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최태건의 분노 섞인 무전이 끊기고 닷새가 흘렀다. 그 다섯 하루 동안 아크델리의 지하 세계는 고요했으나, 수면 밑의 물살은 뼈를 깎아내듯 사나웠다.

습한 밤공기가 아크델리 외곽의 버려진 폐기물 처리장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깨진 콘크리트 틈새로 잡초가 돋아난 낡은 사무실 안, 백열등 하나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탁자 위에는 빗물에 젖은 양식서와 몇 장의 인화 사진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서하진이 볼펜 끝으로 사진 한 장을 툭툭 쳤다. 사진 속에는 사방이 철망으로 둘러싸인 대형 호송 차량이 담겨 있었다. 차량 측면에는 골든 크라운 길드의 상징인 황금 왕관 문양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정보는 확실해. 최태건은 이틀 전부터 길드 내부의 1급 마도사들을 소집했어. 목적지는 아크델리 제3 순환 제하 터널. 호송 대상은 엘리시아야."

서하진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차분했으나, 서류를 쥐고 있는 손가락바닥에는 팽팽한 긴장이 서려 있었다. 그녀는 품 안에서 얇은 가죽 파일 하나를 더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이건 수사 과정에서 우연히 손에 넣은 물건이야. 최태건이 길드 고위직들의 자금을 합법적으로 세탁하기 위해 만든 우회 조세 감면 신청서 초안. 아직 공식 접수되지는 않았지만, 이 서류에 적힌 계좌 번호들이 가리키는 종착지는 하나야. 성좌 '황금의 군주'의 신단으로 직접 흘러 들어가는 무기명 채권 계좌."

연우의 시선이 서류 초안에 머물렀다. 종이 가장자리에 미세하게 박힌 은박 인장이 보였다. 성좌의 힘이 깃든 위조 방지 주술이었다. 연우는 손가락 끝으로 그 인장을 지그시 눌렀다. 희미한 불쾌감이 손가락을 타고 올라왔다. 성좌들의 사악한 탐욕이 빚어낸 찌꺼기였다.

"최태건이 엘리시아를 노리는 이유는 명확해."

연우가 낮게 읊조렸다. 그의 음성은 쇠붙이를 긁는 듯 건조했다.

"그녀가 가진 성좌 봉인 해독 능력. 내 손에 사도가 죽었으니, 최태건은 수호성과의 연결망이 끊길까 봐 극도의 불안을 느끼고 있겠지. 엘리시아를 뇌사 상태로 만들어 마력 추출 노예로 삼아서라도 그 연결을 강제로 유지하려는 심산이다."

"맞아. 그들은 그녀를 단순한 소모품으로 보고 있어. 이번 이송이 끝나면 그녀의 자아는 완전히 지워질 거야. 사법 제도의 테두리 안에서 움직이기엔 시간이 부족해. 백도훈 검사가 이미 이 이송 작전에 '국가 안보상 특수 가호자 격리'라는 명목으로 합법적 면책 처분을 내려뒀거든."

서하진이 안경을 지켜올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법이라는 방패가 범죄자들의 가장 단단한 갑옷이 되어 있는 현실. 그녀의 눈에 서린 것은 짙은 혐오였다.

"법이 그들의 목을 옥죄지 못한다면, 내가 직접 찢는다."

연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등 뒤로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붉은 백열등 빛을 받아 기괴하게 일렁였다.

"가 구역 진입로에서 대기하지. 그들의 법이 어디까지 통하는지 내 손으로 확인해 주겠다."

* * *

아크델리 제3 순환 제하 터널.

지하 50미터 아래에 위치한 이 터널은 거대 길드들의 사유화된 통로였다. 일반 시민들의 출입은 철저히 통제되었고, 오직 황금빛 마도 가로등만이 차가운 콘크리트 벽면을 비추고 있었다.

지잉.

낮은 기계음과 함께 삼중 장갑으로 무장한 대형 호송차가 터널 안으로 진입했다. 차량의 앞뒤로는 검은색 세단 네 대가 삼엄한 대형을 유지하며 뒤따랐다. 세단의 유리창 너머로 붉은색 로브를 입은 골든 크라운 소속 정예 마도사들의 실루엣이 보였다. 그들의 손에는 붉은 보석이 박힌 마도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호송차 내부, 두꺼운 마력 억제 쇠사슬에 묶인 엘리시아가 벽면에 기대어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손목과 발목에 채워진 억제구에서는 푸른빛의 스파크가 튀며 그녀의 체내 마력을 강제로 쥐어짜 내고 있었다. 고통스러울 법한 상황이었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그 어떤 감정의 흔적도 없었다. 마치 타인의 몸을 구경하는 듯한 무감각함만이 그녀를 지배하고 있었다.

"어이, 계집. 얌전히 있는 게 좋을 거다. 터널만 지나면 네 그 잘난 머릿속을 통째로 뒤집어 줄 테니까."

