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00:01]

붉은 레이저 조준선이 지면을 피로 물들였다. 천장이 증발했다. 수십 미터 두께의 콘크리트와 암석층이 빛의 열기에 녹아내렸다.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압도적인 에너지는 단순한 물리적 타격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스템이 강제하는 '좌표 소멸' 명령이었다.

"태현 씨!" 윤지오가 방패를 치켜들며 소리쳤다. 그녀의 푸른 마력 장벽이 붉은 조명에 닿자마자 유리처럼 바스러졌다. 수치상의 위력이 방어 한계치를 아득히 초과했음을 뜻했다.

"가만히 있어."

태현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눈앞에 반투명한 푸른색 개발자 콘솔 창이 떠올랐다. 빛의 낙하 속도는 초속 3,000미터. 충돌까지 남은 시간은 0.4초.

태현의 손가락이 허공을 난사하듯 두드렸다.

`[sys.location.set_attribute("Z-Axis", value=-9999)]` `[sys.terrain.mesh.refract_pixel(coordinate_X, coordinate_Y)]`

포격 범위 지형 파일의 픽셀 좌표를 거꾸로 휘어지게 만드는 리팩토링이었다. 하늘에서 일직선으로 내리꽂히던 정화의 창이 굴절되기 시작했다. 공간의 렌즈가 왜곡되듯, 붉은 빛줄기가 태현의 신체 표면을 1밀리미터 앞두고 바깥쪽으로 둥글게 휘어졌다.

동시에 태현은 맵의 높낮이 고도 데이터를 마이너스 값으로 고정했다.

콰아아아아앙-!

지하 수로가 아니었다. 포격은 태현이 서 있는 지표면을 완벽하게 관통하여, 그보다 수백 미터 아래 깊숙이 묻힌 암석층에 대리 작렬했다. 시스템은 목표 좌표의 '고도(Z)'가 이미 지하 깊은 곳이라고 인식한 상태였다. 엄청난 충격파와 함께 발밑의 땅이 울렸지만, 태현 일행이 서 있는 물리적 좌표에는 단 1의 피해도 기록되지 않았다.

[경보: 대상 'Target_Taehyun'의 생존 확인.] [오류: 물리 타격 지점과 실제 좌표의 불일치 발생(Error Code: 404_TERRAIN).]

"말도 안 돼……." 윤지오가 방패를 내리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지하 수로 전체를 증발시켰어야 할 궤도 포격이 발밑의 보이지 않는 심연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 광경이었다.

태현의 미간이 좁아졌다. 두통이 관자놀이를 찌르고 들어왔다. 뇌세포의 뉴런이 타들어 가는 감각이 척수를 타고 신경망 전체로 번졌다. 코드를 수정할 때마다 치러야 하는 등가교환이었다.

| 구분 | 수치 | 상태 | | :--- | :--- | :--- | | HP | 120 / 1,500 | 위험 | | MP | 45 / 3,000 | 고갈 | | 메모리 누수율 | 74.2% | **경고 (임계점 근접)** | | 남은 수명 | 42일 | 감소 |

"쿨럭." 태현이 마른기침을 뱉자 붉은 피가 바닥에 떨어졌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기계처럼 차가웠다. 감정을 배제한 연산만이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다.

"아직 끝난 게 아니다." 태현의 목소리가 건조하게 울렸다.

지이이잉!

공중에서 백색의 감시용 드론 세 기가 회전하며 내려왔다. 아바타 오스발트의 눈 역할을 하는 정찰 유닛들이었다. 드론의 렌즈가 붉게 빛나며 다시 한번 타겟팅 프로토콜을 가동하려 했다.

[시스템 관리자 '오스발트'가 2차 정화 명령을 대기 중입니다.] [재조준 소요 시간: 15초.]

"설하야. 움직여라." 태현이 명령했다.

