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메스가 어둠을 가르는 궤적은 짧고 간결했다.

송진우의 손목이 꺾이며 은빛 날끝이 태윤의 턱밑을 겨누었다. 화재경보기가 울리기 직전의 정적 속에서, 라이터의 푸른 불꽃이 가연성 비닐막을 짚고 번져 나갔다. 매캐한 가스 냄새가 콧등을 찔렀다. 태윤은 상체를 뒤로 비틀었다.

스각.

칼날이 깃털처럼 가볍게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 뒤로 뜨거운 액체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태윤은 젖혀진 몸의 반동을 이용해 송진우의 오른쪽 손목을 움켜잡았다. 가느다란 뼈마디 위로 금속의 단단함이 만져졌다.

은색 커프스링크.

태윤의 엄지손가락 끝에 까칠한 흠집이 걸렸다. 모서리에 비스듬히 새겨진 0.5밀리미터 크기의 사선 스크래치였다. 뇌 속의 사후 분석 데이터베이스가 즉각적으로 관련 로그를 인출했다.

[로그 #07: 기획팀 공유 서버 - '신사업_최종_수정안_draft4.pdf' 메타데이터 분석] [수정자 식별 코드: 기획 2팀 송진우 대리] [특이 사항: 수정본 저장 직전, 키보드 'F11' 키와 마우스 우클릭 영역에 미세한 금속 마찰흔 및 혈흔 감지. 원인: 마우스 패드 모퉁이에 긁힌 커프스링크의 간섭.]

"이거였군."

태윤이 피 묻은 이빨을 드러내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송진우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루프를 타기 전, 네 놈이 기획팀 서버에 마지막으로 올린 가짜 서류의 수정본 흔적. 그리고 그 커프스링크의 상처. 네가 나와 같은 시간의 궤도를 돌고 있다는 완벽한 증거다."

송진우는 대답 대신 메스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손등의 힘줄이 팽팽하게 솟아올랐다.

"알면 어쩔 건데, 강태윤?"

송진우가 얼굴을 바짝 들이밀며 속삭였다. 그의 숨결에서 역겨운 박하 향이 풍겼다.

"어차피 넌 여기서 죽어. 내가 널 죽이든, 이 가스가 널 질식시키든 상관없어. 11시가 되면 우리는 다시 아침 9시로 돌아갈 테니까. 그리고 다음 회차에서 난 더 완벽하게 널 찢어발길 거야."

"틀렸어."

태윤이 은테 안경을 치켜올렸다. 안경알 너머의 눈동자에는 공포도, 분노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기계적인 계산만이 명멸할 뿐이었다.

"난 너에게 내 죽음의 주도권을 넘겨줄 생각이 없다."

태윤은 송진우의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빼는 동시에, 제 몸을 왼쪽으로 강하게 던졌다. 송진우의 메스가 태윤의 어깨죽지를 깊게 파고들었다. 살점이 뜯겨 나가는 감각이 척수를 타고 뇌로 직행했다. 신음은 터져 나오지 않았다. 태윤은 이미 다음 행동을 실행하고 있었다.

어깨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바닥의 알루미늄 타일을 적셨다. 태윤은 비틀거리면서도 북동쪽 모퉁이로 향하지 않았다. 그의 목적지는 서버실 중앙에 위치한 3톤 무게의 비상 전원 공급 장치(UPS) 캐비닛이었다.

정전과 가스 분사로 인해 빌딩의 자동 제어 시스템은 극도로 예민해져 있었다.

태윤의 머릿속에 '사내 안전 근무 수칙 제22조'의 텍스트가 떠올랐다.

[사내 안전 근무 수칙 제22조: 산업재해 긴급 수송 조항] - 근무 중 전신 마비에 준하는 중상 혹은 다발성 골절 등 즉각적인 생명 유지 장치 동반이 필요한 '산업재해' 발생 시, 빌딩 제어 시스템은 모든 보안 셧다운을 무력화하고 1층 로비 및 구급차 진입로까지의 최단 경로 비상 셔터를 강제 개방하며, 해당 구역 근무자 전원을 즉시 '퇴근 및 병원 이송' 처리한다.

"송진우."

태윤이 캐비닛의 수동 고정 레버를 붙잡았다.

"넌 네가 설계한 밀실이 완벽하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이 회사의 규정은 인간의 목숨보다 '법적 책임 탈피'를 최우선으로 하도록 설계되어 있어."

"무슨 짓을……!"

송진우가 메스를 치켜들고 다시 돌진했다.

