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그때 네 표정, 정말 예술이었어. 강 대리.”

귓가를 긁는 송진우의 목소리는 낮고 축축했다.

태윤은 은테 안경의 브리지를 검지로 천천히 밀어 올렸다. 안경테의 차가운 금속 감촉이 검지 끝을 타고 뇌로 전해졌다. 심장 박동이 불규칙하게 요동치며 흉벽을 두드렸지만, 태윤은 안면 근육의 미세한 떨림조차 완벽히 통제했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간격을 평소와 다름없이 1.5초로 유지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송진우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겁니까, 송 대리.”

태윤의 목소리는 기계음처럼 건조했다.

송진우는 태윤의 굳어 있는 시선을 마주하며 입꼬리를 길게 찢었다. 그의 손가락이 셔츠 소매 끝에 달린 은색 커프스링크를 만지작거렸다. 형광등 불빛을 받아 차갑게 반짝이는 금속 표면에는 미세한 스크래치가 세로로 그어져 있었다. 저번 회차에서 태윤의 칼날을 막아설 때 생긴 흔적이었다.

“헛소리라.”

송진우가 상체를 뒤로 물리며 책상 모퉁이에서 손을 떼었다.

“기억이 안 나는 척하는 건지, 정말로 뇌가 타버린 건지 모르겠네. 강 대리, 너 요새 건망증 심하잖아. 지난주에 네가 기획서 어디다 뒀는지도 까먹고 나한테 물어봤던 거, 기억 안 나나 봐?”

태윤의 관자놀이 부근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머릿속의 사후 분석 데이터베이스가 보이지 않는 적색 경고등을 켰다.

[로그 파일 로드 완료] - 회차: 4회차 루프 진행 중. - 사실 상태: 직전 회차 사망 시각 오후 11시 00분. 사인은 경부 자창으로 인한 과다출혈. - 용의자 송진우: 루프 인지 상태 확실. 직전 회차의 대화를 기억하고 있음. - 부작용: 기억 손실 발생. (어머니의 목소리 톤 및 중학교 졸업식 당시의 풍경 데이터 소멸)

어머니의 얼굴에 이어 이제는 목소리마저 기억나지 않았다. 머릿속의 특정 구역이 통째로 포맷된 것처럼 하얗게 비어 있었다.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대신, 이성은 한층 더 시리고 명징해졌다. 감정이 소거된 자리에 오직 차가운 연산 장치만이 들어앉은 기분이었다.

태윤은 마우스를 쥐고 모니터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불필요한 감정 소모는 데이터 낭비다.

“업무 시간 끝났습니다. 사적인 잡담에 낭비할 시간은 내 데이터시트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진짜 지독한 새끼네.”

송진우가 낮게 읊조렸다. 그의 구두 앞코가 바닥을 탁탁 두드렸다.

“그래, 그 눈빛이야. 언제까지 그렇게 버틸 수 있을지 보자고. 이번엔 어떤 알리바이를 짜왔는지 기대해도 좋아.”

송진우는 등을 돌려 제 자리로 걸어갔다. 파티션 너머로 그의 정수리가 사라지는 순간까지 태윤은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철저한 전술적 침묵. 범인에게 어떠한 단서나 감정적 피드백도 주지 않는 것이 루프물에서 생존율을 높이는 첫 번째 프로토콜이었다.

터벅터벅, 복도 저편에서 신경질적인 구두 굽 소리가 사정없이 바닥을 짓밟으며 다가왔다.

문이 거칠게 열리고, 붉게 충혈된 눈을 한 오민혁 팀장이 사나운 기세로 들어섰다. 그의 넥타이는 삐뚤게 풀려 있었고, 셔츠 깃은 땀과 찌든 담배 냄새로 누렇게 절어 있었다. 오민혁은 들고 있던 두꺼운 바인더 다발을 태윤의 책상 정중앙에 사정없이 내던졌다.

쿵!

먼지가 뿌옇게 일며 종이 뭉치가 사방으로 흐트러졌다.

“강 태윤.”

오민혁이 이빨 사이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태윤의 멱살을 잡을 듯이 상체를 들이밀었다.

“네가 기획한 신사업 초안, 본사 2본부장님이 쓰레기통에 처박으셨단다. 알고 있어? 어?”

태윤은 서류 더미를 바라보며 은테 안경을 가볍게 치켜올렸다.

“본부장님의 피드백 요지가 무엇입니까.”

“요지? 요오지?”

오민혁의 목소리가 옥타브를 높였다. 그의 침방울이 태윤의 모니터 화면에 튀었다.

“이따위 탁상공론 말고 실질적인 매출 지표를 가져오란 말이야! 지금 본사에서 내 목을 치려고 대기 타고 있어. 이번 프로젝트 엎어지면 나만 죽는 줄 알아? 신사업 3팀 전체가 길바닥으로 나앉는 거야!”

