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압류든 기소든, 마음대로 해라."
연우가 반태수의 머리채를 움켜쥔 채 무전기를 향해 나지막하게 뱉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미동조차 없었다.
"그 전에 네 목줄이 먼저 끊어지겠지만."
"이, 이 미친 새끼가……!"
반태수가 피를 토하며 악을 썼다. 연우는 대답 대신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두개골이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반태수의 안면이 시멘트 바닥에 처박혔다. 무전기가 힘없이 굴러떨어졌다. 연우는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군화를 들어 무전기를 밟아 뭉개 버렸다. 회로가 터지는 기계음과 함께 백도훈의 서늘한 목소리도 끊겼다.
골목을 가득 채운 비명과 신음이 빗소리에 씻겨 내려갔다. 연우는 핏물이 묻은 손을 털어내고 어둠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
그로부터 사흘이 지났다.
아크델리 서부 외곽, 낡은 붉은 벽돌 빌라의 3층 임시 처소. 창밖으로 회색빛 스모그가 낮게 깔린 도시의 전경이 보였다.
연우는 삐걱거리는 목제 의자에 앉아 낡은 단말기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화면에는 아크델리 사법 행정망의 실시간 감시 현황이 복잡한 그래프로 얽혀 있었다.
"사흘 동안 한 걸음도 안 나가고 이것만 들여다본 거야?"
방 한구석, 어둠이 짙게 가려진 벽에 기대어 있던 서하진이 서류 가방을 고쳐 잡으며 물었다. 그녀의 단정한 정장 재킷에는 밤새 내린 비의 흔적이 축축하게 남아 있었다.
"백도훈이 움직였다."
연우의 시선은 화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인간 성격에 반태수가 당한 걸 보고도 가만있을 리 없지. 사법 길드 '천상의 정의' 명의로 기소장을 발부했더군. 혐의는 각성자 특별법 위반 및 초법적 무력 행사로 인한 살인미수."
"예상했던 범위 안이다."
"너무 여유 부리지 마. 백도훈은 아크델리 사법망의 절대자야. 그가 기소 도장을 찍는 순간, 넌 이 도시에서 합법적인 사냥감이 돼. 수사관들이 영장을 들고 들이닥치는 건 시간문제야."
서하진이 단말기 옆으로 서류 한 뭉치를 툭 던졌다.
"이건 내가 세무조정위원회 내부망에서 빼낸 백도훈의 비밀 기안서 초안이야. 네가 요구했던 것."
연우의 손가락이 서류철을 넘겼다. 거친 종이 질감이 손끝에 닿았다. 서류의 상단에는 '성좌 가호자 특별 면책 제12조의 이중 예외 위하 조항'이라는 붉은 직인이 찍혀 있었다.
백도훈이 자신의 사법적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비밀리에 설계해 둔 독소 조항이었다. 성좌의 가호를 받는 길드가 국가 행정망을 우회해 사적 이익을 취할 경우, 그 특별 면책 특권을 일시적으로 박탈하고 국가가 강제 집행을 할 수 있도록 만든 예외 규정. 백도훈은 이를 경쟁 길드들을 통제하기 위한 올가미로 쓰려 했으나, 역설적이게도 그 조항의 상세한 법적 허점이 이 서류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쓸만하군."
연우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이걸로 백도훈의 목을 죌 수 있겠어?"
"목을 죄는 걸로 끝나지 않는다."
연우가 단말기 자판을 두드렸다. 그의 손가락이 닿을 때마다 화면에 복잡한 행정 서식과 소명서가 작성되어 채워졌다.
그때, 빌라 아래쪽에서 둔탁한 타이어 마찰음이 들렸다. 연우는 자판을 두드리는 것을 멈추지 않은 채 창밖을 흘긋 보았다.
검은색 방탄 차량 세 대가 빌라 입구를 가로막으며 멈춰 섰다. 차 문이 열리며 검은색 전술 외갑을 착용한 무장 수사관들이 쏟아져 나왔다. 가슴팍에 사법 길드 '천상의 정의'를 상징하는 저울 문양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그들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빌라의 출입구를 차단하고, 외벽의 가스 배관을 따라 저격수들이 자리를 잡았다. 공기 중으로 마력 탐지기의 웅웅거리는 진동음이 퍼졌다.
"왔네."
서하진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는 권총집에 손을 올렸으나, 연우는 손짓으로 그녀를 제지했다.
"가만히 있어라. 건드릴 필요 없다."
우드득, 쾅!
낡은 목제 현관문이 마력으로 강화된 군화에 짓밟히며 종잇장처럼 뜯겨 나갔다. 먼지와 함께 네 명의 무장 수사관이 총구를 겨누며 방 안으로 진입했다. 그들의 뒤로, 단정한 사법관 제복을 입은 사내 하나가 구두굽 소리를 내며 걸어 들어왔다. 백도훈 검사의 수석 집행관, 강철민이었다.
