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늑골 세 번째 마디와 네 번째 마디 사이. 날카로운 강철이 가슴뼈를 가르고 들어왔다. 비명이 목구멍 안쪽에서 핏물과 엉켜 마른 침처럼 삼켜졌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체온은 기이할 정도로 따뜻했다. 귓가를 스치는 숨결에는 희미한 민트 향이 섞여 있었다.

"내일 봐, 태윤 씨."

목소리는 다정했다. 매일 아침 커피 머신 앞에서 인사를 건네던 그 톤 그대로였다. 상처를 파고든 칼날이 반 바퀴 비틀어졌다. 내장이 끊어지는 감각이 척추를 타고 뇌로 직행했다. 은테 안경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렌즈에 미세한 균열이 갔다.

바닥에 뺨을 댄 채 시선이 닿은 곳은 파티션 벽면이었다. 코팅된 A4 용지가 형광등 불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태성그룹 신사업추진 3팀 야간 안전 근무 수칙] - 밤 10시 이후 혼자 남은 회의실의 불을 끄지 말 것. - 출입문이 잠겼을 때 억지로 열려 하지 말 것.

기괴하고 꼼꼼한 사내 규정들이 시야에서 흐려졌다. 시계 바늘이 밤 11시를 가리키는 순간, 차가운 바닥의 감촉마저 먼지처럼 바스러졌다.

* * *

"딩-"

맑은 기계음이 고막을 찔렀다.

허파가 찢어질 듯한 기세로 산소를 빨아들였다. 강태윤은 급하게 숨을 들이켜며 앞으로 비틀거렸다. 목구멍에서 쇠비린내가 나는 것 같아 손으로 목을 감싸 쥐었다. 살갗은 멀쩡했다. 피도, 칼날의 구멍도 없었다. 빳빳하게 풀이 죽은 와이셔츠 칼라가 목덜미를 조이고 있을 뿐이었다.

"어머, 강 대리님. 괜찮으세요? 얼굴이 왜 이렇게 하얗게 질렸어요?"

옆에 서 있던 여직원이 서류 봉투를 안아 들며 물었다. 기획조정실에서 파견 나온 임예은이었다. 그녀의 시선은 태윤의 구겨진 셔츠 깃에 머물러 있었다. 상대를 관찰하고 약점을 잡으려는 특유의 집요한 눈빛이었다.

태윤은 대답 대신 안경을 치켜올렸다.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 위의 디지털 숫자가 빨간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 17 ]

오전 9시. 태성타워 17층이었다. 다시 돌아온 것이다. 두 번째 죽음, 그리고 두 번째 회귀였다.

그 순간, 태윤의 시야 한가운데로 푸른색 광막이 번개처럼 내리쳤다. 안구 안쪽이 타들어 가는 듯한 극심한 두통과 함께 기계적인 텍스트가 뇌리에 직접 박히기 시작했다.

`[사후 분석 데이터베이스 동기화 완료]` `[타임라인 로그를 전개합니다]` `- 회차: 02회차` `- 사망 시각: 23:00:00 (사무실 안쪽 통로)` `- 사인: 흉기에 의한 늑간 동맥 파열 및 과다출혈` `- 확보된 단서: 범인의 민트 향 향수, 은색 커프스링크의 마찰음`

망막 위에 떠오른 홀로그램은 완벽한 로그 파일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직전 회차에서 겪었던 그 끔찍한 고통의 순간이 수치와 텍스트로 치환되어 뇌리에 각인되었다. 범인의 동선, 살해 도구의 궤적, 귓가를 스친 파찰음까지 전부 데이터화되어 저장되어 있었다.

이 정보력은 절대적인 무기였다. 범인이 아무리 알리바이를 바꾸고 덫을 놓아도, 자신은 이전 회차의 패를 모두 쥔 채 게임을 시작하는 셈이니까.

하지만 무상의 권능은 없었다.

