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시간 뒤.
신열이 머리를 태울 듯이 치솟았다.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얼룩덜룩한 곰팡이가 핀 콘크리트 천장이었다. 빗소리가 멀게 들렸다. 코끝을 찌르는 시큼한 소독약 냄새와 눅눅한 먼지 냄새가 비강을 채웠다.
몸을 일으키려 하자 가슴팍에 묵직한 통증이 걸렸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진정제를 주입해 둔 상태니까."
낮고 차분한 목소리.
고개를 돌렸다. 낡은 철제 의자에 앉아 있는 서하진이 보였다. 그녀는 권총을 품안에 거두어 넣은 상태였다. 대신 그녀의 손가락 끝에는 텅 빈 주사기 주입기가 들려 있었다. 각성자용 마력 진정제다.
연우는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끝에 남아 있던 검붉은 신성의 흔적은 피부 아래로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영혼 한구석은 여전히 뜨거웠다. 사냥개의 발톱이 삼킨 '황금의 포식자'의 하급 신성이 뼛속에서 소화되는 중이었다. 이물감과 함께 기괴한 충동이 머릿속을 긁었다.
신성 오염.
성좌의 힘을 강탈한 대가였다. 뇌를 파먹는 듯한 갈증을 억누르며 연우가 갈라진 목소리를 냈다.
"여긴 어디지."
"위원회 소유의 안전가옥입니다. 공식 기록에는 존재하지 않는 곳이죠."
서하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시선이 연우의 목덜미에 머물렀다. 그곳에는 시스템이 낙인찍은 '이단자(Heresy)'의 붉은 표식이 미세하게 점멸하고 있었다.
"방금 전 골목에서 일어난 전투의 흔적을 확인했습니다. 비인가 각성자가 성좌의 하수인을 맨손으로 찢어 죽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아크델리 사법부는 발칵 뒤집힐 겁니다. 특히 당신의 에너지 파형은 일반적인 마력과 다릅니다. 신성을 강제로 흡수한 흔적이 있더군요."
그녀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상대의 모순을 잡아내려는 수사관의 눈빛이었다.
연우는 실소했다. 회귀 전이나 지금이나, 이 여자는 눈치가 빨랐다. 하지만 지금의 서하진은 아직 성좌들의 거대한 음모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저 깃털을 만지고 있을 뿐이다.
연우는 상체를 일으켜 침대 맡에 놓인 자신의 재킷을 집어 들었다. 안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피와 빗물에 젖은 종이 뭉치가 손끝에 잡혔다. 골목에서 사냥했던 하급 도살자 마수의 품에서 뜯어낸 가죽 봉투였다.
척.
젖은 종이 뭉치가 서하진의 구두 앞바닥에 떨어졌다.
"그게 무엇입니까?"
"네가 목숨 걸고 찾고 있던 것."
서하진이 허리를 숙여 종이를 주웠다. 겉면에 묻은 핏자국을 털어내고 종이를 펼치는 그녀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것은 단순한 서류가 아니었다. 골든 크라운 길드가 성좌 '황금의 군주'에게 바치기 위해 작성한 우회 증여 명세서의 초안이었다. 신성 강림의 대가로 지불되는 수만 명의 영혼 가치를 '우주적 가치 창출에 따른 비과세 자산'으로 세무 처리한 법적 꼼수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서하진이 우연히 입수한 최태건 길드의 고위직 탈세 루트가 적힌 합법적 우회 양식의 서류 초안.
그녀가 몇 달 동안 아크델리의 하수구를 뒤지며 찾으려 했던 결정적 증거가 바로 그곳에 있었다.
"이걸... 어떻게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겁니까?"
서하진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낮아졌다. 그녀의 눈에 경계심과 경악이 동시에 서렸다.
"그 도살자 마수는 단순한 사냥개가 아니었어. 골든 크라운의 비밀 연락책이었지. 성좌의 제물을 배달하고 그 대가로 영수증을 받아 가던 길목을 내가 지켰을 뿐이다."
연우의 조용한 설명에 서하진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는 서류와 연우를 번갈아 보았다. 법과 조세 정의를 수호하려는 그녀의 신념이 머릿속에서 거세게 충돌하고 있었다. 눈앞의 사내는 명백한 불법 무등록 각성자이자 초법적 살상 능력을 지닌 위험인물이다. 법대로라면 즉시 구속 기소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그녀가 쥐고 있는 종이는 아크델리를 지배하는 골든 크라운의 목줄을 죌 수 있는 유일한 열쇠였다.
"이건 공식 법정에서 증거 능력을 인정받기 어렵습니다. 획득 경로가 불법이니까요."
"법정?"
연우가 비웃음을 짓으며 침대 밖으로 발을 디뎠다. 바닥에 닿는 발소리가 건조하게 울렸다.
"서하진 수사관. 아직도 구시대의 법이 작동한다고 믿나? 성좌 가호자 특별 면책 조항 제12조. 그 법 조항 하나로 최태건과 그 졸개들은 살인과 영혼 수확을 합법화하고 있어. 네가 법치 체계를 운운하며 영장을 청구하는 동안, 그들은 또 다른 제물을 제단에 바칠 거다."
