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줄기가 뺨을 때리는 감각은 차가웠으나, 연우의 가슴속에서 타오르는 불길은 뼈마디를 녹여버릴 듯이 뜨거웠다.
"허억...!"
연우는 가슴뼈를 움켜쥐며 축축한 아스팔트 바닥으로 무릎을 꿇었다. 흉골의 한가운데를 기점으로 검붉은 혈관들이 뱀처럼 일제히 요동치기 시작했다. 피부 밑에서 기어 다니는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혈관들은 빗물에 젖은 쇄골을 타고 목덜미로, 다시 왼쪽 뺨과 눈가까지 기괴한 낙인처럼 뻗어 나갔다.
[경고: 정신적 신성 오염이 발생했습니다.] [현재 오염도: 4.5%] [영혼의 마수화 징후가 감지됩니다. 극심한 광기에 저항하십시오.]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본능적인 살육의 욕구가 전신을 지배하려 들었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생명체를 찢어발기고, 그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더 뜨거운 피를 마시고 싶다는 기괴한 갈증이 척수를 타고 뇌를 흔들었다. 손가락 끝이 비정상적으로 길어지며 거무스름한 짐승의 가죽과 같은 비늘이 돋아나려 했다.
연우는 오른손으로 자신의 허벅지를 움켜쥐고 세차게 내리쳤다. 둔탁한 타격음이 빗소리에 묻혔다. 고통이 신경을 자극하면서 일시적으로 이성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하아... 하아..." 이것이 그가 택한 권능의 제약이었다. 성좌의 격을 강탈할 때마다 그들의 우주적 탐욕과 광기가 자아를 잠식한다. 이 가속을 멈추거나 억누르는 방법은 역설적이게도 단 하나뿐이었다. 더 거대한 성좌를 사냥하는 것. 더 거대하고 압도적인 신성의 힘으로 하급 신성의 오염을 강제로 짓누르고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뿐이었다. 멈추는 순간, 스스로가 사냥해야 할 마수로 변해버리는 미친 굴레였다.
"상관없어."
연우가 이를 악물었다. 입술이 터지며 쇠 맛이 나는 피가 흘러내렸다. "전부 사냥해 버리면 끝나는 일이다."
비틀거리며 상체를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무릎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회귀 직후의 육체는 성좌의 신성과 오염의 충
격을 버티기에 너무 나약했다. 세포 하나하나가 지져지는 감각 속에서 연우는 흙탕물 바닥에 한쪽 손을 짚었다. 손가락이 아스팔트를 긁어 손톱 밑이 터졌다. 붉은 피가 빗물에 희석되어 흘러갔다.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이명처럼 울렸다.
[경고: 미등록 신성 에너지가 신체 내부에서 충돌합니다.] [영혼의 붕괴율이 상승합니다.]
연우는 거친 숨을 토해냈다. 뜨거운 김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가슴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살육의 충동을 억누르며, 그는 바닥에 흩어진 마수의 잔해를 내려다보았다. 황금의 포식자가 보낸 사냥개는 형체도 없이 으깨져 있었다. 녀석의 찢어진 가죽 사이로 스며 나온 황금빛 액체가 연우의 오른손으로 흡수되는 중이었다.
사냥개의 발톱. 성좌를 도살하고 그 격을 찬탈하는 권능. 사라진 줄 알았던 힘은 회귀한 육체에도 고스란히 각인되어 있었다. 다만 지금의 몸은 고작 일반인에 불과했다. 이대로 가다간 신성을 완전히 소화하기도 전에 자아가 먼저 타버릴 터였다.
자극이 필요했다. 극도의 통증으로 뇌의 각성을 유지해야 했다.
연우는 부러진 마수의 뼈 조각을 집어 들었다. 날카롭게 깨진 뼛조각을 자신의 왼쪽 어깨 깊숙이 찔러 넣었다.
푹.
살이 찢어지는 감각과 함께 선혈이 솟구쳤다. 비명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흐려지던 눈동자에 다시금 서늘한 생기가 돌아왔다. 극심한 통증이 밀려오자 마수화의 광기가 한풀 꺾였다. 오염으로 떨리던 눈꺼풀이 멈추었다.