태윤은 주저 없이 고정 레버를 반대 방향으로 꺾었다. 육중한 쇠사슬이 풀리는 소리와 함께, 300킬로그램이 넘는 대형 배터리 셀이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그 아래는 태윤의 오른쪽 다리가 놓여 있는 자리였다.

쾅!

무자비한 질량이 태윤의 발등과 발목을 덮쳤다.

"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서버실의 굉음을 뚫고 터져 나왔다. 뼈가 가루처럼 으스러지는 생생한 파열음이 고막을 울렸다. 발끝에서부터 시작된 극심한 고통이 신경망을 타고 전신을 난도질했다. 눈앞이 하얗게 번쩍였다. 멈추지 않는 통증 속에서 태윤은 이를 악물었다. 입술이 터져 피가 턱으로 흘러내렸다.

[경고: 구역 내 심각한 인명 피해 감지.] [산업재해 긴급 수송 프로토콜 발동.] [17층 서버실 및 비상구 셧다운 일시 해제. 외부 구급대원 진입로 확보를 위해 전 구역 차단막 개방.]

기계음이 울려 퍼짐과 동시에, 굳게 닫혀 있던 서버실의 두꺼운 철문이 기괴한 마찰음을 내며 위로 열리기 시작했다.

"이, 미친 새끼가……."

송진우가 짓이겨진 태윤의 다리와 열리는 문을 번갈아 바라보며 뒷걸음질 쳤다. 자신의 완벽한 살인 트랩이, 태윤의 자해라는 극단적인 변수에 의해 허무하게 깨져버린 것이다.

문틈 사이로 차가운 복도의 공기가 밀려들어 왔다. 그리고 그 문턱 너머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한설아였다.

그녀의 손에는 복사기 안에서 꺼낸 것이 분명한 초소형 녹음기가 들려 있었다. 기계의 정밀한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미세한 작동 소음이 복도의 소음 속에서도 태윤의 귀에는 선명하게 박혔다. 평소의 소심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한설아의 눈동자는 얼어붙은 호수처럼 차가웠다.

"강태윤 대리님."

설아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태윤의 무너진 몸을 부축했다. 그녀의 작은 손이 태윤의 피 묻은 옷자락을 움켜잡았다. 가냘픈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게 당신 계획이에요? 스스로를 병신으로 만드는 게?"

"비상구가…… 열렸어."

태윤이 밭은 기침을 토해내며 말했다. 기침할 때마다 허파 깊은 곳에서 가스 냄새가 섞인 피가 튀었다.

"송진우는…… 이 조항을…… 예상하지 못했어. 이제…… 탈출해."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요."

설아가 태윤의 뺨을 거칠게 내리쳤다.

찰싹!

매서운 타격음이 서버실 벽에 부딪혀 공명했다. 타들어 가던 태윤의 의식이 강제로 수면 위로 끌어 올려졌다. 은테 안경이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우리는 동맹이잖아요."

설아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눈물은 흐르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빛에는 지독한 악착함이 서려 있었다.

"당신이 자아를 잃으면 내가 뺨을 쳐서라도 깨워주기로 약속했어. 기억 안 나? 여기서 이렇게 기계처럼 계산만 하다가 죽어버리면, 내 장부는 어떻게 하고, 내 돈은 어떻게 받아내!"

그녀가 태윤의 덜덜 떨리는 어깨를 강하게 흔들었다.

"반드시 살아남아. 내일로 가야지. 나 혼자서는 이 지옥 같은 빌딩에서 못 나가."

태윤은 일그러진 시야 속에서 설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차가운 분노가, 역설적으로 그의 꺼져가는 인간성에 불을 지폈다.

송진우가 메스를 움켜쥔 채 두 사람을 향해 다가오려 했다. 하지만 이미 빌딩의 경보 시스템은 통제 불능 상태였다. 스프링클러가 작동하며 머리 위로 차가운 물줄기가 쏟아졌다. 가연성 비닐막의 불꽃은 꺼졌지만, 가스와 물이 뒤섞인 공간은 지옥도와 다름없었다.

"다음 회차에서 보자, 강태윤."

송진우가 이빨을 갈며 복도 저편으로 몸을 돌렸다. 비상구가 열린 이상, 그의 이번 알리바이는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그는 생존자들의 눈을 피해 자신만의 도피로로 사라졌다.

태윤은 바닥에 흘러내린 자신의 피를 내려다보았다.

뜨거운 물줄기가 피를 씻어내고 있었다. 발등의 뼈가 으스러진 고통은 점차 무감각해졌다. 과다출혈로 인한 저체온증이 찾아오고 있었다. 머릿속의 데이터베이스가 마지막 로그를 작성했다.

