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다음 루프에서도 네가 수칙을 기억할 수 있을까?"

송진우는 셔츠 소매 끝에 달린 은색 커프스링크를 손가락 끝으로 튕겼다. 금속이 부딪치며 내는 탁한 소리가 사방이 차단된 서버실의 정적을 깼다. 형광등의 잔광마저 사라진 암흑 속에서, 오직 서버 랙의 방열 팬이 뿜어내는 가쁜 숨소리만이 고막을 찔렀다.

태윤은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닦지 않았다. 눈앞이 흐려졌다. 뇌의 연수 부근이 뜨겁게 달아오르며 날카로운 송곳으로 후벼 파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머릿속에서 무언가 떨어져 나갔다.

시골집 마당의 평상, 그 위에 앉아 자신을 보며 희미하게 웃어주던 한 여자의 얼굴. 주름진 눈가와 따뜻했던 손길의 감각이 잉크가 번지듯 빠르게 지워졌다. 어머니라는 단어는 머리에 남았지만, 그 단어가 지칭하는 대상의 형상은 회색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경고: 대뇌 피질의 장기 기억 영역에서 '가족(모친)' 관련 데이터 세그먼트 완전 소실.] [현재 이성 유지율: 42%]

태윤은 들이쉬는 숨을 멈췄다. 폐부 깊숙이 차가운 공기를 불어넣으며 뇌의 뉴런들을 강제로 정렬했다. 슬픔도, 분노도 사치였다. 감정이 거세된 자리에 남은 것은 날 선 기계적 이성뿐이었다. 태윤은 오른손으로 안경테를 밀어 올리며 어둠 속의 실루엣을 응시했다.

"쓸데없는 도발이군, 송 대리."

목소리에는 물기가 없었다. 사막의 모래바람처럼 건조한 어조였다.

"내 기억의 유통기한을 걱정할 시간에, 네가 방금 내린 그 스위치의 무게나 계산해."

송진우의 어깨가 미세하게 들썩였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송진우는 주머니에서 회사 지급용 태블릿 PC를 꺼내 들었다. 액정의 푸른 빛이 그의 창백한 얼굴을 기괴하게 비추었다.

"이성적인 척하느라 애쓰네. 하지만 강 대리, 네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이 규칙은 못 피해."

송진우가 태블릿 화면을 태윤의 코앞으로 가밀었다. 화면에는 사내 인트라넷 메일 한 통이 띄워져 있었다.

[제목: 금일 22:50 기준 태성타워 17층 야간 특별 소방 훈련 통보 및 안전 권고사항] [발신: 안전보건기획팀 (safety@taesung-p1an.co.kr)] [본문: 금일 야간 소방 설비 정밀 점검으로 인해 17층 전 구역의 배전이 일시 차단됩니다. 안전 수칙 제12조에 의거, 정전 발생 시 서버실 내부 인원은 외부 산소 유입 및 가스 누출 방지를 위해 가스계 소화설비가 완전히 재부팅될 때까지 내부에서 대기하십시오. 임의 이탈 시 징계 조치 및 안전사고 책임은 본인에게 귀속됩니다.]

송진우가 태블릿을 거두며 낮게 속삭였다.

"수칙 제12조. 정전 시 서버실 대기. 문은 밖에서 잠겼고, 안의 산소는 두 시간이면 바닥나겠지. 네가 좋아하는 그 빌어먹을 사내 규정이 이번엔 너를 가두는 벽이 됐어. 어때?"

그는 승리를 확신한 듯 은색 커프스링크를 다시 한번 만지작거렸다. 미세하게 긁힌 자국이 남은 그 커프스링크는 송진우가 매 루프마다 몸에 지니고 다니는 유일한 집착의 표식이었다.

태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송진우의 얼굴이 아니라, 방금 스쳐 지나간 태블릿 화면의 발신인 주소에 고정되어 있었다.

머릿속의 사후 분석 데이터베이스가 빠르게 회전하며 로그 파일을 대조했다.

[데이터 검색 중...] [태성그룹 공식 기획팀 포털 도메인: taesung-plan.co.kr] [현재 메일 발신 도메인: taesung-p1an.co.kr (숫자 '1' 사용)]

"어설퍼."

태윤의 입에서 차가운 실소가 흘러나왔다.

"뭐?"

송진우의 미간이 좁아졌다.

"송 대리, 네 완벽주의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어. 네가 직접 친 덫에 네 발목이 걸리는 줄도 모르고 날뛰는 꼴이라니."

태윤은 천천히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구두굽이 타일 바닥을 찍는 소리가 불길하게 울렸다.

