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빛이 지하 수로의 사방을 질척하게 물들였다. 거대한 강철 게이트는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져 있었다. 그 표면을 뒤덮은 것은 붉고 끈적한 데이터 노이즈였다. 오스발트가 격상시킨 물리 보안 등급, ‘절대 거부(Absolute Denial)’. 게이트 주변 반경 50미터는 닿는 순간 존재 자체가 소멸하는 즉사 영역이었다.
"이건…… 통과할 수 없어요."
윤지오가 방패를 쥔 손을 잘게 떨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붉은 장막은 단순한 마법 장벽이 아니었다. 그것은 세계의 인덱스에서 대상을 지워버리는 가차 없는 포맷 명령어였다. 바닥의 파편 하나가 장막에 닿자마자 소리도 없이 미세한 흰색 분진으로 화해 사라졌다. 물리적인 방어력이나 체력 수치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백설하는 검자루를 꽉 쥔 채 태현의 측면을 지켰다. 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저 태현이 내릴 명령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통과 시 즉사라."
태현이 낮게 읊조렸다. 그의 눈앞에 푸른색 콘솔 창이 떠올랐다. 빛바랜 시스템의 이면, 레거시 코드가 쉴 새 없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오스발트가 구축한 즉사 프로토콜 `Instant_Death_00`. 그것은 시스템의 강제 예외 처리 명령어를 극대화한 결과물이었다. 일반적인 플레이어라면 접근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영역. 하지만 개발자의 눈에는 그저 조잡하게 덧칠해진 보안 스크립트에 불과했다.
태현이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 끝이 보이지 않는 키보드를 두드리듯 빠르게 움직였다.
타타타탁!
``` [System_Security_Policy] - Target: Zone_Sector_00_Gate - Protocol: Instant_Death_00 (Active) - Access_Level: Admin_Only (Oswald) ```
"아무리 단단한 성벽이라도 결국은 메모리 위에 쓰인 텍스트일 뿐이다."
태현의 건조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는 즉시 메모리 주소값을 직접 타격하기 시작했다. 오스발트가 걸어 잠근 강제 포맷의 타겟팅 범위를 역으로 해킹하는 작업이었다. 수정할 주소는 명확했다. `Instant_Death_00`이 감지하는 '오브젝트'의 범위를 재정의한다.
``` [Modify_Source_Code] - Change: Object_Detection_Filter - From: All_Entities - To: Non_Registered_Entities_Only ```
태현은 자신과 백설하, 윤지오의 고유 시스템 인덱스를 임시 안전 리스트에 등록했다. 그들의 발밑으로 미세하게 빛나는 푸른색 그리드 라인이 그어졌다. `Safe_Space_Index`가 그들의 신체를 감싸 안았다.
"지금부터 내 발자국만 밟고 따라와."
태현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윤지오가 경악 어린 숨을 들이켰다. 태현의 구두 굽이 붉은 즉사 버퍼의 경계선을 밟았다.
치이이익!
스파크가 튀었지만, 소멸의 빛은 태현의 몸을 비껴갔다. 마치 보이지 않는 투명한 막이 붉은 에너지를 양옆으로 갈라놓는 듯했다. 태현이 한 주소, 한 주소 코드를 직접 덮어쓰며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붉게 물들었던 지옥의 통로가 고요한 청색의 안전지대로 변모해 갔다.
"어떻게 이런 짓이……."
윤지오는 침을 삼키며 태현의 뒤를 따랐다. 그녀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시스템이 내린 절대적인 사형 선고를, 이 남자는 마치 오타를 교정하듯 가볍게 뜯어고치고 있었다.
하지만 대가는 즉각적이었다. 보안 등급이 높은 코드를 실시간으로 리팩토링할수록, 태현의 머릿속을 찌르는 통증이 강해졌다. 뉴런이 타들어 가는 듯한 지독한 이명. 뇌의 메모리 누수가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시야가 붉게 번지기 시작했다. 다리가 무거워지고, 손가락 끝의 감각이 무뎌졌다.
