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연무가 역사 천장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콘크리트 파편이 비 오듯 쏟아지는 승강장 바닥, 뒤틀린 철로의 틈새에서 검은 그림자가 기어 나왔다.
백도훈이었다.
그의 무릎 가죽은 이미 찢겨 나가 붉은 살점이 드러나 있었다. 온몸에 그을린 냄새를 풍기면서도, 백도훈의 입꼬리는 기괴하게 치솟아 있었다. 그의 오른손에는 반쯤 깨진 청동 인장이 쥐어져 있었다. 성좌와의 밀약을 증명하는 전령 인장이었다.
"하하, 하하핫! 아직 안 끝났다. 이 아크델리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내 손바닥 안이야."
백도훈이 피 섞인 침을 뱉으며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의 눈동자에 서린 것은 단순한 악의가 아니었다. 그것은 성좌의 권능을 빌려 인간 위에 군림하려는 자 특유의 맹신이었다.
"내가 이 국가의 법이다. 성좌가 내게 모든 각성자의 처단권을 허락했다! 감히 사냥개 따위가 내 목을 노려?"
인장에서 뿜어져 나온 황금색 사슬들이 허공을 가르며 연우를 향해 쇄도했다. 공기를 찢는 궤적은 매서웠으나, 연우의 눈에는 느려 터진 움직임에 불과했다.
연우는 바닥을 찼다.
고무 탄성처럼 수축했던 신체가 앞으로 튀어나갔다. 황금 사슬이 연우가 서 있던 자리를 강타해 보도블록을 가루로 만들었다. 먼지 구덩이를 뚫고 나온 연우의 신형이 백도훈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어디……!"
백도훈이 고개를 돌리기도 전이었다.
연우의 오른발이 백도훈의 뒤통수를 정확히 후려쳤다.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백도훈의 고개가 꺾였다. 바닥에 처박힌 그의 몸이 두어 번 구르다 멈췄다. 허무할 정도의 제압이었다. 인장은 힘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뇌가 절여졌군."
연우가 차갑게 읊조렸다.
그러나 승리를 음미할 여유는 없었다. 백도훈을 쓰러뜨린 순간, 연우의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불길이 치솟았다.
"컥……!"
연우가 가슴을 움켜쥐며 무릎을 꿇었다.
단순한 내상이 아니었다. 영혼의 심처에서부터 솟구치는 이물질의 역류였다. 최근 연이어 사냥한 성좌들의 신성, 특히 '심판의 황금 저울'을 무리하게 찬탈한 대가가 마침내 터져 나온 것이다.
[경고: 영혼의 신성 오염도가 임계치(95%)에 도달했습니다.] [시스템 경고: 자아 붕괴의 위험이 감지됩니다. 마수화(魔獸化) 제어 시스템이 오작동합니다.]
귓가를 때리는 붉은색 경고창들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전신이 찢어지는 듯한 감각에 연우의 손가락이 바닥의 콘크리트를 파고들었다. 손톱이 뒤집히며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그 피는 붉지 않았다. 검은 연기를 피워 올리는 타르처럼 탁하고 어두웠다.
"아아아아윽!"
비명이 이빨 사이로 터져 나왔다.
피부 표면 밑으로 무언가 꿈틀거리며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돋아나는 것은 검은 가시들이었다. 인간의 뼈가 아닌, 심연의 마수들이 지닌 융기물들이 살을 뚫고 돋아나려 요동쳤다. 머릿속에서는 수천 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울부짖었다. 사냥당한 성좌들의 원한과 탐욕이 그의 이성을 난도질하고 있었다.
죽여라. 전부 찢어발겨라. 이 세계를 통째로 삼켜라.
"닥쳐……!"
연우가 제 머리를 바닥에 짓찧었다. 충격으로 이마가 깨져 피가 흘렀지만, 영혼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몸이 점점 무거워졌다. 팔다리의 근육이 비정상적으로 팽창하며 인간의 규격을 벗어나려 하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이성을 잃은 마수가 되어 아크델리 전체를 도살하는 괴물로 전락할 터였다.
