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쿠구구구!

지반이 완전히 뒤집혔다. 중력이 역전되며 몸이 허공으로 붕괴했다.

추락의 속도는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졌다. 사방을 메운 것은 칠흑 같은 어둠과 정체를 알 수 없는 노이즈뿐이었다.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고주파 소음이 고막을 찔렀다.

"마스터!"

백설하가 허공에서 손을 뻗었다. 태현은 차분하게 그녀의 손을 잡아끌어 제 품으로 당겼다. 요동치는 시야 너머로 윤지오와 그녀의 정찰대원들이 비명을 지르며 떨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쿵!

무거운 충격음과 함께 바닥에 처박혔다. 등 뒤로 서늘하고 축축한 감각이 전해졌다. 흙도, 돌도 아닌 규격화된 플라스틱 타일 같은 질감이었다.

태현은 몸을 일으켰다. 뇌 깊은 곳에서 욱신거리는 통증이 일었으나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는 즉시 주변 환경을 스캔했다.

[System: 비정상 세션 진입 완료.] [System: 현재 위치 - 'Null Sector (차원 하수구)'] [System: 경고 - 본 구역은 정규 시스템의 관리 영역 외곽입니다.]

어둡고 거대한 지하 수로의 형상이었다. 하지만 흐르는 것은 물이 아니었다. 깨진 픽셀과 깨진 텍스트 파일들이 검푸른 액체처럼 바닥을 따라 흘러가고 있었다.

"아으윽……."

저만치서 윤지오가 신음을 흘리며 일어섰다. 그녀의 대원 세 명도 무기를 쥔 채 사방을 경계했다. 그들의 얼굴은 공포로 질려 있었다.

"여긴…… 어디지? 시스템 지도가 작동하지 않아."

지오가 자신의 상태창을 확인하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조용히 해."

태현의 차가운 목소리가 수로에 낮게 울렸다.

스스스스.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기어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형태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검은 진흙 같은 괴물들이었다. 궤적을 그릴 때마다 붉은색 잔상이 남았다. 시스템이 처리하지 못하고 버린 쓰레기 데이터, 즉 'Null 개체'들이었다.

"적습이다! 방어 대형!"

지오가 검을 뽑아 들며 소리쳤다.

백설하 역시 태현의 앞을 가로막으며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그러나 검을 반쯤 뽑은 순간, 그녀의 신체가 기계적으로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스파크가 그녀의 어깨와 손목 부근에서 튀었다.

치직, 치지직!

[System: 경고! 스킬 시전 오류.] [System: 대상 '백설하'의 액티브 스킬 '신성한 심판의 검' 로딩 실패.]

"아…… 윽."

설하의 미간이 좁혀졌다. 검을 쥐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그녀의 발목을 잡던 정체불명의 디버프였다. 시스템은 항상 이 현상을 단순한 '기력 고갈'이나 '디버프 충돌'로 표시했었다.

태현은 단말기를 켜고 개발자 콘솔을 띄웠다. 안구 전면에 푸른색 소스코드 창이 빼곡하게 명멸했다.

설하의 신체 데이터 주소값을 추적했다.

`Object: Baek_Seol_Ha` `└ Active_Skill: Holy_Judgment_Sword` ` └ Memory_Address: 0x00000000 (Null)`

"이래서였군."

태현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시스템이 그녀의 재능을 억제하기 위해 핵심 스킬의 포인터 주소를 일부러 비워두었던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메모리 주소(Null Pointer)를 가리키게 만드니, 스킬을 쓰려고 할 때마다 런타임 에러가 발생해 온몸이 마비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디버프가 아니라 시스템의 의도적인 코드 오염이었다.

"설하, 검을 쥔 손에 힘을 빼."

"하지만, 마스터…… 적들이……."

"지시에 따라라. 3초 뒤에 다시 잡아."

태현은 콘솔 창의 가상 키보드를 두드렸다.

`Set_Address(Baek_Seol_Ha.Holy_Judgment_Sword, 0x7FFF8A10);` `Reallocate_Memory(0x7FFF8A10, SizeOf(Skill_Data));` `Compile_And_Patch();`

[System: 소스코드 실시간 리팩토링 적용 완료.] [System: 대상 '백설하'의 메모리 누수 주소값을 정상 재할당합니다.] [System: 'Null Pointer Error'가 영구적으로 해결되었습니다.]

뇌가 순간적으로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이 스쳤다. 생명력 수치가 미세하게 깎여 나갔지만, 태현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지금이다. 베어라."

태현의 명령과 동시에, 설하의 검이 마침내 완전히 뽑혔다.

화아아악!

이전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순백의 광휘가 지하 수로를 가득 채웠다. 오염되지 않은 무결한 성력이 검신을 타고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이건……?"