`[시스템 경고: 데이터베이스 동기화에 따른 등가교환 법칙 발동]` `[영구 삭제된 기억 세그먼트: 7세 이전, 어머니와 함께 부르던 동요의 멜로디 및 가사 일체]`

머릿속 한구석이 서늘하게 비어 나갔다. 태윤은 미간을 찌푸렸다.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리려 애썼으나, 안개 속을 헤매듯 윤곽이 흐릿했다. 목소리도, 세세한 표정도 기억나지 않았다. 가장 소중한 사적 기억의 한 조각이 데이터베이스의 용량 확보를 위해 강제로 소거된 것이다.

태윤은 입술을 깨물었다. 감상에 빠질 시간은 없었다. 기억을 잃어버려 감정이 마모된 기계가 되기 전에 이 지옥 같은 루프를 설계한 진범을 찾아내야 했다.

그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신사업추진 3팀의 입구로 걸어갔다. 출입문 옆 유리창에는 '보안 구역'이라는 빨간색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사무실 입구 옆 게시판에 새로 인쇄된 공고문 한 장이 핀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태윤은 발걸음을 멈췄다. 은테 안경을 매만지며 공고문의 글자들을 훑어내렸다.

[정기 위생 및 안전 관리 권고사항] - 본사 시설관리팀 지침에 의거, 17층 정수기 배관 청소 및 필터 교체 작업을 실시합니다. - 주의: 정수기 배관 청소 시 내부 필터를 반드시 선제 탈거할 것. 청소용 화학 물질(가연성 배관 세척제)의 잔류로 인한 인체 유해 물질 유입을 방지하기 위함. - 예외 조항: 세척 작업 중에는 가연성 가스 체류를 막기 위해 해당 구역의 환기 장치를 상시 가동할 것.

"정수기 필터 탈거..."

태윤은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평범한 위생 관리 규칙처럼 보였지만, '가연성 화학 물질'이라는 단어가 뇌리에 박혔다. 이 기괴한 루프 공간 속에서 사내 규정은 단순한 규칙이 아니었다. 시공간의 모순이 만들어낸 틈새이자, 생존을 위한 법칙이었다.

그는 머릿속 데이터베이스에 이 규칙을 직접 타이핑하듯 새겨 넣었다.

`[새로운 단서 등록: 정수기 배관 세척 화학 물질 (가연성 예외 조항)]`

"강 대리, 거기서 뭐 해? 안 들어오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복도를 찢었다. 팀장 오민혁이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이마에 굵은 주름을 잡은 채 신경질적으로 서류 봉투를 털어대고 있었다. 본사에서 좌천된 이후로 그의 성질은 하루가 다르게 포악해져 갔다.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태윤은 건조하게 답하며 안경을 밀어 올렸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익숙한 소음들이 고막을 채웠다. 복사기 돌아가는 소리, 기계적인 키보드 타건음, 그리고 낮게 깔린 에어컨 바람 소리. 모든 것이 직전 회차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치했다.

탕비실 쪽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앗, 죄송합니다! 제가 덜렁대다가..."

계약직 사원 한설아였다.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복사 용지 더미를 허겁지겁 줍고 있었다. 평소처럼 소심하고 눅눅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태윤은 그녀가 종이를 줍는 손길이 지나치게 규칙적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당황한 척하면서도 눈동자는 아주 냉정하게 주위 사람들의 동선을 쫓고 있었다.

오민혁이 사원들에게 다가가 책상을 탁 쳤다.

"다들 주목해! 기획조정실에서 이번 신사업 드래프트 안을 오늘 퇴근 전까지 완벽하게 수정하라고 지시 내려왔어. 오늘 야간 작업은 필수다. 다들 각오해."

오민혁의 영달을 위한 강제 야근 지시였다. 임예은은 그 말을 들으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채 태윤을 슬쩍 훔쳐보았다. 태윤의 실적을 깎아내릴 꼬투리를 잡겠다는 무언의 선언이었다.

기시감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직전 회차에서도 오민혁은 정확히 이 시간에 똑같은 단어로 야근을 강요했다. 그리고 그 야근의 끝에서 태윤은 목숨을 잃었다.

심장이 갈비뼈 안쪽을 강하게 두드렸다. 손끝에서 시작된 한기가 어깨까지 타고 올라왔다. 기시감은 단순한 느낌이 아니었다. 죽음의 공포가 육체에 남긴 물리적 낙인이었다.