연우가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섰다. 서하진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턱을 치켜들며 그의 살기 어린 눈빛을 정면으로 받아냈다.
"그렇다고 해서 사사로운 보복을 묵인할 순 없습니다. 난 법의 테두리 안에서 그들을 단죄할 겁니다."
"아니, 넌 못 해."
연우가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하지만 내가 준 이 서류가 있다면, 행정적 족쇄는 채울 수 있겠지. 세무조사라는 명목으로 그들의 자금을 동결하고, 합법적인 방패를 흔드는 것 정도는 가능할 터다."
"제안을 하려는 건가요?"
"거래지."
연우의 눈빛이 검붉게 침착해졌다.
"나는 그들의 목을 벤다. 너는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법적 소음을 지워라. 그리고 골든 크라운의 숨겨진 자금줄과 성좌들의 강림 좌표를 넘겨. 넌 조세 정의를 실현해서 국가를 구하고, 난 내 사냥을 끝낸다."
서하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원칙주의자였다. 범죄자와 손을 잡는 것은 그녀의 신념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크델리의 현실은 이미 법의 한계를 넘어선 지 오래였다. 성좌들의 비호를 받는 길드들은 법원 위에 군림하고 있었다. 법을 지키기 위해 법을 우회하는 괴물과 손을 잡아야 하는 모순.
"……당신을 믿을 수 없습니다."
"믿지 마라. 나도 널 믿지 않으니까."
연우가 차갑게 덧붙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유용한 도구라는 사실만 기억하면 된다. 그게 사냥개의 방식이니까."
서하진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서류를 가슴에 품었다. 그녀의 침묵은 동의였다.
* * *
아크델리 특별지구의 중심가는 기괴한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
하늘을 찌를 듯한 고층 빌딩과 홀로그램 전광판이 화려한 빛을 뿜어냈다. 전광판에는 '성좌의 가호를 받아 구원받으십시오'라는 문구와 함께 골든 크라운 길드의 홍보 영상이 반복해서 상영되고 있었다.
하지만 화려한 네온사인 아래의 골목은 어두웠다.
"이게 이번 달 가호 분담금 명세서다. 토 달지 말고 내놔."
거친 목소리가 상가 구석에서 흘러나왔다.
골든 크라운 길드의 문양이 새겨진 가죽 재킷을 입은 사내들이 노점상을 둘러싸고 있었다. 선두에 선 사내는 길드의 하급 지휘관인 반태수였다. 그는 성좌 '황금의 군주'의 하급 가호를 받아 피부가 미세하게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하, 하지만 지휘관님. 지난달보다 두 배나 올랐지 않습니까? 저희 같은 일반 영민들은 이 이상 영혼 석을 구하기 힘듭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점상이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애원했다.
반태수는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구두 끝으로 노점상의 가슴을 미련 없이 걷어찼다.
퍽.
노점상이 뒤로 나자빠지며 가판대에 부딪혔다. 과일과 조잡한 마도구들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주위의 시민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도 고개를 숙인 채 걸음을 재촉했다. 아크델리에서 길드의 횡포에 참견하는 것은 자살 행위였다.
"이 새끼가 배가 불렀군. 우리가 성좌님께 기도를 올려서 이 구역의 마수 침공을 막아주는 대가다. 세금 내기 싫으면 아크델리 밖으로 기어 나가서 마수 밥이 되든가!"
반태수가 침을 뱉으며 노점상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가호자 특별 면책 조항 제12조 알지? 우리가 여기서 네놈 영혼을 뽑아 제단에 바쳐도 국가에선 아무 말 못 해. 이건 신성한 예언 행위의 일환이니까."
"그 특별 면책 조항, 오늘부로 적용 범위가 좁아질 텐데요."
골목 입구에서 맑고 서늘한 목소리가 울렸다.
반태수가 인상을 쓰며 고개를 돌렸다. 검은색 정장 차림의 서하진이 세무조정위원회 배지를 치켜든 채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의 뒤에는 후드를 깊게 눌러쓴 한연우가 그림자처럼 따랐다.
"세무조정위원회 암행 감사 수사관 서하진입니다."
서하진이 차가운 눈빛으로 반태수를 응시했다.
"골든 크라운 길드 소속 반태수. 당신이 지금 징수하고 있는 '가호 분담금'은 공식 세무 신고를 거치지 않은 비인가 사적 갈취에 해당합니다. 또한,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강압적 영혼 수확 행위는 면책 조항 제12조의 '국가 안보 목적'에 부합하지 않으므로, 즉각 현장 세무조사 및 압류 절차를 집행하겠습니다."
반태수는 일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콧방귀를 뀌며 폭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세무조사? 야, 들었냐? 이 가시나가 지금 누굴 상대로 세금을 논하는 거야?"
주변의 길드원들도 킥킥거리며 무기를 만지작거렸다.