설하의 눈이 크게 떠졌다. 매번 숨통을 조이던 불쾌한 제약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전신을 흐르는 기운이 완벽하게 최적화된 상태였다.

"하압!"

그녀가 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단 한 번의 가로베기. 그러나 뿜어져 나온 검기는 수로 전체를 종단하며 기어 오던 Null 몬스터 세 마리를 단숨에 증발시켰다. 먼지조차 남지 않은 완전한 소멸이었다.

[System: 대상 '백설하'가 잠재된 진정한 역량을 개방했습니다.] [System: 처치한 Null 몬스터의 데이터 조각을 흡수합니다.]

| 획득 항목 | 수량 | 효과 | | :--- | :---: | :---: | | **순수 데이터 파편** | 120개 | 시스템 가치 1.2% 상승 | | **최적화 가용 리소스** | 15MB | 뇌 세포 누수 복구율 0.8% 증가 |

"내 검이…… 막히지 않아."

설하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무감각하던 그녀의 눈동자에 처음으로 짙은 경외감이 서렸다. 그녀는 태현을 향해 깊게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마스터. 제 안의 어둠이 완전히 걷혔습니다."

"단순한 주소값 오류였다. 제자리로 돌려놓았을 뿐이다."

태현은 건조하게 대꾸하며 단말기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 수로의 상류 방향에서 거대한 파열음이 들려왔다.

쿠르릉! 쿠르릉!

바닥의 픽셀 액체가 거꾸로 솟구치며, 기괴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둠 속에서 붉은색 타이머를 머리 위에 띄운 괴수들이 떼를 지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Warning: 보이드 데토네이터(Void Detonator) 대규모 제너레이트!] [Warning: 해당 개체들은 타겟 접촉 시 자폭을 시도합니다.] [Warning: 자폭 데미지 - 고정 피해 5,000 (구역 내 타격 전파)]

"자폭 괴수라고?"

윤지오의 얼굴이 완전히 굳어졌다. 한두 마리도 아니고 수십 마리였다. 고정 피해 5,000이면 현재 자신들의 체력으로는 단 한 번의 폭발만 스쳐도 즉사였다.

"모두 내 뒤로! 방패를 올려라!"

지오가 대원들을 보호하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검에 푸른 마나가 실렸지만, 사방에서 조여오는 자폭 괴수들의 속도는 절망적으로 빨랐다.

"여기서 죽을 순 없어……! 어떻게든 버텨야 해!"

그녀가 외쳤다.

"비효율적이군."

태현이 걸음을 옮겼다.

"강태현 씨! 뒤로 물러서요! 저것들이 터지면 당신도 무사하지 못해!"

지오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너희들의 방식은 리소스 낭비가 심하다."

태현은 콘솔 창을 다시 열었다. 쇄도하는 보이드 데토네이터들의 헤더 데이터를 낚아챘다. 단말기 화면에 그들의 인공지능 알고리즘과 트리거 조건문이 실시간으로 나열되었다.

`Class: Void_Detonator` `└ Variable: fuse_timer = 5.0 (sec)` `└ Trigger: if (Target_In_Range == true) { Start_Countdown(); }` `└ Action: if (fuse_timer <= 0) { Trigger_Explosion(); }`

태현의 손가락이 잔상을 남기며 움직였다.

"자폭의 트리거가 타이머의 제로 도달이라면."

조건을 비틀어버리면 그만이다.

`Set_Value(fuse_timer, -9999);` `Override_Action: if (fuse_timer < 0) { Delete_Object_Immediate(); }`

자폭 카운트다운의 초깃값을 음수로 고정하고, 음수가 되는 즉시 폭발이 아닌 '오브젝트 강제 삭제' 프로세스가 실행되도록 로직을 리팩토링했다.

[System: 몬스터 개체 'Void_Detonator'의 시스템 트리거를 재정의합니다.] [System: 예외 처리 핸들러 강제 삽입 완료.]

쉬이이이익-!

정찰대원들의 코앞까지 들이닥쳤던 괴수들이 일제히 멈춰 섰다.

그들의 머리 위에 떠 있던 붉은색 타이머가 '5.0'에서 '-9999'로 즉시 치환되었다.

그리고.

펑, 하는 소리조차 없이.

수십 마리의 보이드 데토네이터들이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허공에서 투명하게 바스러지며 사라졌다. 단 한 마리도 예외는 없었다.

고요함이 지하 수로를 지배했다.

지오와 대원들은 검을 든 채 굳어버렸다. 그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마법도, 물리적인 타격도 없었다. 그저 태현이 손가락을 몇 번 움직였을 뿐인데, 재앙 같던 괴수 대군이 증발했다.