[시스템 로그: 11회차 루프 종료 조건 충족.] [강제 귀환 프로토콜 가동.] [대가 지불 프로세스 시작: 임의의 사적 기억 삭제 중…….]

'어머니.'

태윤은 본능적으로 마지막 보루를 붙잡으려 했다. 매일 아침 자신을 배웅해주던 따뜻한 손길, 부드러운 목소리, 그리고…… 그녀의 이름.

머릿속의 전두엽 한구석이 통째로 도려내 지는 듯한 기괴한 통증이 일었다. 기억의 도서관에서 가장 소중한 책 한 권이 통째로 불타 없어지는 감각이었다. 태윤은 사라져가는 기억을 붙잡기 위해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으나, 손가락 끝에 걸리는 것은 차가운 스프링클러의 물방울뿐이었다.

"강태윤! 정신 잃지 마!"

설아의 비명이 멀어졌다.

시야가 완전히 암전되었다.

***

딩동-.

부드러운 전자음이 고막을 두드렸다.

태윤은 급격히 상체를 일으켰다. 차가운 스테인리스 스틸 벽면이 눈에 들어왔다. 엘리베이터 안이었다.

거울 속의 자신은 멀쩡했다. 뺨의 자상도, 으스러졌던 오른쪽 발목도 아무런 통증이 없었다. 은테 안경 역시 코 위에 고스란히 얹혀 있었다.

오전 09:00.

12회차 루프의 시작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부드럽게 열리며 태성타워 17층의 익숙한 로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로비 안내 데스크의 푸른 조명이 서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태윤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화면에는 오늘 날짜와 아침 9시라는 시간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그는 심호흡을 하며 뇌 속의 사후 분석 데이터베이스를 점검했다. 송진우의 커프스링크 흉터, 한설아의 녹음기 동선, 그리고 17층의 안전 근무 수칙 조항들까지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이성(理性)은 그 어느 때보다 명료했고, 분석력은 면도날처럼 날카로웠다.

하지만 가슴 한구석이 기묘할 정도로 텅 비어 있었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 장기를 잃어버린 듯한 기괴한 상실감이었다.

태윤은 멍하니 로비 벽에 걸린 거울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그러나 그 얼굴을 낳아주고 길러준 사람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다.

'내 어머니의 이름이 뭐였지?'

태윤은 입술을 움직여 보았다.

아무리 뇌세포를 쥐어짜 내도, 그가 평생 불러왔던 그 세 글자의 이름이 단 한 자도 떠오르지 않았다.

성(姓)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오직 '어머니'라는 추상적인 단어의 정의만 남아 있을 뿐, 그녀와 함께했던 모든 사적인 시간과 감정의 흔적이 완벽하게 소멸해 있었다.

그는 이제 진짜 기계가 되어가고 있었다.

"강 대리님, 안 내려요? 뒤에 사람 기다리는데."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하고 건조한 목소리.

태윤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엘리베이터 문턱 너머에서, 서류 가방을 든 송진우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송진우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엘리베이터 열림 버튼을 손가락 끝으로 지그시 눌렀다. 금속 도어에 반사된 그의 입꼬리가 비틀려 있었다.

"먼저 내리시죠, 강 대리님. 오늘따라 안색이 아주 흙빛입니다."

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은테 안경의 가운데 다리를 검지 끝으로 밀어 올리며 엘리베이터 바닥을 밟았다. 오른쪽 발목은 멀쩡했다. 3톤 무게의 배터리가 뼈를 으스러뜨리던 감각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뇌 깊은 곳에 각인된 고통의 기억은 잔상처럼 남아 신경을 찔렀다.

두 사람은 나란히 17층 복도를 걸었다. 구두굽이 대리석 바닥을 때리는 소리가 불규칙한 박자로 겹쳤다. 송진우가 소매 끝을 털어내며 은색 커프스링크를 다시 한번 만지작거렸다. 미세한 사선 스크래치가 형광등 빛을 받아 번뜩였다.

"어제 야근은 할 만했습니까?"

송진우가 나직하게 물었다. 목소리에는 상대의 반응을 떠보는 가학적인 호기심이 묻어났다.

"수칙을 지켰다면 무사했을 텐데 말입니다."

"네가 설계한 규칙에는 구멍이 많더군."

태윤이 정면을 응시한 채 건조하게 뱉었다.

"법적 책임을 피하려는 회사의 생리가 네 악취 나는 정성보다 강했다는 뜻이다."

송진우의 눈꼬리가 미세하게 경련했다. 그는 더 이상 말을 얹지 않고 기획팀 사무실 문을 열었다.

오전 9시 5분.

