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피의 리셋이 일어났다.
오전 9시 정각. 엘리베이터의 쇠문이 양옆으로 미끄러지며 열렸다. 17층의 건조하고 서늘한 공기가 콧속으로 밀려들었다.
강태윤은 문틀을 딛고 비좁은 복도로 걸음을 옮겼다. 은테 안경을 밀어 올리는 손가락 끝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구두 굽이 대리석 바닥을 찍는 소리가 고요한 정적을 깨뜨렸다.
시야 우측 하단에 익숙한 청색 반투명 텍스트가 명멸했다.
[사후 분석 데이터베이스 갱신 완료] - 현재 타임라인: 13회차 루프 - 시스템 로그: 정상 작동 중 - 경고: 사적 기억 아카이브의 추가 손실 발생. 영구 소실율 84% 돌파.
태윤은 자리에 멈춰 서서 머릿속의 어두운 방을 이 잡듯 뒤졌다.
없었다.
자신을 낳고 길렀을 한 여성의 얼굴은 물론이고, 그녀를 부르던 세 글자의 이름조차 완벽하게 흔적을 감추었다. 기억의 도서관에서 가장 중요했던 서가가 통째로 불타버린 느낌이었다.
하지만 기묘하게도 슬픔이나 공포는 치밀어 오르지 않았다. 가슴 한구석이 텅 빈 채 바람만 푱푱 불어가는 무감각. 그것이 전부였다. 감정이라는 엔진이 작동을 멈추자, 뇌는 오직 차가운 기계적 인과율과 계산 공식만을 토해냈다.
두려움이 사라진 자리에는 면도날 같은 이성만이 남았다. 창백하게 질린 뺨을 만지며 태윤은 혼잣말을 뱉었다.
"오히려 집중하기 좋군."
사무실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자, 익숙한 조명 아래 신사업추진 3팀의 풍경이 펼쳐졌다. 컴퓨터 본체가 웅웅거리는 소음, 복사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캐한 토너 냄새.
대각선 방향의 파티션 너머에서 송진우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왼쪽 소매 끝에서 은빛 광택이 번쩍였다. 송진우는 늘 하던 대로 턱을 괸 채, 보란 듯이 왼쪽 소매의 커프스링크를 만지작거렸다.
태윤은 자리에 앉지 않고 송진우를 향해 곧장 걸어갔다. 그의 걸음걸이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강 대리님."
송진우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인사를 건넸다. 그의 눈동자에 가학적인 유희가 서렸다.
"출근길이 꽤 피곤해 보이십니다? 신원 보증서 서류 제출이 10시까지인데, 준비는 잘 되어가시는지 걱정스럽군요."
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송진우의 책상 모퉁이로 몸을 굽혔다. 그의 시선이 송진우의 소매 끝, 은색 커프스링크에 고정되었다.
은색 금속 표면에 새겨진 기하학적 무늬 사이로 아주 미세한 일자형 스크래치가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흠집의 틈새를 메우고 있는 짙은 푸른색의 미세한 고체 얼룩.
태윤의 머릿속에서 데이터베이스의 로그 파일이 빛의 속도로 대조 작업을 시작했다.
`[결과 일치: 태성그룹 신사업 3팀 전용 보안 수정 드래프트 특수 화학 잉크.]` `[분석: 해당 잉크는 인쇄 후 1시간 이내에만 전이되는 휘발성 성분을 포함함. 루프 직전의 타임라인에서 피치 못하게 가짜 서류의 수정본을 직접 만지고 조작했음을 증명하는 물리적 흔적.]`
태윤의 입술이 가볍게 열렸다. 그의 목소리는 감정이 완전히 거세되어 기계음처럼 서늘했다.
"송 대리."
송진우가 펜을 돌리던 손가락을 멈추었다.
"커프스링크의 스크래치, 아주 정교하군. 루프를 돌 때마다 몸뚱이와 옷가지는 리셋되지만, 자네가 루프 직전에 만진 그 '수정 드래프트 파일'의 특수 잉크 성분까지는 미처 신경 쓰지 못한 모양이지?"
송진우의 눈매가 순식간에 굳어졌다. 돌리던 펜이 책상 위로 툭 떨어져 굴렀다.
"그게 무슨..."
