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목덜미가 서늘했다.

칼날이 경추를 파고들 때의 감각은 지독하게 선명했다. 뜨거운 피가 기도를 막았고, 폐부는 찢어진 벨로즈처럼 비명을 질렀다. 하늘을 가득 메운 거대한 불꽃의 눈동자, 성좌 '태양의 찬란한 지배자'가 내려다보던 그 비웃음이 뇌리에 박혀 있었다.

"죽어라, 가축."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인류의 마지막 사냥개라 불렸던 한연우의 최후였다.

콰아아앙!

귀를 찢는 기계음과 함께 시야가 번쩍였다. 목을 짓누르던 타는 듯한 통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한연우는 급히 숨을 들이쉬었다. 건조한 공기가 기도를 타고 허파 깊숙이 박혔다. 비린내 나는 피 냄새 대신, 자극적인 소독약과 인공 향료 냄새가 코를 찔렀다.

"다음, 407번 한연우 입장하세요."

여성 안내원의 목소리는 기계적으로 차분했다.

한연우는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피로 물들었던 대지 대신, 빛나는 대리석 타일이 발밑에 깔려 있었다. 사방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야, 이번엔 진짜 상위 성좌가 내려왔대." "골든 크라운 길드에서 벌써 대기 중이라던데? 가호만 받으면 인생 역전이다."

젊은 남녀들이 상기된 얼굴로 손을 모으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탐욕과 가느다란 희망이 뒤섞여 있었다.

한연우는 자신의 손을 보았다. 굳은살이 박여 있긴 하지만, 성좌들의 목을 베며 거칠어질 대로 거칠어졌던 흉터투성이의 손이 아니었다. 얇고, 아직은 인간의 온기가 남아 있는 손가락.

‘회귀했다.’

머릿속이 차갑게 식었다. 감정은 솟구치지 않았다. 오직 냉혹한 현실 감각만이 척추를 타고 빠르게 내려앉았다.

이곳은 아크델리 중앙 성좌 계약식장이다.

인류가 성좌들의 유희거리로 전락하기 직전, 신들의 간택을 받기 위해 제 발로 목줄을 차러 오던 도살장. 멸망하기 정확히 10년 전의 그날이었다.

"407번 한연우 씨? 안 들어가고 뭐 합니까?"

대기열을 관리하는 양복 차림의 사내 하나가 연우의 어깨를 거칠게 밀쳤다. 연우는 사내의 손길을 가볍게 비틀어 흘려보냈다. 사내의 미간이 좁아졌으나, 연우는 이미 거대한 아치형 문을 넘어 안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계약식장 내부는 거대한 원형 광장이었다. 천장에는 우주의 성운을 모방한 홀로그램이 회전하고 있었다. 그 중심에서 푸른빛의 거대한 신석(神石)이 안개를 뿜어냈다.

광장 중앙에 선 각성자들이 하늘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오오, 위대한 밤의 지배자시여……!" "선택해 주십시오! 제 영혼을 바치겠습니다!"

구걸.

연우의 눈에 비친 자들의 행동은 그 한 단어로 요약되었다. 신의 힘을 빌려 초인이 되겠다는 자들이, 스스로 신의 가축이 되기를 자청하며 바닥을 기고 있었다.

웅성거림 사이로 천장이 붉게 물들었다. 성좌들의 시선이 지상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성좌, '황금의 포식자'가 탐욕스러운 눈으로 지상을 내려다봅니다.] [성좌, '심판의 황금 저울'이 가치를 측정합니다.] [성좌, '푸른 파도의 지배자'가 흥미를 보입니다.]

머릿속을 울리는 시스템 메시지들. 가호를 받는 각성자들의 몸에서 차례로 빛이 뿜어졌다.

"성공이다! 황금의 포식자님께서 나를 선택하셨어!" "나는 푸른 파도다! 크하하핫!"

그들은 자신들의 목에 보이지 않는 쇠사슬이 채워지는 줄도 모르고 환호했다. 성좌들에게 인간은 그저 유희용 장난감에 불과했다. 필요가 없어지면 언제든 폐기할 가축.

연우는 광장 한복판에 멈춰 섰다.

주변의 빛이 그를 피해 갔다. 하늘을 메운 성좌들의 문양이 연우의 머리 위를 지나칠 때마다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어떤 성좌도 그에게 빛을 내리지 않았다.

