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휘의 장례를 채 치르기도 전이었다.
수천 명의 무림 연합 군사들과 함께 귀신처럼 나타난 사공도는 기어이 백소진을 찾아내었다. 은밀히 도주하려던 그녀를 향해 사공도의 번개 같은 연환격이 사정없이 쏟아졌고, 극독이 실린 빙결의 진기가 그녀의 전신을 꽁꽁 묶어 결빙시켰다. 그리고 지금, 마천의 장벽 허공에서 그 거대한 빙정이 추락하고 있었다.
허공을 가르는 칼바람이 고막을 찢을 듯 울부짖었다. 혁린의 신형이 그 절벽의 심연 속으로 거침없이 낙하했다.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바람의 포효 속에서, 혁린은 오직 아래만을 응시했다. 푸른 빛을 발하며 떨어지는 빙각(氷角)이 시야의 한구석에서 어지럽게 회전하고 있었다. 그 안에 갇힌 백소진의 얼굴이 어렴풋이 보였다. 평소라면 자신을 향해 온갖 잔소리를 퍼부었을 그 입술이 하얗게 질린 채 굳어 있었다.
쿠구구구구!
낙하하는 속도가 한계에 다다랐을 때, 혁린은 오른손에 쥐어진 신검 천뢰(天雷)를 거꾸로 쥐었다. 검날이 허공을 가르며 푸른 궤적을 그렸다. 그가 노린 것은 절벽 벽면에서 비스듬히 돌출된 거대한 석대였다.
치이이이익!
천뢰의 검끝이 단단한 암벽을 파고들며 불꽃을 튀겼다. 손목을 타고 올라오는 맹렬한 반동이 어깨뼈를 부술 듯 흔들었다. 혁린은 이를 악물었다. 치솟는 고통을 억누르며 검을 지렛대 삼아 신형을 뒤틀었다.
쿵!
가까스로 석대 위에 착지하는 순간, 무거운 충격이 발바닥을 타고 무릎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딛고 선 바위가 잘게 흔들리며 아래로 흙먼지를 쏟아냈다. 그 직후, 백소진이 가두어진 빙정이 석대 한가운데에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빙 표면에 미세한 균열이 가며 차가운 안기가 뿜어져 나왔다.
혁린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빙정 앞으로 다가서려던 찰나였다.
"과연 끈질긴 목숨이구나, 혁린."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소름 끼치도록 온화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뼈를 깎는 듯한 독기가 도사리고 있었다.
혁린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석대 위쪽, 절벽에 수없이 박힌 철쇠를 딛고 내려온 그림자 하나가 허공을 가볍게 날아와 사뿐히 내렸다. 백색 장포를 단정하게 차려입은 사공도였다. 그의 뒤편으로, 수십 명의 무림맹 정예 자객들이 철사슬에 매달린 채 석대 주변을 포위하듯 내려앉고 있었다. 사공도의 얼굴에는 자비로운 미소가 걸려 있었으나, 가늘게 뜬 눈동자 너머로는 탐욕의 안광이 번뜩였다.
"제갈세가의 촉망받는 소가주를 무참히 살해하고, 이제는 맹의 법도마저 무시한 채 도망치려 하다니. 네놈의 그 흉포함이 결국 이 가여운 계집까지 지옥의 문턱으로 밀어 넣은 것이다."
사공도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의 손끝에서 붉은빛의 진기가 실을 잣듯 흘러나와 백소진의 빙정을 휘감았다.
"이 계집의 영맥(靈脈)은 지금 내 빙결 독경에 완벽히 장악되어 있다. 내가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이 얼음과 함께 계집의 온몸이 먼지처럼 산산조각 날 것이다."
혁린의 미간이 좁아졌다. 가슴 안쪽에서 묵직한 통증이 치솟았다. 신검을 쓸 때마다 심장에 쌓이는 천벌의 기운, 뇌적(雷積)이 혈관을 태우며 고개를 들이밀고 있었다.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비린 피를 억지로 삼키며, 혁린은 천뢰의 자루를 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손등의 힘줄이 터질 듯 돋아났다.
사공도가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선택해라. 네 손에 쥔 그 신검 천뢰를 내 발밑에 바친다면, 이 계집의 목숨만은 살려 무림맹의 자비 아래 두마. 네놈 같은 삼류 표사 놈이 감당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그 검은 천하의 주인이 될 자에게 돌아가야 마땅하지."
달콤하고도 음험한 제안이었다.