"보안 수정 드래프트는 본사 기획실에서만 사용하는 전용 플로터 잉크를 쓰지. 일반 프린터 토너와는 성분이 달라. 자네가 매 루프마다 내 동선을 옭아매기 위해 알리바이를 조작하고 서류를 위조할 때, 그 커프스링크로 종이 가장자리를 쓸어내린 흔적이야."
태윤은 상체를 더 굽혀 송진우의 귓가에 속삭였다.
"동반 루프자임을 증명하는 아주 훌륭한 낙인이더군. 지우는 걸 깜빡했나 봐?"
송진우의 눈동자가 좌우로 잘게 흔들렸다. 그 완벽주의적인 소시오패스의 얼굴에 처음으로 미세한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그는 소매를 거칠게 뒤로 빼며 커프스링크를 손바닥으로 감추었다.
"쓸데없는 소리를 정성스럽게 하는군요, 강 대리님."
"쓸데없는지 아닌지는 10시 보안 감사 때 밝혀지겠지."
태윤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송진우의 일그러진 얼굴을 등 뒤로 흘려보내며, 그는 사무실 구석의 복사기 쪽으로 걸어갔다.
복사기 앞에는 한설아가 서 있었다. 그녀는 복사기 덮개를 열고 유리판 위에 문서를 올리는 척하고 있었다.
웅, 하는 복사기의 구동음 사이로 아주 미세한 고주파 소음이 섞여 들었다. 규칙적인 간격으로 깜빡이는 내부 액정의 동선. 태윤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한설아가 복사기 내부 토너 수납함 틈새에 숨겨둔 초소형 녹음기의 작동 소음이었다. 그녀는 일주일에 한 번씩, 용지를 가득 채우는 척하며 저 기기를 교체해 왔다.
한설아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평소 소심해 보이던 눈빛은 온데간데없고, 기계적인 연산력으로 가득 찬 차가운 안광만이 남은 채 태윤을 쳐다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침묵 속에서 시선만이 허공에서 얽혔다.
태윤은 안경테를 툭툭 두 번 두드렸다. '준비 완료'를 뜻하는 신호였다.
한설아는 오른손으로 복사기 위쪽에 놓인 파란색 결재 파일의 하단을 가볍게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검지손가락으로 파일 표면을 세 번 두드린 뒤, 시선을 천장 구석의 배기구 쪽으로 던졌다.
'비자금 원본 파우치의 마지막 수색 지점. 오민혁 팀장의 개인 캐비닛 하단 배기 닥트 안쪽.'
태윤은 가볍게 눈을 깜빡여 답했다. 두 사람의 공조는 칼날처럼 예리하고 신속했다. 감정적인 교감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철저한 이해관계와 생존을 위한 기계적인 연합이었다.
그때, 사무실 중앙에서 날카로운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
캐비닛 철문이 거칠게 열리며 임예은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고, 손에는 노란색 인덱스가 붙은 서류 몇 장이 들려 있었다.
"어디 갔어? 분명히 여기 보관해 둔 신사업 예산 세부 명세서 원본이 왜 없어?"
임예은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사무실의 공기를 찢었다. 그녀의 시선이 하이에나처럼 팀원들의 얼굴을 하나씩 훑기 시작했다.
"이거 기밀 서류야. 누군가 고의로 빼돌린 게 확실해. 안 그래, 강 대리님?"
임예은이 태윤을 정면으로 노려보며 다가왔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자격지심과 승부욕이 뒤엉킨 독기가 서려 있었다. 어떻게든 태윤의 결점을 잡아내어 무너뜨리겠다는 악의가 투명하게 들여다보였다.
"최근에 캐비닛 주변을 기웃거리던 사람이 한 명밖에 없더라고요. 안 그래요?"
그녀는 책상 위의 전화기 수화기를 움켜쥐었다.
"보안 가드팀에 바로 연락해서 17층 전체 수색 지시 내릴 겁니다. 절도 혐의로 즉시 격리실에 처넣어 달라고 해야겠어요. 마침 10시 보안 감사도 다가오는데, 아주 타이밍이 좋네."
임예은의 손가락이 키패드 위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보안 가드팀이 17층으로 들이닥치면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다. 비자금 원본 파우치를 확보하기도 전에 17층 전체가 락다운될 것이고, 태윤은 신원 보증서 미제출로 인해 보안 대기실에 감금될 터였다.
송진우는 멀찍이 서서 이 광경을 흥미진진하다는 듯 관찰하며, 다시금 입가에 비열한 미소를 띠었다.