[System: 규칙 파괴(Rule Break) 성공.] [System: 비정상 소모 프로세스 감지.] [System: 대량의 무결성 데이터 파편을 강제 회수합니다.]

| 구분 | 획득 전 가치 | 획득 후 가치 | | :--- | :---: | :---: | | **시스템 최적화율** | 14.2% | **18.5% (▲ 4.3%)** | | **가용 시스템 메모리** | 120MB | **240MB (▲ 120MB)** |

태현은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뇌를 짓누르던 통증이 리소스 확보와 동시에 눈에 띄게 경감되었다. 시야가 한층 맑아졌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지오가 떨리는 목소리로 태현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혼란과 충격, 그리고 거부할 수 없는 경외감이 뒤섞여 있었다.

"시스템의 허점을 찌른 것이다."

태현이 무심하게 답했다.

"허점이라니요? 그건 시스템의 절대적인 규칙이에요! 괴수가 나타나면 싸워서 이겨야 하는 게 이 세계의 법이잖아요!"

지오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항변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인간의 존엄성과 시스템이 부여한 질서를 굳게 믿는 구도자의 고집이 담겨 있었다.

"너희들이 믿는 그 질서라는 게 얼마나 조잡한 레거시 코드인지 아직도 모르는군."

태현이 지오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눈빛은 감정이 완전히 배제된 냉혹한 분석가의 그것이었다.

"이 아포칼립스는 신의 시험도, 인류의 진화 단계도 아니다."

"무슨 소리를……."

"그저 시스템 관리자 오스발트와 그 일당들이 이전 데이터를 제대로 포맷하지 않고 억지로 시스템 리셋을 감행하다가 터진, 최악의 런타임 에러 쓰레기 더미일 뿐이다."

태현의 명징한 설명에 지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쓰레기 더미…… 라고요?"

"그래. 설계 단계부터 에러투성이인 세계지. 너희들은 그 에러 속에서 목숨을 구걸하며 그것을 '시련'이라 부르고 있는 거다. 비효율의 극치지."

"하지만……!"

지오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의 목숨값까지 무가치해지는 건 아니에요! 이 불합리한 세계 속에서도 우리는 서로를 지키고, 규칙을 지키며 살아남아야 해요! 그게 우리가 인간이라는 증거니까요!"

그녀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비록 세계의 진실이 추악할지라도, 그 안에서 피어나는 인간의 의지만큼은 진짜라고 믿고 있었다.

태현은 그녀의 외침을 들으며 속으로 평가했다.

'감상주의자. 하지만 이용 가치는 충분하다.'

그녀의 곧은 성정과 리더십은 향후 소스코드 교단과의 충돌에서 훌륭한 방패이자 미끼(Decoy)로 쓸 수 있었다.

"살아남고 싶다면 그 무른 생각부터 버려라.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가치 있는 것은 통제 가능한 변수뿐이다."

태현은 그렇게 말하며 수로의 끝을 향해 걸어 나갔다. 설하가 묵묵히 그의 뒤를 따랐다. 지오는 입술을 깨물었지만, 결국 태현의 뒤를 쫓아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의 냉혹한 논리가 틀리지 않았음을, 방금 전의 기적이 증명했기 때문이다.

수로의 끝에 도달하자, 지상으로 올라가는 거대한 수직 통로가 나타났다. 푸른빛의 포탈이 희미하게 명멸하고 있었다. 탈출구였다.

"저기예요! 나갈 수 있어요!"

지오의 대원이 기뻐하며 외쳤다.

그러나 태현은 걸음을 멈췄다. 그의 직관이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단말기 화면에 붉은색 노이즈가 폭발하듯 번졌다.

[System: 치명적인 관리자 권한 간섭 발생!] [System: 정규 프로세스 'Port_Lockdown'이 실행됩니다.]

지이이이잉-!

수직 통로 저편, 어둠 속에서 거대한 푸른색 눈동자가 서서히 떠올랐다.

인간의 형상을 모방했으나, 오직 기계적인 선과 코드로만 이루어진 거인. 아바타 오스발트의 거대한 본체 환영이었다.

"규격을 벗어난 맬웨어여."

오스발트의 목소리가 지하 수로 전체를 진동시켰다.

"당신의 존재는 시스템의 영구적인 오염을 유발합니다. 이에 따라 해당 섹터의 모든 네트워크 포트를 물리적으로 차단합니다."

거인의 손짓 한 번에, 탈출구였던 푸른 포탈 주위로 붉은색의 거대한 마나 봉쇄선이 쇠사슬처럼 얽혀들며 완전히 락다운(Lockdown)되었다.

[Warning: 시스템 포트 강제 폐쇄!] [Warning: 탈출 경로가 영구 차단되었습니다.]

사방의 벽이 좁혀지기 시작했다. 무너져 내리는 차원의 틈새 속에서, 오스발트의 푸른 눈빛이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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