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시 플랜 C를 가동한다! 길드의 모든 가용 자산을 동결 해제하고, 남은 아크델리 방목 시민들의 혼을 전량 강제 제물로 공여하라! '태양의 찬란한 지배자' 강림 제단을 즉시 축조하라! 이것은 길드장님의 최종 명령서에 따른 조치다! 모두 바쳐라! 단 한 명도 남김없이!"
무전기 너머에서 터져 나온 비명은 쇳소리를 내며 끊겼다. 송수신기가 완전히 과열되어 검은 연기를 뿜었다.
연우는 발끝으로 무전기 잔해를 짓밟아 으스러뜨렸다. 플라스틱과 금속 기판이 바스러지는 감각이 군화 밑창을 통해 선명하게 전해졌다.
사방은 고요했다. 무너진 대리석 기둥 사이로 뿌연 먼지가 안개처럼 자욱하게 깔려 있었다. 성좌 '심판의 황금 저울'의 육신이 소멸한 자리에 남은 것은 타버린 회색 재뿐이었다.
연우의 호흡은 거칠었다. 찬탈한 신성이 영혼의 가장자리를 사정없이 갉아먹고 있었다. 심장 박동이 비정상적으로 빨라졌다. 늑골 안쪽에서 뜨거운 진흙 같은 것이 끓어오르는 기분이었다.
"연우 씨."
옆에서 차가운 감촉이 닿았다. 엘리시아의 손가락끝이 연우의 손목을 짚었다. 그녀의 다른 손에는 수많은 미세한 균열 흔적이 쩍쩍 갈라진 흑색 구체 유물이 들려 있었다. 구체의 틈새에서 흘러나온 이질적인 검은 마력이 연우의 피부를 타고 스며들었다.
맥박이 서서히 정상 궤도를 찾았다. 끓어오르던 핏속의 광기가 가라앉으며 시야가 맑아졌다.
"균열이 더 깊어졌군."
연우가 구체를 바라보며 건조하게 말했다. 엘리시아는 시선을 내린 채 구체를 품속으로 밀어 넣었다.
"아직은 버틸 수 있어요. 당신의 사냥이 끝날 때까지는."
말투에는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두려움도, 슬픔도 마비된 눈동자가 연우의 얼굴을 담았다. 연우는 대꾸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무너진 법대 구석, 대리석 더미 밑에서 신음가 흘러나왔다.
"허억, 흑……."
백도훈이었다. 사법 길드 '천상의 정의'를 이끌며 아크델리의 법을 주무르던 부장검사. 그의 단정한 정장은 흙먼지와 피로 얼룩져 있었다. 한쪽 다리가 무거운 돌덩이에 깔린 채, 그는 품 안의 서류 가방을 필사적으로 움켜쥐고 있었다.
연우가 그에게 걸어갔다. 군화 소리가 콘크리트 바닥을 규칙적으로 때렸다.
"오지 마라."
백도훈이 이빨을 드러내며 가방을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의 손 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내가 누구인지 잊었나? 나는 이 구역의 사법 집행관이다. 네놈이 저지른 짓은 초법적 테러다. 국가가, 그리고 성좌가 네놈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성좌?"
연우가 걸음을 멈추고 백도훈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서린 황금빛 잔영이 백도훈의 얼굴을 비추었다.
"네가 믿던 저울은 이미 내가 씹어 삼켰다.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보군."
"닥쳐라! 내 품에는 아직 기소 처분서가 있다. 성좌 가호자 특별 면책 제12조의 이중 예외 위하 조항에 의거해, 네놈의 신성 찬탈 행위는 국가 안보 위협죄로 즉각 기소된다! 이 서류가 전송되는 순간, 너는 합법적인 사형수다!"
백도훈의 목소리에 광기가 어렸다. 그는 가방 속에서 붉은 직인이 찍힌 서류철을 꺼내 들었다. 과거 백도훈이 한연우를 완벽하게 사법적으로 옭아매기 위해 작성했던 비장의 카드였다. 성좌의 권능을 사유화한 자들을 처단하기 위해 만든 형법의 허점. 그것을 이제 연우에게 들이밀고 있었다.