그때, 시야를 가득 메운 검은 연무 사이로 발소리가 들렸다.
사뿐하고, 흔들림 없는 발소리.
엘리시아였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연우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의 품에는 칠흑처럼 어두운 흑색 구체가 들려 있었다. 표면에 수많은 미세한 균열이 가 있어, 당장이라도 깨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이는 고대의 유물이었다.
"한연우."
엘리시아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마치 불타는 지옥 속에서 홀로 얼어붙은 얼음 조각 같았다.
"비켜……! 당장 꺼져!"
연우가 으르렁거렸다. 그의 눈동자는 이미 흰자위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검게 물들어 있었다. 폭주하는 마기가 그의 주변 사방 수 미터를 초토화하고 있었다. 근처에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영혼이 타버릴 화염이었다.
하지만 엘리시아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연우의 바로 앞까지 걸어와 무릎을 꿇었다. 폭주하는 검붉은 마기가 그녀의 뺨을 스치며 긴 머리카락을 태우고 살갗을 베어냈다. 붉은 선혈이 그녀의 고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엘리시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당신은 여기서 멈출 사람이 아니야."
엘리시아가 조용히 단검을 꺼내 들었다.
그녀의 시선이 제 왼쪽 가슴을 향했다. 단검의 끝이 옷감을 뚫고 심장이 고동치는 살갗에 닿았다.
"무슨 짓을……!"
연우가 손을 뻗으려 했으나, 제멋대로 뒤틀리는 근육 때문에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서걱.
가차 없는 칼날의 궤적이 엘리시아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나 그녀의 손길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가슴팍에서 피어오른 붉은 심장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엘리시아는 망설임 없이 그 피를 품에 안은 흑색 구체의 균열 위로 쏟아부었다.
화아아악!
그녀의 순수한 심장 피가 닿자, 흑색 구체의 미세한 균열들이 붉은 빛을 발하며 반응하기 시작했다. 유물 내부에 봉인되어 있던 고대의 성좌 전용 정화 결계가 해방되는 순간이었다.
구체의 균열이 점점 더 넓어지며, 그 사이로 눈이 멀 것 같은 백색의 안개가 내뿜어졌다. 안개는 이내 거대한 소용돌이가 되어 연우의 전신을 감싸 안았다.
"아아아아!"
연우의 몸에서 검붉은 마기가 비명을 지르며 뿜어져 나왔다.
정화의 에너지는 가혹했다. 연우의 영혼에 들러붙어 있던 성좌들의 오염된 신성이 백색의 화염에 타오르기 시작했다. 뼈를 깎아내고 영혼을 세척하는 고통에 연우는 전신을 떨었다.
그러나 그 고통의 끝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단순히 소멸시키는 정화가 아니었다. 엘리시아의 피를 매개로 발동한 결계는, 연우의 영혼 속에 날뛰던 검붉은 탁기를 고도로 여과하고 있었다. 불순물이 타버린 자리에 남은 것은 극한으로 정제된 순수한 마력이었다.
검붉은 마기가 서서히 빛깔을 바꾸기 시작했다.
탁한 어둠이 걷히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찬란하게 타오르는 황금색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성좌들이 부리는 비굴한 황금빛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불사르고 멸하는, 파괴적이고도 고결한 '황금 멸살염(滅殺炎)'이었다.
[오염도 급격히 저하: 95% -> 40%] [경고 해제. 영혼의 격이 안정화됩니다.] [찬탈한 신성의 고속 융합이 시작됩니다.] [고유 권능 '사냥개의 발톱'이 '영강(靈彊)' 등급으로 무장 강화를 완료했습니다.]
연우의 눈동자에서 검은 빛이 완전히 사라졌다. 대신 그 눈동자는 타오르는 황금빛 불꽃으로 가득 찼다.
살을 뚫고 돋아나려던 검은 가시들은 황금빛 마력의 불길에 녹아내려 연우의 피부 속으로 스며들었다. 찢어졌던 근육이 급속도로 재생되며 이전보다 훨씬 더 단단하고 정밀한 형태로 재구성되었다. 영혼의 균열이 메워지고, 그 위에 무상위 멸살의 제왕 마검사로서의 격이 굳건히 내려앉았다.
