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연우 씨. 이대로 더 흡수하면……."

엘리시아의 손가락 끝이 가슴팍에 돋아난 검은 비늘을 가만히 쓸었다. 차가운 지문이 닿은 자리가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렸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검붉은 마력이 폐부를 사정없이 찔렀다.

"당신은 일주일 안에 자아가 완전히 붕괴해서, 이성이 없는 괴물이 될 거예요."

슬픔이 얇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연우는 그녀의 손가락을 쳐내지 않았다. 턱뼈가 어긋날 정도로 이를 악물었을 뿐이다. 쇄골 아래에서 시작된 검은 비늘은 기괴한 기하학적 문양을 그리며 목덜미를 경유해 턱밑까지 기어오르고 있었다.

"일주일이면 충분하다."

연우의 쇳소리 섞인 목소리가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흩어졌다.

빗방울이 가죽 재킷을 두드리는 소리가 소란스러웠다. 아크델리 외곽의 버려진 방직공장 내부로 들어서자 비로소 소음이 한풀 꺾였다. 먼지 냄새와 눅눅한 습기가 엉킨 공기가 코끝을 찔렀다. 사방은 어둠에 잠겨 있었고, 깨진 창문 틈새로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만이 바닥의 고인 물웅덩이를 비추고 있었다.

쿵.

연우는 버티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바닥의 시멘트 가루가 사방으로 튀었다.

가슴팍에서 시작된 마수화의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다. 혈관이 바늘로 찌르는 듯 요동쳤고, 뼈마디가 제멋대로 늘어났다 줄어들기를 반복했다. 붉은 핏줄이 눈가에 돋아나 시야를 온통 피색으로 물들였다. 뇌리에는 정체 모를 성좌들의 속삭임이 이명처럼 휘몰아쳤다.

- 삼켜라. 찢어라. 그 고기를 씹어 삼켜라.

회귀 전, 전장에서 숱하게 들었던 괴물들의 울음소리였다. 성좌 '갈증의 사냥개'의 신성을 찬탈한 대가는 육체와 정신을 동시에 붕괴시키는 파멸적인 오염이었다. 이성을 잃는 순간, 연우는 그가 그토록 증오하던 성좌들의 부하 마수들과 다를 바 없는 존재가 될 터였다.

"비켜라."

연우가 거친 숨을 내뱉으며 엘리시아를 밀쳐내려 했다. 송곳니가 비정상적으로 길어지며 윗입술을 뚫고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지금 당장이라도 눈앞의 살아 있는 생명체를 찢어발기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피비린내를 갈망하는 마수의 본능이 이성의 끈을 갉아먹고 있었다.

그러나 엘리시아는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연우의 단단하고 거친 뺨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그녀의 체온이 연우의 타오르는 피부에 닿았다. 극단적인 온도 차에 연우의 신체가 미세하게 떨렸다.

"제 눈을 보세요, 연우 씨. 흔들리면 안 돼요."

엘리시아가 조심스럽게 품 안에서 흑색 구체를 꺼냈다. 손바닥 크기의 구체는 빛조차 삼켜버릴 듯 어두웠다. 구체의 표면에는 세로로 길게 뻗은 미세한 균열들이 가득했다. 지난번 수송차 습정 당시 가해진 충격으로 생긴 상처들이었다. 구체의 갈라진 틈새로 푸르스름한 정화의 기운이 안개처럼 흘러나와 연우의 얼굴을 감쌌다.

"이 구체는 성좌들의 격을 억누르는 금단의 유물이에요. 당신 안에서 날뛰는 신성의 오염을 이 안으로 유도해야 해요. 하지만 제어하지 못하면 당신의 영혼까지 통째로 삼켜질 거예요."

그녀의 차가운 손가락이 연우의 손을 덮으며 구체를 거칠게 쥐여 주었다. 구체의 차가운 감촉이 손바닥을 타고 뇌척수액까지 전달되는 기분이었다.

"제가 길을 열 테니, 당신은 내면에 도사린 성좌의 의지를 찢으세요. 절대 굴복해서는 안 돼요."

엘리시아가 나직한 목소리로 고대의 주술을 외우기 시작했다. 혀끝에서 맴도는 기이한 발음들이 공기를 진동시켰다. 그녀의 입술이 움직일 때마다 흑색 구체의 균열 속에서 푸른 사슬 모양의 마력 궤적이 뿜어져 나와 연우의 가슴팍을 파고들었다.

"들이쉬는 숨에 오염을 모으고, 내뱉는 숨에 신성의 잔재를 버리세요. 심장의 신핵을 강하게 압박해요."

연우는 눈을 감았다.

영혼의 심처에서 거대한 검은 발톱이 돋아났다. 사냥개의 발톱. 성좌의 목을 베기 위해 각성한 유일무이한 권능이 제 주인의 영혼을 향해 역으로 발동되었다. 연우는 제 안에서 날뛰는 마수의 형상을 한 신성 덩어리를 향해 무형의 발톱을 내리꽂았다.