"발신인 주소를 봐. `taesung-plan`이 아니라 `taesung-p1an`이다. 알파벳 'l'을 숫자 '1'로 교묘하게 바꿨더군. 사내 메일 서버를 경유한 게 아니라, 외부 사설 서버로 보낸 피싱 메일이야. 사내 안전 수칙 제12조는 정전 시 '지정된 방화 구역'으로 대피하는 것이지, 산소 차단 구역인 서버실에 고립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아."

"이깟 도메인 오타 하나로 네가 여기서 빠져나갈 명분이 생길 것 같아? 문은 이미 잠겼어!"

송진우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높아졌다. 완벽한 알리바이를 자부하던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문이 잠긴 건 아무런 문제가 안 돼. 진짜 문제는 지금 우리가 딛고 서 있는 이 바닥 밑에 있지."

태윤은 바닥을 가리켰다.

"오늘 오후 2시, 17층 정수기 필터의 주기적 교체 작업이 있었다. 알고 있겠지? 시설관리팀 작업 일지에 적힌 내용이니까."

"그게 이 상황과 무슨 상관인데?"

"정수기 필터 교체 규정 제4조 나항을 보면, 필터 교체와 함께 배관 세척을 동시 진행하게 되어 있어. 그리고 배관 세척에 사용되는 화학 물질은 가연성 세척액인 '아이소프로필 알코올' 혼합물이지. 이 물질의 가연성 예외 조항에 따르면, 세척 후 12시간 동안은 배관 인근 구역의 전기 스파크 및 고온 노출이 엄격히 금지된다."

태윤의 음성이 낮고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송진우의 눈꺼풀이 잘게 떨렸다.

"서버실 전선관은 정수기 배관과 같은 피트(Shaft)를 공유해. 즉, 지금 메인 스위치를 내려서 서버실의 전류를 강제로 차단하고 다시 올리는 행위는, 배관 사이에 잔류하는 가연성 가스에 스파크를 던지는 짓과 같다."

태윤은 송진우의 손이 얹혀 있는 배전반 스위치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송 대리, 네가 지금 그 스위치를 다시 올려서 서버실을 재부팅하려는 순간, 이 방은 통째로 폭발한다. 그건 살인이 아니라 동반 자살이지. 네가 설계한 알리바이에 '동반 폭사' 같은 지저분한 엔딩도 포함되어 있었나?"

송진우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그는 메인 스위치에 얹은 손가락 끝을 떼지 못하고 굳어 버렸다. 그의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맺혀 턱밑으로 떨어졌다.

"거짓말... 거짓말하지 마, 강태윤! 그깟 세척액 가스가 여기까지 들어왔을 리가 없어!"

"믿기지 않으면 스위치를 올려봐."

태윤은 오히려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의 얼굴에는 두려움이나 망설임이 전혀 없었다. 감정이 사라진 눈동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처럼 고요했다.

"올려라. 같이 터져서 이번 루프를 여기서 끝내지. 난 어차피 다시 아침 9시 엘리베이터 앞으로 돌아갈 뿐이니까. 하지만 너는? 이 폭발의 고통을 고스란히 느끼며 죽어가는 감각을 즐길 준비가 되어 있나?"

송진우는 태윤의 눈에서 광기를 보았다. 아니, 광기조차 없는 극단적인 무(無)의 상태를 보았다. 그는 이자가 정말로 스위치를 올리라고 종용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송진우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더니, 결국 비참하게 스위치에서 떨어졌다.

"윽..."

송진우는 신음 같은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섰다. 그의 자존심이 갈갈이 찢겨 나가는 표정이었다.

태윤은 그를 지나쳐 서버실 출입문 옆에 부착된 비상용 가스 배출 밸브로 향했다. 수칙에 명시된 예외 조항대로, 가연성 가스 유출 우려 시 외부 수동 개방 장치가 작동하게 되어 있었다.

*치이익—!*

태윤이 밸브를 돌리자 기계식 잠금장치가 해제되며 철문이 무겁게 열렸다. 문틈으로 17층 복도의 희미한 비상등 불빛이 비쳐 들어왔다.

태윤은 송진우를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걸어 나왔다. 어둠 속에 홀로 남겨진 송진우의 거친 숨소리가 등 뒤에서 멀어졌다.

[경고: 인지 왜곡 지속 중. 임시 처방이 필요합니다.]

태윤은 비틀거리는 몸을 벽에 기대며 안경을 고쳐 썼다. 한설아라는 계약직 직원의 얼굴이 여전히 떠오르지 않았다. 머릿속의 데이터베이스에는 그녀가 자신과 동맹 관계라고 기록되어 있었지만, 감정적인 신뢰감은 완전히 마비되어 있었다. 오직 살기 위해 움직이는 기계가 된 기분이었다.