혁린의 머릿속에서 수많은 계산이 스쳐 지나갔다. 밑바닥 표사 시절부터 뼈에 사무치도록 배운 생존 법칙이 귓가에 속삭였다. *타인을 믿지 마라. 네 목숨이 가장 소중하다. 검을 넘겨주는 순간 너와 저 계집 모두 개처럼 죽임을 당할 뿐이다.*
하지만 그의 시선이 빙정 속의 백소진에게 닿았다.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온 자신을 향해 입술을 깨물며 붕대를 감아주던 거친 손길. 남몰래 문 뒤에서 흐느끼던 그 가냘픈 울음소리. 자신을 위해 가문의 징표마저 내어주었던 유일한 온기였다.
"자비라……."
혁린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냉소적인 웃음이었다.
"무림맹의 자비 따위가 얼마나 값싼 것인지, 내 이미 몸소 겪어보지 않았던가."
그가 품속으로 왼손을 집어넣었다. 사공도의 눈썹이 힐끗 꿈틀했다. 혁린의 손가락 끝에 걸려 나온 것은 낡고 둔탁한 쇳조각이었다. 용호표국의 가업 징표이자 백소진이 건넸던, 절반으로 부러진 용호철전(龍虎鐵錢)이었다.
"네놈이 그토록 원하는 것이 정녕 이 검뿐이겠느냐."
혁린이 철전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온몸의 뇌전 진기를 그 작은 쇳조각에 남김없이 주입하기 시작했다.
파지직! 파직!
지독한 고립과 불신의 벽을 깨부수는 순간이었다. 오직 한 사람을 구하겠다는 일념이 그의 심장에 고여 있던 뇌적의 고통을 압도했다. 부러진 용호철전이 푸른 뇌광을 머금고 거대하게 진동했다.
사공도의 눈이 탐욕으로 크게 벌어졌다.
"그것은……!"
"가져가라!"
혁린이 손목을 튕겼다.
슈우우우웅!
공기를 찢는 파공음과 함께 용호철전이 사공도의 안면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단순한 암기가 아니었다. 그 안에는 천뢰의 파괴적인 뇌기가 임계점까지 압축되어 있었다.
사공도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고 손을 뻗어 장풍을 날렸다. 붉은 혈막이 그 앞을 가로막았다.
콰아아앙!
철전이 혈막에 부딪히는 순간, 뇌기가 폭발했다. 눈을 멀게 할 듯한 청백색의 광등이 좁은 석대를 가득 채웠다. 사공도의 시야가 순간적으로 하얗게 마비되었다. 광풍이 몰아치며 사공도의 신형이 뒤로 반 보 밀려났다.
그 찰나의 틈을 혁린은 놓치지 않았다.
보법(步法)은 없었다. 기교도 없었다. 오직 광기 어린 돌진뿐이었다.
혁린은 대지를 박차고 폭풍의 한가운데로 몸을 던졌다. 석대 주변에 내리치던 자연 낙뢰가 그의 어깨를 스쳤으나 개의치 않았다. 살이 타들어 가는 냄새가 진동했지만, 그의 안중에는 오직 백소진뿐이었다.
"미친 정종의 사냥개 놈이……!"
시야를 회복한 사공도가 격노하여 손바닥을 내질렀다. 그의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온 적색 혈독(血毒)의 장풍이 뱀처럼 허공을 가르며 혁린의 등을 향해 쇄도했다.
퍼억!
무방비 상태의 등 뒤로 묵직한 충격이 내리꽂혔다. 혁린의 입에서 뜨거운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붉은 혈독의 진기가 척추를 타고 들어가 전신의 경맥을 마비시키기 시작했다. 피가 얼어붙고 내력이 굳어가는 극심한 고통이 몰려왔다. 손가락 끝 하나 움직이기 힘든 절망적인 마비감이었다.
하지만 혁린의 왼팔은 이미 빙정을 감싸 안고 있었다.
쩍! 쩌적!
그의 팔뚝에 서린 뇌기가 빙정의 결계를 강제로 깨부쉈다. 얼음이 깨져 나가며 백소진의 가녀린 신체가 혁린의 품 안으로 쏟아졌다. 차갑고도 미약한 온기가 그의 가슴에 닿았다.
"잡았다."
혁린이 낮게 읊조렸다.
"혁린! 기어이 자멸을 택하는구나!"
사공도가 이빨을 드러내며 도수(屠手)를 뻗어왔다. 그의 손가락 끝이 혁린의 목덜미를 노리고 맹렬하게 쇄도했다. 천뢰를 빼앗고 그의 목숨을 끊으려는 마지막 일격이었다.
혁린은 사공도를 바라보며 차갑게 웃었다.
"말했을 텐데."
