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남은 시간: 23:59:57]

붉은 숫자가 하늘에서 흘러내렸다. 서울 루트 섹터의 하늘을 뒤덮은 핏빛 타이머. 대지가 불쾌한 진동을 토해냈다. 주변에 서 있던 헌터들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포맷이라니? 구역 전체가 날아간다고?" "말도 안 돼! 도망쳐야 해!"

그들은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붕괴가 시작된 섹터에서 벗어나려는 쥐새끼들의 몸부림이었다. 하지만 태현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건조한 눈동자는 하늘의 숫자를 정밀하게 스캔하고 있었다.

"탈출은 비효율적이다."

태현이 낮게 중얼거렸다. 현재 루트 섹터의 공간 인덱스 좌표는 뒤틀려 있다. 무작정 달아나봐야 공간 루프 버그에 갇혀 소멸할 뿐이다. 살기 위한 유일한 경로는 하나였다. 24시간 이내에 메인프레임 제어 구역으로 진입하는 것. 그곳에서 물리 보안 프로토콜을 정지시키고 최적화 리소스를 회수해야 했다.

"가자, 백설하."

태현이 뒤를 돌아보았다. 백설하는 멍한 눈으로 자신의 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스템 에러로 묶인 그녀의 신성 검술. 마력이 흐르지 않는 검은 고철 덩어리에 불과했다. 그녀가 입술을 깨물며 태현을 올려다보았다.

"제 검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전력이 되지 못할 겁니다." "움직이게 만들면 된다."

태현이 한 걸음 다가섰다. 그녀의 어깨 너머로 투명한 반투명 창을 띄웠다. 오직 개발자인 태현에게만 보이는 세계의 이면. '개발자 콘솔'이 어둠 속에서 푸른빛을 발했다.

* * *

서울 루트 섹터 제어 구역 입구. 거꾸로 처박힌 마천루들이 성벽처럼 입구를 가로막고 있었다. 그 틈새에서 기괴한 노이즈가 발생했다. 치직, 치지직. 허공이 찢어지며 정체불명의 괴수들이 쏟아져 나왔다.

[경고: 시스템 에러 개체 '글리치 울프(Glitch Wolf)' 변종 출현!] [개체 수: 47]

붉은 안광을 흘리는 늑대들이었다. 가죽 곳곳이 디지털 노이즈로 깨져 있는 흉측한 외형. 그들이 침을 흘리며 태현과 설하를 향해 쇄도했다.

"전방 30미터, 하급 웨이브다."

