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붉은색 검풍이 좁은 시멘트 복도를 가르며 짓쳐들었다.

쿠구구궁!

콘크리트 벽면이 종잇장처럼 뜯겨 나가며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비산하는 먼지 사이로 백설하의 부서진 눈동자가 보였다. 평소의 차분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의 눈동자 위로 잘게 깨진 붉은 시스템 폰트들이 쉴 새 없이 명멸하고 있었다.

"죽…… 여…… 정화…… 해야……."

그녀가 쥔 낡은 마법 검에서 뻗어 나온 검은 덩굴 모양의 노이즈가 그녀의 하얀 손목을 파고들고 있었다.

설하가 바닥을 찼다.

인간의 반사 신경을 아늑히 초월한 속도였다. 단 0.1초 만에 그녀의 신형이 태현의 코앞까지 육박했다. 검 끝이 태현의 목울대를 향해 일직선으로 뻗어 나왔.

태현은 심박수를 강제로 낮췄다. 공포는 뇌의 연산 속도를 늦추는 불필요한 스레드일 뿐이다. 그는 즉각 뒤로 도약하며 오른손을 허공에 뻗었다.

"콘솔 개방."

나직한 명령과 함께, 반투명한 푸른색 개발자 제어 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스스스스!

태현의 시야 전체가 무수한 소스코드의 나열로 뒤덮였다. 그중에서도 백설하의 오브젝트 데이터가 붉은색 경고등처럼 깜빡이고 있었다.

[오브젝트명: 백설하 (Object_BaekSeolHa)] [상태 효과: 의식 잠식 (Mind_Control_Active = True)] [동작 프로세스: 무차별 난사 (Process_Wildfire)] [현재 타겟: Player_KangTaeHyun]

태현의 미간이 좁아졌다.

머릿속 한구석에서 쇠붙이를 달구어 들이붓는 듯한 극심한 통증이 치솟았다. 뇌세포가 실시간으로 타들어 가는 감각. 개발자 콘솔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뉴런에 메모리 누수가 발생하고 있었다.

코드를 수정할 때마다 그의 수명과 생명력이 영구적으로 깎여 나간다. 질질 끌 시간은 없었다. 단 한 번의 수정으로 상황을 종료해야 했다.

태현의 손가락이 허공의 가상 키보드를 폭발적인 속도로 두드렸다.

"타겟팅 조건문 우회."

그가 노린 것은 백설하가 실행 중인 무차별 난사 스킬의 타겟 인식 로직이었다.

```cpp // 기존 코드 if (Target == Player_KangTaeHyun) { Execute_Fatal_Slash(Target); } ```

태현은 이 조건문의 타겟 변수를 강제로 오버라이딩(Overriding)했다.

```cpp // 리팩토링 코드 if (Target == Player_KangTaeHyun) { Target = Object_Wall_Debris_04; // 주변 벽의 파편으로 강제 지정 Execute_Fatal_Slash(Target); } ```

엔터키를 누르는 순간, 태현의 관자놀이에서 핏줄이 터지며 한 줄기 피가 흘러내렸다.

[시스템: 소스코드 강제 수정 배포 완료.] [경고: 시스템 리소스 오버플로우 발생! 뇌 신경망 수명 12일 감소.]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이 덮쳐왔지만, 태현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수치화된 손실은 나중에 메인프레임을 해킹해 복구하면 그만이다. 지금 중요한 것은 눈앞의 버그를 처리하는 것이다.

스으윽!

태현의 목 바로 앞까지 쇄도했던 검날이 기괴한 궤적을 그리며 꺾였다.

백설하의 고개가 90도 옆으로 돌아갔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태현이 아닌, 복도 구석에 굴러다니던 커다란 콘크리트 잔해를 포착했다.

"정…… 화……!"

콰아아앙!

그녀가 쥔 검에서 뿜어져 나온 수십 조각의 붉은 검기가 콘크리트 더미를 향해 폭발적으로 쏟아졌다.

단순한 충격파가 아니었다. 공간의 물리 법칙을 왜곡하는 파괴적인 에너지가 벽의 잔해를 분자 단위로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통로 전체가 격렬하게 흔들리며 천장에서 모래 먼지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아…… 으아……."

스킬의 모든 마력을 쏟아부은 백설하의 신체가 부르르 떨렸다. 그녀를 잠식하고 있던 검은 노이즈가 급격히 사그라들었다. 마력 고갈과 시스템 강제 리다이렉션으로 인한 부하가 그녀의 뇌를 덮친 것이다.

