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야간 당직, 준비됐지?"
송진우의 두터운 손바닥이 강태윤의 오른쪽 어깨를 묵직하게 내리눌렀다. 뼈마디를 타고 전해지는 불쾌한 압박감에 태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송진우의 입꼬리가 비정상적으로 길게 찢어지며 기괴한 미소를 만들어냈다. 17층 사무실의 형광등 불빛이 그의 안경 렌즈에 반사되어 하얗게 깨졌다. 민트 향이 섞인 숨결이 태윤의 뺨을 스쳤다.
"제 업무 분담표에는 오늘 야간 당직이 없습니다, 송 대리님."
태윤은 어깨를 가볍게 비틀어 그의 손을 떨쳐냈다. 손가락 끝으로 은테 안경의 다리를 밀어 올리는 태윤의 동작은 기계처럼 정확하고 건조했다.
"규정은 언제나 변하는 법이니까."
송진우는 널찍한 어깨를 으쓱하며 제 자리로 걸어갔다. 그의 구두 굽이 왁스 칠한 바닥을 짓누를 때마다 뽀득거리는 마찰음이 복도에 울려 퍼졌다.
태윤은 자리에 앉았다. 모니터의 푸른 빛이 그의 무표정한 얼굴을 비추었다. 마우스를 쥔 손등에 푸른 힘줄이 돋아났다. 머릿속 깊은 곳에서 차가운 기계음과 같은 이명과 함께 사후 분석 데이터베이스의 로그 파일들이 나열되기 시작했다.
`[사후 분석 데이터베이스 로딩 완료]` `[현재 타임라인: 4회차 루프]` `[등가교환 로그: 우측 대뇌피질의 사적 기억 영역 삭제 확인]`
머릿속 폴더 하나가 강제로 지워지는 감각이 뒤따랐다. 뇌의 가장 부드러운 안쪽 어딘가가 예리한 메스로 도려내지는 듯한 서늘한 통증이었다. 이번에 소실된 것은 초등학교 졸업식 날 운동장에서 먹었던 짜장면의 냄새와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이제 태윤에게는 '졸업식'이라는 단어 정보만 남았을 뿐, 그날의 온기와 어머니의 얼굴은 완전히 백지로 표백되었다. 인간으로서의 감정적 닻이 또 하나 떨어져 나갔다.
태윤은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미간을 꾹 누르며 통증을 억눌렀다. 감정이 사라진 자리를 메우는 것은 오직 차가운 이성과 축적된 데이터뿐이었다.
`[직전 회차 분석 데이터]` `- 사망 시각: 오후 11시 00분` `- 사망 원인: 경추 압박 및 질식` `- 용의자 송진우: 사내 안전 근무 수칙 제15조(가연성 배관 청소 및 차단)를 악용하여 17층 탈출로 차단.`
송진우는 루프를 기억하고 있다. 그는 이전 회차에서의 실패를 보완하기 위해 이번에는 아예 '공식적인 규정'을 들고 나왔다. 태성타워 17층 전체를 합법적인 밀실로 만들어 태윤의 숨통을 조이려는 의도였다.
"강 대리, 오늘 기획안 수정본 제출하는 날인 거 알지?"
임예은 대리가 파티션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녀의 날카로운 눈매가 태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듯 훑었다. 손가락으로 붉은색 볼펜을 소리 나게 돌리는 그녀의 태도에는 숨길 수 없는 자격지심이 묻어났다. 본사에서 내려온 엘리트인 태윤의 실적을 깎아내릴 꼬투리를 잡기 위해 그녀는 매일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오후 두 시 전에 송부하겠습니다."
태윤은 모니터로 시선을 돌리며 짧게 대답했다. 불필요한 감정 소모는 사치였다. 그의 손가락은 이미 키보드 위를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타다닥, 타닥. 건조한 타건음이 사무실의 에어컨 소음 속으로 흡수되었다.
오전 10시. 기획 회의를 위해 회의실로 향하는 복도는 서늘했다. 태성타워 17층은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거대한 아크릴 상자 같았다. 환풍기 너머로 흘러나오는 기계음만이 이곳이 살아있는 공간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때, 등 뒤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태윤이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누군가 그의 옆을 빠르게 지나쳤다. 계약직 사원 한설아였다. 그녀는 기획 회의에 쓸 인쇄물 뭉치를 가슴에 안은 채 고개를 숙이고 걷고 있었다. 매사 소심하고 눈치를 보는 그녀는 팀원들의 온갖 잡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존재였다.
