 이 검의 밥이 될 것이다."

"이 바보 같은 놈이……!"

백소진의 눈가에 붉은 기운이 감돌았다. 그녀는 혁린의 검끝이 목을 겨누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먹을 꽉 쥔 채 한 걸음 더 내딛지 못했다.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피투성이가 된 채 홀로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성벽을 쌓아 올리는 혁린의 모습이 너무도 처절해 보였기에, 가슴이 미어지는 까닭이었다.

혁린은 천천히 검을 거두었다. 그리고 비틀거리는 육신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천뢰의 검자루를 움켜쥔 손가락에 터질 듯한 힘이 들어갔다. 고통에 굴복해 쓰러지는 것은 그의 생리(生理)에 맞지 않았다.

스스스스.

그때, 거센 빗줄기 속에서 기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쓰러진 태산마적들의 시체 사이, 질퍽이는 진흙 구덩이 속에 반쯤 묻혀 있던 음침한 기운의 시신 한 구가 혁린의 안광에 포착되었다. 마적의 가죽옷이 아닌, 흑색 비단포를 걸친 사내였다. 마적 두령조차 수하 대하듯 함부로 대하지 못했던, 웅풍곡 한편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감시자였다.

혁린은 묵묵히 걸음을 옮겨 그 시신 앞 고개를 숙였다. 뇌기에 전신이 타들어 가 검게 변해버린 시신의 품을 천뢰의 검끝으로 헤집었다.

바스락.

그 안에서 흘러나온 것은 피와 진흙에 젖은 황동 패(牌) 하나였다. 패의 전면에는 무림맹(武林盟)을 상징하는 세 개의 검날 문양이 선명하게 음각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뒤편에 적힌 거친 필체.

[용호표국의 정찰대를 몰살하고, 태산마적의 습격으로 위장하라. 흔적을 남기지 말 것.]

"……감탄고토(甘呑苦吐)라 하였던가."

혁린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비소(誹笑)가 빗소리에 묻혀 흩어졌다.

무림맹의 위선자들은 처음부터 용호표국을 살려둘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세금 수탈을 위한 명분을 만들고, 거추장스러운 변방의 약자들을 정리하기 위해 마적들과 결탁하여 덫을 놓았다. 맹의 고고하신 명숙들은 뒤에서 추악한 거래를 나누며, 혁린과 표국 무인들의 목숨을 가차 없이 장기판의 말처럼 버렸다.

"이게…… 무슨……."

뒤따라와 황동 패를 확인한 백소진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갔다.

"무림맹이…… 우리를 죽이려 했다고? 우리가 그들을 위해 바친 피가 얼마인데……!"

그녀의 어깨가 분노와 배신감으로 가늘게 떨렸다. 강호의 정의를 부르짖던 맹의 실체가 이토록 추악한 시궁창일 줄은 꿈에도 몰랐으리라.

-크하하하! 겉으로는 정기를 읊조리며 뒤로는 사파의 피를 빠는 맹의 개들답구나! 어떠냐, 인간아? 저 위선자들의 목을 모조리 베어 발치에 깔고 싶지 않으냐?

머릿속에서 뇌령이 광기 어린 속삭임으로 증오를 부추겼다. 혁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황동 패를 손아귀에 쥐고 으스러뜨릴 듯 힘을 주었을 뿐이다. 마침내 황동 패가 찌그러지며 진흙 바닥으로 떨어졌다.

쿠구구구…….

웅풍곡의 대지가 미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멀리서 들려오는 기분 나쁜 말발굽 소리.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최소 수십, 수백의 군세가 이쪽을 향해 해일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혁린, 저 소리는……!"

백소진이 다급히 검자루를 쥐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웅풍곡의 좁은 입구 너머, 어둠이 짙게 깔린 지평선 위로 수십 개의 횃불이 비구름을 뚫고 타오르기 시작했다. 붉은 불빛들은 무서운 속도로 웅풍곡을 향해 좁혀오고 있었다.

단순한 마적 떼의 기세가 아니었다. 일糸불란하게 대형을 유지하며 다가오는 정예 무인들의 서슬 퍼런 살기. 무림맹의 인장이 찍힌 깃발이 거센 바람에 펄럭이는 모습이 혁린의 시야에 들어왔다.

"추격대인가……."

혁린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새롭게 얻은 뇌신무예의 기운이 전신을 맴돌았으나, 아직 첫 번째 뇌적조차 정화하지 못한 육신은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심장의 붉은 낙인은 여전히 불길처럼 타오르며 그의 수명을 갉아먹고 있었다. 이 상태로 저 거대한 군세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은 자멸에 가까웠다.

하지만 도망칠 곳은 없었다.

앞에는 살기를 뿜어내며 좁혀오는 무림맹의 정예 토벌대, 뒤로는 깎아지른 듯한 웅풍곡의 절벽뿐이었다.

-키득키득, 첫 번째 채무의 시간이 다가왔구나. 저들의 피로 네 검을 적셔라! 그렇지 않으면 네가 먼저 타 죽으리라!

뇌령의 기괴한 웃음소리가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빗소리와 뒤섞여 웅풍곡을 가득 채웠다. 혁린은 천뢰의 검자루를 고쳐 잡으며, 몰려오는 불빛들을 향해 서늘한 안광을 던졌다.

벼락이 가리킨 검끝이 갈 곳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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