연우는 피식 웃었다.
"그 이중 예외 조항, 꽤 머리를 썼더군."
"알면 무릎을 꿇어라! 법은 아직 살아있다!"
"아니."
연우가 오른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에서 황금빛 신성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방금 전 찬탈한 '심판의 황금 저울'의 파편이었다. 백도훈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크게 벌어졌다. 자신이 평생을 바쳐 공양했던 신의 불꽃이, 자신을 겨누고 있었다.
"법을 만드는 건 힘이다. 그리고 지금 그 힘은 내게 있지."
황금빛 불꽃이 백도훈의 손에 들린 서류철로 옮겨붙었다.
화르륵!
"안 돼! 안 된다!"
백도훈이 비명을 지르며 불길을 끄려 했다. 하지만 신성의 불꽃은 인간의 손길 따위로 꺼지는 것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종이 뭉치가 검은 재로 변해 허공으로 흩어졌다. 백도훈이 평생을 걸쳐 구축해 온 사법적 올가미가, 그가 숭배하던 신의 불꽃에 의해 한 줌의 먼지가 되었다.
"끝났다, 백도훈."
연우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너는 더 이상 사법의 대리인이 아니다. 그저 세금을 포탈하고 신성을 불법 유통한 범죄자일 뿐이지."
"이, 이 괴물 같은 놈……!"
백도훈이 핏발 선 눈으로 연우를 노려보았다. 연우는 더 이상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사법적 권위를 잃은 사냥개는 더 이상 사냥감조차 되지 못했다.
터벅, 터벅.
먼지구덩이 너머에서 구두 굽 소리가 들려왔다. 가죽 코트를 입은 여자가 어둠을 헤치고 걸어 나왔다. 특별 세무 수사관, 서하진이었다. 그녀의 손에는 연방 정부의 직인이 찍힌 두꺼운 서류 가방이 들려 있었다.
"상황이 아주 깔끔하게 정리되었군요, 한연우 씨."
서하진이 주변의 참상을 둘러보며 안경을 치켜올렸다. 그녀의 눈빛에는 두려움 대신 기이할 정도의 흥분과 집념이 서려 있었다.
"백도훈의 기소권은 이제 무효입니다. 방금 연방 세무청과 행정안전부로부터 공식 서한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백도훈을 서늘하게 내려다보며 서류 한 장을 꺼내 던졌다.
"성좌 '심판의 황금 저울'의 소멸로 인해, 사법 길드 '천상의 정의'가 보유했던 모든 사법 면책권은 박탈되었습니다. 또한, 아크델리 지청 내부에 신설된 제 사무소는 오늘부로 '사법 독립 감사부'로 승격되었습니다."
"사법 독립 감사부?"
백도훈이 피를 토하듯 물었다. 서하진이 차갑게 미소 지었다.
"쉽게 말해, 이제 아크델리 내에서 성좌와 결탁한 각성자들을 합법적으로 탈탈 털어버릴 권한이 제게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한연우 씨는 저희 감사부의 '공식 수사 협조관'으로 등록되었습니다."
그것은 완벽한 신분 반전이었다. 사법의 이름으로 연우를 처단하려던 자들이, 이제 연우가 쥔 합법적인 법률의 칼날 아래 목을 내밀어야 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서하진은 연우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 깊은 경외감이 깃들어 있었다.
단 한 명의 무가호 각성자가 신을 도살하고 법을 재정의했다. 이 남자의 뒤에 서 있는 한, 자신이 갈망하던 조세 정의와 초법적 길드들의 파멸은 현실이 될 터였다.
"이제 골든 크라운 길드의 목줄을 죌 차례입니다."
서하진이 단호하게 말했다.
"가자."
연우가 앞장섰다. 엘리시아와 서하진이 그 뒤를 따랐다. 무너진 법정의 잔해를 밟고 밖으로 나오자, 차가운 밤공기가 얼굴을 때렸다.
* * *
사흘 뒤.
아크델리 특별지구 중앙 광장.
거대한 홀로그램 전광판들이 일제히 붉은색 경고등을 깜빡이고 있었다. 광장에 모여든 시민들은 웅성거리며 화면을 주시했다.
