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대리석 바닥이 뺨에 닿았다.
시야가 온통 핏빛으로 번졌다. 귓가를 찢는 경고음은 멈추지 않았다.
[경고! 메모리 누수율 임계점 돌파 (98.4%)] [사용자 뇌 기능 저하: 85% 돌파] [생체 신호 위험: 심정지 12초 전]
콧구멍과 입술 사이로 뜨겁고 비릿한 액체가 울컥 흘러내렸다. 뇌가 통째로 끓는 물에 삶아지는 감각이었다. 뉴런이 실시간으로 타들어 가며 검게 죽어갔다.
"마스터! 정신 차리십시오!"
백설하의 비명이 고막을 때렸지만, 멀게만 느껴졌다. 그녀의 손길이 어깨를 붙잡았으나 감각은 이미 마비되어 가고 있었다.
움직여야 한다. 여기서 멈추면 그대로 영구 소멸이다.
태현은 피가 흐르는 눈을 억지로 부릅떴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붉게 점멸하는 단말기 화면이 보였다.
[System: '오스발트' 프로토콜 대기 중…….] [System: 외부 침입자 강제 배제 프로세스 가동 5% 진행]
관리자 봇의 청소 루틴이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시스템에 의해 뇌세포가 전부 포맷된다.
태현은 경련하는 오른손가락을 움직였다. 허공을 향해 손끝을 뻗었다.
"콘…… 솔. 오픈."
피가 섞인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눈앞에 반투명한 푸른색 개발자 입력창이 나타났다. 평소보다 텍스트가 심하게 깨져 있었고, 입력 반응 속도도 처참하게 느렸다.
[Command: run local_debug.exe (Error: Memory Allocation Failed)]
메모리가 부족하다. 시스템의 방화벽이 태현의 연산 영역을 완전히 압착하고 있었다.
"이 따위 레거시 코드가……."
태현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입 안에서 비린 피 맛이 강하게 퍼졌다. 감정을 배제해야 한다. 고통은 뇌가 보내는 전기 신호일 뿐이다. 불필요한 감각 데이터는 무시한다.
그는 단말기의 물리적 인터페이스 포트에 시선을 고정했다.
저 단말기는 메인프레임과 연결된 고대역폭 물리 포트다. 방화벽이 가동 중이지만, 역으로 말하면 저 포트를 통해 메인프레임의 가동 리소스가 실시간으로 공급되고 있다는 뜻이다.
"리소스…… 탈취."
태현은 콘솔 창에 강제 주입 명령어를 써 내려갔다. 손가락이 떨려 오타가 날 때마다 뇌에 극심한 물리적 타격이 가해졌다. 머릿속이 번개에 맞는 것처럼 번쩍였다.
[Command: force_mount /dev/mainframe_mem -o bypass_auth] [System: 경고! 허가되지 않은 물리적 마운트 시도!] [System: 방화벽 가디언 '스위퍼(Sweeper)' 유닛 4기가 활성화됩니다.]
쿵! 쿵! 쿵! 쿵!
전당의 사방 벽면이 열리며 강철로 이루어진 거구의 골렘들이 걸어 나왔다. 온몸에 푸른색 방화벽 회로를 두른 고위험 오류 정화 개체들이었다.
가디언들의 안구에 붉은 빛이 들어왔다. 타겟은 명확했다. 바닥에 쓰러져 피를 토하는 개발자, 강태현이었다.
스위퍼들이 무거운 철퇴를 끌며 돌진하기 시작했다. 바닥이 진동했다.
"접근을 불허합니다."
설하가 태현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그녀의 백은색 대검이 푸른 불꽃을 뿜어냈다.
"마스터, 손을 멈추지 마십시오. 이 자들은 내가 단 한 걸음도 들여놓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설하의 목소리에는 일체의 망설임이 없었다. 그녀는 이미 자신의 생명을 태현의 연산에 완전히 저당 잡힌 상태였다. 태현이 죽으면 그녀 역시 시스템의 에러 코드로 판정되어 소멸한다.
쿠우우웅!
설하가 대검을 휘둘러 가장 먼저 다가온 스위퍼의 어깨를 내리쳤다. 불꽃이 튀며 강철 골렘의 장갑이 찌그러졌다.
하지만 가디언은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무식하게 크고 무거운 철퇴가 설하의 허리를 향해 가로로 쇄도했다.
깡!
