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있었어?"
귓가를 긁는 임예은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탕비실 냉장고의 모터가 규칙적으로 웅웅거리는 소음 사이로 그녀의 숨결이 차갑게 닿았다. 뺨을 타고 흘러내린 그녀의 땀방울이 바닥에 고인 붉은 액체 위로 툭, 떨어졌다.
태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은테 안경 너머의 눈동자는 바닥에서 끓어오르는 염소계 화학 물질의 하얀 연기를 향해 있었다. 한 걸음만 늦었어도 저 독극물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 위벽을 녹여버렸을 것이다.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려왔지만, 태윤은 왼손으로 오른손목을 단단히 움켜잡아 흔들림을 억제했다.
"무엇을 말입니까, 임 대리님."
태윤은 상체를 반듯하게 세우며 임예은과의 거리를 벌렸다. 그녀의 어깨너머로 열려 있는 탕비실 문밖, 어두운 복도의 정적을 응시했다.
"이 음료가 본사 격려품이 아니라, 청소용 강산성 세척제라는 것 말입니까? 아니면 임 대리님이 사내 안전 근무 수칙 제7조를 위반하고 정체불명의 용기를 공용 공간에 방치했다는 사실 말입니까."
임예은의 눈동자가 좌우로 빠르게 흔들렸다. 그녀는 대걸레 자루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손가락 관절이 하얗게 벼려졌다.
"시치미 떼지 마. 너, 아까부터 행동이 이상했어. 마치 이 병에 뭐가 들었는지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망상은 업무 효율을 떨어뜨릴 뿐입니다."
태윤은 은테 안경테를 가볍게 밀어 올렸다.
"바닥이나 마저 닦으시죠. 산성 가스가 이 좁은 공간에 가득 차면, 다음 야근 근무자는 호흡기 손상으로 내일 출근하지 못할 테니까요. 그 책임은 고스란히 임 대리님께 돌아갑니다."
임예은의 입술이 비틀렸다. 그녀는 무언가 더 반박하려 입을 열었으나, 태윤은 이미 몸을 돌려 탕비실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뒤쪽에서 대걸레가 타일 바닥을 거칠게 문지르는 마찰음이 신경질적으로 울려 퍼졌다.
복도로 나선 태윤의 걸음걸이는 침착했으나, 속은 타들어 가고 있었다. 관자놀이 부근에서 시작된 둔탁한 박동이 점차 두개골 전체를 흔들기 시작했다.
'온다.'
태윤은 벽을 짚었다. 차가운 대리석의 감촉이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지만,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폭발적인 열감을 막을 수는 없었다. 사후 분석 데이터베이스의 동기화 징후였다.
오른쪽 눈앞에 반투명한 청색 로그 파일들이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시스템: 4회차 타임라인 데이터베이스 동기화 완료.] [알림: 등가교환 법칙에 의거, 임의의 사적 기억 한 조각을 영구 소멸합니다.]
"윽."
태윤은 신음을 삼키며 복도 끝 화장실로 몸을 던지듯 밀고 들어갔다. 문을 걸어 잠그자마자 무릎이 꺾였다. 변기 옆 바닥에 주저앉은 그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날카로운 메스로 오려내 지듯 떨어져 나갔다.
달콤한 냄새. 박수 소리. 누군가의 환호성.
그것은 태윤이 대학 시절, 첫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았을 때의 기억이었다. 평생을 불우하게 살아온 그가 처음으로 자신의 재능을 세상에 증명하고 맛보았던 순수한 성취감. 동기들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축하해 주던 그 따뜻한 온기.
그 찬란했던 순간의 색채가 순식간에 회색으로 바래더니, 이내 고운 모래처럼 부서져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태윤은 허공을 움켜쥐려 손을 뻗었으나 손가락 사이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오직 '첫 성공을 거두었다'는 건조한 사실 기술어만 남았을 뿐, 그때 느꼈던 희열과 인간적인 온기는 흔적도 없이 소멸했다.
거울 속의 자신을 올려다보았다. 은테 안경 밑에 드러난 눈동자는 이전 회차보다 한층 더 차갑고 황량해져 있었다. 인간으로서의 감정이 거세된 분석 기계의 눈빛이었다.
