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오후 8시, 복도가 완전히 암전되고 비상벨이 기만음처럼 가늘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찌르륵, 찌르륵.

귀를 긁는 기계음이 고요한 17층의 정적을 깨뜨렸다. 탕비실 천장의 스프링클러 헤드에서 붉은빛의 액체가 뚝, 뚝, 떨어져 내렸다. 바닥에 닿는 순간 시큼하고 매캐한 화학 물질의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단순한 물이 아니었다.

‘정수기 필터의 주기적 교체 규정과 배관 세척 화학 물질의 가연성 예외 조항.’

1화에서 머릿속에 각인해 둔 안전 수칙의 한 구절이 뇌리를 스쳤다. 정수기 배관을 세척할 때 사용하는 약제는 알코올 계열의 고가연성 물질이다. 스프링클러 배관이 오작동하여 소독용 세척액이 역류하고 있었다. 이 좁은 탕비실 안에 가스가 가득 차 있었다.

송진우의 엄지손가락이 라이터의 부싯돌 휠 위에 올려져 있었다. 미세한 스크래치가 난 그의 은색 커프스링크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반짝였다.

“그 손가락 퉁기지 마십시오, 송 대리.”

태윤은 탕비실 문틀을 움켜쥐었다. 손바닥에 닿는 나무 표면이 축축하게 뼈마디를 적셨다.

“여기서 불꽃이 일면, 당신도 무사하지 못합니다.”

“알잖아. 어차피 다시 아침 9시로 돌아갈 뿐이야.”

송진우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스르륵.

부싯돌이 쓸리는 거친 마찰음이 났다.

태윤은 생각보다 몸을 먼저 움직였다. 한 걸음. 두 사람 사이의 좁은 거리를 단번에 좁히며 오른손을 뻗었다. 송진우의 손목을 움켜쥐는 것과 동시에, 왼손으로 정수기 옆 벽면에 붙은 비상 정지 밸브의 아크릴 덮개를 후려쳐 부쉈다. 날카로운 플라스틱 파편이 손등을 긁고 지나갔지만 통증을 느낄 여유는 없었다.

딸깍.

수동 차단 밸브를 시계 방향으로 완전히 돌렸다. 쉬익 하는 고압의 압력 소리가 멈추며 천장에서 떨어지던 붉은 액체의 줄기가 가늘어졌다.

송진우의 손목을 쥔 태윤의 손가락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송진우는 라이터를 쥔 채 움직이지 않았다. 가스 농도가 임계점에 달해 있었지만, 산소 공급이 차단되면서 폭발의 도화선은 젖어 버렸다.

“미친 짓은 거기까지 하십시오.”

태윤이 송진우의 손목을 거칠게 뿌리쳤다. 송진우는 순순히 밀려나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의 은색 라이터 뚜껑이 챙 하는 소리와 함께 닫혔다.

“아쉽네. 반응 속도가 저번 회차보다 1.2초 정도 빨라졌어, 강 대리. 몸이 기억하는 모양이지?”

송진우가 어둠 속에서 하얗게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아쉬움보다 기묘한 흥분이 섞여 있었다.

태윤은 그를 상대할 시간이 없었다. 등 뒤의 어두운 사무실 저편에서 임예은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 소리가 다시 한번 복도를 흔들었기 때문이다.

오민혁의 거친 욕설과 무언가 넘어지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단순한 정전이 아니었다. 시스템이 강제로 구역을 차단하기 시작한 징후였다.

태윤은 탕비실을 뛰쳐나와 복도로 달렸다. 벽을 짚은 손끝에 서늘한 콘크리트의 감촉이 전해졌다. 사후 분석 데이터베이스의 로그 파일이 뇌리에서 빠르게 갱신되고 있었다.

[오후 08:03 - 17층 전체 암전 및 비상 셧다운 프로토콜 가동] [생존 수칙 9번: 야근 시 2인 이상 회의실에 잔류할 경우 비상 폐쇄를 면한다. 단, 구성원 전원의 신체적 접촉 혹은 밀착 상태가 유지되어야 시스템이 이를 '정상 근무 인원'으로 인지함.]