태윤은 자리에 앉아 모니터를 켰다. 파란 화면 위로 마우스 커서를 움직이는 그의 손목이 가늘게 떨렸다.

그때, 등 뒤에서 서늘한 기척이 느껴졌다.

그림자가 태윤의 책상 위로 길게 드리워졌다. 가죽 구두의 굽이 바닥 카펫을 누르는 묵직한 소리가 멈췄다.

"태윤 씨."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 귓가를 간지럽히던 민트 향이 코끝을 스쳤다.

태윤의 척추가 얼어붙었다. 등 뒤에서 들리는 이 목소리는 죽기 직전 자신에게 '내일 봐'라고 속삭였던 바로 그 목소리였다.

어깨 위로 가볍고 묵직한 손길이 얹어졌다. 하얀 와이셔츠 소매 끝으로 드러난 은색 커프스링크가 형광등 불빛을 받아 차갑게 번쩍였다. 그 표면에는 미세한 스크래치가 긁혀 있었다.

송진우였다.

그는 태윤의 어깨를 가볍게 쥐며, 입꼬리를 기괴할 정도로 매끄럽게 끌어올렸다. 눈동자는 웃고 있지 않았다. 형언할 수 없는 가학적인 호기심만이 그 검은 눈동자 속에서 넘실거리고 있었다.

"오늘 야간 당직, 준비됐지?"

어깨를 누르는 손가락 끝의 압력이 척추를 타고 내려가 꼬리뼈를 자극했다. 강태윤은 숨을 멈췄다. 허파꽈리가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지만, 표정은 굳게 닫아걸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송진우의 얼굴이 바로 옆에 있었다. 정돈된 가르마, 잡티 없는 피부, 그리고 얇은 입술 끝에 매달린 미소. 매일 아침 사내 메신저로 업무 협조를 요청하던 그 친절한 동료의 가면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는 칼날을 쥔 손길처럼 차갑고 끈적한 가학성이 일렁이고 있었다.

"손 치우시죠."

태윤은 목소리를 낮췄다. 분노도, 두려움도 담지 않은 평이한 톤이었다.

송진우는 순순히 손을 뗐다. 그러고는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미안해요. 안색이 너무 안 좋길래. 어제 잠을 설쳤나 봐?"

"어제라뇨."

"그냥, 악몽이라도 꾼 얼굴이라서."

송진우가 미세하게 눈꼬리를 접었다.

그 순간 태윤의 시야에 다시 한번 푸른색 텍스트가 명멸했다.

`[대상 분석: 송진우]` `[호흡수: 분당 14회 (극도로 안정됨)]` `[미세 근육 반응: 구륜근 우측 2mm 상승 - 조소 및 우월감의 표출]` `[경고: 대상은 이전 루프의 기억을 완전히 보존하고 있음]`

심장이 갈비뼈를 때리는 속도가 빨라졌다. 태윤은 책상 서랍을 열어 만년필을 꺼냈다. 금속 재질의 만년필 대를 손가락으로 강하게 움켜쥐자 통증이 감각을 깨웠다. 감정에 휘둘리면 분석이 흐려진다. 냉정해져야 했다.

"악몽 같은 걸 믿을 나이는 지났습니다, 송 대리님."

태윤은 만년필 끝으로 모니터 화면을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그보다 오늘 야간 작업 말입니다. 오 팀장님이 지시한 드래프트 수정 건, 송 대리님 담당 구역도 포함되어 있습니까?"

"글쎄요. 팀장님 마음이겠죠."

송진우가 고개를 까딱이며 탕비실 쪽을 힐끗 보았다.

"하지만 오늘은 다들 쉽게 퇴근하지 못할 겁니다. 저것 때문에라도."

송진우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은 사무실 입구의 대형 프린터기였다. 요란한 기계음과 함께 A4 용지 몇 장이 트레이 위로 토해지듯 떨어지고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정리하던 한설아가 가장 먼저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아무런 표정 없이 프린터로 걸어가 출력된 종이를 집어 들었다. 평소의 소심한 걸음걸이였지만, 종이를 훑어보는 그녀의 눈동자는 기계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한설아는 종이를 든 채 태윤의 자리로 다가왔다. 그녀의 시선이 아주 잠깐 송진우의 소매 끝, 은색 커프스링크에 머물렀다가 떨어졌다.

