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윤 대리. 머리가 아주 좋더군.]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송진우의 음색을 기괴하게 일그러뜨린 형태였다. 금속을 긁는 듯한 기계음 필터가 서너 겹 겹쳐져 귀를 찔렀다.
태윤은 시선을 내리지 않은 채 머리 위의 둥근 스피커를 응시했다.
철컥, 쾅!
동시에 완전히 열리려던 엘리베이터 홀의 방화문이 무거운 쇳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17층 전체를 채우던 비상등의 붉은 빛마저 단숨에 점멸했다. 완벽한 암전이었다. 손바닥을 눈앞에 대도 보이지 않을 만큼 짙은 어둠이 사무실을 집어삼켰다.
"아악! 뭐야! 불 왜 꺼져!"
저 멀리 배관실 입구에서 오민혁 팀장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들렸다. 그 뒤를 이어 임예은이 바닥을 긁으며 헐떡이는 소리가 어둠을 타고 전해졌다. 산소 결핍의 여파로 가쁜 호흡들이 허공을 어지럽게 헤집었다.
태윤은 움직이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감각을 곤두세웠다.
서늘한 공기 속에서 나직한 숨소리가 들렸다. 바로 옆이었다. 송진우의 호흡은 평소와 달리 불규칙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송 대리."
태윤이 어둠을 향해 나직하게 읊조렸다.
"네 작품치고는 연출이 조잡하군."
침묵이 이어졌다. 이윽고 옷자락이 쓸리는 마찰음이 들렸다. 송진우가 제자리에서 몸을 돌리는 소리였다. 딸깍거리는 금속음이 뒤따랐다. 송진우가 습관적으로 왼쪽 소매 끝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미세하게 반짝이는 은색 커프스링크. 그 표면에 새겨진 미세한 스크래치가 태윤의 뇌리에 각인된 로그 파일과 교차했다.
3회차 루프 당시, 송진우가 서류 더미를 만지작거릴 때 보았던 그 상처였다. 수정 드래프트 파일의 모서리에 긁혀 생긴 미세한 흠집. 그는 여전히 그 비밀을 소매 끝에 매달고 있었다.
"내가 미쳤다고 저런 촌스러운 방송을 틀겠습니까, 강 대리님."
송진우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차분했으나, 미세한 균열이 묻어났다.
"하지만 재미있군요. 이 상황은 내 시나리오에도 없던 변수입니다."
"그렇겠지. 넌 17층을 완벽히 밀실로 만드는 것에만 집착했으니까."
태윤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액정 화면을 켜자 희미한 푸른 빛이 그의 은테 안경 유리에 반사되었다. 빛의 범위는 사방 1미터도 되지 않았다. 그 빈약한 광원 속으로 한설아의 얼굴이 불쑥 들어왔다. 그녀의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 기묘할 정도로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한설아가 소매 안쪽에서 무언가를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강 대리님, 저 방송은 실시간 송출이 아니에요. 노이즈의 왜곡 패턴이 일정해요. 30분 전에 미리 녹음된 파일이 루프 재생되는 방식입니다."
그녀의 손가락 끝이 가리킨 곳은 복사기 방향이었다. 복사기 내부 트레이 깊숙한 곳에 숨겨진 초소형 녹음기의 푸른 LED가 아주 미세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태윤은 안경을 밀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 기계식 셧다운이 강제 해제될 경우를 대비해 이중 안전장치를 걸어둔 거군. 시스템이 재부팅되는 순간 가동되도록 말이야."
"오민혁 팀장의 짓은 아니에요. 저 인간은 저런 복잡한 설계를 할 대가리가 없으니까."
한설아의 독설은 건조했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태윤의 스마트폰 불빛 아래로 들이밀었다. 먼지가 뽀얗게 앉은 17층의 소방 설계도면이었다.
"서버실로 가야 합니다. 방화문이 다시 내려앉았다는 건, 중앙 통제 장치가 완전히 먹통이 되었다는 뜻이에요. 하지만 서버실 내부에 있는 비상구 시스템은 달라요."
태윤은 도면 위의 특정 구역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서버실 비상구 시스템, 화재 경보 시 자동 개방 및 셧다운 차단 지연 예외 조항."
"네. 소화 가스가 분사되기 직전 3분 동안, 시스템은 물리적 탈출 경로를 확보하기 위해 모든 잠금장치를 강제로 해제해요. 그 수동 해제 레버가 서버실 안쪽에 있어요."
한설아의 설명에 태윤의 이성이 빠르게 연산을 시작했다.
머릿속 사후 분석 데이터베이스가 가동되며 푸른색 로그 파일이 시야에 겹쳐졌다.
[로그 10-04: 서버실 비상구 예외 조항 가동 조건 - 소화용 가스 분사 트리거 작동 시, 180초간 물리 락(Lock) 해제.]
하지만 그 이면에는 기괴한 규칙이 도사리고 있었다. 태윤은 뇌리에 각인된 사내 안전 근무 수칙 14조를 떠올렸다.