태윤의 안경 너머로 차가운 아날로그 시계의 바늘이 보였다. 남은 시간은 단 5분. 이 시간이 지나면 17층의 모든 출입문과 회의실은 철저히 폐쇄되어 아침 9시까지 열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 밀실 안에서 송진우는 아무런 제약 없이 사냥을 시작할 것이다.

“이쪽입니다! 회의실로 모이십시오!”

태윤의 목소리가 복도의 좁은 벽을 타고 울려 퍼졌다.

복도 모퉁이를 돌자, 비상 유도등의 푸른빛 아래에서 주저앉아 있는 임예은이 보였다. 그녀의 세련되던 단발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손에 쥔 서류 뭉치들이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오민혁은 그 옆에서 이마의 땀을 닦으며 벽에 붙은 비상 인터폰을 미친 듯이 두들겨 대고 있었다.

“야! 강태윤! 이거 어떻게 된 거야! 보안팀 왜 연락 안 받아!”

오민혁이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그의 넥타이는 이미 풀어헤쳐져 있었고, 눈동자는 공포로 심하게 흔들렸다.

“인터폰 선은 이미 차단되었습니다. 팀장님, 살고 싶으면 당장 제 말대로 하십시오.”

태윤이 오민혁의 멱살을 잡듯 이끌며 회의실 문을 열어젖혔다.

“예은 씨, 일어나십시오. 시간이 없습니다.”

임예은은 자격지심과 독기로 가득 차 있던 평소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이가 맞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태윤의 소매를 붙잡았다.

“강 대리님…… 불이…… 불이 다 꺼졌어요. 저기 뒤에, 누군가 서 있어요.”

임예은이 가리킨 복도 끝 어둠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실루엣이 있었다.

송진우였다.

그는 오른손에 사무용 대형 가위를 쥐고 있었다. 가위날이 유도등의 푸른빛을 받아 섬뜩하게 번뜩였다. 서걱, 서걱. 그가 걸어오며 가위질을 하는 소리가 암전된 복도에 기괴하게 울렸다.

“다들 왜 거기 모여 있어? 회의는 끝난 줄 알았는데.”

송진우의 목소리는 평온하다 못해 다정하게까지 들렸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굶주린 맹수의 그것과 같았다.

태윤은 임예은과 오민혁을 회의실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회의실 문틀에 기대어 서서 송진우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송 대리, 9번 수칙을 잊은 건 아니겠지?”

태윤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은테 안경을 치켜올리는 그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으나, 눈빛만큼은 면도날처럼 날카로웠다.

“9번 수칙……?”

송진우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눈주위 근육이 미세하게 경련했다.

“‘야근 중 비상 정전 발생 시, 2인 이상의 직원이 회의실 내에 밀착하여 잔류할 경우, 해당 구역은 자동 폐쇄 대상에서 제외된다.’ 이 조항이 실행되면 본사의 중앙 관제 시스템에는 이 회의실이 ‘정상 가동 구역’으로 표시됩니다. 즉, 이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물리적 타격이나 생체 신호의 변화가 실시간으로 로그에 기록된다는 뜻이지.”

태윤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회의실 테이블을 짚었다. 그곳에는 이미 한설아가 소리 없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도 기묘할 정도로 차분한 눈동자로 송진우를 응시하고 있었다.

“만약 이 상황에서 당신이 우리 중 누군가를 공격한다면, 시스템은 즉시 무단 침입 및 상해 경보를 울리고 보안 요원을 강제 진입시킬 겁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이 그토록 원하는 ‘완벽한 알리바이’는 깨지지.”

송진우의 가위 끝이 바닥을 향해 천천히 내려갔다.

“강태윤, 머리가 제법 잘 돌아가네. 이번 루프에서는 제법 준비를 많이 했어.”

“당신이 준비할 시간을 주지 않았습니까. 매번 나를 죽이면서 말입니다.”

회의실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오민혁과 임예은은 두 사람의 대화가 무슨 뜻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숨을 죽이고 눈치만 살폈다.

송진우는 닫히기 직전의 회의실 문틈을 통해 내부를 살폈다.