사무실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동결되었다.

저 멀리 구석 자리에서 서류를 정리하던 임예은이 숨을 죽인 채 이쪽을 훔쳐보았고, 송진우는 턱을 굄 채 흥미롭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오민혁은 주머니에서 누런 종이 한 장을 꺼내 태윤의 이마 앞에 흔들어 댔다.

“오늘 밤 11시까지 전원 자리 지켜. 한 놈도 퇴근할 생각 마라. 기획안 수정본 내 책상에 올려놓기 전까지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생각도 하지 마.”

태윤은 오민혁이 던져놓은 누런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사내 안전 근무 수칙의 규정집 표지였다.

“팀장님. 본사 안전 관리 규정 제14조 2항에 따르면, 야간 근무 지시는 최소 4시간 전에 서면으로 통보되어야 하며, 당일 연장 근무는 개별 동의가 없는 한 오후 10시를 초과할 수 없습니다.”

태윤이 건조한 목소리로 규정을 읊조리자, 오민혁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이 새끼가 지금 나한테 법 조항을 읊어? 여기가 법원이야? 회사가 장난 같아?”

“장난이 아니라 사내 규정입니다. 규정 위반 시 부서장 평가에 감점 요인으로 반영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민혁은 기가 찬다는 듯 허탈하게 웃더니, 이내 규정집을 구기듯 움켜쥐었다.

“개소리 하지 마. 이 규정집 맨 뒷장 예외 조항 안 읽어봤지? ‘긴급 재난 및 경영상의 중대한 손실이 우려되는 비상사태의 경우, 부서장의 재량 하에 야간 통제를 실시할 수 있다.’ 이번 프로젝트 반려가 바로 경영상 중대한 손실이야! 그러니까 입 닥치고 앉아서 일해!”

오민혁은 구겨진 규정집을 태윤의 얼굴을 향해 던지듯 내려놓고는 자신의 개인 집무실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았다.

문이 닫히는 진동에 사무실 유리창이 미세하게 떨렸다.

태윤은 흩어진 서류를 한 장씩 정돈했다. 오민혁의 히스테리는 매 루프마다 반복되는 패턴이었다. 그러나 이번 회차에서는 규정집의 예외 조항을 걸고넘어지는 방식이 훨씬 더 구체적이고 악랄해졌다.

그때, 소리 없이 다가온 그림자가 태윤의 책상 옆에 멈춰 섰다.

한설아였다.

그녀는 늘 그렇듯 소심한 표정으로 어깨를 움츠리고 있었지만, 태윤을 내려다보는 눈동자만큼은 이질적일 정도로 차분했다. 그녀는 품에 안고 있던 복사 용지 뭉치 사이에서 얇은 종이 한 장을 슬며시 꺼내 태윤의 키보드 위에 올려놓았다.

“강 대리님.”

한설아의 목소리는 모기 비행 소리처럼 작았지만, 명확하게 뇌리에 박혔다.

“팀장님이 준 규정집, 그거 위조된 거예요.”

태윤은 키보드 위로 시선을 내렸다. 한설아가 건넨 종이는 사내 수칙의 원본 사본이었다.

“무슨 뜻입니까.”

“오민혁 팀장이 들고 있는 규정집에는 특정 조항의 예외 처리가 빠져 있어요. 특히 17층 정수기 필터의 주기적 교체 규정과 배관 세척 화학 물질의 가연성 예외 조항 부분이요.”

태윤의 안경 너머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그것은 태윤이 1회차 루프에서 입수했던 첫 번째 퇴실 불가 안내문의 내용과 정확히 일치하는 단서였다.

[데이터베이스 분석 가동] - 단서 연동: '배관 세척 화학 물질의 가연성 예외 조항'. - 내용: 17층 문서 보관실 밀실 스프링클러 배관은 정수기 세척용 가연성 화학 물질 배관과 기묘하게 교차 설계되어 있음. 특정 압력 이상 시 역류 가능성 존재. - 활용 가능성: 문서 보관실에 갇혔을 때 물리적 탈출을 위한 기폭제로 사용 가능.

한설아는 태윤의 냉소적인 반응에 익숙하다는 듯, 감정 없는 눈빛으로 말을 이어갔다.

“대리님이 가진 그 비정상적인 분석 능력, 그리고 법 조항 해석 능력이 이 지옥을 나갈 유일한 열쇠라는 거, 소문으로만 듣던 것보다 직접 보니 더 확신이 서네요. 전 장부를 원하고, 대리님은 생존을 원하죠. 비즈니스로서 나쁘지 않은 조건 아닌가요?”

태윤은 종이를 반으로 접어 셔츠 안주머니에 넣었다.

“타인은 변수일 뿐입니다. 한설아 씨의 목적이 무엇이든, 내 동선에 방해가 된다면 배제할 겁니다.”

