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강남의 한 최고급 호텔 최고층 스위트룸. 통유리창 너머로 서늘한 도시의 불빛이 내려다보이지만, 당신의 시선은 오직 대리석 테이블 위에 놓인 얇은 서류철에 고정되어 있다.

맞은편에 앉은 자이언츠 구단의 단장 대행, 송현우가 만년필 끝을 가볍게 톡톡 두드린다. 규칙적인 타격음이 방 안의 무거운 정적을 짓누른다.

"한태오 에이전트. 우리도 그룹 사치세(CBT) 기준선을 맞추기 위해 꽤나 머리를 썼습니다. 보장 금액은 낮지만, 인센티브를 전부 채우면 총액은 업계 최고 수준입니다. 강건우의 부활을 믿는다면 사인하지 못할 이유가 없잖습니까?"

당신은 서류의 수치들을 날카롭게 분석한다.

[보장 연봉 80만 달러. 인센티브 320만 달러.]

숫자 뒤에 숨겨진 독소 조항들이 잔인하게 이빨을 드러내고 있다. 메이저리그 사치세 감면과 구단 리스크 최소화를 핑계로 내건 '지옥의 인센티브'.

[인센티브 발동 조건: 시즌 180이닝 소화, 28경기 이상 선발 등판, 부상자 명단(IL) 등재 기간 15일 미만.]

미친 짓이다. 당신의 눈에 비치는 강건우의 신체 잠재력 수치는 아직 과부하를 견딜 수준이 아니다. 토미 존 수술(내측측부인대 재건술)을 거친 투수의 팔꿈치 인대 내구도는 이제 막 82% 선을 회복했을 뿐이다.

분당 2,500회전에 육박하는 건우의 강력한 포심 패스트볼은 릴리스 포인트에서 손가락 끝에 엄청난 악력을 요구하며, 투구 시 팔꿈치에 가해지는 토크는 무려 85Nm에 달한다. 이 상태에서 구단이 요구하는 '180이닝'이라는 고기 방앗간에 건우를 밀어 넣는다면, 후반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인대는 다시 비명을 지르며 파열될 것이다. 구단은 사치세를 회피하며 선수를 쥐어짜 쓰고, 부상이 재발하면 단돈 80만 달러만 던져주고 방출하면 그만인 설계다.

"이건 계약서가 아니라, 합법적인 선수 생명 말살 문서군요."

당신의 차가운 어조에 송 단장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비즈니스입니다, 한 에이전트. 시장의 평가는 냉정해요. 수술 경력이 있는 투수에게 제한 없는 풀 보증을 줄 바보 같은 구단은 없습니다. 이 조건을 거부하면 건우 군의 올 시즌 마운드 복귀는 불투명해질 겁니다."

협상의 주도권을 쥐었다고 믿는 송 단장의 눈빛에 오만한 확신이 서린다. 테이블 밑에서 주먹을 쥔 채 당신을 바라보는 강건우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마운드에 서고 싶다는 열망과, 다시 팔꿈치가 부서질지 모른다는 공포가 교차하고 있다.

당신의 머릿속에서 컴퓨터보다 빠른 연산이 시작된다. 이 벼랑 끝의 테이블을 뒤엎고, 주도권을 빼앗아 올 치명적인 한 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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