태윤은 세면대 물을 틀고 차가운 물로 얼굴을 적셨다. 물방울이 턱끝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이성만 남은 괴물이라……."
그는 혼잣말을 뱉으며 안경을 닦았다. 슬퍼하거나 분노할 시간조차 사치였다. 뇌리에 각인된 데이터베이스의 로그 파일들을 하나씩 검증해야 했다.
똑, 똑.
화장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태윤은 안경을 고쳐 쓰며 문을 열었다.
문밖에 서 있는 사람은 송진우였다.
송진우는 완벽하게 다듬어진 헤어스타일에 티끌 하나 없는 슈트 차림이었다. 언제나처럼 이마 위에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였다.
"강 대리, 안에서 무슨 일 있었어? 안색이 흙빛이네."
송진우가 안으로 걸어 들어오며 자연스럽게 세면대 앞에 섰다. 그는 수도꼭지를 틀어 손을 씻기 시작했다. 물소리가 화장실 안을 채웠다.
태윤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송진우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했다. 머릿속의 데이터베이스가 가동되며 송진우의 신체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스캔하기 시작했다.
[스캔 대상: 송진우 (기획실 대리)] [의심도: 99.8% (직전 회차 살해 용의자)] [특이 사항: 루프 인지 가능성 농후]
송진우가 젖은 손을 털고 종이 타월을 뽑아 손을 닦았다. 그리고 소맷자락을 정리하며 자신의 왼쪽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반짝이는 은색 커프스링크.
정사각형 모양의 심플한 디자인이었지만, 태윤의 눈에 탑재된 초정밀 스캔 기능은 그 표면에 새겨진 미세한 흔적을 놓치지 않았다.
[데이터 분석: 왼쪽 커프스링크 표면에 미세 스크래치 감지.] [패턴 일치율: 98.7%] [분석 결과: 3회차 루프 당시, 피해자(강태윤)가 질식사하기 직전 용의자의 손목을 부여잡으며 손톱으로 긁은 흔적과 일치.]
태윤의 심장이 차갑게 식어 내렸다.
루프가 시작되면 모든 물리적 상태는 오전 9시로 되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송진우의 커프스링크에 새겨진 저 상흔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송진우 역시 이 지옥 같은 루프의 동반자이며, 물리적 상흔의 일부가 시간의 왜곡을 뚫고 보존되고 있음을 입증하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였다.
송진우가 거울을 통해 태윤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살짝 돌렸다. 그의 입꼬리가 매끄럽게 올라갔다.
"내 커프스링크에 뭐 묻었어? 그렇게 뚫어져라 보네."
태윤은 피하지 않고 송진우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그의 어조는 면도날처럼 날카로웠다.
"아주 비싼 물건 같습니다, 송 대리님. 그런데 왼쪽 커프스링크 모서리에 깊은 스크래치가 났더군요. 마치…… 누군가가 죽기 살기로 매달리며 손톱으로 긁어놓은 것처럼 말입니다."
순간, 송진우의 왼쪽 눈주의 근육이 미세하게 파르르 떨렸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데이터베이스는 그 경련을 정확히 기록했다. 송진우의 완벽한 포커페이스에 균열이 간 순간이었다.
"아, 이거?"
송진우는 손목을 내려다보며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출근길 엘리베이터 문에 살짝 긁혔나 봐. 세심하기도 해라, 강 대리는. 이런 사소한 것까지 신경 쓰고."
"사소한 단서가 전체 알리바이를 깨뜨리는 법이니까요."
태윤은 차갑게 쏘아붙였다.
"특히 우리 부서처럼 보안과 안전 수칙이 엄격한 곳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송 대리님도 물건 간수 잘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자칫하면 그 흠집이 덜미를 잡는 덫이 될 수도 있으니까."
송진우의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는 서늘한 살기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조언 고마워. 명심하지."
송진우는 태윤의 어깨를 가볍게 툭 치며 화장실을 빠져나갔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 짙은 스킨향이 남았다.