조수석에 앉은 흉터 투성이의 마도사가 룸미러를 통해 엘리시아를 보며 비열하게 웃었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붉은 전격이 튀었다.

그 순간이었다.

터널 천장의 거대한 콘크리트 슬라브가 비명 지르듯 갈라졌다.

쿠우우웅!

아무런 예고도 없었다. 경보음도, 마력의 전조 증상도 감지되지 않았다. 오직 무지막지한 질량이 중력을 타고 그대로 수직 낙하했을 뿐이었다.

호송 차량의 지붕 위로 검은 그림자가 내리꽂혔다. 연우의 발끝이 삼중 장갑판에 닿는 순간, 공기가 터져 나가는 충격파가 터널 전체를 휩쓸었다.

콰아아앙!

강철로 만들어진 차량의 루프가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사방으로 튀는 불꽃과 찢어진 철판 파편이 터널 벽면을 난사했다. 호송차의 전륜 축이 힘없이 부러지며 바닥에 박혔고, 거대한 차체가 앞으로 고꾸라지며 굉음을 냈다. 뒷따르던 세단 세 대가 급제동을 걸었으나,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앞차의 잔해에 들이받았다.

"적습이다! 전원 전투 태세!"

세단에서 문이 부서져라 열리며 정예 마도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의 지팡이 끝에서 일제히 붉은색 화염 구체와 전격이 일어났다. 수십 개의 마법 서클이 터널 안을 붉게 물들였다.

연우는 구겨진 호송차 지붕 위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동자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왼손 끝에는 무형의 칼날이 푸른빛을 내뿜으며 일렁이고 있었다. 성좌를 사냥하는 발톱이었다.

"죽여라!"

선두에 선 마도사가 지팡이를 휘둘렀다. 굵은 화염 줄기가 연우를 향해 쇄도했다.

연우는 피하지 않았다. 그는 앞으로 한 걸음 내딛으며 손을 가볍게 내저었다. 역학적인 궤적을 그리며 뻗어 나간 무형의 칼날이 허공을 갈랐다.

스각.

화염 줄기가 반으로 쪼개지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칼날의 잔상이 마도사의 목덜미를 그대로 스치고 지나갔다.

틱.

짧은 파열음과 함께 마도사의 머리가 뒤로 꺾였다. 목뼈가 완전히 으스러진 사체가 바닥으로 널브러졌다. 핏방울이 아스팔트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연우의 신형은 이미 다음 목표를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방막을 펼쳐라! 차단막을—!"

다른 마도사가 비명을 지르며 푸른색 마력 장벽을 전개했다. 두께만 수십 센티미터에 달하는 정예 마도사의 최선이었다.

연우의 주먹이 장벽의 중심부를 똑바로 강타했다. 마력의 파열음은 없었다. 오직 뼈와 강철이 부딪히는 묵직한 타격음만이 터널을 울렸다.

콰직!

유리가 깨지듯 마력 장벽이 산산조각 났다. 연우의 주먹은 멈추지 않고 그대로 마도사의 가슴팍에 박혔다. 흉골이 함몰되며 등 뒤로 뼈 구슬이 튀어나왔다. 마도사는 단 한 마디의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바닥에 처박혀 경련했다.

"괴, 괴물 새끼……!"

남은 마도사들이 공포에 질려 뒤로 물러섰다. 그들이 자랑하던 체계적인 마법 캐스팅은 연우의 압도적인 물리적 속도와 파괴력 앞에서 무용지물이었다. 연우는 그들의 공포를 음미하지 않았다. 그저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왼발을 축으로 회전하며 가한 발차기가 한 명의 관자놀이를 날려버렸고, 연이어 뻗은 오른손이 다른 마도사의 손목을 움켜쥐고 그대로 비틀었다. 뼈가 바스러지는 소리가 터널의 폐쇄된 공간에 메아리쳤다.

단 3분 만에 터널 안은 침묵으로 가득 찼다. 붉은색 로브를 입은 사체들이 피웅덩이 위에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연우는 호송차의 찌그러진 뒷문을 향해 걸어갔다. 손을 뻗어 두꺼운 강철 문짝을 잡았다. 손가락 끝에 힘을 주자, 삐걱거리는 비명과 함께 문짝이 통째로 뜯겨 나갔.

어두운 차량 내부, 사슬에 묶인 엘리시아가 먼지 구덩이 속에서 연우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뺨에는 튀어 오른 파편에 긁힌 상처에서 핏방울이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고요했다.

연우는 말없이 다가가 그녀의 손목을 조이고 있던 마력 억제 장치를 잡았다.

쩍!

강력한 악력에 황금빛 주술이 새겨진 억제구가 허무하게 부서졌다. 사슬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거친 마찰음을 냈다.

엘리시아는 자유로워진 손목을 쓸어내리지도 않은 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연우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연우의 목덜미와 뺨 주변에 흐릿하게 감도는 검은 기운에 머물렀다.

"당신의 영혼에서 썩은 냄새가 나는군요."