설하는 검날로 철퇴를 받아내며 뒤로 밀려났다. 대리석 바닥에 그녀의 부츠가 깊은 궤적을 그렸다. 두 자루, 세 자루의 철퇴가 연이어 그녀를 덮쳤다.
태현은 그 광경을 이성적으로 관찰했다.
'백설하. 현재 전투력 140. 스위퍼 유닛의 평균 전투력 180. 1대4 대치는 물리적으로 불가능.'
그녀가 버틸 수 있는 예상 시간은 최대 45초.
하지만 태현의 마운트 해킹 완료까지 남은 시간은 1분 20초였다. 35초의 공백이 존재한다. 이 계산대로라면 설하는 파괴되고, 태현 역시 해킹을 완료하기 전에 으스러진다.
"설하, 오른쪽 15도 구역으로 회피해라."
태현이 짧게 명령했다.
설하는 묻지도 않고 몸을 날렸다. 그녀가 있던 자리에 거대한 철퇴가 내리꽂히며 폭음이 일었다.
"그대로 반격해라."
설하가 대검을 쥐고 도약했다. 무방비 상태인 스위퍼의 목을 겨냥해 검을 내리치려는 찰나였다.
화아악!
갑자기 그녀의 대검에 깃들었던 푸른 불꽃이 거짓말처럼 꺼졌다. 검날이 허공에서 멈추며 그녀의 신체가 기계적으로 경직되었다.
"아……?!"
설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System: 경고! 개체명 '백설하'의 액티브 스킬 '성검의 가호'가 강제 취소되었습니다.] [에러 코드: Null Pointer Exception (0x00000000)]
설하의 검술 스킬 주소값이 존재하지 않는 메모리 영역을 가리키며 시스템의 예외 처리가 발생한 것이다. 2화에서부터 그녀의 발목을 잡았던 고질적인 검술 무효화 디버프의 실체였다.
그녀의 무기를 버그로 판단한 시스템이 스킬의 실시간 라이브러리 연결을 끊어버린 상태였다.
스위퍼의 철퇴가 무방비해진 설하의 가슴을 향해 나아갔다. 직격하면 즉사였다.
"찾았다."
태현의 피 묻은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그는 죽어가는 와중에도 멀티스레딩(Multithreading) 연산을 가동하고 있었다. 전체 뇌 용량의 5%를 할당해 설하의 캐릭터 소스코드를 정밀 분석했다.
'검술 스킬 주소값이 0x00000000으로 초기화되어 있군. 레거시 시스템이 그녀의 검을 쓰레기 데이터(Garbage Value)로 오인해 메모리를 회수한 거다.'
간단한 포인터 리다이렉션(Pointer Redirection)으로 해결할 수 있는 오류였다.
태현은 콘솔 창에 빠르게 명령어를 때려 넣었다.
[Command: set_pointer (&백설하.검술_라이브러리, &가바란의_녹슨_심장.에너지_코어)]
이전 전투에서 획득한 A급 재료 '가바란의 녹슨 심장'의 메모리 주소를 설하의 검술 스킬 포인터에 강제로 대입했다. 시스템이 길을 잃었던 스킬 주소값이 새로운 고효율 에너지 코어와 완벽하게 동기화되었다.
[System: 오류 수정 완료 (Hotfix Applied)] [System: '백설하'의 검술 스킬 주소값이 유효한 물리 엔진 영역으로 재할당되었습니다.] [System: 잠금 해제된 잠재력 — '무결한 성검의 궤적' 활성화!]
웅웅웅웅!
설하의 대검이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백색의 고밀도 마력 파동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순백색의 광채로 물들었다.
"이 힘은……?"
설하의 목소리에 경외감이 서렸다. 그녀는 자신을 짓누르던 보이지 않는 쇠사슬이 완전히 끊겨 나갔음을 직감했다.
그녀가 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서걱!
단 한 번의 가로베기였다. 전방을 가로막고 있던 스위퍼 두 기의 허리가 종잇장처럼 잘려 나갔다. 절단면에서 푸른색 스파크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말도 안 되는……."
설하 스스로도 자신의 힘에 경악했다. 스펙의 한계에 가로막혀 있던 기사가, 시스템의 족쇄를 벗어던지자 진정한 괴물로 거듭난 순간이었다.
나머지 두 기의 스위퍼가 동시에 달려들었으나, 설하의 신형은 이미 그들의 인지 속도를 초월해 있었다.
스파앗!
