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러서십시오!"
윤지오가 대검을 치켜들며 외쳤다.
그러나 뻗어 나간 검 기운은 허공에 처박힌 붉은색 쇠사슬에 닿기도 전에 흔적도 없이 분해되었다. 마나 자체가 시스템의 차단 프로토콜에 흡수되는 형태였다.
지오의 대원들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자빠졌다. 수직 통로 전체를 밀어닥치던 푸른 포탈의 빛은 이미 칠흑 같은 적색 연무에 뒤덮여 있었다.
아바타 오스발트의 거대한 환영이 허공에서 무감각한 눈빛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규격 외 개체 강태현. 당신의 세션 세그먼트를 격리합니다. 이 조치는 시스템의 무결성 유지를 위한 표준 대응 절차입니다."
지이이이잉-!
수백 개의 붉은 쇠사슬이 사방의 벽을 타고 내려와 그들이 서 있는 발판을 조여 왔다. 벽면의 돌들이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모래가 되어 흘러내렸다.
태현은 도망치지 않았다. 도망칠 곳 따위는 메모리 맵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차분하게 오른손을 뻗어 허공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반투명한 청색 개발자 콘솔이 그의 안구 전면에 동기화되었다.
[System: Developer Console Activated.] [Target Object: 'Port_Lockdown' (Active Barrier)] [Analysis: 물리적 공격 흡수율 100%, 마법 공격 무효화율 100%] [Current Status: 분산 공격에 대한 절대 면역 상태]
태현의 눈동자가 빠르게 굴러갔다.
오스발트가 시전한 락다운 배리어는 개별적인 공격을 무한히 흡수해 자신의 방어력으로 환원하는 순환 구조를 취하고 있었다. 이 상태에서 제각각 무기를 휘두르는 것은 적에게 마나를 상납하는 짓에 불과했다.
"윤지오. 검 내려놔."
태현의 건조한 목소리가 좁혀지는 수로 안에 울렸다.
"하지만 강태현 씨!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우리는 여기서 압사당해요! 저 사슬을 끊어내야—"
"네 검술 수치는 현재 180이다. 옆에 있는 백설하의 기본 수치는 150. 대원들의 합은 70에 불과하지. 너희가 지금 저 배리어에 가하는 공격은 제각기 다른 시간축에 도달한다. 즉, 공격력이 쪼개져서 들어간다는 뜻이다."
태현은 단말기 화면의 수식 레지스터를 실시간으로 갱신했다.
| 공격 방식 | 개별 연산 물리력 | 배리어 흡수 판정 | 최종 유효 타격 | | :--- | :--- | :--- | :--- | | 분산 공격 (현재) | 180 / 150 / 70 | 100% 흡수 (임계값 1000) | **0 (무효)** | | 동기 고밀도 공격 | 2400 (동기화 배율 6.0x) | 돌파 (임계값 초과) | **1400 (관통)** |
"공격의 타이밍을 단 하나의 프레임으로 동기화시킨다. 임계값을 일시에 초과시키면 배리어의 흡수 루프가 과부하로 깨진다."
"동기화라니요? 그런 정밀한 마력 제어를 이 짧은 순간에 어떻게 합니까?"
지오가 이를 악물며 물었다.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다른 계통의 마력을 보유한 헌터들이 소수점 아래 밀리초 단위로 시전 타이밍을 맞추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내가 강제로 맞춘다."
태현이 콘솔 창의 입력 라인에 코드를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sys.set_trigger_sync(Target_A: Seolha, Target_B: Jio, Frame_Rate: 60fps)` `sys.bind_attack_vector(A_Vector, B_Vector)`
[Warning: 시스템 스케줄러 강제 변조 시도.] [Warning: 뇌세포 메모리 누수 위험이 감지되었습니다.]
두통이 관자놀이를 타고 송곳처럼 찔러 들어왔다. 뇌세포의 일부가 타들어 가며 차가운 기계적 고열을 뿜어냈다. 수명이 실시간으로 깎여 나가는 감각이었지만, 태현의 손가락은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자판을 두드렸다.
그 순간, 백설하가 비틀거리며 검을 잡았다. 그녀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아…… 윽……."
설하의 검이 흐릿하게 흔들렸다. 그녀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와야 할 푸른 마나가 기괴하게 꺾이며 소멸하고 있었다.
시스템의 고질적인 에러가 그녀의 신경망을 다시 옥죄기 시작한 것이다.
태현의 눈에 설하의 상태창이 붉은색으로 점멸하는 것이 보였다.
