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쿠구구구궁!

지하 수로의 콘크리트 바닥을 뚫고 거대한 석조 기둥들이 솟아올랐다. 사방을 에워싼 기둥은 8개. 기둥 표면에 새겨진 보라색 룬 문자들이 기괴한 광증처럼 점멸했다.

"성스러운 복음의 소리를 들으라."

한진우가 양팔을 벌렸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뿜어져 나온 보라색 연기가 그물을 그리며 하늘을 덮었다. 퇴로가 차단되었다. 태현 일행이 서 있는 좌표계 전체가 외부 세계와 격리되는 폐쇄 세션으로 전환되었다.

[알림: 독점적 시스템 영역 '영혼 제단(Soul Altar)'이 활성화되었습니다.] [경고: 외부 네트워크와의 연결이 차단됩니다.] [상태: 격리 및 소스코드 추출 대기 중.]

"더러운 해커 놈들." 한진우의 눈동자가 황홀경으로 풀려 있었다. "위대한 시스템의 설정을 무단으로 뜯어고친 대가는 오직 하나뿐이다. 너희의 생체 코드를 분해해 메인프레임의 거름으로 바치는 것."

교단의 성직자들이 제단 주변으로 늘어섰다. 그들이 일제히 기괴한 주문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단순한 음성이 아니었다. 고주파의 시스템 노이즈였다. 고막을 찢는 듯한 소음이 뇌리를 파고들었다.

"태현 씨!"

윤지오가 방패를 치켜들며 소리쳤다. 그녀의 푸른 성벽 스킬이 전방에 전개되었지만, 보라색 연기는 방패의 물리적 판정을 비웃듯 그대로 통과했다. 방패 표면에 닿은 연기가 지이익 소리를 내며 시스템 방어막을 부식시켰다.

"이건 물리 공격이 아니야." 태현이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데이터 추출 프로토콜이다. 닿는 순간 캐릭터 정보가 파괴된다."

태현은 허공에 손가락을 튕겼다. 개발자 콘솔 창이 그의 시야에만 보이도록 작게 활성화되었다.

[Console v1.04 - Developer Mode Active] [Target: Sector_Sub_09_Underground] [Scanning Network Traffic...]

지하 수로 사방에 떠 있는 오스발트의 감시용 드론들이 보였다. 붉은 렌즈를 번뜩이며 태현을 실시간으로 스캔하고 있었다. 드론들의 전파 흐름이 한진우의 제단 제어망과 병렬로 연결되어 있었다.

'역추적 경로가 완벽하게 겹친다.'

태현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한진우는 태현을 잡기 위해 오스발트의 감시망을 역추적해 들어왔다. 하지만 그것은 태현에게 가장 확실한 백도어(Backdoor)를 제공한 꼴이었다.

"설하 씨." 태현이 낮게 읊조렸다. "오른쪽 세 번째 기둥을 타격해."

"알겠습니다."

백설하가 대답과 동시에 지면을 박찼다. 그녀의 신형 검이 허공을 가르며 무서운 속도로 쇄도했다. 하지만 검날이 보라색 기둥에 닿기 직전, 궤적이 엉뚱한 방향으로 비틀어졌다. 스르륵. 검이 기둥을 통과해 허공을 갈랐다. 동시에 설하의 머리 위에 붉은색 경고창이 떠올랐다.

[Warning: Skill_Execution_Failed] [Error: Null Pointer Exception (Target Object Address is Null)]

"어……?" 설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의 검술 스킬이 완전히 무효화되고 있었다. 시스템이 그녀의 무기를 존재하지 않는 데이터로 인식하는 디버프였다. 2화에서부터 그녀의 영혼을 갉아먹던 고질적인 시스템 오류. 검술 스킬의 메모리 주소값이 통째로 유실된 결과였다.

"바보 같은 년." 한진우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그 검은 이미 시스템이 버그로 규정한 쓰레기다. 감히 신의 도구에 상처를 입힐 수 있을 것 같으냐?"

성직자들의 주문이 빨라졌다. 보라색 사슬이 설하의 발목을 휘감기 위해 뱀처럼 꿈틀거리며 다가갔다.

"그대로 있어." 태현이 콘솔을 두드렸다. 그의 손가락이 잔상을 남기며 허공의 가상 키보드를 쳤다. 뇌 세포의 뉴런이 타들어 가는 찌릿한 통증이 뒤통수를 때렸다. 수명이 소모되는 감각. 하지만 지금은 최적화 리소스가 가득 차 있었다. 이 정도 통손실은 오차 범위 내였다.