``` [경고: 시스템 리팩토링으로 인한 메모리 누수(Memory Leak) 발생!] [경고: 뉴런 파괴율 급증. 생명력 보존 수치가 한계치에 도달합니다.] ================================== 강태현 (Vital_Status) - HP: 10 / 100 (Critical) - 정신 오염도: 82% ================================== ```
코끝에서 붉은 피가 한 방울 떨어져 청색 그리드 위에 번졌다. 무릎이 꺾이려는 찰나였다. 태현의 시야가 암전되기 직전, 강한 손길이 그의 어깨를 부축했다.
백설하였다.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에 미세한 균열이 가 있었다.
"대장."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시스템 권한을 개방했다. 과거 태현이 그녀의 망가진 스킬 루프를 복구해 주었을 때 생성되었던 깊은 데이터 연결 통로. 설하는 그 통로를 통해 자신의 생명력 데이터를 태현에게 강제로 밀어 넣기 시작했다.
"제 활력을 가져가십시오. 저는 당신의 도구입니다."
``` [알림: 백설하(Object_ID: Baek_Seol_ha)가 활력 동기화를 요청합니다.] [알림: 생체 데이터 전송을 개시합니다.] ================================== 강태현 (Vital_Status) - HP: 10 -> 45 / 100 (Recovery) ================================== ```
차가운 전류가 태현의 척추를 타고 흘러들었다. 흐릿했던 시야가 순식간에 선명해졌다. 수치가 복구되자, 머릿속을 짓누르던 통증도 한풀 꺾였다.
태현은 설하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다소 창백해져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단단했다. 그녀의 검 손잡이 부분에서 기괴한 노이즈가 발생하는 것이 태현의 눈에 포착되었다. 그것은 2화에서부터 그녀의 검술을 옭아매고 있던 고질적인 디버프의 근원이었다.
'검술 스킬 주소값 Null pointer 에러.'
시스템이 그녀의 무기와 스킬을 비정상적인 버그로 인식해 지속적으로 차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태현은 콘솔 창의 남은 리소스를 확인했다. 설하가 제공해 준 활력 덕분에 연산력에 여유가 생겼다.
"백설하."
"예, 대장."
"네 검이 왜 자꾸 겉돌았는지 이제 확실히 알겠군. 시스템이 네 무기의 주소값을 잃어버렸던 거다. 지금 바로잡는다."
태현의 손가락이 콘솔을 강하게 때렸다. 설하의 검술 스킬 주소를 실시간으로 추적해, 그녀가 쥐고 있는 검의 고유 데이터 ID와 강제로 바인딩했다.
``` [System_Debugger: Error_Fix] - Target: Baek_Seol_ha -> Skill: Void_Slash - Error: Null_Pointer_Exception (Resolved) - Re-binding Weapon_ID: 0x7FFF90A2 ```
스릉!
설하의 장검에서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른 검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녀를 억누르던 무거운 디버프가 완전히 소멸한 순간이었다. 그녀의 전투력 수치가 폭발적으로 치솟았다.
``` [알림: 백설하의 숨겨진 재능 '무결한 검성'이 활성화됩니다.] [전투력 수치 변동: 120 -> 480] ```
설하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검 끝에서 흐르는 기운은 이전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녀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자신을 옭아매던 사슬을 태현이 완전히 끊어준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인사는 살아남아서 해라."
태현은 차갑게 대꾸하며 마침내 게이트의 중앙 통제 장치에 손을 얹었다. 붉은 즉사 장막은 이미 푸른색 안전 코드로 완벽하게 덮어씌워진 상태였다. 오스발트가 구축한 절대 거부의 영역은, 이제 그들의 통과를 환영하는 웰컴 로드로 리팩토링되어 있었다.
쿠구구구궁!
거대한 강철 게이트가 좌우로 갈라지며 열렸다. 그 너머로 마침내 서울 루트 섹터의 심장부, 시스템 메인프레임의 전경이 드러났다.