그의 오른발이 딛고 있던 석대의 가장자리를 강하게 내질렀다. 이미 균열이 가 있던 바위가 완전히 비명을 지르며 무너져 내렸다.
"네놈에게 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스스슥!
발밑의 지면이 사라졌다.
혁린은 백소진을 가슴에 품은 채, 뒤로 쓰러지듯 심연을 향해 몸을 던졌다.
"혁린!!!"
사공도의 일격은 허공만을 갈랐다. 무너지며 떨어지는 암석들 사이로, 자비 없는 분노로 일그러진 사공도의 얼굴이 순식간에 멀어졌다.
수천 길 아래, 끝이 보이지 않는 마천의 장벽 최심부로 두 사람의 신형이 수직으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휘이이이이잉!
귀가 먹먹할 정도로 몰아치는 낙하의 바람 속에서, 혁린은 자신을 덮쳐오는 또 다른 기운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한 허공이 아니었다.
저 아래, 암연의 바닥에서부터 기이한 푸른 안개가 솟구치고 있었다. 수천 년 동안 마천의 장벽 깊은 곳에 응축되어 있던 천혜의 자연 전기였다.
파지직! 콰르릉!
빙벽 사이를 메우고 있던 안개가 거대한 번개의 사슬로 변해 그들을 향해 치솟았다. 수백, 수천 갈래의 푸른 전류가 살아 움직이는 용처럼 요동치며 낙하하는 두 사람의 육신을 덮쳤다.
"크으으윽!"
전신을 태우는 듯한 전류의 마찰음 속에서 혁린은 신음했다. 사공도가 심어놓은 붉은 혈독과 대지에서 치솟는 푸른 전기가 그의 체내에서 맹렬하게 충돌했다. 세포 하나하나가 찢어지고 결이 갈라지는 극통이 전신을 지배했다.
전뇌(電腦)가 마비되고 의식이 멀어지려 했다.
품 안의 백소진 역시 몰아치는 전류의 영향으로 가늘게 신음하며 그의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혁린은 흐려지는 정신줄을 부여잡으며 그녀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추락의 속도는 멈추지 않았다.
사방은 이제 온통 번개의 바다였다. 청색과 적색의 전류가 어지럽게 뒤엉켜 소용돌이치는 뇌해(雷海)의 한가운데로, 두 사람은 깊이, 더 깊이 침전해 들어갔다.
그때였다.
웅웅웅웅!
혁린의 등 뒤에 매달린 신검 천뢰가 스스로 울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반발이 아니었다. 거대한 부름에 대한 응답이었다.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전기의 대폭풍 너머, 심연의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수천 년 동안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태고의 유적, 뇌정전(雷霆殿)의 외벽이었다. 절벽 면을 따라 거대하게 새겨진 고대의 기하학적 문양들이 두 사람의 추락에 반응하고 있었다.
혁린의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와 백소진의 뺨에서 떨어진 핏방울이 허공에서 흩날려 그 고대의 문양에 닿는 순간.
스 스스로오오옹—!
천지를 뒤흔드는 듯한 묵직한 공명음이 협곡 전체를 지배했다. 사납게 날뛰던 푸른 번개들이 일순간 흐름을 멈추고 사방으로 갈라졌다.
고대 뇌신전의 문양 유적이 피를 대면하자, 차가운 푸른빛이 아닌, 눈이 시리도록 찬란한 금색 아우라가 사방으로 분출되기 시작했다.
그 찬란한 황금빛 장막이 추락하는 두 사람의 신형을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어둠 속으로 끌어당겼다.
금빛 아우라는 구원의 손길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대한 심판의 서막에 불과했다.
쿠르르릉! 황릉(黃陵)의 무덤이 열리듯 묵직한 천둥소리가 뇌해의 바닥에서부터 치솟았다. 백색과 청색으로용틀임하던 전기의 줄기들이 금빛 장막에 닿는 순간, 거대한 불꽃을 튀기며 황금빛 뇌전으로 동화되었다. 그 찬란한 빛 무리가 낙하하는 두 사람의 전신을 휘감았다.
"크아아악!"
혁린의 입에서 짐승 같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피부에 닿은 금색 전류는 단순한 충격을 넘어 영혼의 밑바닥까지 꿰뚫는 열기를 품고 있었다. 사공도의 혈독에 마비되었던 경맥이 강제로 개방되며 타오르는 듯한 고통이 몰려왔다. 굳어 가던 피가 끓어오르고, 뼈마디가 어긋나는 잡음이 귓전을 때렸다.