[Status: '백설하' (Object_ID: Player_004)] [Active Skill: '극광의 검술' (State: Error)] [Error Code: NullPointerException - Target Address '0x00F3A2' is Null.]
2화에서부터 그녀의 발목을 잡았던 검술 스킬 주소값의 결함이었다. 시스템은 설하가 쥔 검을 정상적인 무기가 아닌 '정의되지 않은 버그 오브젝트'로 해석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가 마력을 주입할 때마다 스킬의 참조 주소가 유실되어 시전 자체가 취소되는 디버프가 발생했던 것이다.
태현은 지체 없이 콘솔의 다음 탭을 열었다.
"백설하. 움직이지 마라."
"태현 님…… 검이…… 제 마력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설하가 절망적인 눈빛으로 태현을 바라보았다.
"검이 망가진 게 아니다. 시스템의 이정표가 부서진 것뿐이지."
태현의 손가락이 가상 키보드 위에서 잔상을 남기며 움직였다.
`# 백설하 검술 스킬 주소값 강제 할당` `if (Player_004.Equipped_Weapon == Null) {` ` Player_004.Equipped_Weapon.Address = 0x00F3A2;` `}` `sys.rebind_pointer(Player_004.Active_Skill, 0x00F3A2);`
[System: 스킬 주소값 강제 바인딩 완료.] [System: NullPointerException의 예외 처리를 무시합니다.]
파지직-!
설하의 손에 들린 검에서 눈이 멀 것 같은 백색의 검기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이전과는 궤를 달리하는 순수한 마력의 흐름이었다. 그녀를 쾡하게 짓누르던 시스템의 무효화 디버프가 완전히 소멸하고, 본래 가지고 있던 진정한 천재성이 해방되는 순간이었다.
"아……."
설하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검을 타고 흐르는 마나가 막힘없이 온몸의 회로를 순환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생기가 돌며, 태현을 향한 맹목적인 신뢰가 한층 더 깊어졌다.
"준비해라."
태현이 두 사람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내가 신호를 내리는 순간,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배리어의 중심부를 타격한다."
"알겠습니다!"
지오도 설하의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파괴력을 느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대검에도 성스러운 금빛 마나가 어려 있었다.
`sys.execute_sync_sequence()`
[System: 동기화 시퀀스 시작.] [Time to Impact: 3, 2, 1...]
태현의 안구 속 타이머가 제로를 가리킨 순간, 두 여자의 신형이 동시에 앞으로 튀어 나갔다.
설하의 백색 검기와 지오의 금빛 기운이 공중에서 정밀하게 교차했다. 두 사람의 마력이 서로의 빈틈을 메우며 완벽한 나선형의 궤적을 그렸다. 단일 타이밍으로 묶인 공격력 수치가 허공에 표시되었다.
[Current Damage Output: 2400]
콰아아아앙-!
지하 수로가 무너질 듯한 폭음과 함께, 오스발트가 쳐두었던 붉은색 락다운 배리어가 유리창처럼 산산조각 나며 흩어졌다.
사방을 죄어오던 붉은 사슬들이 먼지가 되어 사라지고, 그 너머로 다시 푸른빛의 포탈이 모습을 드러냈다.
"성공했다……!"
지오의 대원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지오 역시 거친 숨을 몰아쉬며 대검을 바닥에 짚었다. 그녀는 태현을 경외심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단지 타이밍을 동기화하고 스킬의 연결 고리를 수정했을 뿐인데, 난공불락처럼 보이던 관리자의 봉쇄가 이토록 허무하게 깨질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이다.
[System: 경고 상태 해제.] [System: 세션 격리 실패. 정규 프로세스로 복귀합니다.]
허공에 떠 있던 오스발트의 거대한 환영이 서서히 흐려지더니 이내 완전히 소멸했다.
동시에 머리 위에 거대한 시스템 방송 문구가 떠올랐다.
[System: 던전 내부의 모든 위협 요소가 정화되었습니다.] [System: Dungeon Clear!] [System: 안전지대로 이동하는 게이트가 활성화됩니다.]
푸른 포탈이 잔잔한 수면처럼 빛나며 그들을 유혹했다.
"끝났어…… 진짜로 탈출할 수 있는 거야!"
"살았다! 교단 놈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났어!"
대원들이 기뻐하며 포탈을 향해 걸음을 옮기려 했다. 지오 역시 긴장이 풀린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단 한 사람, 태현만이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태현의 안구 속에서 돌아가던 개발자 콘솔의 로그 창은 그들과 전혀 다른 정보를 출력하고 있었다.
`[Notice: Read_Memory_Buffer]` `[Warning: Log_Spoofing_Detected]` `[Alert: Pseudo_Clear_State == True]`
"멈춰."