태현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그는 곧바로 허공에 손가락을 튕겼다. 콘솔 창이 거대하게 확장되며 백설하의 캐릭터 소스코드를 펼쳐 보였다.

``` [Object: Baek_Seol_Ah] ├─ Status: Active ├─ Class: Holy Knight (Corrupted) └─ Skill: Holy_Slash └─ Error: NullPointerException (Address: 0x00F3A9) ```

"역시나."

태현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그녀의 무기를 버그로 판단한 시스템이 스킬의 대상 주소값을 통째로 비워버린 상태였다. 'Null pointer' 에러. 참조할 대상이 없으니 마력을 아무리 주입해도 기술이 발동할 리 만무했다. 시스템이 강제로 먹통을 만들어 놓은 레거시 코드의 전형적인 폐해였다.

"지금부터 강제 리팩토링을 시작한다."

태현의 손가락이 콘솔 키보드 위를 폭포수처럼 두드렸다. 타다다닥! 가상 공간에 코드 라인이 실시간으로 재배치되기 시작했다. 빈 공간으로 방치된 스킬 주소값(0x00F3A9)을 강제로 지웠다. 그리고 그 자리에 백설하의 마력 코어 직접 주소값을 수동으로 매핑했다.

`&Baek_Seol_Ah.Mana_Core -> Direct_Link(Holy_Slash)`

그 순간, 태현의 관자놀이가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뇌세포가 순식간에 증발하는 듯한 극심한 두통. 메모리 누수(Memory Leak)의 대가였다. 귀에서 삐- 하는 이음과 함께 코끝에서 비릿한 피가 흘러내렸다. 하지만 태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엔터키를 눌렀다.

[시스템: 소스코드 수정 완료.] [알림: 백설하의 'Holy_Slash' 스킬 구조가 재정의되었습니다.]

"크윽……!"

백설하가 짧은 신음을 뱉었다. 그녀의 전신을 흐르던 마력이 기괴한 경로를 타고 검끝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막혀 있던 댐이 무너진 형국이었다. 검붉은 노이즈로 가득했던 그녀의 장검이 순식간에 순백의 신성한 마력으로 뒤덮였다.

"이건……?"

설하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커졌다. 늘 자신을 옭아매던 불쾌한 위화감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검이 손가락의 연장선처럼 가볍게 느껴졌다.

"명령이다."

태현이 피를 훔치며 건조하게 말했다.

"앞에 있는 쓰레기들을 청소해라."

* * *

백설하에게는 더 이상의 의문도, 계산도 필요치 않았다. 자신의 검술을 완벽하게 되살려 준 남자. 시스템의 불합리한 억압 아래에서 자신을 건져 올려 준 유일한 존재. 그녀의 가슴 깊은 곳에서 맹목적인 충성심이 뿜어져 나왔다.

"비키세요."

설하가 대지를 박찼다. 그녀의 신형이 백색의 광조가 되어 전방으로 쏘아졌다. 기동 속도가 이전과는 차원을 달리했다. 마력 전달 효율이 100% 최적화된 결과였다.

스사사삭!

한 자루의 검이 백색의 궤적을 그리며 허공을 갈랐다. 가장 선두에 서 있던 글리치 울프 세 마리가 소리도 없이 두 동강 났다. 단면에서 뿜어져 나온 것은 피가 아닌, 깨진 데이터 파편들이었다.

"멍청한 짐승들."

설하의 눈빛은 서늘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검을 가볍게 회전시키며 쇄도하는 늑대들의 목을 차례로 수확해 나갔다. 좌가르고 우로 벤다. 지극히 단순한 검로였으나, 극도로 최적화된 마력 연산 덕분에 파괴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콰아아앙!

검끝에서 뿜어져 나온 신성한 폭풍이 전방의 몬스터 무리를 휩쓸었다. 단 10초. 구역 입구를 가득 메우고 있던 47마리의 글리치 울프들이 형체도 없이 소멸했다.

[전투 결과 보고] | 처치 개체 | 획득 경험치 | 획득 골드 | 특이 사항 | | :--- | :--- | :--- | :--- | | 글리치 울프 변종 x47 | 14,100 EXP | 4,700 G | 구역 정화율 +5% |

설하가 검을 거두며 태현을 향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호흡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길을 열었습니다, 마스터."

태현은 그녀의 극적인 변화를 담담하게 지켜보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효율성에 고정되어 있었다.

"전투 효율이 이전 대비 340% 상승했군. 쓸 만한 오브젝트다."

감상적인 칭찬은 없었다. 하지만 설하에게는 그 건조한 평가조차 더없는 구원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당신의 도구로서 소임을 다하겠습니다."

태현은 대답 대신 앞장서 걸었다. 제어 구역의 문이 서서히 열리고 있었다.

* * *

제어 구역 내부, '망각의 전당'. 사방이 거울 같은 검은 대리석으로 뒤덮인 거대한 방이었다. 그 중앙에 기괴한 존재가 버티고 서 있었다. 온몸에 녹슨 판금 갑옷을 두르고, 거대한 대검을 바닥에 박아 넣은 기사. 그의 머리 위에 붉은색 네임드 마크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네임드 Boss: 무장 해제자 가바란(Gavaran)] [레벨: 45] [전투력 평가: 측정 불가 (구역 규칙 적용 중)]

가바란의 주변으로 붉은색 마력 장벽이 넘실거렸다. 그와 동시에 허공에 시스템 인터페이스가 강제로 출력되었다.

[위험: 특수 구역 규칙 '가바란의 영역'이 활성화됩니다.] [규칙 1: 영역 내 모든 침입자의 무기 공격력이 90% 강제 감소합니다.] [규칙 2: 스킬을 시전할 경우, 즉시 '무장 해제(Disarm)' 디버프가 적용되어 무기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악랄하기 짝이 없는 디버프 규칙이었다. 이 구역에 들어온 헌터들이 추풍낙엽처럼 쓸려 나간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아무리 강력한 무기를 들고 와도 공격력은 10분의 1로 칼질당한다. 스킬을 쓰면 무기를 떨어뜨려 바보가 된다. 시스템이 설계한 '클리어 불가능'의 벽이었다.

우우우웅-!

가바란이 투구 너머로 서늘한 안광을 빛내며 대검을 들어 올렸다. 그가 한 걸음 내딛자, 묵중한 압박감이 전당을 가득 채웠다. 설하가 반사적으로 검자루를 쥐었으나, 시스템의 강제 제약으로 인해 검의 빛이 순식간에 흐려졌다.

"마스터, 몸이 무겁습니다. 검에 마력이 실리지 않습니다."

설하의 안색이 굳어졌다. 공격력 90% 감소. 이 상태로는 가바란의 판금 갑옷에 흠집조차 낼 수 없었다.

"규칙이 그렇다면, 규칙을 바꾸면 된다."

태현이 차갑게 웃었다. 그는 제자리에 서서 다시 한번 개발자 콘솔을 열었다. 가바란의 영역을 제어하는 서브 시스템의 소스코드가 그의 손끝에서 해체되기 시작했다.

``` [Area_Rule: Gavaran_Domain] ├─ Condition: Player_In_Area │ └─ Action: Apply_Debuff(Attack_Power_Down_90) └─ Condition: Player_Skill_Cast └─ Action: Apply_Debuff(Disarm) ```

"참으로 원시적인 조건문이군."

태현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그는 디버프를 유발하는 액션 메소드를 통째로 긁어내어 수정했다. 시스템이 정해놓은 '클리어 불가능'의 전제를 완전히 역이용하는 리팩토링이었다.