툭.

그녀가 쥔 오염된 마법 검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동시에 백설하의 무릎이 꺾였다. 그녀의 몸이 앞으로 쓰러지려는 찰나, 태현이 한 걸음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품에 안긴 그녀의 몸은 얼음처럼 차가웠고,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태현은 그녀를 바닥에 조심스럽게 눕혔다. 그리고 그녀의 이마에 오른손을 얹었다.

" 분석 개시."

그의 눈앞에 다시 한번 텍스트 창이 무수히 떠올랐다. 이번에는 백설하 개인의 고유 스킬 주소값들이었다.

[오브젝트: 백설하 - 스킬 디렉토리 분석 중...] [검술 스킬 주소값: 0x00000000 (Null Pointer Exception)] [경고: 존재하지 않는 메모리 주소를 참조하고 있습니다. 무기 장착 시 시스템 충돌 유발.]

태현의 이성적인 눈빛이 번뜩였다.

'이거였군.'

2화에서 그녀를 처음 대면했을 때 보았던 검술 무효화 디버프의 실체였다. 시스템은 그녀가 무기를 쥘 때마다 그 무기를 정상적인 아이템이 아닌 '정의되지 않은 버그'로 판단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녀의 스킬 주소값은 늘 비어 있는 상태(Null Pointer)였고, 오염된 무기를 쥐는 순간 그 빈자리를 악성 코드가 파고들어 폭주를 일으킨 것이다.

이것은 백설하라는 객체 자체의 결함이 아니었다. 이 세계를 지배하는 레거시 시스템이 그녀에게 가한 의도적인 '오염'이었다.

태현은 입꼬리를 미미하게 올렸다.

"간단한 리팩토링이군."

그는 쓰러진 그녀의 이마를 짚은 채, 허공에 서너 줄의 명령어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cpp // 스킬 주소값 강제 매핑 및 예외 처리 구문 삽입 if (BaekSeolHa.Weapon_Skill_Address == null) { BaekSeolHa.Weapon_Skill_Address = System.Get_Valid_Address(Weapon_ID); BaekSeolHa.Sanity_Index = 100; } ```

타닥.

마지막 코드를 입력하고 엔터를 누르자, 태현의 손끝에서 푸른색의 정밀한 데이터 스트림이 뿜어져 나와 백설하의 이마로 흘러 들어갔다.

위이이잉-!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던 기괴한 붉은색 기운이 완전히 정화되며, 맑고 투명한 마력의 파동이 그녀의 전신을 순환하기 시작했다.

[시스템: 오브젝트 '백설하'의 소스코드 리팩토링 완료.] [수정 내용: Weapon_Skill_Address 포인터 정상 복구 및 고정.] [효과: 백설하의 검술 스킬 효율 150% 가시적 상승. 정신 오염 면역 획득.]

"음…… 윽……."

백설하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천천히 눈을 뜬 그녀의 눈동자는 더 이상 붉은 노이즈로 흐려져 있지 않았다. 본래의 맑고 깊은 검은빛 동공이 태현을 똑바로 비추었다.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늘 자신을 짓누르던 원인 모를 두통과 마력의 엉킴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아니, 오히려 전신을 흐르는 마력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럽고 강력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이건…… 어떻게 된……."

설하가 상체를 일으키며 태현을 바라보았다.

태현은 이미 콘솔 창을 닫고,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 검술 스킬의 주소값이 꼬여 있었다. 시스템의 에러를 수정했을 뿐이다."

"시스템의 에러를…… 수정하셨다고요?"

설하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이 세계에서 시스템은 절대적인 신의 규칙이자 침범할 수 없는 섭리였다. 그것을 '수정'했다는 태현의 말은 상식을 아늑히 벗어난 영역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몸 상태가 증명하는 명백한 팩트를 부정할 수 없었다. 평생 자신을 괴롭히던 한계와 고통이, 이 남자의 손길 한 번에 완벽하게 치유되었다.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 존재하던 고독과 불안이 눈 녹듯 사라졌다.

자신을 바르게 지탱해 줄 절대적인 존재. 그녀가 갈망하던 구원자가 바로 눈앞에 서 있었다.

스윽.

설하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태현의 발끝을 향해 깊은 경의를 표했다.

"이 생명과 검, 이제 온전히 당신의 것입니다. 저를…… 바로잡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이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태현은 그런 그녀를 감정이 배제된 눈으로 바라보았다.

