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9시의 미지근한 에어컨 바람이 콧등을 스쳤다. 눈을 깜빡이자 시야 우측 하단에 익숙한 청색 반투명 로그 창이 명멸했다.
[사후 분석 데이터베이스 로딩 완료.] [삭제된 사적 기억 조각: 대학 졸업식 날의 사진, 고등학교 시절 단짝의 이름, 그리고…….] [삭제된 인적 데이터: '한설아'와 관련된 모든 감정적 기억 및 신뢰 관계 정보.]
뇌의 일부분이 도려내어진 듯한 서늘한 두통이 관자놀이를 때렸다. 태윤은 은테 안경을 치켜올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파티션 너머로 타이핑 소리가 사납게 울렸다. 9회차 루프의 시작이었다.
정오를 지나 오후 8시 50분. 시간은 낭비 없이 흘러 파국을 향해 직진했다.
태윤은 두꺼운 기획 서류철을 오민혁의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손끝에 닿는 종이의 질감이 까칠했다. 안도의 한숨을 쉬는 찰나, 오민혁 팀장이 태윤의 서류를 공중에 찢어발기며 밤 11시까지 전원 대기할 것을 노호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이따위 쓰레기 같은 분석서를 보고서라고 들고 와? 오늘 밤 11시 전에는 아무도 이 층에서 못 나가! 전원 대기해!"
찢어진 종이 조각들이 형광등 불빛 아래서 눈송이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오민혁의 목에 선 핏대가 분노로 터질 듯 팽창해 있었다. 그의 기회주의적인 눈동자는 초조함으로 잘게 떨렸다. 본사 복귀에 눈이 먼 인간의 발악이었다.
태윤은 구두 굽에 밟히는 종이 쪼가리를 내려다보며 안경테를 고쳐 잡았다. 감정의 동요는 없었다. 뇌세포가 타들어 간 자리에 남은 것은 오직 얼음처럼 차가운 연산뿐이었다.
"팀장님, 현재 시각 20시 52분입니다. 야근 합의서 서면 작성이 누락된 상태에서의 강제 대기 지시는 사내 안전 근무 수칙 제4조 위반입니다만."
"시끄러! 수칙이고 나발이고 내 방침이 곧 규칙이야!"
오민혁이 책상을 내리쳤다. 쿵 하는 둔탁한 파열음이 사무실의 적막을 깼다.
그때였다. 머리 위의 비상 유도등이 요란한 기계음과 함께 적색으로 점멸하기 시작했다.
*위이이잉—!*
날카로운 사이렌 소리가 고막을 찔렀다. 천장의 환풍구 구멍이 무거운 쇠 마찰음을 내며 일제히 닫히기 시작했다. 강철 셔터가 내려앉듯, 17층의 모든 유리문과 엘리베이터 홀로 통하는 이중 방화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처박혔다.
"뭐, 뭐야? 아직 9시인데 왜 벌써 문이 닫혀?"
임예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볼펜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오민혁 역시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오피스 시스템 제어창에는 붉은색 글씨가 점멸하고 있었다.
[경고: 17층 구역 불시 셧다운 실행. 통제 시간 21시 00분부로 전면 폐쇄.]
"예정보다 두 시간 빠르군."
태윤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은 사무실 구석, 어둠 속에 조용히 서 있는 송진우에게 향했다. 송진우는 늘 하던 대로 소매 끝의 은색 커프스링크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 표정에는 당혹감이 없었다. 오히려 입꼬리가 미세하게 뒤틀려 있었다. 범인이 알리바이를 재설계한 결과였다. 9시 조기 폐쇄. 이 밀실 안에서 태윤을 완벽하게 고립시키기 위한 송진우의 변칙 패였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봐! 한설아 씨! 얼른 중앙 제어실에 연락해!"
오민혁이 삿대질하며 고함을 질렀다.
자리에서 일어난 한설아는 평소처럼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수화기를 들었다. 그러나 신호음은 가지 않았다. 외선은 이미 차단된 상태였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태윤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서늘하게 가라앉으며 기계적인 차가움을 띠었다.
태윤의 뇌 속 데이터베이스 로그가 경고를 보냈다.
[경고: 해당 개체는 '한설아'임. 감정적 기억 소멸. 단, 로그 상 신뢰도 99%의 동맹.]
