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이거예요.”

한설아가 가죽 가방의 지퍼를 완전히 열어젖히며 속삭였다. 갈색 파우치 틈새로 비친 USB 메모리의 금속 단자가 회의실의 미약한 비상등 불빛을 받아 차갑게 반짝였다. 빽빽한 숫자와 계좌 번호가 인쇄된 서류 모서리가 그녀의 손끝목덜미 아래에서 흔들렸다.

“태성그룹 신사업추진 3팀의 비자금 이중 장부. 오민혁 팀장과 본사 임원들이 숨기려던 진짜 기록이 여기 들어 있어요.”

태윤은 은테 안경을 치켜올렸다. 렌즈 너머로 한설아의 눈동자를 관찰했다. 비정상적일 정도로 평온한 고요함이 그 안에 고여 있었다. 사후 분석 데이터베이스의 로그 파일에는 존재하지 않던 변수였다. 지옥 같은 루프 속에서 매번 흩어지던 기억의 조각들이 이 순간만큼은 예리한 각도로 맞춰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걸로 뭘 하겠다는 겁니까.”

태윤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감정이 섞이지 않은 질문은 칼날처럼 곧게 뻗어 한설아의 미간에 닿았다.

“거래를 해야죠. 살아남기 위한 거래.”

한설아가 파우치를 다시 가방 속으로 밀어 넣으며 몸을 굽혔다. 가죽 지퍼가 맞물리는 소리가 서늘하게 방 안을 채웠다.

“강 대리님은 이 루프를 깨고 싶어 하고, 저는 제 몫의 합의금을 원해요. 목표는 다르지만 수단은 같아요. 오민혁을 무너뜨리고 송진우의 발을 묶는 것.”

태윤은 대답 대신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회의실의 유리창 너머 복도 끝에서 구두 굽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규칙적이고 신경질적인 굽 소리. 임예은의 발소리였다.

태윤은 재빨리 한설아의 어깨를 짚어 뒤로 밀었다.

“숨겨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회의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문손잡이가 벽에 부딪히며 둔탁한 소음을 냈다. 그곳에 선 임예은은 한 손에 붉은색 결재 파일을 들고 있었다. 그녀의 입꼬리가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승리감에 도취한 인간 특유의 찌그러진 미소였다.

“여기서 둘이 뭐 하고 있어? 쥐새끼들처럼 소곤소곤.”

임예은이 결재 파일로 자신의 손바닥을 툭툭 쳤다. 은근한 조롱이 섞인 몸짓이었다.

“강태윤 대리. 내 컴퓨터에 백업된 신사업 기밀 데이터, 네 계정으로 접근한 흔적이 있더라? 보안 팀에 바로 넘길 수 있는 아주 예쁜 로그가 남았던데.”

태윤은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안경테를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튕겼을 뿐이다.

“그 폴더는 공용 서버에 열려 있었습니다. 보안 규정 위반을 논하기 전에 본인의 관리 소홀부터 소명하는 게 순서일 텐데요, 임 대리님.”

“입 닥쳐.”

임예은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높아졌다. 그녀의 눈동자가 좌우로 빠르게 흔들렸다. 강태윤의 평정심이 그녀의 자격지심을 자극하는 자석처럼 작동한 모양이었다.

“어차피 오늘 퇴근 시간 전까지 넌 아무 데도 못 가. 오 팀장님이 이 서류 확인하시는 순간, 네 사원증은 정지될 테니까.”

임예은이 턱짓으로 복도 건너편의 문서 보관실을 가리켰다.

“마침 잘됐네. 오 팀장님이 지시하신 과거 3개년 사업 계획서 원본, 보관실 안쪽 캐비닛에 있어. 네가 직접 들어가서 찾아와. 보안 등급 때문에 외부인은 접근 불가인 곳이니까, 들어가서 조용히 자숙하고 있어.”

태윤의 머릿속 데이터베이스가 즉각 반응했다.

[로그 확인: 문서 보관실 - 외부 잠금식 전자 도어록 장착. 안쪽에서는 수동 개폐 장치가 작동하지 않는 폐쇄형 물리 밀실.]