태윤은 세면대를 짚었다. 송진우가 루프를 인지하고 있다는 심증은 이제 확증으로 바뀌었다. 그는 매 회차 태윤을 죽이기 위해 알리바이를 재설계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번 회차의 살해 계획은 이미 시작되었을 터였다.
화장실을 나와 복도로 복귀하려던 참이었다. 모퉁이를 돌자마자 누군가와 부딪힐 뻔했다.
한설아였다.
그녀는 소심한 태도로 서류철을 가슴에 안은 채 태윤을 올려다보았다. 평소처럼 팀원들의 심부름을 도맡아 하느라 이리저리 치인 듯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태윤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깊고 차갑게 가라앉았다.
"강 대리님."
한설아가 주변을 살피며 조그만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까 탕비실에서 임 대리님이랑 있던 일…… 다 봤어요. 임 대리님이 닦아내던 그 액체, 보통 청소용 세제 냄새가 아니던데요. 대리님을 겨냥한 것 같아요."
그녀가 슬그머니 손을 뻗어 태윤의 소매를 잡으려 했다.
"이 팀은 미쳐 있어요. 다들 제정신이 아니에요. 저랑 같이……."
팍.
태윤은 냉정하게 그녀의 손을 쳐냈다. 그의 은테 안경 뒤로 비치는 눈빛에는 한 줌의 온기도 없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한설아 씨."
"네? 저는 그냥 대리님을 돕고 싶어서……."
"돕는다고요?"
태윤은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
"태성그룹 비자금 장부를 노리고 있는 당신이, 아무런 이득도 없이 나를 돕겠다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소리군요. 내 몸은 내가 지킵니다. 동정이든 거래 제안이든, 그 얄팍한 손길은 치우시죠."
한설아의 얼굴에서 소심한 기색이 순식간에 휘발되었다. 그녀의 눈빛은 기계적으로 연산을 가동하는 컴퓨터처럼 차갑게 식어 내렸다. 그녀는 쳐내진 손을 거두며 옷자락을 정리했다.
"강 대리님은 참 똑똑하시지만, 지나치게 오만하시네요. 혼자서 이 지옥을 버틸 수 있을 거라고 믿으시나요?"
"버티는 게 아니라, 부순 뒤에 나갈 겁니다. 혼자서."
태윤은 그녀를 지나쳐 거침없이 걸어갔다. 한설아의 차가운 시선이 그의 등 뒤에 꽂히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타인은 변수일 뿐이다. 오직 자신의 머릿속에 기록된 데이터와 사내 안전 근무 수칙의 모순만이 유일한 상수였다.
밤 10시가 가까워지며 17층의 조명이 하나둘씩 꺼지기 시작했다. 에어컨의 서늘한 바람과 기계적인 소음만이 복도를 가득 채웠다.
태윤은 사무실로 돌아와 자신의 책상 앞에 앉았다. 서랍을 열어 비상시 쓸 수 있는 다용도 칼과 손전등의 위치를 확인했다. 머릿속의 데이터베이스가 끊임없이 경고음을 울리고 있었다. 밤 11시, 살해 분기점까지 남은 시간은 단 한 시간.
그때, 등 뒤에서 나지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사박, 사박.
카펫 바닥을 밟는 구두 소리가 기묘할 정도로 정적을 깼다. 태윤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두운 파티션 너머로 송진우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의 양손은 주머니에 깊숙이 찔러 넣어 패어 있었고, 은색 커프스링크는 어둠 속에서 형광등 불빛을 받아 차갑게 번뜩였다.
송진우가 태윤의 책상 모퉁이를 짚고 서서히 몸을 숙였다. 그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태윤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그리고 송진우가 입을 열었다.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목소리는 나지막하고 읊조리듯 고요했다.
"결국 이번에도 여기서 끝인가……."
태윤의 척추를 타고 얼음 송곳 같은 전율이 내리꽂혔다.
그것은 저번 회차, 송진우의 칼날이 목덜미를 파고들 때 태윤이 홀로 피를 토하며 뱉었던 독백이었다. 아무도 없는 독방 같은 공간에서, 오직 죽어가는 자신만이 읊조렸던 그 마지막 한마디.
송진우는 태윤의 귀밑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며, 기괴할 정도로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그때 네 표정, 정말 예술이었어. 강 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