태윤의 왼편에는 오민혁이, 오른편에는 임예은이, 그리고 바로 뒤쪽에는 한설아가 밀착해 서 있었다. 네 명의 신체가 서로 닿아 있는 구조였다. 시스템이 인지하는 ‘밀착 잔류’의 완벽한 조건이었다.

만약 지금 송진우가 억지로 이 틈에 끼어들거나 누군가를 찌르려 한다면, 9번 수칙의 예외 조항에 의해 보안 시스템의 경보가 작동한다. 그것은 송진우에게 단순한 루프의 실패가 아니라, 다음 루프에서 태윤에게 알리바이를 간파당할 치명적인 단서를 제공하는 꼴이 된다.

송진우의 턱뼈가 도드라졌다. 이빨을 강하게 깨무는 소리가 찌르르하게 회의실 안의 침묵을 찢었다. 그의 눈동자에 서린 살기가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부르르 떨렸다.

“좋아. 규칙은 지켜야지. 사내 안전 수칙이니까.”

송진우가 가위를 주머니 뒤춤에 찔러 넣었다. 그리고 회의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와, 다른 이들과 철저히 격리된 맞은편 가장자리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완벽하게 통제당했다는 사실이 태윤의 입가에 옅은, 냉소적인 미소를 띠게 만들었다. 첫 번째 유효한 반격이었다. 매번 일방적으로 쫓기고 살해당하던 구도에서, 처음으로 사내 규정이라는 보이지 않는 칼날로 범인의 목을 죈 순간이었다.

송진우는 의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어둠 속에서 태윤을 노려보았다. 그의 손가락이 테이블을 규칙적으로 톡, 톡, 두드렸다. 그 소리는 분노의 표현이자, 다음 수를 계산하는 소리였다.

“강 대리, 대단해. 정말 대단해.”

송진우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태윤은 그의 도발을 가볍게 무시하고 몸을 돌렸다. 옆에 서 있던 한설아의 어깨가 그의 팔에 닿았다.

좁은 회의실 테이블 밑, 어둠 속에서 한설아의 손이 태윤의 손목을 조용히 움켜쥐었다. 그녀의 손가락은 얼음처럼 차가웠으나, 쥐는 힘만큼은 비정상적일 정도로 강했다.

태윤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설아의 얼굴은 어둠에 묻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숨결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소심하던 평소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기계적인 냉정함과 필사적인 탈출 의지가 그녀의 작은 눈동자 안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협력해요.”

한설아가 아주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민혁과 임예은에게는 들리지 않을, 오직 태윤의 귓가에만 닿을 듯한 소리였다.

“당신이 뭘 알고 있는지, 왜 저 남자가 저러는지 묻지 않을게요. 하지만 살아나가고 싶다는 목적은 같으니까.”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미세한 떨림은 공포가 아니었다. 그것은 긴장감 속에서 극도로 활성화된 신경의 박동이었다.

태윤은 그녀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극단적인 인간불신과 냉소주의로 똘똘 뭉친 그였지만, 이 지옥 같은 루프 속에서 홀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다 결정적인 정보의 맹점에 빠졌던 지난 회차들의 기억이 머릿속을 스쳤다. 한설아라는 존재는 변수이자, 이용 가치가 충분한 도구였다.

‘동맹인가.’

태윤은 그녀의 손을 마주 잡지 않았지만, 그녀가 손을 떼지 않도록 가만히 두었다. 미세하게나마 마음속의 빗장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그때였다.

콰아아앙!

머릿속에서 거대한 해일이 밀려오는 듯한 충격이 태윤의 뇌를 강타했다.

“아윽……”

태윤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리며 이마를 짚었다. 은테 안경이 비틀거리며 콧등 아래로 흘러내렸다.

사후 분석 데이터베이스의 작동 대가.

기억의 등가교환이 시작된 것이다. 뇌세포의 특정 구역이 강제로 포맷되는 듯한 기괴한 감각이 신경계를 타고 흘렀다. 뜨거운 인두로 뇌 주름을 지져 물로 씻어내는 듯한 극심한 두통이었다.

머릿속의 앨범에서 사진 한 장이 통째로 뜯겨 나갔다.