“오만하시네요, 여전히.”

한설아는 차갑게 미소 지으며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 오만함이 언제까지 유지될지 지켜보겠어요. 오후 8시가 되면, 17층 서브 전력 계통이 정기 점검으로 차단돼요. 오 팀장은 그것도 모르고 야근을 시킨 거고요.”

그녀가 멀어지자 태윤은 시계를 보았다.

오후 7시 45분.

차단까지 남은 시간은 단 15분이었다.

태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탕비실로 향했다. 복도는 기묘할 정도로 정적에 잠겨 있었다. 에어컨에서 뿜어져 나오는 서늘한 바람이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소름이 돋았다.

정수기 옆에 서서 물을 컵에 담는 내내, 태윤의 시선은 정수기 하단의 배관 밸브에 고정되어 있었다. 파란색 급수관 옆으로 붉은색 세척용 화학 물질 라인이 어지럽게 얽혀 있었다.

‘가연성 세척 권고사항…….’

이 사소하고 낡은 규칙이 단순한 위생 관리가 아닌, 이 거대한 밀실의 숨겨진 트리거라는 사실을 송진우는 알고 있을까.

탕비실을 나오자마자, 저편 복도 끝에서 송진우가 벽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이 보였다. 실내 흡연은 금지되어 있었지만, 이 공간에서 그런 규칙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송진우는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태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의 은색 커프스링크가 어둠 속에서 다시 한번 기만적으로 번뜩였다.

태윤은 그를 무시하고 사무실로 걸어갔다. 발소리가 대리석 바닥에 부딪혀 서늘하게 울려 퍼졌다.

사무실 안으로 돌아와 책상에 앉자마자, 손목시계의 초침이 오후 8시 정각을 가리켰다.

탁.

기계적인 마찰음과 함께 17층 전체의 조명이 단번에 꺼졌다.

순식간에 들이닥친 암흑은 눈앞의 손바닥조차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짙었다. 컴퓨터 모니터의 푸른 빛도, 복도의 비상등도 모두 동시에 숨을 죽였다. 에어컨의 웅웅거리던 소음마저 멈추자,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정적이 사무실을 지배했다.

그리고 3초 뒤.

리이이이이이이이이인-.

어둠속에서 비상 벨 소리가 기만적인 울림을 내며 가늘고 길게 복도 전체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리이이이이이이이이인-.

고막을 찢는 비명 같은 금속음이 어둠을 난도질했다. 비상경보기가 뿜어내는 적색 스트로브 조명이 1초 간격으로 벽면을 붉게 물들였다가 이내 삼켜버렸다. 적색과 흑색이 교차하는 시야 속에서, 사무실의 집기들이 기괴한 형상으로 팽창하고 수축하기를 반복했다.

태윤은 자리에 부동자세로 앉아 손목시계의 야광 다이얼을 응시했다.

오후 8시 1분 15초.

경보음의 주기는 2.4초. 소방서로 자동 신고되는 화재 수신반의 정상 주기가 아니었다. 이것은 설비 오작동 혹은 물리적 폐쇄 단계의 진입을 알리는 경고음이었다.

“뭐야, 이거! 왜 불이 꺼져!”

오민혁의 집문실 문이 거칠게 열리며 그의 비명이 고막을 때렸다. 스마트폰 액정 화면을 조명 삼아 비추고 있는 그의 얼굴은 허옇게 질려 있었다. 오민혁은 허둥지둥 비상구 방향으로 뛰어갔다. 그의 구두가 바닥에 놓인 서류 더미를 밟고 미끄러지는 마찰음이 들렸다.

태윤은 머릿속 데이터베이스를 즉시 가동했다.

[사내 안전 근무 수칙 - 제7조 (비상 정전 시 행동 요령)] - 정기 전력 차단과 동시에 경보가 울릴 경우, 이는 단순 정전이 아닌 '물리적 밀실 프로토콜'의 작동을 의미함. - 예외 조항 4호: 전력 차단 중 비상벨이 30초 이상 지속될 시, 17층의 모든 외부 연결 통로(비상계단 및 엘리베이터 샤프트)는 보안 등급 최상위 단계로 강제 동결됨.

“안 열려! 야, 이거 왜 안 열려!”

오민혁이 비상구 철문을 양손으로 붙잡고 미친 듯이 흔들어 댔다. 쾅, 쾅, 강철이 프레임에 부딪히는 둔탁한 파열음이 복도를 울렸다. 비상구 위의 유도등은 이미 꺼져 있었다. 철문은 안쪽에서 완전히 잠긴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팀장님, 비상계단 문은 원래 정전되면 자동으로 열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임예은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날카롭게 갈라졌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모서리를 짚으며 오민혁 쪽으로 다가갔다. 발걸음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도 몰라! 시스템 오류겠지! 보안실에 전화해 봐!”