`[Script: Debugging_Target_Active]` `[Pointer_Rerouting: Seolha.Weapon.Active_Instance -> 0x7FFF8A0C]` `[Status: Address_Binding_Complete]`

태현이 엔터 키를 내리쳤다.

"지금이다. 베어라."

그 순간, 설하가 쥐고 있던 검이 터질 듯한 푸른 광폭을 뿜어냈다. 존재하지 않던 검의 주소값이 시스템 마스터 프레임에 강제로 등재되었다. 더 이상 버그가 아니었다. 세계의 핵심 물리 엔진이 그녀의 검을 '절대적 실체'로 판정하기 시작했다.

스바아아앙!

설하의 검이 가볍게 휘둘러졌다. 그저 단순한 횡베기였음에도, 보라색 제단 기둥 하나가 마치 두부처럼 깔끔하게 잘려 나갔다. 기둥 단면에서 보라색 스파크가 사방으로 튀었다.

"뭐, 뭐라고?!" 한진우의 황홀하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스킬 주소값이 복구되었다고? 그럴 리가 없다! 시스템의 낙인이 어떻게……!"

"낙인이 아니라 단순한 포인터 누락이었다." 태현이 차갑게 읊조렸다. "코드 한 줄이면 고치는 사소한 에러지."

태현은 멈추지 않았다. 진짜 작업은 지금부터였다. 사방을 포위한 채 붉은 빛을 뿜어내던 오스발트의 감시용 드론들. 그 드론들의 펌웨어 깊숙한 곳에는 공장 출하 시 탑재되는 마스터 명령어가 심어져 있었다. 7화에서 태현이 분석해 백업해 두었던 핵심 코드였다.

[비상 리부트 시스템 강제 트리거 (Emergency Reboot System Force Trigger)]

시스템 관리자 오스발트조차 제어할 수 없는, 하드웨어 레벨의 강제 재부팅 명령. 태현은 콘솔 창에 미리 준비해 둔 스크립트를 붙여넣었다.

`[Infiltrating: Drone_Network_Bridge]` `[Payload: Injecting 'Force_Reboot_Signal' to Soul_Altar_Core]` `[Execution: Trigger_On_Synchronization_Max]`

"너희의 신앙 리플레이 회로는 이 드론들의 네트워크 대역폭을 공유하고 있지." 태현이 한진우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 말은, 드론이 리부트되면 너희 제단도 함께 초기화된다는 뜻이다."

"미친 소리 하지 마라! 이건 신성한 승천의 의식……!"

웅-!

갑자기 사방의 드론들이 일제히 작동을 멈추고 제자리에 정지했다. 붉은 카메라 렌즈가 꺼지고, 차가운 녹색 보정 광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System Message: Emergency Reboot Signal Detected.] [Executing System Reset in Sector_Sub_09...]

"아, 아아악?!" 한진우가 머리를 감싸 쥐며 단말마를 내질렀다. 제단의 중심부에서 솟구치던 보라색 마력이 갈 곳을 잃고 역류하기 시작했다. 신앙 리플레이 회로가 강제로 셧다운되면서, 그들이 모아두었던 방대한 영혼 데이터가 시스템의 원초적 에너지로 환원되고 있었다.

태현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콘솔의 리소스 흡수 포트를 활성화했다.

`[Active: Resource_Harvest_Mode]` `[Destination: Taehyun.Neurological_Memory]`

퍼어어어엉!

제단 기둥들이 차례로 폭발했다. 보라색 마력이 정화된 백색의 순수 에너지로 변환되어 태현의 몸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 항목 | 수치 / 내용 | | :--- | :--- | | **탈취한 최적화 리소스** | +1,500 (초과분 임시 저장) | | **뇌 세포 복구율** | 14.8% -> 19.5% (급격히 상승 중) | | **시스템 로그 분석 권한** | Level 3 -> Level 4 (상승) |

머릿속을 지배하던 지독한 이명이 완전히 사라졌다. 눈앞의 시야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선명해졌다. 세계의 물리 법칙을 구성하는 소스코드의 입자들이 하나하나 눈에 밟힐 듯이 보였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였다. 제단이 붕괴하면서 발생한 과부하 에너지의 파동이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지하 수로의 천장이 무너지며 거대한 콘크리트 잔해들이 쏟아졌다.

"위험해요!" 지오가 소리치며 방패를 세웠지만, 물리적 충격파의 궤적이 그녀의 사각지대를 향하고 있었다.