임예은은 태윤을 그 안에 가두고 퇴근 시간인 밤 11시까지 고립시킬 생각이었다. 그렇게 되면 태윤은 움직이지 못하고 송진우의 사냥감이 되거나, 사내 보안 수칙 위반으로 꼼짝없이 덫에 걸리게 된다.

태윤은 한설아를 흘낏 보았다. 한설아는 고개를 아주 미세하게 숙이며 가방끈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의 눈빛이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시간 벌기. 그것이 그녀가 보낸 무언의 신호였다.

“알겠습니다. 들어가죠.”

태윤이 한 발을 내딛자, 임예은이 뒤를 따라붙었다.

문서 보관실은 17층 복도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두꺼운 철문이 열리자 퀴퀴한 종이 냄새와 차가운 공기가 쏟아져 나왔다. 태윤이 발을 들여놓는 순간, 등 뒤에서 강한 힘이 그를 밀쳤다.

철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이어서 도어록이 잠기는 기계음이 들렸다. *띠리릭, 탁.*

완벽한 어둠이 태윤을 덮쳤다. 환풍기 돌아가는 소리만이 정적을 찢고 있었다.

태윤은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소리치는 것은 에너지를 낭비하는 무익한 짓이었다. 대신 그는 안경을 벗어 셔츠 깃으로 닦은 뒤 다시 썼다. 어둠에 시야가 적응하자, 벽면에 붙은 비상 탈출 안내판의 희미한 야광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그의 시선이 머문 곳은 벽면 하단에 위치한 정수기 배관 점검구였다.

사후 분석 데이터베이스의 첫 번째 회차 로그가 뇌리에 뚜렷한 글씨로 인쇄되듯 떠올랐다.

[사내 안전 근무 수칙 제14조: 본사 건물의 위생 관리를 위해 정수기 배관 필터는 매월 첫째 주 화요일 오후 9시를 기점으로 화학 세척을 실시한다. 세척 시 사용하는 약품(수산화나트륨 및 가연성 활성 화합물)은 가연성 예외 조항에 의거, 세척 완료 전까지 열원과의 접촉을 엄격히 금지한다.]

오늘이 바로 그 첫째 주 화요일이었다. 현재 시각 오후 9시 15분.

이미 정수기 배관을 타고 강력한 화학 세척액이 흐르고 있을 시간이었다. 문서 보관실 벽면을 지나는 저 배관 내부에는 가연성이 극도로 높은 수산화나트륨 혼합물이 차 있을 것이 분명했다.

태윤은 주머니에서 다용도 소형 드라이버를 꺼냈다. 기획 회의 준비용 비품 상자에서 미리 챙겨둔 물건이었다. 그는 주저 없이 배관 점검구의 나사를 풀기 시작했다. 금속 마찰음이 어둠 속에서 조용히 울렸다.

나사 네 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철판을 떼어내자 굵은 플라스틱 배관과 구리 튜브가 얽혀 있는 내부가 드러났다. 톡 쏘는 강한 알칼리성 화학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배관 세척 화학 물질의 가연성 예외 조항.”

태윤이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두려움도, 망설임도 없었다. 오직 흐트러짐 없는 기계적 연산만이 뇌를 지배했다.

그는 정수기 필터와 연결되는 분기 밸브를 찾았다. 수동으로 조작할 수 있는 작은 플라스틱 레버가 보였다. 태윤은 밸브를 조심스럽게 돌려 세척액이 흐르는 통로를 일부 차단하고, 필터 하단의 배출 밸브를 열었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투명하고 번들거리는 액체가 바닥에 고이기 시작했다. 강한 독성을 품은 가연성 세척액이었다.

그 시각, 문서 보관실 외부 복도.

임예은은 철문 앞에 서서 팔짱을 낀 채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거기서 밤새도록 서류나 뒤적거리고 있어, 강 대리.”

그녀가 돌아서려던 찰나, 복도 맞은편 탕비실 방향에서 날카로운 파열음이 들려왔다.

*쨍그랑!*

도자기 머그컵이 바닥에 사정없이 깨지는 소리였다. 뒤이어 짧은 비명과 함께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어머, 죄송해요! 어떡해…….”

한설아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임예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저 고문관 기집애가 진짜…….”