하지만 그녀가 태윤의 옆을 스쳐 지나가는 찰나, 태윤의 양복 주머니 안으로 작고 빳빳한 종이 조각이 미끄러져 들어왔다.
태윤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주머니 속의 종이를 손가락 끝으로 감지했다. 포스트잇이었다. 회의실 문을 열기 직전, 태윤은 흘깃 주머니 속을 확인했다.
[비자금 장부. 오 팀장 캐비닛 뒤쪽 벽면 이중 패널 확인 완료. 오늘 저녁 이동 예정. 마실 것에 주의할 것.]
단정한 글씨체였다. 소심한 계약직 사원의 가면 뒤에 숨겨진 한설아의 본모습이 그 짧은 문장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녀는 태성그룹의 비자금 장부를 노리고 이 지옥 같은 루프 속에서 태윤을 상호 생존 파트너로 이용하고 있었다.
회의실 안으로 들어서자 오민혁 팀장이 이미 상석에 앉아 붉은색 결재판을 신경질적으로 두드리고 있었다.
"신사업추진 3팀이 본사 복귀할 수 있는 기회는 이번 프로젝트뿐이야. 다들 정신 똑바로 차려. 강 대리, 기획안 진척 상황은?"
오민혁의 목소리에는 초조함이 가득했다. 좌천당한 수모를 갚기 위해 그는 팀원들의 목을 죄어오고 있었다.
"수정 보완하여 오후 두 시에 올리겠습니다."
태윤의 대답은 한결같이 차가웠다. 오민혁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를 쯧 차며 서류를 내던졌다. 회의는 시종일관 가시 돋친 대화와 압박으로 이어졌다. 송진우는 그 와중에도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수첩에 무언가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의 은색 커프스링크가 회의실 조명 아래에서 번쩍였다. 미세한 스크래치가 난 그 커프스링크는 그가 이전 루프에서 사용했던 것과 동일한 물건이었다.
회의가 끝난 것은 오후 1시 30분이었다.
태윤은 건조한 목구멍을 축이기 위해 탕비실로 향했다. 17층 복도 끝에 위치한 탕비실은 금속성 테이블과 차가운 스테인리스 냉장고가 배치된 음산한 공간이었다. 정수기의 배관이 미세하게 떨리며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냉장고 문을 열려던 태윤의 손길이 멈칫했다.
이미 냉장고 앞에 임예은 대리가 서 있었다. 그녀는 냉장고 깊숙한 곳에서 유리병 하나를 꺼내 들고 있었다. 투명한 유리병 안에는 정체불명의 붉은색 액체가 담겨 있었고, 병 목에는 선명한 진홍빛 라벨이 붙어 있었다.
"어머, 강 대리 마침 잘 왔네."
임예은이 몸을 돌리며 생긋 웃었다. 가식적인 미소였다. 그녀는 들고 있던 붉은 라벨의 유리병을 태윤의 코앞으로 내밀었다.
"이거 마셔봐요. 본사에서 우리 신사업 3팀 고생한다고 특별히 내려보낸 에너지 음료라던데. 맛이 아주 독특하더라고."
태윤의 은테 안경 너머로 차가운 아우라가 감돌았다. 그의 뇌리에서 사내 안전 근무 수칙의 텍스트가 빠르게 스크롤되었다.
`[사내 안전 근무 수칙 제7조 4항]` `- 탕비실 냉장고의 '붉은 라벨 음료'는 임직원 식용이 아님. 해당 물품은 특정 설비 세척 및 폐기용 화학 물질 시료이므로 절대 섭취하지 말 것.`
태윤은 임예은의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녀의 눈빛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지만, 강권하는 손길은 여전히 단단했다. 그녀는 이 음료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의 지시를 받고 태윤을 시험하는 것일까. 혹은 단순히 태윤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한 악의일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이 붉은 라벨의 액체가 치명적인 독이나 화학 물질이라는 사실이었다.
"본사에서 내려온 격려품이라니, 오 팀장님이 먼저 드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태윤은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받아쳤다.
"팀장님은 아까 커피 드셨잖아. 강 대리 요즘 밤샘 야근하느라 피곤해 보이길래 내가 특별히 챙겨주는 건데, 성의를 무시하는 거야?"
임예은이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그녀의 구두 굽 소리가 탕비실의 좁은 타일 바닥에 거칠게 울렸다. 병을 쥔 그녀의 손가락 끝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마시지 않으면 이 방을 나갈 수 없게 만들겠다는 듯한 집요한 압박이었다.