공중에 거꾸로 매달린 거대한 반도체 칩 형태의 건축물들. 그리고 그 중심에서 푸른빛을 발하며 회전하고 있는 메인프레임 코어. 하지만 그 아름다운 광경을 가로막고 서 있는 자들이 있었다.
게이트 뒤편, 차가운 금속 단상 위에 두 명의 인형이 서 있었다.
한 명은 단정한 정장 차림에 기괴할 정도로 정중한 미소를 짓고 있는 사내. 시스템 관리자의 아바타, 오스발트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피와 기계 부품으로 뒤범벅된 사제복을 입고 황홀경에 빠진 듯 눈을 뒤집고 있는 사내. 소스코드 교단의 교주, 한진우였다.
"드디어 오셨군요, 무단 침입자 강태현 씨."
오스발트가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의 목소리는 기계음처럼 차갑고 일관적이었다.
"시스템의 정규 규격을 어지럽히는 에러 코드가 이토록 깊은 곳까지 도달하다니. 참으로 흥미로운 버그입니다만, 여기까지입니다. 당신의 포맷은 이미 결정되어 있습니다."
"아아……!"
한진우가 양팔을 벌리며 광소했다. 그의 몸 주변으로 기괴한 영혼의 회로망이 꿈틀거렸다. "보아라! 위대한 시스템의 육신이 완성되는 순간이다! 네놈의 미천한 두뇌 코드 역시 이 성스러운 제단의 거름이 될지어다!"
두 강대한 적이 연합하여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발밑으로 가공할 만한 압박감이 밀려왔다. 윤지오가 방패를 고쳐 잡으며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태현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스발트의 머리 위에 둥둥 떠 있는 작은 감시용 드론에 꽂혔다. 7화에서부터 오스발트가 자신들을 감시하기 위해 보냈던 그 드론. 태현은 이미 그 드론의 펌웨어 내부에 치명적인 트랩을 심어둔 상태였다.
'비상 리부트 시스템 강제 트리거.'
태현이 주머니 속에서 작은 송신기를 꺼내 가볍게 눌렀다.
딸깍.
``` [System_Hack: Send_Signal] - Target: Oswald_Surveillance_Drone_v3 - Execute: Force_Emergency_Reboot ```
삐이이이익-!
공중에 떠 있던 드론이 갑자기 거친 노이즈를 내뿜으며 격렬하게 진동했다. 그리고 드론에서 방출된 고주파 오버로드 신호가 오스발트의 본체 시스템 회로로 역류해 들어갔다.
"……?! 이, 이것은……."
오스발트의 정중한 얼굴이 단숨에 일그러졌다. 그의 몸을 감싸고 있던 절대 물리 면역 배리어가 정전이 일어난 것처럼 격렬하게 깜빡이기 시작했다. 강제 리부트 프로토콜이 그의 제어 권한을 일시적으로 동결시킨 것이었다.
"지금이다. 설하, 지오. 쳐라."
태현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백설하의 신형이 광풍처럼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디버프가 풀린 그녀의 검이 오스발트의 일그러진 장벽을 향해 무결한 궤적을 그리며 쇄도했다.
그러나 그 순간, 한진우가 기괴한 웃음을 터뜨리며 오스발트의 어깨를 붙잡았다.
"키히히히! 아직이다! 승천의 의식은 멈추지 않는다!"
한진우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 소스코드 사슬이 오스발트의 기계 몸체와 엉키기 시작했다. 두 존재의 데이터가 하나로 융합되며, 메인프레임의 영역 전체가 미친 듯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연합이 아니었다. 서로의 잔여 시스템 명령어를 통째로 합쳐, 규격을 초월한 단 하나의 거대한 괴물로 변모하려는 시도였다.
쿠르릉!
게이트 너머의 공간이 무너지며, 거대한 그림자가 그들 앞에 드리워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