임예은이 신경질적으로 구두 굽을 울리며 탕비실 쪽으로 걸어갔다. 복도 모퉁이를 돌자, 바닥에 주저앉아 깨진 컵 조각을 허둥지둥 줍고 있는 한설아가 보였다. 탕비실 바닥은 이미 엎질러진 커피와 물로 엉망이었다.

“한설아 씨, 지금 뭐 하는 거야? 손이 없어, 발이 없어? 왜 맨날 이 모양이야?”

임예은이 쏘아붙였다.

한설아는 고개를 숙인 채 손을 벌벌 떨었다. 하지만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로 가려진 눈동자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는 깨진 조각을 천천히 주우며 임예은의 시선과 동선을 철저히 붙잡아두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임 대리님. 제가 손이 미끄러져서…….”

“비켜, 내가 치울 테니까. 넌 저기 가서 걸레나 찾아와!”

임예은이 소리를 지르며 탕비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순간을 한설아는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걸레를 찾는 척하며 복도 끝 문서 보관실 쪽을 응시했다. 시계 바늘은 오후 9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문서 보관실 내부.

태윤은 바닥에 고인 화학 세척액을 종이 서류 몇 장에 적셨다. 축축하게 젖은 서류 뭉치에서 지독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그는 도어록의 내부 배선 덮개를 향해 다가갔다. 구형 모델인 이 도어록은 비상시 내부 회로가 단락되면 안전 조항에 따라 잠금장치가 자동으로 해제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사내 규정집 부록에 실려 있던 기계 설비 예외 조항의 맹점이었다.

태윤은 드라이버 끝으로 도어록 제어반의 나사를 뜯어냈다. 복잡하게 얽힌 전선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미세한 스파크를 일으키기 위해 전원 공급용 배선 두 가닥을 강제로 교차시켰다.

*지지직.*

작은 불꽃이 튀었다.

태윤은 그 불꽃이 튀는 지점에 세척액을 듬뿍 적신 서류 뭉치를 가져다 댔다. 가연성 화학 물질이 미세한 전력 스파크와 만나는 순간, 격렬한 반응이 일어났다.

*펑!*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불꽃이 순간적으로 치솟았다. 가연성 세척액이 타오르며 도어록의 메인 회로판을 순식간에 녹여버렸다. 매캐한 연기가 좁은 보관실 안을 채웠다.

[알림: 도어록 제어 장치 단락 발생. 비상 예외 조항 작동 - 물리 잠금 해제.]

*철컥.*

무거운 철문의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선명하게 울렸다.

태윤은 안경을 고쳐 쓰며 타오르는 불씨를 남은 서류 더미로 덮어 눌렀다. 산소를 차단하자 불길은 이내 사그라들고 매캐한 흰 연기만 남았다.

기계적이고 논리적인 탈출이었다. 임예은이 설계한 허술한 감옥은 사내 안전 수칙의 맹점 앞에서 무력하게 깨져 나갔다.

태윤은 문손잡이를 잡았다.

바깥 복도는 여전히 조용했다. 탕비실 쪽에서 임예은의 잔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올 뿐이었다. 한설아가 제 역할을 완벽히 수행하고 있었다.

태윤은 손잡이를 돌려 문을 밀었다.

새어 나오는 연기와 함께 문이 천천히 열렸다. 어두운 복도의 찬 공기가 보관실 내부로 밀려들었다.

태윤이 한 발을 밖으로 내딛는 순간이었다.

갑작스러운 공기의 흐름이 변했다.

문서 보관실 바로 옆, 어두운 비상구 그늘 속에서 정체불명의 실루엣이 번개처럼 튀어나왔다.

태윤이 반응하기도 전에,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 하나가 그의 셔츠 깃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억센 힘이 태윤의 몸을 벽으로 밀어붙였다. 등 뒤의 시멘트 벽에 부딪히며 척추를 타고 둔중한 통증이 달렸다.

어둠 속에서 안경 너머로 비친 것은, 기묘하게 뒤틀린 입꼬리와 미세하게 떨리는 눈주의 근육이었다.

송진우였다.

그가 태윤의 얼굴 바로 앞까지 다가와 서늘한 숨결을 뱉어냈다.

"탈출 성공 축하해, 강 대리. 근데 말이야……."

송진우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이번엔 내가 먼저 기다리고 있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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