"한연우."
강철민이 품바지 주머니에서 푸른빛이 도는 법원의 체포영장을 꺼내 들었다.
"각성자 사법법 제8조 및 특수 상해 혐의로 체포한다. 순순히 포승줄을 받아라. 저항할 경우 현장에서 사살해도 좋다는 허가가 떨어졌다."
수사관들의 총구에서 붉은색 마력 레이저 조준선이 연우의 이마와 심장에 정렬되었다.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을 듯 팽팽해졌다. 서하진은 숨을 죽인 채 연우의 등 뒤에 서 있었다.
연우는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단말기 화면을 톡톡 두드린 뒤, 느긋하게 등받이에 몸을 댔다.
"영장 발부 주체가 백도훈 검사실이군."
"검사님의 명령이다. 네놈이 길드원들을 잔혹하게 도살한 대가는 법정에서 치르게 될 것이다."
강철민이 차갑게 뱉으며 철제 수갑을 꺼내 들었다.
"기소 사유가 성좌 가호자 특별 면책 조항을 위반한 무단 무력 행사라고 되어 있군."
연우가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그렇다. 넌 성좌의 가호도 없는 무가호 각성자 주제에, 골든 크라운 길드의 정당한 신성 집행관들을 공격했다. 이는 아크델리 사법 질서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다."
"그 정당한 집행관들이라는 놈들이, 내 집 앞에서 사적인 사냥 행위를 벌인 건 세무법상 어떻게 분류되지?"
연우의 질문에 강철민의 눈썹이 꿈틀했다.
"무슨 개소리냐."
"지금 확인해 봐라. 너희 검사실 행정망에 방금 접수된 소명서가 있을 거다."
연우가 턱끝으로 강철민의 손목에 차인 전술 단말기를 가리켰다.
강철민은 인상을 쓰며 단말기를 내려다보았다. 순간, 그의 단말기 화면이 붉은색 경고등과 함께 격렬하게 점멸하기 시작했다. 단말기 스피커에서 다급한 통신음이 흘러나왔다.
[강 팀장! 즉시 집행을 중지하십시오! 지금 세무조정위원회 본부에서 긴급 행정 명령이 하달되었습니다!]
통신 너머 지원팀의 목소리는 경악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무슨 소리야? 체포영장은 정식으로 발부되었다!"
강철민이 소리쳤다.
[그게 아닙니다! 피의자 한연우가 대중 세무망과 행정법원에 동시에 '정당방위 및 세무 사법 방해 고발장'을 제출했습니다! 그 내용에…… 백 검사님이 작성하셨던 '제12조 이중 예외 위하 조항'의 세부 이행 규정이 그대로 첨부되어 있습니다!]
강철민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기 시작했다.
[골든 크라운 길드가 반태수를 통해 사적으로 영혼을 수확하려 했던 정황이 세무망에 실시간으로 등록되었습니다. 이 조항에 따르면, 골든 크라운은 비과세 혜택을 박탈당한 '불법 사적 이익 집행자'가 됩니다. 즉, 한연우의 행위는 단순 살인미수가 아니라, 불법 탈세 현장을 적발하고 제압한 '국가 조세 정의 구현 및 정당방위'로 소명되었습니다!]
방 안의 모든 수사관이 동요했다. 겨누고 있던 총구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연우는 단말기 화면을 강철민 쪽으로 돌려 보였다. 화면에는 세무조정위원회의 공식 직인이 찍힌 수리 완료 문서가 떠 있었다.
"백도훈이 아주 훌륭한 법적 칼날을 만들어 두었더군."
연우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성좌의 가호를 빙자해 세금을 탈루하고 사적 도살을 자행하는 자들은 특별 면책 대상에서 제외된다. 그리고 그 현장을 제압한 자는 국가 세무 방해 행위를 저지한 공로자로 인정받아, 사법 기소가 일시 유예된다. 백 검사가 다른 길드들을 쳐내려고 직접 기안한 법안이지?"
"너…… 네놈이 그걸 어떻게……!"
강철민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내가 쓴 소명서가 대중 세무망에 게시된 순간, 아크델리의 모든 하급 각성자들과 시민들이 이 법적 모순을 지켜보게 됐다."
연우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의 큰 키가 강철민을 위압적으로 내려다보았다.
"지금 나를 여기서 강제로 연행하면, 백도훈은 자신이 만든 법률을 스스로 부정하는 꼴이 된다. 또한, 세무조정위원회의 권위를 무시하고 탈세 길드를 비호했다는 혐의로 행정소송을 당하게 되겠지. 감당할 수 있겠나?"
정적만이 방 안을 채웠다.
강철민은 이빨을 짓씹었다. 그의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백도훈 검사의 사법 감시망을 완벽하게 우회하는 것을 넘어, 그들이 만든 법의 그물로 그들의 목을 감아쥔 형국이었다.
"……철수한다."
강철민이 신음하듯 내뱉었다.