백설하가 즉시 검을 뽑아 들고 앞으로 나섰다. 그러나 그녀의 신체 인덱스 주변으로 붉은색 에러 메시지가 어지럽게 명멸하고 있었다. 그녀가 지닌 고유 검술 스킬들이 회색으로 비활성화된 상태였다. 시스템이 그녀의 무기를 존재하지 않는 '버그'로 판단하여 강제로 시스템 접근을 차단하고 있었다.

태현은 이미 이 현상의 원인을 파악하고 있었다. 2화에서부터 그녀의 발목을 잡았던 고유 디버프. 그것은 단순한 저주나 상태 이상이 아니었다.

'검술 스킬 주소값 Null pointer 에러.'

시스템이 설하의 검술 데이터가 저장된 메모리 번지를 찾지 못해 매번 스킬 시전 자체를 취소(Null) 처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태현은 콘솔 창의 디버그 모드를 활성화했다.

"설하. 검의 궤적을 0.3초 동안 고정해." "예, 마스터."

설하가 검을 허공에 일직선으로 겨누었다. 태현의 손가락이 보이지 않는 속도로 움직였다. 메모리 주소 직접 지정 방식을 사용하여, 잃어버린 데이터 세그먼트를 강제로 연결했다.

`[ptr_skill = &Char_Seolha.Skills["Heavenly_Slash"]]` `[if (ptr_skill == NULL) { ptr_skill = 0x7FFF00A1; }]`

찰칵, 하는 기계적인 마찰음이 머릿속에서 들리는 듯했다. 설하의 검날에서 뿜어져 나오던 검은색 노이즈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극도로 정제된 청백색의 마력이 검신을 타고 흘렀다.

[시스템: 캐릭터 '백설하'의 스킬 주소값 복구 완료.] [알림: 고유 스킬 '진(眞)·참천검'의 락(Lock)이 해제됩니다.]

"이건……." 설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몸 안에서 솟구치는 마력의 밀도가 이전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시스템의 제약에 묶여 10%도 발휘하지 못하던 그녀의 진짜 재능이 온전히 개방된 순간이었다.

"시간을 벌어라. 지오와 함께 사방을 차단해." 태현이 명령했다.

"존명."

설하가 대답과 동시에 신형을 날렸다. 그녀의 신체가 푸른색 잔상을 남기며 공중의 드론들을 향해 솟구쳤다. 주소값이 복구된 그녀의 검 끝에서 뿜어지는 참격은 공간을 가르는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서걱!

단 한 번의 휘두름에 첫 번째 드론이 좌우로 정갈하게 갈라졌다. 비산하는 기계 부품 사이로 윤지오가 뛰어들었다. 방패를 지면에 박아 넣으며 그녀의 고유 성벽 스킬을 발동했다.

"성역 전개! 태현 씨, 이 안에서는 안전할 거예요!"

지오의 방패를 기점으로 거대한 황금색 반구형 결계가 생성되었다. 설하와 지오가 양 사방에서 완벽한 연계로 서포팅 시스템 진을 구축한 것이었다. 태현에게 허용된 안전 시간은 단 10초.

태현은 지체하지 않고 바닥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진우가 도망치며 떨어뜨린 성물이 그곳에 있었다. 검붉은 빛을 내뿜는 타리스만. 그 안에는 시스템의 핵심 데이터가 흐르고 있었다.

태현은 타리스만 위에 손을 올렸다. 콘솔 창에 복잡한 데이터 스트림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Scanning... Root_Session_Master_Token_Data [2/3]]`

"과거의 기억을 동기화한다."

태현의 뇌리에 7화에서 심어두었던 복선이 스쳤다. 오스발트의 감시용 드론 내부 소스코드에 심어두었던 숨은 트리거. '비상 리부트 시스템 강제 트리거(Emergency_Reboot_Trigger)'였다. 이것은 한진우가 승천 의식을 치르던 순간 강제 리부트를 걸어 시스템의 우선권을 탈취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태현은 그 트리거의 잔존 소스를 호출했다. 리부트 과정에서 흘러나온 시스템의 최적화 리소스를 끌어모아 자신의 메모리 보관함에 주사했다.