엘리시아의 목소리는 한겨울의 서리처럼 차갑고 건조했다.

"인간의 것이 아닌 힘을 억지로 삼킨 대가겠지요."

연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덜미를 잡아채듯 이끌며 터널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터널 인근의 버려진 지하 보일러실.

낡은 파이프 사이로 뜨거운 증기가 치익 소리를 내며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사방이 가로막힌 폐쇄된 공간이었으나, 연우에게는 지금 이 순간 가장 안전한 대피소였다.

연우는 벽에 기대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가슴 안쪽에서 뜨거운 불길이 치밀어 오르는 느낌이었다. 사냥개의 발톱을 사용해 성좌의 신성을 찬탈한 이후, 체내에 축적된 신성 오염도가 요동치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수십 명의 목소리가 동시에 속삭이는 듯한 환청이 들렸다. 피를 갈망하는 마수의 본능이 이성의 끈을 갉아먹고 있었다.

스윽.

엘리시아가 연우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연우의 고통을 빤히 바라보았다. 두려움도, 동정도 없는 차가운 관찰자의 눈이었다.

"당신은 성좌들을 증오하는군요."

엘리시아가 나직하게 말했다.

"그들의 목을 베어 삼킬 때마다, 당신의 영혼은 그들의 광기로 물들어 가고 있어요. 결국에는 당신 역시 그들이 부리던 더러운 사냥개와 다를 바 없는 괴물이 되겠지요."

"닥쳐라."

연우가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그의 눈동자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내가 괴물이 되든 말든, 그자들의 대가리를 모두 깨부술 수만 있다면 상관없다. 너 역시 그자들에게 제물로 바쳐져 영혼이 찢길 뻔했던 몸이 아니던가. 나를 방해하겠다면 여기서 네 목도 같이 베어주마."

엘리시아는 연우의 살기 서린 협박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입가에 아주 미세한, 서글픈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방해하려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그 반대죠."

그녀는 천천히 오른손을 자신의 가슴팍으로 가져갔다. 얇은 옷자락 너머, 과거 성좌의 제물 의식 때 새겨진 깊은 흉터가 어렴풋이 보였다. 그녀가 손가락 끝으로 흉터를 지그시 누르자, 희미한 흑색 마력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녀의 품 안에서 천천히 떠오른 것은 작은 흑색 구체였다.

구체의 표면에는 수많은 미세한 균열 흔적들이 가득 새겨져 있었다. 사방으로 거미줄처럼 뻗어 나간 그 균열들은 마치 무언가를 억지로 묶어두고 있는 사슬처럼 보였다.

연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구체의 균열 사이로 흘러나오는 기운은 이질적이었다. 성좌들의 신성도, 일반적인 마력도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신적인 존재들의 격을 강제로 억누르고 정화하는 기이한 억제력이었다. 그 힘이 연우의 피부에 닿자,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환청이 기적처럼 잦아들었다.

"이건……."

"성좌들의 가호를 거부하는 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금단의 유물이에요."

엘리시아가 구체를 연우의 눈앞에 보여주며 속삭였다.

"이 구체의 균열은 제가 가진 힘으로 간신히 유지하고 있어요. 당신이 찬탈한 신성의 오염을 이 구체가 일시적으로 흡수해 줄 수 있어요. 하지만 이것도 임시방편일 뿐이에요."

그녀는 구체를 다시 품 안으로 거두어들였다. 정화의 기운이 잦아들자, 연우는 가슴을 짓누르던 고통이 한결 가벼워진 것을 느꼈다.

엘리시아는 연우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우리는 닮았어요. 성좌들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껍데기만 남은 망령들. 당신이 그들의 목을 베는 사냥개가 되겠다면, 저는 기꺼이 당신의 고삐가 되겠어요. 당신이 완전히 괴물이 되어 무너지기 전까지는, 내가 당신의 이성을 붙잡아 주겠어요."

연우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 서려 있는 지독한 복수심과 공허함이 자신과 정확히 같은 색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로를 철저히 이용하는 관계. 그것이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계약이었다.

"좋다."

연우가 건조하게 수락했다.

"내 고삐를 쥐어라. 하지만 내가 성좌의 목을 베는 순간에는 방해하지 마라."

엘리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차가운 눈동자가 연우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때였다.

엘리시아의 시선이 연우의 셔츠 깃 너머로 향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연우의 쇄골 아래, 가슴팍 피부 위로 검은색 마수의 비늘이 돋아나고 있었다. 단단하고 차가운, 인간의 것이 아닌 마수(魔獸)의 가죽이었다. 찬탈한 신성의 오염이 육체마저 잠식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였다.

엘리시아의 슬픈 눈빛이 연우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녀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연우 씨. 이대로 더 신성을 흡수하면……."

그녀가 연우의 가슴팍에 돋아난 검은 비늘을 손가락 끝으로 조심스럽게 만지며 경고했다.

"당신은 일주일 안에 자아가 완전히 붕괴해서, 이성이 없는 괴물이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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