콰직.

영혼이 직접 찢어지는 듯한 극심한 뇌진탕이 일었다. 연우의 입에서 핏덩이가 섞인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뼈를 깎는 고통 속에서도 이성의 끈을 악물고 놓지 않았다. 발톱으로 찢어발긴 신성의 정수를 강제로 제 영혼의 그릇에 우겨넣었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시커먼 오염의 찌꺼기들을 엘리시아가 열어둔 통로를 통해 흑색 구체로 밀어냈다.

쉬이이익.

검은 연기 같은 오염 물질이 연우의 가슴에서 빠져나와 흑색 구체의 균열 속으로 사정없이 빨려 들어갔다. 구체는 연기를 삼킬 때마다 붉게 달아오르며 미세하게 진동했다. 징, 하는 이명 같은 진동음이 폐공장의 천장을 흔들었다.

연우의 쇄골 아래를 덮고 있던 검은 비늘이 서서히 피부 밑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목덜미를 덮었던 마수의 단단한 가죽도 점차 옅어지며 원래의 살결로 돌아왔다. 갈라졌던 붉은 눈동자가 서서히 짙은 검은색을 되찾았다.

"하아…… 하아……."

연우는 바닥에 손을 짚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가죽 재킷 안쪽은 이미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러나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투명하고 명료했다. 제멋대로 날뛰며 영혼을 파먹던 신성이 그의 의지 아래 완벽하게 굴복하여 정돈된 상태였다.

기어이 독종 같은 정신력으로 신성의 제어권을 쟁취해 낸 것이다.

연우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엘리시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창백해진 얼굴로 흑색 구체를 품에 안고 있었다. 구체의 표면에 나 있던 미세한 균열들은 이전보다 조금 더 넓어져 있었고, 그 사이로 붉은 빛이 희미하게 명멸하고 있었다.

"살아남았군."

연우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건조하고 낮았다.

"당신이 괴물보다 더 독한 존재니까요."

엘리시아가 제 입가에 고인 핏자국을 손등으로 닦아내며 서늘하게 미소 지었다. 영혼이 부서진 자들만이 지을 수 있는, 감정이 거세된 미소였다.

"말했을 텐데. 난 널 미끼로 쓸 거다. 언제든 목숨이 날아갈 수 있는 구렁텅이로 널 던져버릴지도 모른다."

연우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가죽 재킷을 추슬렀다.

"알고 있어요. 당신의 사냥개가 되어 성좌들의 목을 벨 수만 있다면, 내 뼈가 부서져 그들의 징검다리가 되어도 상관없어요. 우린 서로를 파먹는 망령들이니까."

엘리시아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두려움도 섞여 있지 않았다.

동정이나 연민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관계. 오직 복수라는 단 하나의 목적을 향해 달리는 두 마리 사냥개의 차가운 결속이었다. 연우는 그 기괴한 신뢰감이 마음에 들었다. 적어도 배신으로 가득했던 회귀 전의 동료들보다는 이편이 훨씬 명료하고 깔끔했다.

연우는 품 안에서 소형 홀로그램 단말기를 꺼내 바닥에 던졌다.

스륵, 하는 소리와 함께 단말기에서 푸른빛이 투사되며 공중에 가상의 화면들이 떠올랐다. 보안 통신망이 연결되자, 화면 한가운데에 서하진의 단정한 얼굴이 나타났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 한연우 씨. 살아 계셨군요.

"쓸데없는 걱정은 접어두지. 골든 크라운의 동향은 어떤가."

연우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건조하게 물었다.

- 최태건은 엘리시아 양이 탈취당한 것에 극도로 분노하고 있습니다. 하부 조직원들을 동원해 아크델리 외곽 전역을 이 잡듯 뒤지고 있어요. 그리고…… 지난번 제가 전해드린 서류는 검토해 보셨습니까?

서하진이 화면 한쪽에 행정 서류 양식을 띄웠다. 3화에서 그녀가 목숨을 걸고 입수했던, 최태건 길드의 고위직 탈세 루트가 상세히 적힌 합법적 우회 양식의 서류 초안이었다.

연우는 화면에 표시된 텍스트를 빠르게 훑어내렸다.

"성좌 가호자 특별 면책 조항 제12조. 성좌의 대리인이 행하는 신성한 군사적 예언 및 가치 창출 행위는 비과세 대상으로 분류한다."

- 그렇습니다. 최태건은 이 조항을 교묘하게 악용해 매달 수백억 대의 자금을 세탁하고 있어요. 성좌 '황금의 군주'가 부여한 권능으로 던전을 공략하고 자원을 획득하는 행위를 모두 '국가 안보를 위한 비과세 신성 사업'으로 포장한 겁니다. 실상은 아크델리 시민들의 영혼을 바치고 받은 대가인데도 말이죠.

서하진의 목소리에 분노가 서렸다. 법과 조세 정의를 믿는 그녀에게 있어, 성좌의 권위를 빌려 법망을 유린하는 행위는 묵과할 수 없는 죄악이었다.