사무실 내부는 평소와 다름없는 소음으로 채워져 있었다. 오민혁 팀장은 자리에서 신경질적으로 결재판을 두드렸고, 임예은은 모니터를 뚫어질 듯 노려보며 마우스를 신경질적으로 클릭했다.

태윤은 자신의 파티션으로 걸어가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때, 저편 복사기 앞에서 한설아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종이 걸림 경고등이 깜빡이는 복사기 덮개를 열고 내부를 만지고 있었다.

*틱, 틱.*

복사기 팬이 돌아가는 소음 사이로, 가늘고 규칙적인 기계적 고주파 소음이 감지됐다. 태윤의 사후 분석 데이터베이스가 즉각 작동했다.

[로그 #13: 한설아의 이상 행동 분석] [위치: 기획3팀 복사기 내부 토너 적재함 하단] [작동 기기: 초소형 음성 녹음기(배터리 수명 24시간)] [동선: 매일 오전 09:15분 경, 소모품 교체를 빙자해 상단 메모리 칩을 회수 및 교체함.]

한설아가 고개를 돌려 태윤과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눈빛은 어제 서버실에서 태윤의 뺨을 갈기던 순간처럼 차갑고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는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소심한 계약직 사원의 가면을 쓰고 허리를 숙였다.

태윤은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상실감은 파도처럼 밀려오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뇌의 일부가 물리적으로 정전된 것처럼, 그저 어둠으로 채워진 빈 공간으로 존재했다. 어머니라는 단어를 떠올려도 아무런 감정의 도화선이 당겨지지 않았다. 머릿속에 남은 것은 '나를 조건 없이 지지해주던 여성 보호자'라는 사전적 정의뿐이었다.

괴물이 되어가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이 냉정함이 지금의 사투에는 가장 유용한 무기였다.

그때, 책상 위의 스마트폰이 조용히 진동했다.

화면에는 발신 번호가 표시되지 않은 문자 메시지 한 통이 떠 있었다.

[송진우: 기억은 안녕하십니까? 이번엔 무엇을 지불하셨을지 아주 궁금하군요.]

태윤은 고개를 들어 대각선 방향에 앉은 송진우를 바라보았다. 송진우는 턱을 괸 채 펜을 돌리며 태윤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 가학적인 유희가 넘실거렸다.

태윤이 답장을 보내려던 찰나, 사내 인트라넷 팝업창이 모니터 우측 하단에 붉은색 경고 표시와 함께 솟아올랐다.

[알림: 신사업추진 3팀 긴급 보안 감사 실시 안내] - 대상: 기획 3팀 전원 - 조치 사항: 금일 오전 10시까지 본인 및 직계 존속의 신원 보증 서류 재제출 요망. - 미제출 시 조치: 사내 안전 수칙 제15조 4항 '비존재 직원 격리 조항'에 의거, 즉시 출입 권한 일시 정지 및 17층 보안 대기실 강제 격리.

태윤의 손가락이 마우스 휠을 꽉 움켜쥐었다.

신원 보증 서류.

그 서류의 최상단에는 보증인의 법적 실명과 주민등록번호, 그리고 관계를 증명할 인적 사항을 자필로 기재해야 했다. 태윤에게 남은 유일한 직계 존속이자 보증인은 어머니였다.

하지만 태윤은 이제 그녀의 이름 석 자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머릿속의 데이터베이스를 이 잡듯 뒤졌지만, 사적 영역의 아카이브는 완전히 포맷되어 있었다. 로그 파일 어디에도 '어머니의 이름'이라는 텍스트는 존재하지 않았다.

송진우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는 인쇄기에서 갓 뽑아낸 하얀 서류 봉투를 손에 쥔 채, 태윤의 파티션 너머로 다가왔다.

"강 대리님."

송진우가 서류 봉투로 태윤의 책상 모퉁이를 툭툭 쳤다.

"신원 보증서, 미리 작성해 두셨습니까? 10시가 지나면 보안팀이 직접 올라와서 격리실로 데려갈 텐데 말입니다. 거긴 한 번 들어가면 퇴근 시간까지 절대 안 열리는 밀실이죠."

송진우의 목소리가 귓가를 낮게 파고들었다.

"이름을 모르면 서류를 채울 수 없을 텐데, 어떻게 하실 겁니까?"

태윤의 안경알 너머로 차가운 정적이 가라앉았다. 오전 10시까지 남은 시간은 단 50분. 자신의 신원을 증명하지 못하면 11시 퇴근 카드를 찍기도 전에 밀실에 갇혀 송진우의 사냥감이 될 터였다.

송진우가 서류 봉투를 태윤의 키보드 위에 툭 떨어뜨리며 이빨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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