태현의 나직한 명령에 포탈로 향하던 대원들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강태현 씨? 왜 그러세요? 이미 클리어 판정이 났잖아요."
지오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위조된 로그다."
태현이 차갑게 답했다.
"이 시스템은 지금 너희에게 '가짜 통관 방송'을 보여주고 있다. 저 포탈로 들어가면 안전지대가 아니라, 시스템의 소멸 처리 루틴(Garbage Collector)의 한복판으로 직접 전송된다."
"네? 그게 무슨……."
"눈으로 직접 보여주지."
태현이 콘솔 화면을 가볍게 튕겼다. 그의 손끝에서 시작된 청색 파동이 푸른 포탈의 표면을 쓸고 지나갔다.
윙-!
그러자 아름답게 빛나던 푸른색 포탈의 껍데기가 마치 홀로그램이 벗겨지듯 찢겨 나갔다.
그 뒤에 숨겨져 있던 추악한 실체가 드러났다.
포탈의 중심부에서 자라나고 있던 것은, 수백 개의 붉은 신경망이 기어 다니는 기괴한 형태의 '본체 뇌수'였다. 그것은 포탈을 통과하려는 자들의 생체 데이터를 통째로 흡수하기 위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덫이었다.
"힉……!"
대원들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자빠졌다.
가장 안전하고 믿음직해 보이던 탈출구가 사실은 자신들을 통째로 갈아 마실 함정이었다는 사실에, 지오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어떻게…… 시스템의 안내 방송까지 위조할 수가 있는 거죠?"
"레거시 코드는 언제나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대상을 제거하려 든다. 싸우는 것보다 속이는 게 리소스가 적게 드니까."
태현은 차갑게 중얼거리며 본체 뇌수의 정확한 좌표값을 고정했다.
`[Target: Core_Brain_01 (Virtual Node)]` `[Coordinate: X: 442.12, Y: 891.04, Z: -12.33]` `sys.inject_subroutine(Target, 'Overload_Crash')`
"딜리트(Delete)."
태현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키보드를 누르는 가벼운 마찰음과 함께, 본체 뇌수의 중심부로 치명적인 과부하 코드가 주입되었다.
쿠구구구궁!
뇌수가 괴이한 비명을 지르며 내부에서부터 스스로 폭발하기 시작했다. 붉은 신경망들이 맥없이 끊어지고, 위조된 공간의 인덱스 좌표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며 사방의 벽면이 정상적인 석조 구조물로 환원되었다.
완벽한 정밀 저격이었다. 거창한 무력도, 화려한 스킬의 난사도 없었다. 오직 시스템의 알고리즘을 역이용해 적의 숨통을 정확히 끊어낸 천재적인 디버깅이었다.
지오는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만약 태현이 없었다면, 자신과 대원들은 저 아름다운 푸른 빛속으로 기꺼이 걸어 들어가 끔찍한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고맙습니다…… 강태현 씨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모두……."
"착각하지 마라."
태현은 지오의 감사를 칼같이 잘라냈다.
"너희를 살린 건 내 효율적인 생존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다. 쓸데없는 감상으로 리소스를 낭비하지 마."
그의 냉혹한 다짐에 지오는 입술을 깨물었지만, 더는 반박할 수 없었다. 그의 말이 옳았고, 그의 천재적인 재능만이 이 미쳐버린 세계에서 유일한 나침반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도감은 길지 않았다.
본체 뇌수가 완전히 녹아내려 재가 된 순간, 허공에 떠 있던 황금빛 'Dungeon Clear' 텍스트가 기괴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스르륵, 스르륵.
글자들이 마치 검은 피처럼 흘러내리며 붉은색의 새로운 문장으로 재구성되었다.
[Warning: 시스템 중추 노드 손상 감지.] [Warning: 예외 처리 오류로 인해 상위 보안 프로토콜이 강제 활성화됩니다.] [Warning: 진짜 보스 - '레거시 코드 수호령'의 동기화가 시작됩니다.]
쿠르르릉-!
지하 수로의 천장이 거대하게 갈라지며, 정체불명의 압도적인 중압감이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사방의 중력이 제멋대로 뒤틀려 발판이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태현 님……!"
설하가 검을 고쳐 잡으며 태현의 앞을 가로막았다.
천장의 균열 사이로, 오직 검은색 노이즈와 깨진 텍스트로만 이루어진 거대한 수호령의 형상이 천천히 내려앉고 있었다. 단지 그 존재만으로도 주변의 물리 법칙이 비명을 지르며 붕괴해 가는 것이 보였다.
태현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