"법이 성좌의 권위를 인정해 주니 가능한 짓이지."

연우가 픽 웃었다.

"하지만 이 조항에는 치명적인 허점이 하나 존재합니다."

서하진이 화면을 넘기며 붉은색 밑줄이 그어진 세부 법조항을 가리켰다.

- 면책 특권은 해당 성좌의 격(格)이 '지구 방위에 기여하는 수호성'으로 정식 등록되어 있을 때만 유효합니다. 만약 그 성좌의 가호가 사라지거나, 사법 심사 청문회를 통해 '이단적 마수화 성좌'로 판결받는 순간, 그간 누렸던 모든 세금 감면 혜택은 무효화됩니다. 소급 과세는 물론이고 길드의 모든 자산이 국고로 가압류되죠.

연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판결을 내릴 수 있는 곳이 어디지?"

- 성좌 세무 조정 위원회 산하의 사법 심사 청문회입니다. 하지만 그곳은 백도훈 검사와 성좌 '심판의 황금 저울'의 완벽한 영향력 아래 있습니다. 백도훈이 청문회의 판사들과 위원들을 쥐고 흔드는 한, 합법적인 판결을 기대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간단하군."

연우가 엘리시아를 쳐다보았다. 그녀 역시 연우의 의도를 알아챈 듯 고개를 미세하게 끄덕였다.

"백도훈을 비호하는 성좌, '심판의 황금 저울'의 대가리를 먼저 깨부순다."

화면 너머 서하진의 숨소리가 순간 멎었다. 아무리 연우의 실력을 보았다고 해도, 사법 체계의 핵심을 지탱하는 고위 성좌를 직접 도살하겠다는 선언은 상식을 아득히 초월한 발상이었다.

"그 성좌의 격을 내 영혼에 찬탈해 낙인찍는 순간, 백도훈이 쥔 사법적 올가미는 무용지물이 된다. 성좌의 가호가 사라진 백도훈은 그저 평범하고 나약한 인간 검사에 불과해지니까."

연우의 검은 눈동자 깊은 곳에서 차가운 살기가 소용돌이쳤다.

"최태건의 목줄을 죄기 전에, 그를 비호하는 법의 방패부터 깨부순다. 서하진 수사관, 청문회 일정을 앞당길 수 있는 행정적 명분을 준비해라. 사냥터는 내가 직접 고른다."

- ……알겠습니다. 세무 특별 수사관의 권한으로, 골든 크라운의 특별 세무 감사 청구서를 공식 접수하겠습니다. 백도훈도 이를 막기 위해 청문회를 강제로 개최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서하진의 목소리가 단호하게 맺어졌다. 화면이 꺼지며 폐공장 안은 다시 어둠과 빗소리로 가득 찼다.

***

같은 시각.

아크델리 중앙 사법청 45층 부장검사실.

통유리창 너머로 아크델리의 화려한 네온사인과 홀로그램 광고판들이 빗속에서 번쩍이고 있었다. 백도훈 검사는 고급 가죽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책상 위의 서류철을 손가락 끝으로 규칙적으로 두드리고 있었다.

탁. 탁. 탁.

정적을 깨는 일정한 타격음이 집무실의 무거운 공기를 지배했다.

문이 열리고 비서가 들어와 허리를 숙였다.

"검사님. 준비가 끝났습니다."

백도훈은 두드리던 손가락을 멈추고 서류철을 열었다. 맨 앞장에는 한연우와 엘리시아의 얼굴이 인쇄된 프로필이 붙어 있었다. 그 아래에는 붉은색 관인이 선명하게 찍힌 긴급 영장 청구서가 놓여 있었다.

[무허가 불법 성좌물 소지 및 납치 교사 혐의에 따른 긴급 체포 영장]

백도훈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듯 오만한 미소였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 기어오르려는 하찮은 쥐새끼가 한 마리 있군."

그는 만년필을 들어 영장 하단에 거침없이 조형적인 서명을 남겼다. 서명이 완료되는 순간, 서류 봉투 틈새로 황금빛 마력이 미세하게 새어 나와 허공에서 저울 모양을 그리다 사라졌다. 성좌 '심판의 황금 저울'이 부여한 사법적 공권력의 발현이었다.

"한연우. 네가 아무리 규격 외의 힘을 지녔다 한들, 결국 이 사회가 짜놓은 사법 체계 안에서 숨 쉬는 가축일 뿐이다. 법의 올가미가 네 목줄을 어떻게 죄어 끊는지 똑똑히 보여주지."

백도훈이 책상 위의 붉은색 내선 전화를 들어 올렸다. 그의 목소리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차갑고 명확했다.

"아크델리 특별경비구역 사령부에 연락해라. 각성 경비용병단 전원을 즉시 소집한다. 등급을 불문하고, 체포에 저항하는 자는 현장에서 즉시 사살해도 좋다고 전해라."

사법의 가면을 쓴 거대한 행정 무력이 마침내 한연우의 숨통을 끊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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