"강 팀장님!"
수사관들이 경악하며 그를 바라보았으나, 강철민은 영장을 구겨 쥐며 뒤로 돌아섰다.
"철수하라고 했다! 지금 이 자를 건드리면 검사님이 먼저 파멸하신다!"
수사관들이 서둘러 총구를 내리고 퇴각하기 시작했다. 문으로 향하던 강철민이 멈춰 서서 연우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이번 한 번은 법의 맹점을 찔러 빠져나갔을지 모른다. 하지만 백 검사님이 이대로 물러설 분이 아니다."
연우는 강철민의 귓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가서 네 주인에게 전해라."
그의 눈동자에서 붉은빛이 찰나의 순간 번뜩였다. 신성의 힘이 서린 안광이었다.
"다음 서류는 기정 사실이 될 거다. 그가 기소당해 파멸하는 서류 말이지."
강철민은 알 수 없는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며, 서둘러 방을 빠져나갔다. 빌라 아래에서 차량들이 급히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
"미친 짓이었어."
수사관들이 완전히 떠난 것을 확인한 서하진이 긴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이마에도 땀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완벽한 승리군. 백도훈의 그 거만한 얼굴이 어떻게 일그러졌을지 눈에 선해."
"이건 승리가 아니다. 임시방편일 뿐이지."
연우가 단말기를 끄며 말했다.
"백도훈은 곧 다른 구실을 찾아낼 거다. 법을 주무르는 자들이니까. 그 전에 힘의 균형을 바꿔야 한다."
"균형을 바꾼다니? 어떻게?"
서하진이 묻자, 연우는 그녀가 가져온 서류 뭉치에서 지도 한 장을 꺼내 펼쳤다. 아크델리 서부 특별지구의 경계선이 그려진 지도였다. 그 중심에는 붉은색으로 거대하게 칠해진 구역이 있었다.
'영혼 방목장'.
"이곳에 있는 하급 수호성자들의 좌표를 넘겨라."
연우의 말에 서하진은 침을 삼켰다. 그녀는 서류 가방 깊숙한 곳에서 밀봉된 보안 칩을 꺼내 단말기에 연결했다. 화면 위로 아크델리 철책선 내부의 실시간 좌표가 생성되었다.
"여기야. '갈증의 사냥개' 사도들이 난민들을 몰아넣고 강림 의식을 준비하는 기점."
서하진이 가리킨 좌표는 철책선 가장 깊숙한 어둠 속에 위치해 있었다.
"그들은 매달 수십 명의 무가호 난민들을 성좌에게 제물로 바치고 있어. 세무조정위원회는 이를 '비과세 신성 의식'으로 묵인하고 있고."
"사냥개라."
연우가 자신의 오른팔을 내려다보았다.
소맷자락을 걷어 올리자, 살갗 위에 새겨진 검은색 이빨 모양의 낙인이 기괴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사냥개의 발톱' 권능의 흔적이었다.
동시에 머릿속이 타들어 가는 듯한 극심한 두통이 밀려왔다. 찬탈한 신성이 영혼을 오염시키며 이성을 갉아먹는 대가였다. 귓가에서 정체불명의 짐승이 울부짖는 환청이 들려왔다. 피를 흘려라, 더 많은 격을 뜯어먹어라, 갈증을 해소하라는 탐욕스러운 목소리가 뇌리를 헤집었다.
연우는 이빨을 악물며 들끓는 마력을 강제로 억눌렀다. 이 신성 오염의 폭주를 제어하는 유일한 방법은, 더 거대한 격을 가진 성좌의 목을 베어 힘의 천칭을 억지로 맞추는 것뿐이었다.
"지금 당장 출발한다."
연우가 코트를 걸치며 칼집을 허리에 차기 시작했다.
"지금 가겠다고? 그곳은 사법 면책 특권이 완벽하게 적용되는 무법지대야. 사도들뿐만 아니라 성좌의 화신들이 득실거린다고!"
서하진이 만류했으나, 연우는 이미 문가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렇기에 사냥하기 더 좋은 곳이지."
그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밤하늘에서 차가운 빗줄기가 다시 쏟아지기 시작했다. 먼 발치에서 아크델리 영혼 방목장의 거대한 철책선이 네온사인 불빛 아래 검은 야수처럼 엎드려 있었다.
철책선 너머 깊은 어둠 속을 응시하던 연우의 팔목이 가늘게 떨렸다.
화르륵.
피부 가죽을 뚫고 나올 듯, 검은 낙인이 붉게 타오르며 팽창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난민의 피를 빨며 군림하던 성좌 '갈증의 사냥개'의 신성 파동이, 연우의 영혼에 새겨진 찬탈자의 이빨과 기괴하게 공명하며 날카로운 마찰음을 내고 있었다.
사냥개가 사냥개의 냄새를 맡았다.
연우는 빗속으로 몸을 던졌다. 목을 벨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