오민혁이 스마트폰을 귀에 대며 소리 질렀다. 그러나 그의 얼굴을 비추는 액정 화면 상단에는 ‘서비스 없음’을 알리는 안테나 표시만이 깜빡이고 있었다. 17층 전체의 전파가 차단된 상태였다.

이것은 11시에 시작되던 감금 시나리오의 비정상적인 전조였다. 시간선이 무너지고 있었다.

태윤은 은테 안경을 벗어 셔츠 주머니에 넣었다. 어둠 속에서는 렌즈의 난반사가 오히려 시야를 방해했다. 그의 시선이 어둠에 적응할 무렵, 파티션 너머에서 조용히 움직이는 인영이 포착되었다.

송진우였다.

그는 소란스러운 오민혁과 임예은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탕비실 방향으로 아주 느리게 걸어가고 있었다. 그의 오른손은 바지 주머니에 들어가 있었고, 왼손 손가락은 규칙적으로 무언가를 튕기는 소리를 냈다.

착, 착, 착.

금속 라이터의 뚜껑이 열리고 닫히는 마찰음이었다.

태윤의 뇌리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가연성 세척 화학 물질.’

한설아가 건넸던 수칙 사본의 내용이 머릿속에서 강렬한 불꽃을 일으켰다. 정전과 동시에 비상 경보가 울리면, 정수기 배관의 오염을 막기 위해 가연성 세척액이 고압으로 역류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지금 탕비실 배관에는 휘발성이 극도로 높은 세척 화학 물질이 가득 차 흐르고 있을 터였다.

그곳에서 라이터를 켠다면, 17층 전체가 폭발하는 시나리오가 성립된다.

그것이 송진우가 이번 회차에 준비한 새로운 알리바이와 살해 방식이었다. 가스 누출로 인한 단순 사고사. 자신 역시 루프하기에 폭발의 고통 따위는 개의치 않는 것이다.

태윤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소리 없이, 그러나 화살처럼 빠르게 탕비실로 향했다.

“강 대리, 어디 가?”

뒤에서 한설아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발목을 잡았다. 그녀는 제자리에 가만히 앉아 태윤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도 기묘할 정도로 차분하게 빛나고 있었다.

“변수를 통제하러 갑니다.”

태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그의 발걸음이 어두운 복도를 가로질렀다.

탕비실 입구에 다다랐을 때, 코끝을 찌르는 시큼하고 매캐한 화학 물질의 냄새가 공기 중에 진동하고 있었다. 정수기 하단 배관에서 미세한 고압의 쉬익 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탕비실 안쪽, 어둠의 한가운데에 송진우가 서 있었다.

그는 정수기 바로 옆에 기대어 선 채, 태윤이 들어오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송진우의 왼손에 쥐인 은색 지포 라이터가 가볍게 흔들렸다.

“눈치채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네, 강 대리.”

송진우가 낮게 읊조리며 라이터 뚜껑을 열었다.

챙 하는 맑은 금속음이 탕비실의 좁은 공간을 가득 채웠다. 화학 물질의 가스 농도가 이미 임계점에 달해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폐부가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 손가락 퉁기지 마십시오, 송 대리.”

태윤은 탕비실 문틀을 짚으며 상체를 들이밀었다. 그의 목소리는 분노가 아닌, 극도로 절제된 경고의 톤이었다.

“여기서 불꽃이 일면, 당신도 무사하지 못합니다.”

“알잖아. 어차피 다시 아침 9시로 돌아갈 뿐이야.”

송진우가 기괴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라이터의 부싯돌 휠 위에 얹어졌다.

“하지만 이번엔 조금 다를 거야. 타 죽는 고통은 칼에 찔리는 것보다 훨씬 오래 남거든. 네 그 똑똑한 대가리가 그 고통을 견디고도 다음 루프에서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지 궁금하네.”

그가 휠을 쓸어내리려는 찰나, 태윤의 시야에 정수기 옆 벽면에 붙은 비상 정지 밸브가 들어왔다. 그 위에는 먼지 쌓인 아크릴 덮개가 씌워져 있었다.

‘정수기 필터 교체 규정 예외 조항 - 비상시 수동 차단 밸브의 위치.’

태윤은 송진우의 눈을 응시한 채, 오른발을 앞으로 천천히 내디뎠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단 세 걸음.

그때, 등 뒤의 어두운 사무실 저편에서 쾅 하는 거대한 충격음과 함께 누군가의 자지러지는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오민혁의 비명이 아니었다. 그것은 명백히 임예은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었다.

동시에, 탕비실 천장의 스프링클러 헤드에서 붉은빛의 액체가 뚝, 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송진우의 눈동자가 기괴하게 일그러지며 엄지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스르륵.

부싯돌이 긁히는 소리가 정막을 깨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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