태현의 뇌가 빠르게 계산을 마쳤다. 백설하와 윤지오는 이 세계를 최적화하기 위한 중요한 '도구'들이자 객체들이었다. 여기서 손실되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지극히 계산적인 판단이었다. 하지만 그의 몸이 움직인 속도는 계산보다 반 박자 빨랐다.

태현은 본능적으로 몸을 날려 설하와 지오의 어깨를 붙잡고 자신 쪽으로 잡아당겼다. 쿵! 그가 두 사람을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안음과 동시에, 거대한 낙석이 그들이 서 있던 자리를 덮쳤다. 먼지 구덩이 속에서 태현의 단단한 등이 충격파를 고스란히 받아냈다.

"쿨럭……!" 태현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등 뒤의 옷이 찢어지고 붉은 대미지 표기 수치가 허공에 떴다.

[-120 HP]

"태, 태현 씨?!" 설하의 눈동자가 크게 확대되었다. 그녀는 태현이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무방비하게 등 뒤를 내주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언제나 차갑고 기계적인 효율만을 따지던 남자가 보여준 이질적인 행동. 지오 역시 놀란 표정으로 태현의 소매를 움켜쥐었다.

"괜찮으십니까? 왜 이런 무모한……."

"효율적인 자산 관리다." 태현이 먼지를 털어내며 냉정하게 말했다. "너희가 여기서 사망하면 내 연산 카드가 줄어든다. 비 효율을 차단했을 뿐이다."

그의 말투는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두 사람의 눈빛에 어린 온기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설하는 조용히 검자루를 고쳐 쥐며 태현의 옆에 한 걸음 더 밀착했다. 유대의 고리가 한층 더 견고해진 순간이었다.

한편, 제단의 중심부에서는 처참한 비명이 들려왔다.

"이럴 수는 없다! 내 위대한 승천이……!"

한진우가 피를 토하며 바닥을 기고 있었다. 강제 리부트의 직격타를 맞은 그의 육신은 절반쯤 붕괴하여 내부의 붉은 데이터 노이즈를 흘리고 있었다. 그의 머리 위에 표시된 HP 바가 붉은색 한계선까지 내려앉았다.

태현이 그에게 다가갔다. 지독하게 가라앉은 구두 굽 소리가 지하 수로에 울렸다.

"너희 소스코드 교단이 숭배하는 건 신이 아니다." 태현이 한진우의 앞에 멈춰 섰다. "그저 누군가 짜놓고 방치한 쓰레기 같은 레거시 코드일 뿐이지."

"닥쳐라, 이 오만한 버그 세력 놈……!"

한진우가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려 했다. 하지만 태현의 발이 한진우의 손목을 가차 없이 짓밟았다. 뿌드득 소리와 함께 한진우의 손가락이 기괴한 각도로 꺾였다. 한진우가 비명을 지르며 떨어뜨린 것은 빛바랜 양가죽 종이 형태의 아이템이었다.

[아이템: 루트 세션 마스터 권한 토큰 분할 데이터 (1/3)]

태현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것을 주워 자신의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오스발트의 방어막을 무력화할 수 있는 핵심 치트키의 일부였다.

"이건 내가 유용하게 쓰지."

"으, 으으…… 두고 보자. 아바타가…… 위대한 추적자께서 곧 너희의 코드를 완전히 포맷할 것이다……!"

한진우는 품속에 소지하고 있던 비상 포탈 주문서를 찢었다. 그의 신체가 보라색 입자로 깨어지며 공간 너머로 강제 전송되었다. 도망친 것이었다.

"쫓을까요?" 설하가 검을 겨누며 물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다. 수식 파일의 핵심을 빼앗았으니 저놈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태현이 고개를 저었다.

그때였다.

지이이이이잉-!

지하 수로의 천장이 갑자기 푸른색의 거대한 빛줄기로 뒤덮였다. 그것은 단순한 조명이 아니었다. 하늘 높은 곳, 궤도 상에 존재하는 물리 보안 시스템이 작동하는 소리였다.

[경고: 시스템 관리자 '오스발트'가 정규 사양 권한을 복원했습니다.] [좌표 동기화 완료: Target_Taehyun] [위성 궤도 정밀 타격 프로토콜 '정화의 창(Spear of Purification)' 기동.]

지하 수로의 천장이 거대한 홀로그램처럼 반투명하게 투과되더니, 저 먼 우주 하늘에서부터 내려오는 거대한 붉은색 레이저 조준선이 태현이 서 있는 발밑 좌표계를 정확히 겨냥했다.

조준선이 회전하며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00:03] [00:02]

피할 곳은 없었다. 범위는 이 지하 구역 전체를 증발시키고도 남을 규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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