[수칙 14조: 정전 시 서버실 내부의 소음 진원지에 절대 접근하지 말 것. 그곳에서 들리는 소리는 서버의 울림이 아니다.]
미신 같은 문장 뒤에 숨겨진 진짜 물리적 실체를 파헤쳐야 했다. 태윤은 도면의 기하학적 구조를 응시했다. 서버실은 가로 12미터, 세로 8미터의 직사각형 구조다. 중앙에는 두 줄로 늘어선 서버 랙들이 장벽처럼 버티고 서 있다.
"서버실의 공조 시스템은 이중 바닥을 통해 아래에서 위로 냉기를 뿜어 올리지."
태윤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서늘하게 울렸다.
"그리고 벽면에 설치된 대형 쿨러 세 대가 그 열기를 빨아들여 환풍구로 보낸다. 정전이 되면 메인 쿨러는 멈추지만, 비상 전력으로 작동하는 보조 쿨러 한 대가 가동되지. 그게 바로 소음의 진원지야."
"그게 수칙 14조와 무슨 상관이죠?"
한설아가 물었다.
"기하학적 모순이지."
태윤은 펜을 꺼내 도면 위에 선을 그었다.
"보조 쿨러가 작동하는 위치는 서버실 북동쪽 모퉁이야. 이곳은 공기 흡입 압력이 극대화되는 지점이지. 만약 소화 가스가 분사되면, 압력 차이 때문에 가스가 북동쪽 모퉁이로 급격히 쏠리게 되어 있어. 즉, 소음 진원지에 접근하는 순간 고농도의 소화 가스를 정면으로 들이마시고 30초 내에 질식사하게 된다는 뜻이다."
태윤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괴생명체 따위가 아니야. 이건 철저히 공기역학적 설계와 가스 분사 노즐의 위치를 이용한 물리적 덫이다. 송진우, 혹은 이 시스템을 설계한 자가 침입자를 청소하기 위해 만든 법적 예외 조항의 악용이지."
"그렇다면 안전지대는 어디죠?"
"남서쪽 모퉁이. 흡입구의 반대편이자 쿨러의 바람이 닿지 않는 데드 존(Dead Zone). 그곳에 수동 해제 레버가 있어. 가스가 분사되더라도 그곳은 산소 농도가 가장 늦게 떨어지는 구역이다."
태윤은 도면을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모든 수수께끼가 논리의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들어가는 순간, 말할 수 없는 희열이 척추를 타고 흘러내렸다. 기괴한 사내 수칙들의 이면에 존재하는 완벽한 과학적 사실들. 그것들을 하나씩 부수고 나아가는 감각은 극상의 중독성이 있었다.
하지만 그 대가는 즉각적이었다.
"으윽……!"
태윤이 관자놀이를 움켜쥐며 비틀거렸다. 뇌수를 송곳으로 휘젓는 듯한 극심한 편두통이 밀려왔다. 눈앞이 흐려지며 시야의 로그 파일들이 지지직거리며 깨졌다.
머릿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소중한 기억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는 감각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사각, 사각.*
지워진다.
어린 시절, 비가 내리던 날 초등학교 운동장 앞에서 노란 우산을 들고 서 있던 누군가의 실루엣이 뿌옇게 지워졌다. 그가 자신을 부르던 다정한 목소리가 무음 처리가 되듯 사라졌다. 어머니였던가? 아니면 누나였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얼굴의 윤곽도 이제는 안개 속의 풍경처럼 형태조차 알아볼 수 없었다.
태윤의 동공이 풀렸다가 이내 기계처럼 차갑게 다시 좁혀졌다. 감정이 빠져나간 자리에 오직 차가운 이성과 데이터 분석력만이 납작하게 들어찼다.
태윤은 제자리에 멈춰 서서 한설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더 이상 인간적인 온기가 남아 있지 않았다. 은테 안경 너머의 눈동자는 유리알처럼 무기질적이었다.
"한설아 씨."
태윤의 목소리는 고장 난 기계가 내는 소리처럼 건조했다.
"내 뇌의 데이터베이스는 완벽하다. 하지만 내 사적인 영역의 데이터는 영구 결손되고 있어. 방금 전에도 아주 중요한 아카이브 하나가 삭제됐다."
한설아는 침묵을 지키며 태윤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녀의 차가운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태윤의 무기질적인 눈빛을 받아내고 있었다.
"이대로 루프가 반복되면, 나는 결국 목적성조차 잃어버린 채 오직 생존 연산만 반복하는 괴물이 될 거다. 내가 누구인지, 왜 이 빌딩에서 나가야 하는지도 잊어버린 채."
태윤이 한설아의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뼈마디가 드러날 정도로 강한 악력이었다.
"약속해라. 만약 내가 나 자신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거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내 뺨을 갈겨서라도 깨워. 내가 누구인지, 우리가 왜 이 짓을 하고 있는지 네가 내 뇌에 수동으로 입력해."