"수사관 나리. 우리가 내는 비과세 자산이 얼만지나 알고 이러시는 건가? 백도훈 검사님이 우리 길드 고문 변호사인 건 알아? 법원에서도 우리 건은 기소 유예로 종결지어."
반태수가 서하진의 코앞까지 다가와 손가락질을 했다.
"어디서 쥐꼬리만 한 공무원 나부랭이가 헌법 위에 노려보고 있어? 꺼져, 대가리에 구멍 나기 싫으면."
서하진의 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그녀가 품속의 권총에 손을 올리려던 찰나였다.
스윽.
연우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으며 나섰다.
"비켜라."
연우의 짧은 한마디에 반태수의 시선이 그에게 닿았다. 후드 아래로 드러난 연우의 눈동자는 감정이 완전히 거세된, 굶주린 짐승의 그것과 같았다.
"뭐야, 이 허접한 새끼는? 어이, 치워라."
반태수가 연우의 어깨를 밀치려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연우의 신형이 기괴할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타악.
연우의 왼손이 반태수의 뻗은 손목을 정확히 낚아챘다. 쇠집게로 조이는 듯한 강도로 악력이 가해졌다.
"억?!"
반태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풀려나기 위해 마력을 끌어올리려 했으나, 연우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검붉은 기운이 그의 마력 순환을 강제로 비틀어 막아버렸다. 사냥개의 발톱이 지닌 신성 억제 권능이었다.
"말했지."
연우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세금 없이 가호는 없다고."
연우는 그대로 반태수의 손목을 가차 없이 회전시켰다.
두둑, 빠각!
뼈가 어긋나고 관절이 뒤틀리는 파괴음이 골목에 선명하게 울렸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게 연우의 오른손이 반태수의 턱관절을 강타했다.
턱뼈가 정확한 궤적으로 탈골되며 반태수의 고개가 기괴하게 꺾였다. 연우는 멈추지 않았다. 반태수의 가슴팍을 왼발로 짓누르며, 부러진 팔을 그대로 아래로 꺾어 내렸다.
우드득!
어깨 관절이 완전히 파열되며 반태수의 몸이 바닥으로 처박혔다.
"이, 이 미친 새끼가!"
뒤에 서 있던 세 명의 길드원이 뒤늦게 무기를 뽑아 들고 달려들었다. 마력으로 강화된 검날이 연우의 머리를 향해 사선으로 그어졌다.
연우는 피하지 않았다.
그는 반태수의 신형을 방패막이로 삼아 던졌다. 날아오는 신체에 가로막힌 길드원들의 초식이 흐트러진 찰나, 연우의 신형이 그들의 품안으로 파고들었다.
첫 번째 사내의 손목을 쳐내 검을 떨어뜨리게 만든 뒤, 그대로 그의 명치에 팔꿈치를 박아 넣었다. 흉골이 함몰되는 둔탁한 감각이 연우의 팔을 타고 전해졌다. 사내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거품을 물며 쓰러졌다.
두 번째 사내가 단검을 찌르려 하자, 연우는 그의 손목 관절을 반대로 꺾어 단검이 사내 자신의 허벅지를 깊숙이 찌르게 만들었다.
"아아악!"
골목에 비명이 퍼졌다.
단 3초 만에 길드원 세 명이 바닥을 뒹굴었다. 어떠한 화려한 마법도 기술도 없었다. 오직 인체의 취약한 관절과 역학적 궤적만을 노린 잔인하고 효율적인 도살이었다.
지켜보던 노점상들과 시민들은 공포에 질려 숨을 죽였다. 서하진조차 연우의 무자비한 폭력성에 침을 삼켰다.
연우는 바닥에서 신음하는 반태수의 머리채를 잡아 올렸다. 반태수의 얼굴은 피와 흙먼지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너희 길드장 최태건에게 전해라."
연우가 반태수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탈세한 신성만큼, 목숨으로 환수하러 가겠다고."
반태수는 공포와 고통으로 눈물이 범벅된 채, 떨리는 왼손으로 품속의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 그의 손가락이 피 묻은 버튼을 필사적으로 눌렀다.
"커헉……! 검사님! 백도훈 검사님……! 습격입니다……! 세무조정위원회의 끄나풀 놈들이…… 저희를……!"
무전기 너머에서 지이익 하는 기계음과 함께, 차갑고 지적인 남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반태수 지휘관. 지금 법적 면책 구역 내에서 소란을 피우는 자가 누구입니까?]
사법 길드 '천상의 정의'의 수장, 백도훈 검사의 목소리였다.
반태수가 연우를 독기 서린 눈으로 노려보며 무전기에 대고 비명을 질렀다.
"네놈 가호 성좌가 누구든 상관없어! 백 검사님이 널 법정으로 끌고 가 영혼까지 가압류해서 말려 죽일 거다! 으아아악!"
무전기에서 흘러나오는 서늘한 마력 파동이 골목의 공기를 무겁게 가라앉혔다. 새로운 올가미가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