복도를 지나 기획 3팀 사무실로 들어선 순간이었다.

*쾅!*

유리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날카로운 고함이 정적을 찢었다.

"강태윤! 너 지금 어디 가 있었어!"

팀장 오민혁이었다. 그의 붉게 충혈된 눈이 태윤을 꿰뚫을 듯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태윤이 작성했던 주간 실적 보고서 파일이 들려 있었다. 오민혁은 광기에 찬 몸짓으로 보고서를 태윤의 면전에 내던졌다.

*좌르륵!*

하얀 종이들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오민혁은 숨을 헐떡이며 태윤의 멱살을 잡을 듯이 다가왔다.

"이따위 쓰레기 같은 보고서를 던져놓고 퇴근을 하겠다고? 오늘 밤 11시까지 전원 대기다! 한 사람이라도 이 층에서 발을 빼면, 내가 직접 본사에 고발해서 매장시켜 버릴 줄 알아!"

찢어진 종이 조각들이 태윤의 안경 너머로 힘없이 떨어졌다. 시계 바늘은 어느덧 밤 10시 5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암전의 시간이 코앞이었다.

흩날리는 종이 조각들이 태윤의 구두 앞코에 떨어졌다. 하얗게 잘려 나간 보고서 서두에는 '신사업 타당성 분석'이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태윤은 허리를 숙이지 않았다. 은테 안경 너머로 비치는 그의 눈동자는 오민혁의 붉게 충혈된 눈을 똑바로 겨냥했다.

"11시까지 대기라니요."

태윤의 목소리는 낮고 평탄했다. 감정이 빠져나간 음성은 서늘한 기계음처럼 들렸다.

"규정 위반입니다, 오 팀장님."

"뭐? 규정?"

오민혁의 입꼬리가 경련하듯 떨렸다. 그는 태윤의 멱살을 잡을 기세로 상체를 들이밀었다. 그의 목덜미에 굵은 핏대가 솟아올랐다.

"네가 지금 나한테 규정을 논해? 이 프로젝트 날아가면 나만 죽는 줄 알아? 너, 한설아, 여기 있는 새끼들 전부 한강 물에 대가리 박아야 해! 어디서 건방지게 퇴근 타령이야!"

오민혁이 침을 튀기며 고함을 질렀다. 그의 손가락이 태윤의 가슴팍을 거칠게 찔렀다.

태윤은 뒤로 반 걸음 물러서며 오민혁의 손가락을 가볍게 쳐냈다. 접촉은 최소한으로, 그러나 단호했다.

"사내 안전 근무 수칙 제7조 3항."

태윤은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22시 56분 15초. 초침이 붉은 궤적을 그리며 죽음의 시간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야간 연장 근무 지시 시, 부서장은 반드시 당일 18시 이전에 서면 서명된 '야근 합의서'를 인사팀과 안전관리팀에 제출해야 합니다. 현재 시간은 22시 56분. 승인되지 않은 강제 대기 지시는 직권남용 및 감금죄에 해당합니다."

"이 새끼가 진짜..."

오민혁이 주먹을 쥐어 올리는 순간, 사무실 구석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강 대리님 말이 맞아요."

한설아였다. 그녀는 가방끈을 움켜쥔 채 제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눈빛은 아까의 소심한 계약직 사원의 것이 아니었다. 유리를 깎아 만든 것처럼 서늘하고 기계적인 연산력이 그 눈동자 안에서 회전하고 있었다.

"이미 고용노동부 가이드라인에 따른 내부 고발 접수가 끝났습니다. 오 팀장님, 이대로 11시를 넘기시면 본사 윤리위원회에 실시간으로 채무 불이행 및 강요죄 혐의가 송신됩니다."

"한설아, 너까지 미쳤어?"

오민혁이 고개를 돌려 한설아를 윽박질렀다.

그 순간, 태윤의 시야에 복사기 옆에 서 있는 임예은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이 상황을 흥미롭다는 듯 관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은밀하게 한설아의 손끝을 향해 있었다. 한설아가 복사기 틈새로 손을 뻗어 무언가를 회수하려는 움직임을 포착한 것이다.

*스스스...*

미세한 고주파 소음. 복사기 내부에서 작동 중인 초소형 녹음기의 소리였다. 태윤의 뇌 속 데이터베이스가 경고등을 켰다.

[경고: 임예은, 한설아의 녹음기 위치 파악 확률 87%.] [대응책: 주의 분산 필요.]