'훌륭한 객체(Object)의 최적화가 끝났다.'

인간으로서의 연대감 따위는 없었다. 그저 쓸모 있는 도구가 완벽하게 수리되었을 뿐이다. 태현에게 백설하는 이제 자신의 명령을 오차 없이 수행할 완벽한 스터브(Stub)이자 방패였다.

"일어나라. 구경꾼들이 모이고 있다."

태현의 건조한 음성에 설하가 즉각 몸을 일으켜 그의 등 뒤에 섰. 그녀는 이미 태현의 완벽한 수하이자 사냥개였다.

* * *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부서진 콘크리트 벽 너머, 어두운 통로 구석에서 숨어 숨을 죽이고 있던 헌터 무리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소스코드 교단의 집행자와 백설하의 폭주를 목격하고 숨어 있던 다른 구역의 생존자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나름 이 인근 섹터에서 이름을 날리던 중견 헌터들도 섞여 있었다.

"백설하잖아? 그 미친 폭주 기사……." "방금 전까지 완전히 괴물이 되어 날뛰고 있었는데, 저 남자가 이마에 손을 얹자마자 멈췄어." "아니, 그것보다 저걸 봐!"

한 헌터가 허공에 띄워진 시스템 전광판을 가리키며 비명을 지르듯 속삭였다.

[서울 제로 구역 - 실시간 헌터 랭킹] [-] 1위: 강태현 (전투력 측정 불가 / 안전 지수: 100%) [▲] 2위: 백설하 (전투력: 42,000 -> 68,500) [▼] 3위: 이진수 (전투력: 31,000)

"전투력이…… 미친, 실시간으로 2만 이상이 뛰었다고?! 저게 말이 돼?!" "게다가 저 남자, 강태현? 랭킹 1위에 등록되었는데 전투력이 '측정 불가'야!"

구경꾼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갔다.

아포칼립스가 시작된 이래, 시스템이 부여한 수치와 랭킹은 절대적인 무력의 척도였다. 그것이 단 몇 초 만에, 아무런 전투도 없이 임의로 재배치된 것이다.

그들이 보기에 태현은 무기를 휘두르지도, 거대한 마법을 캐스팅하지도 않았다. 그저 허공에 손가락을 몇 번 까딱였을 뿐이다.

그 단순한 행위 하나가 최강의 폭주 스킬을 장난감처럼 무력화하고, 랭킹의 판도를 뒤흔들었다.

"괴물이야……." "저 자와는 절대 엮이지 마. 시스템 자체를 주무르고 있잖아……."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헌터들이 침묵 속으로 침잠했다. 태현을 향해 쏟아지는 시선에는 공포와 경외가 뒤섞여 있었다. 그 누구도 감히 그들에게 다가서거나 말을 걸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태현은 그들의 시선을 가볍게 무시했다. 타인들의 평판이나 경악 따위는 그에게 아무런 가치도 없는 데이터 노이즈에 불과했다.

"가자."

태현이 짧게 한마디를 던지며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우우우웅-!

갑자기 대지가 격렬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전의 전투로 인한 진동과는 궤를 달리하는, 차원 자체가 뒤틀리는 듯한 불쾌한 진동이었다.

"앗?!" "무슨 일이야?!"

구경꾼 헌터들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태현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뒤틀린 서울의 마천루들 사이, 연회색 하늘 전체가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더니 거대한 시스템 텍스트가 번쩍이며 나타났다.

[위험: 서울 루트 섹터(Root Sector) 내 메인프레임 소스코드 오염율 92% 돌파!] [시스템 경고: 물리 보안 프로토콜 '방화벽' 강제 가동.] [구역 이벤트: 섹터 포맷(Format) 프로세스 대기 중.]

그리고 그 아래로, 피같이 붉은색의 거대한 숫자들이 실시간으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남은 시간: 23:59:59] [남은 시간: 23:59:58]

"서울 루트 섹터 대규모 붕괴 시간 24시간 제한……."

태현의 건조한 눈동자에 붉은 타이머의 빛이 반사되어 차갑게 빛났다.

세계의 메인프레임이 강제로 초기화되려 하고 있었다. 이대로 물리 보안 프로토콜이 실행된다면, 이 섹터 내의 모든 오브젝트는 소멸한다.

태현의 입술이 차갑게 굳어졌다.

시간이 없었다. 메인프레임을 해킹해 최적화 리소스를 확보하는 것과 동시에, 이 시스템 자체를 디버깅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

태현의 눈앞에 새로운 시스템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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