간결한 두 번의 검선이 전당을 갈랐다. 가디언들은 단 3초 만에 차가운 고철 더미로 화해 바닥에 뒹굴었다.
설하가 태현의 앞을 굳건히 지켰다.
"마스터, 끝내십시오."
"그래."
태현은 단말기의 코어 영역에 도달했다. 방화벽이 제거된 마스터프레임 포트는 이제 무방비한 상태였다.
그는 콘솔 창의 최종 실행 엔터키를 눌렀다.
[Command: transfer_resource --source=mainframe_ram --target=user_brain] [System: 메인프레임 가동 RAM 리소스 이송 시작 (0%... 50%... 100%)] [System: 시스템 강제 최적화 루틴이 사용자에게 적용됩니다.]
쿠우우웅!
단말기에서 뿜어져 나온 순수한 물리 데이터의 흐름이 태현의 전신을 관통했다.
그것은 단순한 마력이 아니었다. 세계를 구성하는 물리 법칙의 제어권이자, 무한한 연산 능력을 자랑하는 시스템의 원천 리소스였다.
태현의 뇌 속으로 차가운 빙수가 쏟아져 내리는 듯한 극상의 쾌감이 몰려왔다. 타들어 가던 뉴런들이 실시간으로 재생되기 시작했다. 세포의 미토콘드리아가 폭발적으로 활성화되며 수명이 복구되었다.
[System: 사용자 메모리 누수 완벽 수복!] [System: 뇌 세포 영구 최적화 완료!] [System: 사용자 수명 20년 연장!]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안개가 완전히 걷혔다. 시야는 이전보다 몇 배는 더 선명해졌고, 주변의 모든 사물이 수식과 코드로 해체되어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시스템의 메인 리소스를 직접 강탈한 대가로, 그의 개인 스펙이 비정상적인 수치로 폭등하기 시작했다.
알림창이 태현의 안구 전면에 떠올랐다.
| 구분 | 변경 전 | 변경 후 | | :--- | :---: | :---: | | **연산 속도 (CPU)** | 1.2 GHz | **8.5 GHz (초고속)** | | **가동 메모리 (RAM)** | 4 GB | **64 GB (대용량)** | | **영구 생명 수치** | 120 | **2,400** | | **종합 전투력** | **150** | **890** |
전투력 150에서 890.
일반적인 헌터들이 평생을 바쳐도 도달할 수 없는 초월적인 도약이었다. 신체의 모든 근육과 감각 기관이 완벽히 튜닝된 스포츠카처럼 정밀하게 맞물려 움직였다.
태현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닥에 고여 있던 자신의 피를 밟으며, 단말기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단말기 화면은 이제 완전히 푸른색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태현의 제어 하에 들어온 것이다.
"겨우 20년인가."
태현은 차갑게 중얼거렸다. 만족할 수 없었다. 이 세계의 불합리한 시스템을 완전히 장악하고 영원한 통제권을 얻기 전까지는, 이 정도의 리소스는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그러나 첫걸음으로서는 나쁘지 않았다.
"마스터, 몸은 괜찮으십니까?"
설하가 검을 거두며 다가왔다. 그녀의 눈빛에는 이제 태현을 향한 맹목적인 구원의 갈망과 깊은 경외심이 담겨 있었다.
"완벽하다."
태현은 자신의 손을 쥐었다 폈다. 힘이 넘쳤다.
그가 단말기에서 '시스템 마스터 키'를 뽑아내려는 순간이었다.
뚜우우우-.
갑자기 전당 전체의 푸른 조명이 붉은색으로 반전되며 기괴한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이전의 방화벽 경고와는 차원이 다른, 공간 자체가 진동하는 듯한 위압감이었다.
공중의 인덱스 좌표들이 미친 듯이 일그러지며, 단말기 상단에 푸른색 홀로그램 입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인간의 형상을 닮은, 그러나 지극히 기계적이고 차가운 실루엣이었다.
[System: 긴급 비상 프로토콜 '오스발트'가 강제 로드됩니다.] [System: 시스템 오염 정화율 0.1% 진행…….]
허공에 나타난 푸른 그림자가 태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입이 없는 얼굴이었으나, 전당 내부의 모든 스피커를 통해 친절하고 차분한 어조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불법 프로세스 '강태현'. 당신의 존재는 시스템의 치명적인 메모리 오염입니다. 즉시 정화를 시작합니다."
동시에 전당의 문들이 전부 강철 차단벽으로 봉쇄되기 시작했다. 퇴로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