태윤은 즉각 행동을 개시했다. 그는 오민혁의 책상 쪽으로 걸어가 전화를 들어 올렸다.

"안전실이죠? 기획 3팀 강태윤 대리입니다. 현재 17층 서버실에 가연성 가스 누출 가능성이 감지되었습니다. 즉시 전체 대피 경보를 발령해 주십시오."

"강태윤! 너 지금 무슨 짓거리야!"

오민혁이 수화기를 빼앗으려 달려들었다.

하지만 태윤은 이미 수화기를 내려놓은 뒤였다. 그는 주머니에서 조금 전 서버실에서 챙긴 얇은 구리선을 꺼내 오민혁의 책상 위 멀티탭 콘센트 구멍에 밀어 넣었다.

*파팍!*

강렬한 스파크와 함께 기획 3팀 사무실의 천장등이 일제히 소등되었다. 비상등의 붉은 빛만이 어두워진 사무실을 피처럼 물들였다.

"악!"

임예은이 짧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어둠 속에서 한설아가 빠르게 복사기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녹음기를 주머니에 찔러 넣는 실루엣이 보였다. 주의 분산 성공이었다.

그러나 안도할 틈은 없었다.

*스르륵.*

어두운 복도 끝에서 하나의 실루엣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송진우였다. 그의 셔츠 소매 끝에서 은색 커프스링크가 붉은 비상등을 반사하며 기괴하게 번뜩였다. 그의 손에는 종이 상자를 뜯을 때 쓰는 대형 커터칼이 들려 있었다.

*스르릉.*

칼날이 나오는 마찰음이 정전된 사무실에 소름 끼치도록 선명하게 울렸다.

"재밌네, 강 대리."

송진우가 낮게 웃었다. 그의 눈가 근육이 미세하게 경련하고 있었다. 완벽하게 설계했던 서버실 고립 시나리오가 깨진 것에 대한 가학적 흥분이었다.

"가스 누출이라니. 머리는 잘 썼어. 하지만 말야, 엘리베이터는 이미 셧다운됐고 비상계단 철문은 밖에서 걸어 잠겼어. 11시가 되기 전에 이 층을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없어."

송진우가 커터칼을 쥔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결국 여기서 죽는 건 변하지 않아."

오민혁은 송진우의 손에 들린 칼을 보고 겁에 질려 책상 뒤로 숨었다. 임예은 역시 숨을 죽인 채 벽으로 가붙었다. 오직 한설아만이 태윤의 등 뒤에서 기계적인 침묵을 지키며 상황을 분석하고 있었다.

시간은 22시 59분 10초.

루프의 종착지가 50초 앞으로 다가왔다.

태윤은 침착하게 자신의 주머니를 뒤졌다. 드라이버와 구리선, 그리고 서버실에서 수거한 가연성 세척액의 안전 데이터 시트(MSDS)가 만져졌다. 그의 머릿속 데이터베이스가 마지막 연산을 시작했다.

[남은 시간: 40초.] [이성 수치: 39%] [생존 확률: 1.2%]

송진우가 살기를 뿜으며 태윤을 향해 도약하려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천장에 달린 기계식 스프링클러 헤드에서 물이 아닌, 짙은 회색의 가스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쉬이이이익—!*

지독하게 매캐하고 인체에 유해한, 소화용 이산화탄소 가스였다. 정전과 동시에 작동한 서버실의 소방 시스템이 오작동하여 17층 전체로 가스를 분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콜록! 윽, 이게 뭐야!"

오민혁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송진우 역시 예상치 못한 가스 분출에 시야를 잃고 휘청거렸다.

어둠과 소화 가스로 가득 찬 밀실. 숨이 막혀오는 고통 속에서 태윤은 한설아의 차가운 손이 자신의 소매를 잡아끄는 것을 느꼈다.

"강 대리님, 이쪽이에요."

한설아의 목소리가 가스 소음 너머로 들려왔다. 그러나 태윤의 머릿속에서는 그녀의 이름이, 그녀의 존재 이유가 급격하게 휘발되고 있었다.

[치명적 경고: 뇌세포 괴사 진행율 급증.] [손실 데이터: '한설아'의 모든 인적 사항 및 동맹 기억 포맷 완료.]

태윤은 자신의 소매를 잡은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누구야... 당신 누구지?"

태윤의 메마른 질문에 한설아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크게 흔들렸다.

그리고 그 순간,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칼날이 태윤의 목덜미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찔러 들어왔다. 송진우의 광기 어린 미소가 붉은 비상등 불빛 아래 드러났다.

초침이 11시 정각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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