[긴급 속보: 골든 크라운 길드, 수호성좌의 신성 면책 계좌 강제 동결.] [세무 감사부, 골든 크라운의 자산 94%에 대한 압류 집행 개시.] [아크델리 특별지구 행정망 마비 우려…….]
화면 가득 흘러나오는 뉴스들은 하나같이 골든 크라운 길드의 파멸을 가리키고 있었다. 성좌 '심판의 황금 저울'이 사라지자, 길드가 누리던 초법적 세무 혜택이 도미노처럼 무너져 내린 결과였다.
"대단하군."
광장 모퉁이의 그늘진 골목. 가죽 재킷의 깃을 올린 연우가 전광판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서하진이 제법 쓸 만하게 움직였어. 길드의 자금줄이 완전히 묶였다."
"하지만 그들이 순순히 무너지진 않을 거예요."
옆에 선 엘리시아가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품속에 숨겨둔 흑색 구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한기가 그녀의 옷자락을 타고 서리로 변해 내리고 있었다. 구체의 표면은 이제 절반 이상이 미세한 균열로 뒤덮여 있었다.
"그들은 갈 곳이 없어요. 쥐도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이죠."
"물어봐야 이빨만 부러질 뿐이다."
연우의 눈이 잔혹하게 가라앉았다. 그의 목적은 골든 크라운 길드의 파산이 아니었다. 그들의 배후에 있는 성좌, 인류를 유희거리로 삼았던 그 오만한 존재들의 목을 모조리 베어 넘기는 것뿐이었다.
그때였다.
웅웅웅-.
갑자기 아크델리 전역의 지면이 미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가로등의 불빛이 격렬하게 흔들렸고, 공중의 홀로그램 전광판들이 지지직거리는 노이즈와 함께 일그러졌다.
"음?"
연우가 고개를 들어 전광판을 응시했다.
파란색 뉴스 화면이 순식간에 핏빛 적색으로 물들었다. 기이한 고주파 소음이 도시 전체를 가득 채웠다. 광장에 모여 있던 시민들이 귀를 막으며 비명을 질렀다.
화면 중앙의 노이즈가 걷히며, 한 남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최태건이었다.
그의 머리카락은 하얗게 세어 있었고, 눈동자는 붉은 핏발로 가득 차 있었다. 평소의 오만하고 정돈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화면 너머의 최태건은 짐승처럼 헐떡이며 광기 어린 미소를 짓고 있었다.
- 아크델리의 가축들이여. 들리는가.
그의 목소리가 확성기를 타고 도시 전체에 메아리쳤다.
- 감히 신의 은혜를 배신하고, 사냥개 놈의 발끝에서 꼬리를 흔든 대가는 참혹할 것이다. 너희가 믿던 법? 정의? 세금?
최태건이 광기 서린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뒤편으로 거대한 황금빛 제단이 솟아오르는 모습이 비쳤다. 제단 위에는 수천 명의 민간인들이 쇠사슬에 묶인 채 피를 흘리며 울부짖고 있었다.
- 오늘부로 아크델리 내의 모든 면책 12조를 중단한다. 국가의 법 따위는 이제 상관없다. 수호성좌께서 직접 이 땅에 임하실 것이다!
최태건이 화면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 안개가 제단 위의 사람들을 덮쳤다. 비명 소리가 홀로그램 전광판을 뚫고 나와 광장을 가득 메웠다.
- 전 시민이여, 강림 성좌의 가축으로 죽으라! 너희의 영혼을 제물로 바쳐, 찬란한 태양을 이 지상에 띄우겠다!
지지직!
전광판이 완전히 암전되었다. 동시에 하늘을 가득 채운 구름이 붉은색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거대한 눈동자가 지상을 내려다보는 듯한 압도적인 격(格)이 아크델리 하늘 전체를 짓눌렀다.
성좌 '태양의 찬란한 지배자'의 강림이 시작되고 있었다.
연우는 천천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붉게 타오르는 하늘이 그의 검은 눈동자에 비쳤다. 손끝의 찬탈한 신성이 굶주린 마수처럼 꿈틀거리며 포효했다.
"드디어 대가리를 내미는군."
연우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사냥터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