"이 정도로 죽지는 않는다."
연우가 뼛조각을 뽑아 던졌다. 뼈가 바닥에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그는 벽을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 다리가 굳어 자꾸만 아래로 꺾이려 했다. 하지만 억지로 뼈마디를 맞춰 세우듯 힘을 주었다.
그때였다.
뚜벅. 뚜벅.
골목 입구에서 규칙적인 발소리가 들려왔다. 빗소리에 묻혀 희미했으나, 연우의 감각은 이미 초감각의 영역에 걸쳐 있었다. 발걸음 소리는 가볍고 흔들림이 없었다. 훈련받은 자의 보법이었다.
연우는 벽에 등을 기대고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손끝에 남아 있는 미약한 마력을 끌어모았다. 언제든 목덜미를 물어뜯을 준비를 마친 사냥개처럼, 그는 숨소리마저 죽였다.
골목 안으로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등 뒤로 비치는 가로등 불빛을 받으며 한 여자가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검은색 레인코트를 걸친 단정한 차림새였다. 빗물이 코트 표면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의 손에는 가죽으로 된 얇은 서류철이 들려 있었다.
여자는 골목 바닥에 낭자한 마수의 핏자국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의 시선이 바닥의 황금빛 진액을 쫓았다. 이어 어두운 벽면에 기대어 있는 연우에게로 향했다.
"거기까지."
여자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서리발 같았다. 그녀가 레인코트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이윽고 꺼내든 것은 검은색 마력 권총이었다. 총구는 정확히 연우의 이마를 겨누고 있었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국가특별행정부 소속입니다."
여자가 왼손을 들어 올려 가죽 지갑을 펼쳤다. 빗물에 젖은 투명한 아크릴판 너머로 금색 인장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성좌 세무 조정 위원회 — 암행 감사 특별 수사관 서하진]
연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서하진. 회귀 전, 성좌들과 결탁한 대형 길드들의 숨통을 법과 조세 제도로 조였던 광기 어린 원칙주의자. 그녀가 지금 자신의 눈앞에 서 있었다.
서하진은 총구를 고정한 채 천천히 다가왔다. 그녀의 시선이 연우의 피 묻은 오른손과 어깨의 상처를 훑었다. "비인가 각성자로 추정되는군요. 방금 이곳에서 발생한 고에너지 반응의 원인입니까?"
연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손에 들린 서류철을 보았다. 가죽 표면 틈새로 언뜻 보이는 서류의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골든 크라운 길드 세무조사 예비 기안서]
연우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최태건의 길드였다. 서하진은 이미 이 시점부터 골든 크라운의 뒤를 캐고 있었던 것이다.
"질문에 답하십시오." 서하진의 손가락이 방아쇠에 걸렸다. 미세한 마력이 총신을 타고 흐르며 푸른 빛을 발했다. "대답이 없으면 불법 신성 취득 및 초법적 파괴 행위자로 규정하고 즉각 즉결 처분하겠습니다."
연우가 벽에서 등을 떼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의 발걸음은 위태로웠으나 눈빛만큼은 여전히 검붉은 안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처분?" 연우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공무원이 민간인을 쏠 권한은 없을 텐데. 특별면책조항 제12조를 과용하는 건 불법 아닌가, 서하진 수사관."
서하진의 눈썹이 꿈틀했다. 자신의 이름과 법 조항을 정확히 꿰뚫고 있는 눈앞의 사내에게서 기이한 압박감이 느껴진 탓이었다. 그녀는 총구를 더 단단히 쥐었다.
"신원을 밝히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즉시 발포합니다."
연우는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영혼 속에서 사냥개의 발톱이 다시금 요동쳤다. 오염의 고통이 파도처럼 밀려와 시야가 급격히 흐려지기 시작했다. 한계였다.
그는 쓰러지기 직전, 서하진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사냥은... 이제 시작이다."
말을 끝으로 연우의 무릎이 꺾였다. 그의 몸이 차가운 빗물 바닥으로 쓰러지는 순간, 서하진이 급히 다가오는 구두 굽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그리고 연우의 의식은 암전 속으로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