동시에 심장이 찢어질 듯 날뛰기 한 시작했다. 검을 쥔 자의 수명을 갉아먹는 천벌의 낙인, 뇌적(雷積)이 금빛 뇌전과 공명하며 폭주한 것이다.
두근! 두근! 두근!
가슴 가죽을 뚫고 나올 것처럼 요동치는 심장박동이 온 신경을 마비시켰다. 시야가 붉게 물들고, 숨을 쉴 때마다 허파가 타들어 가는 연기가 목구멍을 넘어왔다.
-키득, 키득키득! 똑똑히 보아라, 어리석은 인간아.
머릿속을 잔인하게 긁어대는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신검 천뢰에 깃든 불길한 의지, 뇌령(雷靈)이었다.
-스스로 살아남는 법을 잊고 한낱 계집을 위해 몸을 던진 대가다. 네놈의 심장은 이제 반 각도 버티지 못하고 숯더미가 되리라. 어찌할 테냐? 지금이라도 그 계집의 목을 꺾고 내게 영혼을 바친다면, 이 천벌의 불길을 거두어 주마!
뇌령의 유혹은 달콤하고도 차가웠다. 하지만 혁린은 대답 대신 품 안의 여인을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고립과 의심으로 점철되었던 그의 삶에서, 오직 백소진만이 유일하게 그를 인간으로 묶어두는 끈이었다. 그 끈을 제 손으로 끊어내고 얻는 연명 따위는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시끄럽다……."
혁린이 이를 악물었다. 깨진 이 틈새로 붉은 선혈이 흘러내려 백소진의 하얀 뺨을 적셨다.
그 순간, 머리 위 허공에서 또 다른 파국이 시작되었다.
콰르르릉!
금빛으로 가득 차던 심연의 천장이 붉은 광망에 찢겨 나갔다.
"어디를 도망치려 하느냐, 혁린!"
절벽 끝자락, 사공도의 손에 들린 붉은 쇳조각이 기괴한 안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것은 과거 사공도가 뇌정전 외곽에서 훔쳐내 무림맹에 바쳤다는 고대 유물, '뇌신령'의 조각이었다.
붉은 조각에서 뻗어 나온 마기가 황금빛 뇌해의 흐름을 강제로 비틀어 왜곡시키기 시작했다. 사공도가 가진 뇌신령의 권능이, 추락하는 두 사람을 향해 뇌해의 모든 에너지를 역류시키고 있었다.
진정한 일촉즉발(一觸即發)의 위기였다.
위에서는 사공도가 조종하는 붉은 뇌전의 창날이 쇄도하고, 아래에서는 폭주하는 금빛 뇌해가 그들의 육신을 분쇄하려 소용돌이쳤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공도의 독문 혈독이 혁린의 단전을 옥죄어 한 줌의 내력조차 끌어올릴 수 없게 만들었다.
스스스슥!
그 찰나의 순간, 두 사람의 신형이 마침내 심연의 바닥에 도달했다.
그곳은 끝없는 전기의 바다 한가운데 솟아오른 거대한 청동 제단이었다.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뇌정전(雷霆殿)의 본전(本殿) 입구였다. 둔탁한 충격음과 함께 제단 바닥에 쓰러진 혁린은 온몸의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 속에서도 백소진을 제 몸 아래로 감싸 안았다.
"소진아…… 정신 차려라……."
갈라진 목소리로 속삭였으나, 백소진은 굳게 닫힌 눈을 뜨지 못했다. 그녀의 영맥을 갉아먹는 빙결의 독기가 온몸을 타고 올라와 목덜미까지 푸른 서리를 피워내고 있었다.
상황은 최악을 치닫고 있었다.
머리 위에서는 사공도가 조종하는 붉은 뇌전의 격류가 제단을 통째로 날려버릴 기세로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제단의 사방을 수호하던 석상들이 불길한 진동을 일으키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침입자를 배제하려는 뇌정전의 고대 방어 기전이 기동한 것이다.
내력은 고갈되었고, 심장은 뇌적으로 타들어 가며, 적의 치명적인 일격이 머리 위까지 당도했다.
혁린은 천뢰의 자루를 간신히 쥔 채, 붉게 물든 눈으로 쏟아지는 번개의 비를 올려다보았다.
바로 그 순간.
우우우웅!
제단 한가운데 박혀 있던 거대한 청동 명판이 혁린의 피에 반응하여 기이한 문양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까지 그가 알고 있던 어떤 무예의 궤적과도 다른, 파멸적인 기운의 흐름이었다.
이중의 겁절(劫札)이 그들의 머리 위로 아가리를 벌리는 찰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