"강 대리님. 이거... 기획조정실에서 방금 전체 공지로 보낸 문서인데요."

한설아가 종이를 내밀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기어들어 갔지만, 종이를 쥔 손끝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태윤은 종이를 받아 쥐었다. 거친 종이의 질감이 손가락 끝에 닿았다. 상단에는 굵은 고딕체로 쓰인 제목이 박혀 있었다.

[행정 통보: 17층 임시 폐쇄 및 퇴실 제한 안내] - 일시: 금일 오후 10시 00분 ~ 익일 오전 06시 00분 - 사유: 17층 전체 정수기 가연성 배관 청소 및 서면 보안 문서 일제 점검 - 조치 사항: 1) 보안 유지 및 화학 물질 유출 방지를 위해 오후 10시 이후 17층 비상구 및 엘리베이터 작동을 전면 통제함. 2) 단, 기획조정실 지정 필수 잔업자(신사업추진 3팀 전원)는 예외 조항에 따라 지정된 사무 구역 내에서 대기하며 업무를 수행할 것. 3) 본 조치는 사내 안전 근무 수칙 제12조(비상시 통제 권한)에 의거하여 강제됨.

퇴실 제한.

사실상의 밀실 감금 선언이었다.

태윤의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 직전 회차에서는 이런 공문이 내려오지 않았다. 직전 회차의 감금은 오민혁의 독단적인 야근 지시와 물리적인 문 잠김으로 일어난 우발적 사건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사내 안전 근무 수칙'의 정식 조항을 등에 업은 공식적인 통제였다.

태윤은 고개를 들어 송진우를 보았다.

송진우는 태윤의 책상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고 있었다. 딱, 딱, 딱. 일정한 간격의 타격음이 탕비실의 에어컨 소음과 겹쳤다.

"봤죠, 태윤 씨?"

송진우가 상체를 조금 더 숙였다. 그의 몸에서 풍기는 민트 향이 태윤의 콧등을 찔렀다. 귓가에 닿는 목소리는 살을 에는 바람처럼 서늘했다.

"오늘은 아무도 이 17층을 나갈 수 없어요. 공식적으로 말이지."

송진우가 루프를 인지하고 알리바이를 재설계했다는 확증이었다. 그는 단순히 태윤을 죽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내 규정이라는 완벽한 제도를 이용해 태윤을 퇴로가 없는 거대한 쥐덫에 가두어버린 것이다.

머릿속 데이터베이스가 붉은빛 경고등을 켜며 새로운 로그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위기 상황 감지: 타임라인 변동 발생]` `[동반 루퍼 '송진우'에 의한 시스템적 고립 완료]` `[오후 10시 00분 이후, 퇴실 경로 원천 폐쇄]`

태윤은 은테 안경을 매만졌다. 안경다리를 쥔 손가락끝에 땀이 배어났다. 철저한 인간불신과 냉소가 그의 이성을 지탱하는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도움을 청할 곳은 없었다. 소심한 척 딴청을 피우는 한설아도, 실적에 미쳐 날뛰는 오민혁도, 자신을 감시하는 임예은도 모두 믿을 수 없는 변수들에 불과했다.

오직 머릿속에 기록된 데이터와 사내 수칙의 모순만이 그의 무기였다.

"그렇습니까."

태윤은 공문을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송진우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은빛 렌즈 너머로 차가운 분석의 안광이 빛났다.

"가연성 배관 청소라면 화재 위험이 따르겠군요. 사내 수칙 제15조에 따르면 가연성 물질 작업 시 소방 설비의 예외 작동 권한이 우선시될 텐데... 송 대리님은 그 대비책도 세워두셨습니까?"

송진우의 눈썹 언저리가 미세하게 꿈틀했다. 매끄럽던 미소의 틈새로 아주 찰나 동안 당혹감이 스쳤다.

태윤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쐐기를 박았다.

"오늘 밤, 누가 타 죽을지 아주 기대되는군요."

사무실의 에어컨 바람이 두 사람 사이의 서늘한 공기를 갈랐다. 째깍거리는 벽시계 소리가 마치 폭탄의 타이머처럼 무겁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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