한설아가 서류철 하나를 품에 안은 채 태윤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강 대리님, 오 팀장 컴퓨터에서 빼낸 자금 유출 내역서예요. 송 대리와 공모해서 회사 비자금을 해외 페이퍼 컴퍼니로 흘려보낸 정황이 여기 다 적혀 있어요."
태윤은 그녀가 내민 종이를 받아 들었다. 숫자와 계좌 번호가 빽빽하게 적힌 내역서였다.
"나를 어떻게 믿고 이걸 주지?"
태윤의 건조한 질문에 한설아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우린 파트너잖아요. 살아서 나가야 돈을 뜯어내든 폭로를 하든 하니까요. 대리님이 기억을 잃어가고 있다는 건 눈빛만 봐도 알아요. 하지만 내 계산은 틀리지 않아요. 대리님이 있어야 내가 살아요."
태윤은 내역서 위에 적힌 송진우의 서명과 오민혁의 전자 결재 도장을 대조했다.
"오민혁은 단순한 고기방패에 불과해. 송진우가 꼬리를 자르기 위해 오민혁의 비자금 횡령 사실을 일부러 흘렸거나, 혹은 이 폐쇄 자체를 오민혁의 독단으로 위장하려는 거다."
"하지만 이 빌딩의 산소 공급 장치까지 꺼졌어요. 17층은 완벽한 밀폐 구역이에요. 이대로 가면 11시가 되기 전에 우리 모두 질식사해요."
한설아의 지적은 정확했다. 천장의 환풍구는 완전히 차단되었고, 공기는 급격히 무겁고 뜨거워지고 있었다. 콧속으로 들어오는 산소의 밀도가 확연히 줄어드는 느낌이 피부로 전해졌다.
"커헉! 흡, 숨이…… 숨이 안 쉬어져!"
오민혁이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헤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임예은 역시 가슴을 쥐어짜며 벽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공포가 가득 찬 사무실 내부에서 오직 송진우만이 태윤을 집요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강태윤 대리."
송진우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의 목소리는 밀폐된 공간에서 기묘하게 울렸다.
"이번엔 탈출구가 없을 텐데. 기계식 셧다운은 중앙 통제실에서만 해제할 수 있어. 수칙 체계의 맹점을 아무리 파고들어도, 물리적으로 닫힌 강철 문을 열 방법은 없지. 안 그래?"
태윤은 송진우의 은색 커프스링크를 바라보았다. 번쩍이는 금속 표면에 미세한 스크래치가 가 있었다. 저 커프스링크는 사내 규정상 허용되지 않는 장신구다. 송진우는 왜 저것에 집착하는가.
뇌 속의 데이터베이스가 빠르게 연산을 수행했다.
[사내 안전 근무 수칙 제14조: 정수기 필터의 주기적 교체 규정.] [예외 조항 14-2: 배관 세척 시 사용하는 화학 물질(가연성 에틸렌글리콜 혼합제)은 가연성 예외 구역으로 지정된 문서 보관실 인접 배관실에 보관하며, 비상시 압력 밸브를 통한 강제 방출이 허용된다.]
태윤의 입꼬리가 차갑게 올라갔다.
"송 대리, 네가 설계한 알리바이는 완벽해 보이지. 하지만 넌 행정적 절차와 안전 수칙의 상호 작용을 간과했어."
"무슨 소릴 하는 거지?"
송진우의 눈주의 근육이 미세하게 실룩였다. 완벽한 계획에 균열이 생길 때 나오는 그의 고유한 신체 반응이었다.
태윤은 한설아를 돌아보았다.
"한설아 씨, 기획실 뒤편 탕비실 옆 정수기 배관실로 갑니다. 거기 정수기 필터 교체용 보관함이 있어요."
"필터요? 이 상황에 필터를 왜……."
"질문은 생략해. 살고 싶으면 움직여."
태윤은 망설임 없이 복도를 가로질렀다. 숨이 가빠왔지만 걸음걸이는 흔들리지 않았다. 산소 결핍으로 뇌가 타들어 가는 감각 속에서도 그의 이성은 칼날처럼 예리하게 벼려져 있었다.