그러나 태윤의 심박수는 1분 전과 다름없이 고요했다.
공포를 느껴야 할 뇌의 회로가 작동하지 않았다. 감정이 소멸한 뇌는 오직 차가운 인과 관계의 틈새만을 파고들었다. 사내 안전 근무 수칙의 뼈대를 이루는 문장들이 태윤의 머릿속에서 입체적인 도표로 재조합되었다.
`[사내 안전 근무 수칙 제15조 4항: 비존재 직원 격리 조항]` `[연계 수칙 제22조 1항: 보안 가드 무단 호출 및 허위 신고에 대한 예외 조항]` - 본관 보안 가드팀은 명확한 물리적 증거(CCTV 녹화본 또는 현장 적발) 없이 호출될 수 없다. - 이를 위반하고 사내 비상 전화를 가동할 경우, 호출을 시도한 당사자 역시 '보안 위반의 공동 책임 및 허위 사실 유포'로 규정되어 즉시 직무가 정지되며 48시간 동안 보안 심의실에 구금된다.
법적이고 행정적인 맹점. 그것은 규칙을 숭배하는 이 타워 내부에서 가장 날카로운 무기였다.
태윤은 느린 걸음으로 임예은을 향해 다가갔다. 그의 구두 소리가 기이할 정도로 규칙적이었다.
임예은이 전화기 다이얼의 마지막 번호를 누르려는 순간이었다.
태윤의 하얗고 마른 손가락이 허공을 가르고 내려와, 임예은이 쥐고 있던 수화기의 거치대를 꾹 눌렀다.
뚝.
기계적인 신호음이 끊어지며 정적이 내려앉았다.
"뭐 하는 짓이에요, 강 대리?"
임예은이 쏘아붙이며 태윤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 하지만 태윤의 손가락은 바위처럼 단단하게 거치대를 내리누르고 있었다.
태윤이 몸을 숙여 임예은의 귓가에 대고 낮게 읊조렸다. 그의 입김은 서늘했고, 안경알 너머의 눈동자에는 아무런 빛도 감돌지 않았다.
"임 대리. 사내 수칙 제22조 1항을 잊은 모양이군."
"그게 무슨..."
"물리적 증거 없는 무단 호출은 허위 신고로 간주된다. 자네가 지금 그 전화를 연결하는 순간, 가드팀은 자네 손에 들린 그 서류의 출처부터 조사할 거야. 본사 기획실에서 유출된 비자금 명세서의 사본을 왜 자네가 개인 캐비닛에 보관하고 있었는지, 보안팀이 납득할 리가 없잖아?"
임예은의 눈동자가 크게 확대되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태윤은 수화기를 그녀의 손에서 부드럽게 빼앗아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녀의 책상 위에 놓인 노란색 인덱스 서류를 집어 들었다.
"이 서류의 하단에 찍힌 워터마크. 본사 재무팀의 전용 인장이야. 자네가 태성그룹 비자금의 흐름을 훔쳐보고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지. 이걸 보안 가드팀에게 직접 보여주고 싶나?"
태윤의 목소리에는 분노도, 비아냥도 없었다. 오직 사실의 나열만이 칼날처럼 임예은의 목덜미를 겨누고 있었다.
임예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입술만 파르르 떨었다. 그녀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기계보다 더 정확하게 규정을 대입해 자신을 궤멸시키는 태윤의 모습은, 더 이상 인간이라기보다는 기이한 괴물에 가까워 보였다.
멀리서 지켜보던 송진우의 눈매가 완전히 일그러졌다. 그의 계획이 다시 한번 어긋나고 있었다.
태윤은 안경을 고쳐 쓰며 송진우를 향해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그와 임예은이 들으라는 듯, 건조하게 선언했다.
"9시 50분. 보안 감사가 시작되기 전까지 앞으로 정확히 10분 남았다."
태윤은 몸을 돌려 오민혁 팀장의 캐비닛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한설아가 그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그러나 그 순간, 사무실 구석의 비상벨이 날카로운 경고음을 울리며 붉은색으로 점멸하기 시작했다.
위이이이이잉—!
[알림: 17층 비상 셧다운 시스템 가동 준비. 10분 후 모든 출입문이 차단됩니다.]
예상보다 이른 경보음이었다. 송진우가 입가를 비틀며 소매 속의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집어넣는 모습이 태윤의 데이터베이스 로그에 포착되었다.
태윤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시간이 없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