`Apply_Debuff(Attack_Power_Down_90) -> Apply_Buff(Attack_Power_Up_300)` `Apply_Debuff(Disarm) -> Apply_Buff(Holy_Attribute_Boost)`

코드가 수정되는 순간, 태현의 머릿속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다시 한번 폭발했다. 뇌 세포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시야가 가늘게 떨렸지만, 그는 이빨을 악물고 엔터를 쾅 눌렀다.

[시스템: 구역 규칙 소스코드 변조 완료.] [알림: '가바란의 영역'이 아군 이로운 효과 구문으로 대체됩니다.]

쿠구구구구!

검게 가라앉았던 전당의 공기가 순식간에 황금빛 마력으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가바란이 무기를 치켜들며 설하를 향해 쇄도했다. 그의 대검이 파괴적인 궤적을 그리며 내리눌렀다.

"설하, 스킬을 시전해라."

태현의 나직한 명령이 떨어졌다. 설하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적의 대검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신성 검술을 촉발했다.

"하앗!"

원래대로라면 무장 해제 디버프가 걸려 검을 떨어뜨려야 할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시스템: 규칙 변환 트리거 발동!] [버프: 백설하의 공격력이 300% 증가합니다!] [버프: 백설하의 검에 '성스러운 격상' 속성이 부여됩니다!]

쿠아아아앙!

설하의 검끝에서 태양에 필적하는 눈부신 백색의 빛이 폭발했다. 공격력 300% 증가와 속성 보강이 융합된, 신의 일격에 가까운 파괴력이었다. 가바란의 거대한 대검이 설하의 검과 부딪치는 순간, 유리창처럼 산산조각 나며 흩어졌다.

"무, 무슨……?!"

가바란의 녹슨 투구 너머로 기계적인 경악이 흘러나왔다. 그의 거대한 신체가 설하의 빛의 궤적에 가로막혀 허공에 고정되었다.

"사라지세요."

설하가 검을 회전시키며 사선으로 베어 넘겼다. 순백의 검기가 가바란의 두꺼운 판금 갑옷을 종잇장처럼 찢어발겼다.

콰아아아아앙!

거대한 폭음과 함께, 공략 불가능이라 여겨졌던 네임드 기사 가바란이 단 일격에 양단되었다. 그의 거대한 신체가 빛의 가루가 되어 허공으로 흩어졌다.

[시스템: 네임드 몬스터 '무장 해제자 가바란' 처치!] [시스템: 서울 루트 섹터 제어 구역의 안전이 확보되었습니다.] [획득 보상: 가바란의 녹슨 심장 (A급 재료), 시스템 마스터 키 x1]

* * *

"성공했군요."

설하가 검을 칼집에 넣으며 숨을 고르는 사이, 태현은 이미 전당의 단상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곳에는 핏빛으로 점멸하는 반투명한 단말기가 놓여 있었다. '비밀 마스터프레임 단말기'. 이 세계의 근본 시스템과 직접 연결된 하드웨어 인터페이스였다.

"이것만 해킹하면 수명 복구가 가능하다."

태현의 눈동자에 광기 어린 집착이 서렸다. 그는 단말기에 손을 올렸다. 그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색 코드 라인들이 단말기의 보안 서버를 강제로 뜯어내기 시작했다.

[접속 시도: 개발자 권한 (Level 1)] [보안 시스템: 외부 침입 감지! 방화벽 가동!] [경고: 시스템 메인프레임과의 강제 동기화가 진행됩니다.]

"닥치고 열어라."

태현은 보안 경고를 무시하고 강제로 해킹 루틴을 실행했다. 수십만 줄의 암호 코드가 그의 뇌를 거쳐 단말기로 쏟아져 들어갔다. 세계의 소스코드를 직접 주무르는 대가. 그것이 그의 뉴런을 실시간으로 태워버리기 시작했다.

치지직! 치직!

태현의 귓가에 잔혹한 경보음이 쏟아졌다.

[경고! 메모리 누수율 임계점 돌파 (98%)] [시스템 경보: 사용자 뇌 기능 저하 82% 돌파!] [생체 신호 위험: 심정지 및 뉴런 영구 손상 경고!]

"아윽……!"

태현이 자리에 멈춰 서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눈앞이 붉게 물들었다. 코와 입, 심지어 눈가에서도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온몸의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고열이 전신을 덮쳤다.

"마스터?!"

설하가 비명을 지르며 달려왔다. 하지만 태현의 시야는 이미 빠르게 암전되고 있었다. 단말기 화면에는 정체불명의 에러 코드와 함께, 기괴한 인격의 텍스트가 조용히 떠오르고 있었다.

[System: '오스발트(Oswald)' 프로토콜이 침입자를 감지했습니다.] [System: 강제 리부트 프로세스를 대기 상태로 전환합니다.]

"이런…… 버그 같은 녀석이……."

태현은 끝내 중심을 잃고 차가운 대리석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의 의식이 암흑 속으로 침잠하기 직전, 단말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차갑고 친절한 기계음이 고막을 울렸다.

"불법 프로세스를 감지했습니다. 청소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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