환골탈태였다.
연우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이 가벼웠다. 전신을 흐르는 마력은 마치 잔잔한 호수 같으면서도, 언제든 폭발할 준비가 된 화산과 같았다. 일체의 잡음이 사라진 완벽한 통제 상태였다.
그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끝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황금 멸살염이 보였다. 성좌의 힘을 빌려 쓰는 가호자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오직 사냥개만이 다룰 수 있는 순수한 찬탈의 힘이었다.
"하아……."
연우가 더운 숨을 뱉었다. 그의 시선이 옆으로 쓰러진 엘리시아에게 향했다.
그녀는 가슴을 움켜쥔 채 창백한 얼굴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흑색 구체는 모든 힘을 소진한 듯 빛을 잃고 바닥에 굴렀다.
"쓸데없는 짓을."
연우가 건조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의 손은 엘리시아의 어깨를 짚고 있었다. 그의 체내에서 정제된 온화한 마력이 엘리시아의 상처로 흘러들어 가 지혈을 돕기 시작했다.
"당신이…… 살아야, 내 복수도 끝나니까."
엘리시아가 핏기 없는 입술로 희미하게 웃었다. 그녀는 이 상황에서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연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를 안전한 열차 벽면에 기대어 눕혀두었을 뿐이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발치에서, 뒤통수를 얻어맞고 기절해 있던 백도훈이 신음을 흘리며 깨어나고 있었다. 백도훈은 으스러진 턱을 움켜쥐며 사지를 버둥거렸다.
"끄으윽…… 아, 아악!"
백도훈이 머리를 흔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눈에 비친 것은 이전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내는 연우의 형상이었다. 연우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황금 멸살염의 열기만으로도 백도훈의 피부가 따갑게 타들어 갔다.
"너, 너 어떻게…… 괴물이 되지 않은 거지? 그 정도의 신성을 삼켰으면 자아가 붕괴했어야 해!"
백도훈이 뒷걸음질 치며 비명을 질렀다. 그의 손이 본능적으로 품속을 뒤적였다. 그가 꺼내든 것은 낡은 마도 무전기였다.
연우는 가만히 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도망칠 기회를 주는 것이 아니었다. 사냥감이 마지막 발악을 하는 모습을 관조하는 포식자의 여유였다.
치지직.
무전기 너머로 다급한 신호음이 울렸다. 백도훈이 미친 듯이 소리쳤다.
"최태건! 최 길드장! 들리나? 당장 지원을 보내라! 이놈이…… 이 사냥개 놈이 신성을 완전히 제어했다! 어서 수호성을 강림시켜야 해!"
수화기 너머에서는 오직 차가운 정적과 바람 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최태건은 이미 아크델리의 전황이 기울었음을 직감하고 도주한 지 오래였다.
"이, 이 빌어먹을 새끼가 나를 버려?"
백도훈의 얼굴이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그러나 이내 그는 연우를 노려보며 이빨을 드러냈다. 그의 눈에 마지막 광기가 어렸다.
"한연우! 착각하지 마라! 네가 날 죽일 수 있을 것 같나?"
백도훈이 무전기를 내팽개치고 품에서 붉은 가죽으로 된 법률 문서를 꺼내 들었다.
"가호자 특별 면책 조항 제12조! 나는 성좌 '황금의 군주'와 정식 계약을 맺은 사법 대리인이다! 국가 법치 체계가 존속하는 한, 공권력은 나를 보호할 의무가 있어! 네가 날 죽이는 순간, 너는 이 국가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대역죄인이 되는 거다!"
백도훈이 사지가 으스러진 상태에서도 상체를 치켜세우며 소리쳤다.
"어디 쳐 봐라! 사법의 단죄를 받는 것은 내가 아니라, 법을 어긴 네놈이다!"
그것은 굳건한 현대 사법 질서의 방패 뒤에 숨은 기생충의 마지막 전면 항해였다.
연우가 천천히 백도훈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발걸음마다 승강장 바닥이 황금빛 불꽃으로 그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