`[sys.memory.store("Master_Override_Bypass_Key", token_data_2)]`

[알림: '마스터 오버라이드 우회키'의 2차 세그먼트 등록이 완료되었습니다.] [진행도: 66.7%]

머릿속을 짓누르던 메모리 누수의 압박이 일시적으로 완화되었다. 시스템 메인프레임의 최적화 리소스를 탈취해 오염된 뇌세포를 강제로 동기화한 덕분이었다. 태현의 호흡이 한결 가벼워졌다.

"성벽이 깨집니다!" 지오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하늘에서 2차로 조준된 궤도 레이저가 지오의 결계를 타격하고 있었다. 황금빛 결계에 균열이 가며 미세한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설하가 공중에서 마지막 드론을 베어 넘기며 태현의 옆으로 착지했다.

"마스터, 준비를 마쳤습니다."

"가자." 태현이 냉정하게 말했다.

그는 이미 이곳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데이터를 추출했다. 한진우의 성물에서 얻은 토큰 조각과 설하의 스킬 복구, 그리고 오스발트의 추적을 흘려보낸 것까지. 모든 것이 태현의 설계대로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다.

셋은 무너져 내리는 지하 수로의 통로를 달려 탈출구로 향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단 하나. 서울 제로 구역의 가장 깊은 곳이자, 시스템 메인프레임으로 향하는 정문. '루트 섹터(Root Sector)'의 최종 관문이었다.

수 분을 달린 끝에, 그들의 눈앞에 거대한 강철 게이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좌우로 수십 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게이트는 고대 유적의 문처럼 웅장하게 서 있었다. 이 문만 넘어서면 서울 루트 섹터의 핵심부로 진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위이이이잉-!

게이트 표면에 부착된 보안 모니터들이 일제히 붉은색으로 점멸하기 시작했다. 단순한 경고등이 아니었다. 문 전체를 뒤덮고 있는 것은 기괴할 정도로 붉고 끈적해 보이는 데이터 노이즈였다.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의 핏줄처럼, 붉은색 파괴 버퍼(Destruction Buffer)가 게이트의 틈새를 따라 급속도로 침식해 들어갔다.

[경고: 시스템 관리자 '오스발트'가 해당 구역의 물리 보안 등급을 '절대 거부(Absolute Denial)'로 격상했습니다.] [알림: 게이트 주변 반경 50m 이내의 모든 오브젝트에 즉사 프로토콜 'Instant_Death_00'이 상시 적용됩니다.] [접근 시도 시 즉시 포맷(Format) 처리됩니다.]

게이트 앞의 바닥에 떨어진 돌멩이 하나가 붉은 장막에 닿자마자, 소리도 없이 미세한 디지털 가루가 되어 증발했다. 존재 자체가 세계관의 인덱스에서 완전히 지워진 것이었다.

"이건…… 통과할 수 없어요." 윤지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스킬이나 방패로 막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에요. 닿는 순간 영혼까지 지워질 겁니다."

설하 역시 검을 쥔 손에 힘을 주며 태현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태현이라면 이 불합리한 규칙마저 깨부술 수 있을 것이라는 맹목적인 신뢰가 담겨 있었다.

태현은 게이트를 가득 채운 붉은색 즉사 버퍼를 가만히 응시했다. 오스발트가 마침내 자신을 배제하기 위해 시스템의 근간 규칙마저 뒤흔들기 시작한 것이다.

"통과 시 즉사라."

태현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그의 눈앞에서 다시 한번 푸른색 콘솔 창이 열리며, 게이트의 소스코드가 실시간으로 해독되기 시작했다.

붉은 장막은 거세게 요동치며 그들의 접근을 거부하고 있었다. 한 걸음만 더 내딛는 순간, 모든 데이터는 소멸한다. 하지만 태현의 손가락은 이미 콘솔 창의 가장 깊숙한 시스템 코어 영역을 조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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