탕비실 옆 좁은 배관실의 철문을 열자, 특유의 화학 약품 냄새가 진동했다. 선반 위에는 정수기 필터 카트리지들과 배관 세척용 파란색 플라스틱 용기가 놓여 있었다. 용기 표면에는 '가연성'을 뜻하는 붉은색 경고 마크와 함께 MSDS(물질안전보건자료)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이건 배관 세척용 화학 물질이잖아요. 가연성 물질을 여기서 태우기라도 하겠다는 건가요?"
뒤따라온 한설아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물었다.
"태우는 게 아니야. 압력을 이용하는 거지."
태윤은 정수기 필터 카트리지 여러 개를 꺼내 손으로 쪼개기 시작했다. 필터 내부에서 검은색 활성탄 가루가 쏟아져 나왔다.
"사내 안전 근무 수칙 제14조에 따르면, 배관 세척 화학 물질은 활성탄과 반응할 경우 급격한 화학적 기화 현상을 일으키며 부피가 백 배 이상 팽창한다. 그래서 이 두 물질은 동일 구역에 밀봉 보관할 수 없게 되어 있지. 하지만 이 빌딩의 관리팀은 귀찮다는 이유로 정수기 필터와 세척액을 한 공간에 쑤셔 넣었어."
태윤은 플라스틱 용기의 뚜껑을 열고 활성탄 가루를 쏟아부었다. 그리고 배관실 벽면에 붙어 있는 질소 압력 밸브의 안전핀을 드라이버로 내려쳤다.
*깡—!*
"송진우는 17층 전체를 셧다운해서 우리를 고사시키려 했지만, 이 배관실의 가연성 안전 밸브는 기계식 피스톤으로 작동해. 중앙 통제실의 전자적 제어를 받지 않는 예외 구역이지."
태윤이 화학 물질이 팽창하기 시작한 용기를 환풍구 연결 배관 입구에 밀어 넣고 밸브를 최대로 개방했다.
*슈우우우욱—!*
엄청난 압력의 가스가 배관 내부를 타고 역류하기 시작했다. 꽉 막혀 있던 17층 공조 시스템의 내부 댐퍼가 가스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강제로 튕겨 나갔다.
"콜록! 콜록!"
환풍구 구멍을 통해 갇혀 있던 탁한 공기가 빠져나가고, 외부의 신선한 공기가 배관을 타고 역류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무실 저편에서 쓰러져 있던 오민혁과 임예은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바닥을 기었다.
"살았다…… 살았어!"
오민혁이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었다.
태윤은 차가운 눈빛으로 배관실을 나왔다. 그의 손에는 한설아가 준 비자금 내역서가 들려 있었다. 기계식 셧다운의 하드웨어적 우회 단계를 성공적으로 기동한 것이다. 오피스의 모든 시스템이 배관 압력 폭발로 인해 일시적으로 비상 재기동 모드에 돌입했다.
닫혀 있던 엘리베이터 홀의 방화문이 서서히 위로 열리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
송진우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열리는 방화문을 바라보았다. 그의 완벽한 물리적 고립 시나리오가 사내 안전 수칙의 물리적 맹점에 의해 산산조각이 난 순간이었다.
태윤은 송진우의 곁을 지나치며 그의 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이번 회차의 알리바이는 실패야, 송 대리."
그때였다.
지지직거리는 잡음과 함께 머리 위의 중앙 통제실 스피커가 요란하게 울렸다. 안내원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기계음 필터를 여러 겹 겹쳐놓은 듯, 기괴하게 일그러지고 찢어진 목소리였다.
[-강태윤 대리. 머리가 아주 좋더군.]
스피커 너머의 목소리는 분명 송진우의 톤을 닮아 있었으나, 동시에 인간의 것이 아닌 듯한 기괴한 에코가 섞여 있었다.
태윤은 멈칫하며 스피커를 올려다보았다. 바로 옆에 서 있는 송진우 역시 굳어진 표정으로 스피커를 바라보고 있었다. 송진우의 목소리가 아니다. 그렇다면 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송진우의 탈을 쓴 목소리의 진짜 주인은 누구란 말인가.
[-하지만 잊지 마라. 이 방에서 나갈 수 있는 문은 오직 하나뿐이다.]
스피커의 일그러진 경고와 함께, 열리던 방화문이 다시 쾅 하는 굉음과 함께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비상등의 불빛이 완전히 꺼지며, 17층 전체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