"저 녀석은 왜 가호가 안 내려오지?" "가호도 못 받는 무재능인가 보네. 불쌍해라."

주변에서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연우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성좌들을 향한 경외심 대신, 뼛속 깊이 각인된 살의와 불신만이 서려 있었다.

과거, 그의 동생 한아영은 성좌의 감언이설에 속아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3년 뒤, 성좌의 유희를 위한 '강림 제물'로 지정되어 영혼까지 찢겨 죽었다. 동생이 죽어가던 날, 사법 기관도, 각성자 협회도 성좌의 특별 면책 조항을 들이밀며 방관했다.

그 기억이 연우의 심장을 얼음송곳처럼 찔렀다.

하늘의 성좌들이 연우의 영혼 깊은 곳을 들여다본 모양이었다. 그들의 눈동자가 불쾌한 듯 꿈틀거렸다. 신을 우러러보지 않는 불순한 필멸자. 가축 주제에 도살자의 목을 노리는 사나운 이빨.

징-!

광장 중앙의 신석이 붉은빛을 뿜으며 거친 경고음을 울렸다.

[경고. 대상의 영혼에서 성좌를 향한 강한 적대감과 이질적 파동이 감지되었습니다.] [성좌들이 대상과의 계약을 전면 거부합니다.] [판정: 시스템 이단자(Heresy).]

광장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이단자 판정. 그것은 성좌들에게 버림받은 개체라는 낙인이었다.

"이단자라고?" "미친, 신들에게 대들기라도 한 거야?"

단상 위에 서 있던 심사관들이 차가운 눈빛으로 연우를 바라보았다. 아크델리의 관리자이자 친성좌 길드 소속의 각성자들이었다.

"407번 한연우. 성좌의 가호를 거부하고 시스템을 모독했다." 단상 위에서 은색 제복을 입은 사내가 마이크를 잡고 차갑게 선언했다. "성좌 가호자 특별 면책 조항 및 각성자 관리법에 의거, 귀하를 이 신성한 계약식장에서 강제 추방합니다. 아울러 향후 어떠한 공식 던전 진입 및 길드 가입도 불허합니다."

"추방해라!" "가축만도 못한 놈, 꺼져라!"

주변의 각성자들이 침을 뱉듯 욕설을 퍼부었다. 성좌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그들의 비굴한 충성심이 연우를 향한 공격성으로 발현되고 있었다.

연우는 입꼬리를 올렸다. 건조한 실소가 흘러나왔다.

"가호?"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개에게 던져주는 뼈다귀를 물고 좋아하는 꼴들이 보기 좋군."

"뭐라구? 저 새끼가 미쳤나!" "당장 끌어내!"

경비대원들이 진압봉을 꺼내 들고 연우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 순간, 연우의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불길이 치솟았다. 회귀하기 직전, 참수당하던 순간 그의 영혼에 각인되었던 유일무이한 고유 권능이 깨어나고 있었다.

신성을 거부하는 힘. 신의 목줄을 끊고 그 살점을 씹어 삼키는 사냥개의 의지.

두근.

심장이 거세게 고동쳤다. 전신을 흐르는 피가 끓어올랐다.

[고유 권능, '사냥개의 발톱(신성 찬탈)'이 각성합니다.] [성좌의 가호를 영구히 거부합니다.] [경고: 본 권능은 성좌의 신성을 직접 찢어 발겨 찬탈하는 금기의 힘입니다.] [찬탈할 때마다 영혼에 '정신적 신성 오염'이 누적됩니다.]

눈앞에 붉은색 반투명창이 떠올랐다.

연우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가락 틈새로 검붉은 오라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그것은 마나도, 성좌들이 내려주는 신성도 아니었다. 신들의 격(格)을 무너뜨리고 찢어발기기 위해 태어난 종말의 힘이었다.

다가오던 경비대원들이 연우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이한 기백에 본능적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그들의 얼굴에 원인 모를 공포가 서렸다.

"뭐, 뭐야? 저 기운은……." "비켜라."

연우가 나직하게 말했다.

사내들은 저도 모르게 옆으로 길을 터주었다. 연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약식장 출구를 향해 걸었다.

그의 등 뒤로 성좌들의 분노 어린 시선이 꽂혔다. 하늘이 붉게 융단처럼 일렁였으나, 연우는 개의치 않았다.

'가호 따위는 필요 없다.'