송진우의 설계가 여기까지 닿아 있는 것이 분명했다. 송진우는 규칙의 모순을 이용해 태윤을 직접 죽이는 것 외에도, 주변 인물들을 교묘하게 조종해 태윤을 함정에 빠뜨리는 심리전의 달인이었다.
태윤은 오른손을 뻗어 유리병을 받아들었다. 차가운 유리의 질감이 손바닥 전체로 퍼져나갔다. 병 안의 붉은 액체가 출렁이며 기포를 만들어냈다.
임예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녀는 팔짱을 끼며 태윤이 병뚜껑을 돌려 따기를 기다렸다.
"그럼, 성의를 생각해서 감사히 받겠습니다."
태윤은 병을 쥔 채 은테 안경을 매만졌다. 그의 눈동자에는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그 순간, 태윤은 손가락의 힘을 아주 미세하게 풀었다. 손바닥에 맺혀 있던 땀방울과 차가운 유리병 표면의 결로가 만나 매끄러운 마찰력을 상실했다.
스르륵.
"아."
태윤의 짧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유리병이 수직으로 낙하했다.
쨍그랑!
날카로운 파열음이 탕비실의 좁은 공간을 찢어발겼다. 투명한 유리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고, 그와 동시에 진홍빛 액체가 흰색 데코타일 바닥으로 넓게 퍼져나갔다.
"어머! 무슨 짓이야!"
임예은이 깜짝 놀라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하지만 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바닥에 쏟아진 액체에 고정되어 있었다.
치이이익-.
기괴한 소리가 탕비실 바닥에서 피어올랐다.
타일 바닥에 닿은 붉은 액체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하얀 연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강산성 물질이 타일 표면의 왁스 층을 순식간에 녹여버리고 회색 시멘트 바닥을 부식시키는 소리였다. 탕비실 안이 순식간에 코를 찌르는 매캐한 염소계 화학 냄새로 가득 찼다.
임예은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그녀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이것은 음료가 아니었다. 만약 태윤이 이것을 한 모금이라도 마셨다면, 그의 식도와 위장은 지금 바닥의 타일처럼 형체도 없이 녹아내렸을 것이다. 끔찍한 고통 속에서 피를 토하며 죽어갔을 터였다.
사내 안전 근무 수칙의 경고는 완벽한 사실이었다. 이 미쳐버린 루프 공간을 지배하는 유일한 물리 법칙이자,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열쇠였다.
태윤은 깨진 유리 파편과 끓어오르는 액체를 굽어보며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
"손이 미끄러졌군요. 본사의 귀한 격려품을 낭비해서 유감입니다, 임 대리님."
태윤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는 은테 안경을 다시 한 번 치켜올리며 벽에 걸린 대걸레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내가 치울 테니 비켜요."
임예은이 갑자기 태윤의 팔을 낚아채듯 밀쳐내고 대걸레를 빼앗아 쥐었다. 그녀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서둘러 몸을 숙인 채, 흩어진 유리 파편과 부식되어 가는 바닥을 걸레로 거칠게 닦아내기 시작했다. 하얀 연기가 그녀의 옷자락을 스치며 매캐한 냄새를 풍겼다.
독이 든 음료를 자연스럽게 쏟아내며 위기를 회피한 태윤은 그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사내 수칙을 위반하려던 함정은 산산조각이 났다. 송진우의 교묘한 설계에 균열을 낸 순간이었다.
하지만 임예은의 태도는 이상했다. 그녀는 단순히 실수를 감추려는 행동치고는 지나치게 필사적으로 바닥을 문지르고 있었다. 붉은 액체가 묻은 걸레가 검게 변해가는 와중에도 그녀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이윽고 임예은이 걸레질을 멈추었다.
그녀는 머리카락 사이로 땀방울을 흘리며, 천천히 고개를 들어 태윤의 구두 끝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방금 전의 당혹감 대신, 서늘하고 기괴한 안광이 서려 있었다.
임예은이 상체를 천천히 일으키며 태윤에게 다가왔다. 두 사람의 거리가 좁혀졌다. 탕비실의 웅웅거리는 냉장고 소음 사이로, 그녀의 낮고 차가운 숨소리가 섞여 들었다.
그녀가 태윤의 귀밑에 입술을 가까이 가져갔다.
"알고 있었어?"
비명처럼 날카롭고, 얼음처럼 차가운 속삭임이 태윤의 고막을 찔렀다.
태윤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커졌다. 탕비실의 공기가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