‘뭐지? 무엇이 사라진 거지?’

태윤은 필사적으로 기억의 파편을 붙잡으려 애썼다.

푸른색. 맑은 하늘. 시끌벅적한 사람들의 목소리. 누군가 내 어깨를 두드리며 축하한다고 말했던 목소리. 꽃다발의 냄새.

대학 입학식 날이었다.

어머니가 시장에서 가장 좋은 옷이라며 사다 준 푸른색 셔츠를 입고, 촌스러운 가방을 멘 채 대학 교문 앞에 서 있던 열아홉 살의 강태윤. 그날의 설렘과 푸르스름한 봄바람의 감촉이 머릿속에서 하얗게 표백되어 갔다.

아무리 기억해 내려 해도, 그 자리에 남은 것은 거칠고 차가운 회색 공백뿐이었다.

어머니의 목소리도, 그날 느꼈던 소박한 성취감도 이제는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었다.

태윤의 신형이 크게 흔들렸다. 무릎의 힘이 풀리며 바닥으로 쓰러지려는 순간, 한설아가 그의 허리를 단단히 받쳐 들었다.

“강 대리님, 제정신 차려요.”

한설아의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평소의 더듬거리던 말투는 온데간데없었다. 냉정하고 기계적인 명령조였다.

태윤은 이빨을 악물고 버텼다. 입안에서 비린 피 맛이 퍼졌다.

사라진 기억의 자리에, 차가운 0과 1의 데이터 로그가 채워졌다. 감정이 거세된 분석 괴물이 되어가는 과정이었다. 슬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소중한 무언가를 잃었다는 이성적 판단만이 머리에 남을 뿐이었다.

태윤은 안경을 다시 고쳐 썼다. 그의 눈빛은 이전보다 한층 더 깊고 차가운 심연으로 변해 있었다.

“괜찮습니다.”

태윤이 한설아의 손을 밀어내며 스스로 몸을 일으켰다.

맞은편 어둠 속에서 송진우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태윤의 미세한 변화를 알아챈 듯, 입꼬리를 기묘하게 뒤틀며 손가락으로 턱을 괴었다.

“왜 그래, 강 대리? 머리가 좀 아픈가 보네? 너무 무리해서 규칙을 굴리면 뇌가 타버리는 법이지.”

송진우의 조롱 섞인 목소리가 회의실의 차가운 벽에 부딪혀 흩어졌다.

태윤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송진우의 동선을 머릿속 로그 파일에 추가로 기록할 뿐이었다.

오민혁은 구석에서 웅크린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임예은은 무릎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고 있었다. 이 밀실이 된 17층에서, 오직 세 사람만이 깨어 있는 눈으로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어둠이 더욱 깊어졌다. 밤 9시를 향해 가는 시간.

한설아가 태윤의 옆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그녀는 자신의 가죽 가방을 무릎 위에 올리더니, 지퍼를 소리 나지 않게 천천히 열었다.

태윤의 시선이 그녀의 움직임을 쫓았다.

한설아는 주변의 눈치를 살핀 뒤, 가방 안쪽 깊숙한 곳에서 갈색 가죽 파우치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테이블 밑에서 태윤의 손에 닿지 않을 만큼의 거리까지 슬그머니 밀어 보였다.

파우치의 틈새로 낡은 USB 메모리와 빽빽하게 숫자가 적힌 서류 몇 장이 스치듯 보였다.

한설아가 고개를 들어 태윤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녀의 눈빛에 기이한 열기가 서려 있었다.

“이거예요.”

한설아가 아주 미세한 목소리로 지껄였다.

“태성그룹 신사업추진 3팀의 비자금 이중 장부. 오민혁 팀장과 본사 임원들이 숨기려던 진짜 기록이 여기 들어 있어요.”

태윤의 은테 안경 너머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예상치 못한 단서의 등장이었다. 사후 분석 데이터베이스의 로그 파일에도 존재하지 않던, 이번 회차의 완전한 변수였다.

한설아는 파우치를 다시 가방 속으로 집어넣으며, 태윤의 귀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이걸 이용하면, 우리는 이 지옥을 끝낼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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