직접 사냥해서 빼앗으면 그만이다. 성좌들의 목을 베고, 그들의 격을 찬탈하여, 그 고결한 척하는 신성을 내 영혼의 먹이로 삼겠다. 그것이 회귀한 사냥개, 한연우가 선택한 유일한 생존법이자 복수의 방식이었다.

***

계약식장 건물 밖으로 나오자 차가운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네온사인이 어지럽게 빛나는 아크델리의 거리는 화려했지만, 그 이면은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성좌들의 가호를 받지 못한 하층민들은 골목 구석에 웅크린 채 마약에 취해 있었고, 거대한 길드의 차량들이 물웅덩이를 튀기며 도로를 질주했다.

연우는 빗속을 걸었다.

전신이 젖어 들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그의 신경은 오직 자신의 내면에 집중되어 있었다.

'사냥개의 발톱.'

손끝을 가볍게 움직이자, 미세한 검붉은 기류가 손가락을 감싸 안았다.

아직은 미약했다. 사냥한 성좌가 없기 때문에 권능의 출력은 바닥이었다. 하지만 이 힘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신성을 찢는 이빨. 이것만 있다면 아무리 거대한 성좌라 해도 목덜미를 뜯어내고 그 격을 찬탈할 수 있다.

문제는 대가였다.

'정신적 신성 오염.'

성좌의 격을 강탈할 때마다 그들이 가진 우주적 광기와 탐욕이 영혼을 잠식한다. 결국에는 이성을 잃고 피에 굶주린 마수로 변하게 되는 저주.

‘알고 있다.’

회귀 전, 그가 성좌들의 목을 베며 마지막 순가까지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은 끊임없이 더 거대한 성좌를 사냥해 힘의 균형을 강제로 억눌렀기 때문이었다. 멈추는 순간 마수가 된다. 사냥을 계속해야만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는 모순적인 굴레.

"하하."

연우의 입에서 건조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차피 인간으로 얌전히 죽을 생각 따위는 없었다. 성좌들의 대가리를 전부 깨부술 수만 있다면, 영혼이 마수로 조각나도 상관없었다.

그가 발걸음을 옮겨 낙후 구역의 좁고 어두운 골목으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스스스스.

빗소리 사이로 기이한 마찰음이 섞여 들었다.

골목 안쪽의 가로등이 치직거리며 불을 밝혔다 꺼뜨리기를 반복했다. 짙은 핏빛 안개가 바닥에서부터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연우는 걸음을 멈추었다.

피비린내가 빗물에 씻기지 않고 코를 찔렀다. 골목 벽면에 새겨진 황금색 문양이 어둠 속에서 기괴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성좌, '황금의 포식자'의 잔재가 감지됩니다.] [하급 도살자 마수가 당신의 기이한 파동을 감지하고 굶주림을 드러냅니다.]

"벌써 냄새를 맡았나."

연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계약식장에서 성좌의 가호를 거부하고 이단자 판정을 받은 그의 영혼은, 성좌들의 하수인들에게 가장 맛좋은 먹잇감이자 제거 대상이었다.

스르륵.

어둠 속에서 네 개의 붉은 눈동자가 번뜩였다.

길이 2미터는 족히 넘어 보이는 형상의 괴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온몸의 가죽이 벗겨진 채 붉은 근육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고, 대가리 대신 거대한 아가리가 세로로 찢어져 있었다. 이빨 사이로 황금빛 침이 뚝뚝 떨어졌다.

성좌 '황금의 포식자'가 부리는 하급 도살자 마수였다.

크르르르르.

괴수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빗방울이 괴수의 뜨거운 가죽에 닿아 기화하며 하얀 김을 피워 올렸다. 녀석의 시선이 연우의 목덜미에 고정되어 있었다. 신성을 거부하는 불순한 영혼을 뜯어먹고 성좌에게 바치려는 본능적인 갈망이었다.

연우는 등 뒤로 손을 뻗었다.

무기는 없었다. 회귀하기 전 쓰던 도살도는 지금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맨손뿐이었다.

하지만 두려움은 없었다. 오히려 심장박동이 빨라지며 기분 좋은 긴장감이 전신을 채웠다.

"와라."

연우가 나직하게 읊조린 순간.

파아앗!

괴수가 빗줄기를 뚫고 탄환처럼 돌진했다. 거대한 아가리가 연우의 목덜미를 향해 무섭게 호선을 그리며 덮쳐왔다. 날카로운 황금빛 이빨이 연우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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