한설아는 태윤의 강한 손길에도 인상을 찌푸리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태윤의 손을 맞잡았다. 그녀의 손바닥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걱정 마세요, 강 대리님. 당신이 미쳐버리면 내 비자금 장부도, 이 지옥에서의 탈출도 날아가니까. 당신의 이성은 내가 아주 잔인하게 이용할 겁니다. 그러니까 영혼이 닳아 없어지더라도 뇌는 살려두세요."
상호 생존을 위한 기괴하고도 잔혹한 서약이었다.
두 사람은 어둠을 뚫고 서버실 문 앞으로 향했다.
도중에 바닥을 기고 있던 오민혁이 태윤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강 대리…… 나 좀 살려줘…… 나 본사로 돌아가야 해…… 여기서 죽을 순 없어……."
태윤은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았다. 다리를 가볍게 흔들어 오민혁의 손을 떼어냈다.
"팀장님, 수칙 3조를 잊으셨습니까. '위기 상황 시 각자의 업무 영역을 고수할 것.' 팀장님의 업무는 여기서 품위 있게 버티는 겁니다."
태윤의 냉소적인 대꾸에 오민혁은 멍하니 손을 놓았다.
서버실의 두꺼운 철문이 눈앞에 나타났다. 손잡이를 잡자 정전기의 미세한 스파크가 기분 나쁘게 튀었다.
태윤이 문을 밀어 열었다.
*위이이이이이이잉—*
서버실 내부는 거대한 기계의 무덤 같았다. 수백 대의 서버가 내뿜는 미세한 열기와, 비상 전력으로 간신히 돌아가는 보조 쿨러의 굉음이 고막을 압박했다. 바닥의 이중 플레이트 틈새로 차가운 바람이 올라와 발목을 적셨다.
"남서쪽 모퉁이로 갑니다."
한설아가 앞장서려 하자, 태윤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대기해. 소화 가스 수동 제어반의 압력 수치를 먼저 확인해야 한다."
태윤이 벽면에 설치된 제어반의 유리창을 손전등으로 비추었다. 붉은색 바늘이 이미 위험 구역인 노란색 선을 넘어 빨간색 영역으로 치닫고 있었다. 누군가 강제로 가스 분사 타이머를 조작한 흔적이었다.
그때였다.
서버실 내부의 거대한 쿨러 소음 사이로, 기묘한 마찰음이 섞여 들기 시작했다.
*스스스슥…… 스스스슥……*
마치 무거운 가죽 부대를 바닥에 쓸며 걸어오는 듯한 기괴한 소리였다. 수칙 14조의 경고가 머릿속에서 다시 한번 사이렌처럼 울렸다.
[그곳에서 들리는 소리는 서버의 울림이 아니다.]
태윤은 손전등의 불빛을 소리가 나는 북동쪽 모퉁이로 비추었다.
빛의 끝에 걸린 것은 괴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대한 비닐막이었다. 보조 쿨러의 강력한 흡입력 때문에 서버 랙 사이에 걸려 있던 가연성 비닐 보호막이 펄럭이며 내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 비닐막 바로 뒤에, 메인 가스 분사 밸브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과연."
태윤이 차갑게 중얼거렸다.
"이 소음으로 공포심을 유발해 침입자가 남서쪽의 진짜 수동 해제 레버로 접근하지 못하게 만들고, 북동쪽의 막다른 길로 유도하는 장치였군. 심리적 맹점을 이용한 완벽한 공간 설계야."
그 순간, 서버실의 문이 뒤에서 육중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철컥.
잠금장치가 걸리는 소리였다.
태윤과 한설아는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서버실 입구,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비상용 랜턴의 푸른 빛이 스르륵 피어올랐다. 빛이 비춘 것은 아래에서 위로 기괴하게 꺾인 그림자, 그리고 그 실루엣의 주인인 송진우였다.
송진우는 한 손에 비상용 랜턴을 들고, 다른 한 손은 벽면에 설치된 서버실 메인 정전 스위치와 가스 강제 분사 레버 위에 얹고 있었다.
그의 눈주위가 기묘하게 일그러지며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가학적인 쾌감과 극도의 흥분이 뒤섞인 소시오패스의 전형적인 표정이었다.
"강 대리님."
송진우가 낮게 속삭였다. 그의 숨소리가 어둠을 가르고 뱀처럼 기어왔다.
"이 방에서 나갈 수 있는 문은 오직 하나뿐이라고 말씀드렸잖습니까."
그의 손가락 끝이 붉은색 강제 분사 레버를 서서히 아래로 당기기 시작했다.
"이번 회차의 엔딩은 좀 더 정숙했으면 좋겠군요."
송진우가 스위치를 완전히 움켜잡으며 광기 어린 숨소리를 내뿜는 순간, 서버실의 모든 잔류 전력이 완전히 소멸하며 사방이 완전한 지옥의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