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색 장포를 걸친 제갈연의 오만한 안광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의 등 뒤로 늘어선 수십 명의 철갑 무사들이 일제히 대도를 뽑아 들었다. 쇠붙이가 맞부딪치는 서늘한 음향이 낙양 분타의 연무장을 온통 얼어붙게 만들었다.
"내 말이 들리지 않는가! 대역죄인 한백령을 즉시 압송하라!"
제갈연의 호통이 고막을 찔렀다. 맹주 맹진태의 붉은 인장이 찍힌 서첩이 밤바람에 거칠게 펄럭였다.
그의 기세는 무림맹주의 대리인답게 거침이 없었다. 낙양 분타의 공기가 바늘처럼 뾰족해졌다. 남궁혜린은 칼자루를 쥔 손가락에 하얗게 핏기를 잃어갔다. 제갈휘 역시 입술을 깨물며 소매 속에 감춘 부채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가문의 장로가 내뿜는 압도적인 세력 앞에 그들의 어깨가 무겁게 짓눌렸다.
그러나 한백령의 시선은 지상이 아닌, 발밑의 깊은 어둠을 향해 있었다.
수만 가지의 정보가 뇌리 속에서 불꽃처럼 명멸했다. 방금 전 획득한 제갈가의 비전, 제갈심산(諸葛心算)의 이치가 그의 뇌수를 자극했다. 지상의 소란은 그저 껍데기에 불과했다. 진짜 핵심은 바로 이 낙양 분타의 심장부, 지하 깊은 곳에 흐르는 영맥의 맥동이었다.
그는 슬그머니 소맷자락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손끝에 차갑고 투박한 감각이 닿았다. 과거 귀영문이 멸문당할 때 품어 나왔던, 겉이 완전히 녹슬어 버린 낡은 단검이었다.
'이것이 열쇠다.'
백령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정파 놈들은 이 고철 덩어리가 낙양 분타 지하에 봉인된 거대한 영맥을 송두리째 뒤흔들 신물이라는 사실을 꿈에도 모를 터였다.
백령은 혜린과 제갈휘에게 은밀한 전음(傳音)을 보냈다.
- 잠시 시간을 벌어 주십시오.
그의 목소리는 지독할 정도로 평온했다. 폭풍의 한가운데 서 있는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고요한 음성이었다.
혜린은 대답 대신 검을 고쳐 잡았다. 제갈휘 역시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전방의 장로 제갈연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갔다. 두 사람이 장로회의 시선을 끄는 바로 그 찰나였다.
백령의 신형이 연무장의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 듯 사라졌다.
귀영문의 독문 신법인 영음보(影陰步)였다. 소리도, 기척도 없었다. 장로회의 정예 무사들이 그의 소실을 알아채기도 전에, 백령은 이미 지상 연무장 구석의 비밀 통로를 타고 지하 분타의 심처로 몸을 던진 후였다.
지하 제단으로 향하는 길은 축축하고 서늘한 기운으로 가득했다.
백령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어두운 통로의 끝에 다다르자, 거대한 석조 제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림맹이 오랜 세월 동안 사파의 기운을 억누르기 위해 설치한 봉인식들이 제단 사방에 붉은 부적처럼 박혀 있었다. 그 중심에서 낙양의 거대한 영맥이 억압당한 채 신음하듯 진동하고 있었다.
백령은 주저 없이 품에서 녹슨 단검을 꺼내 들었다.
단검의 칼날이 지하의 미세한 공진과 맞물리며 미세하게 떨렸다. 이것은 단순한 무기가 아니었다. 귀영문의 선조들이 낙양의 영맥을 통제하기 위해 조율해 둔 인과의 매개체였다.
백령은 제단의 가장 중심부, 봉인 주술이 교차하는 맥점에 단검을 깊숙이 찔러 넣었다.
콰르릉!
단검이 석판을 뚫고 들어가자마자, 지하 전체가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요동쳤다.
녹슨 단검의 표면을 덮고 있던 붉은 녹이 순식간에 벗겨져 나갔다. 그 밑에서 시퍼런 귀영문의 비전 문양이 살아 움직이듯 꿈틀거리며 빛을 발했다. 영맥의 흐름이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무림맹이 쳐 두었던 황금빛 봉인 진법들이 사정없이 뒤틀리며 비명을 질렀다.
"크윽……!"
백령의 단전으로 가공할 만한 영기가 역류해 들어왔다.
사파의 거칠고 사나운 독기와, 낙양 지하에 잠들어 있던 순수한 대지의 힘이 융합되었다. 백령은 이를 억누르지 않았다. 천외인과경의 기운을 운용하여, 역류하는 영맥의 기운을 완벽한 순양기(純陽氣)의 형태로 정제해 나갔다. 그의 전신에서 푸르스름한 열기가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지하의 공명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영맥의 흐름을 장악하자, 뇌리 속에 기이한 광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낙양 총맹 지하 깊은 곳에 봉인되어 있다는 전설의 비검릉(祕劍陵). 그 거대한 무덤을 감싸고 있는 영적 방어벽의 구조와 흐름이, 마치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지도처럼 선명하게 뇌해에 그려졌다.
제갈심산의 연산 능력이 영맥의 변화를 실시간으로 해독해 낸 덕분이었다.
"이것이 비검릉의 골격인가."
백령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무림맹주가 그토록 숨기려 했던 지하의 비밀 통로가 그의 머릿속에서 완벽하게 해체되고 있었다.
그때, 지하 통로 입구에서 가쁜 숨소리가 들려왔다.
남궁혜린이었다. 그녀는 밀려드는 장로회 무사들의 공세를 막아내며 지하로 후퇴해 있었다. 그녀의 백옥 같은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고, 호흡은 가빴다.
무엇보다 백령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녀의 손목 주위로 번져가는 희미한 붉은 반점들이었다.
남궁가문 비전 심법의 치명적인 결함. 내공을 무리하게 끌어올릴 때마다 심맥을 갉아먹는 역혈의 증세가 그녀를 옥죄고 있었다. 혜린은 자신의 검을 쥔 손을 부르르 떨며, 밀려오는 고통을 참아내려 어금니를 악물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언제 버려질지 모른다는 정파 특유의 고독과 불안이 짙게 깔려 있었다.
백령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의 미소는 잔잔한 호수처럼 부드러웠다. 차가운 도구로 타인을 대하는 내면의 냉혹함은 그 미소 뒤에 완벽히 가려져 있었다.
백령은 혜린의 떨리는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백령 소협……."
혜린의 입술이 가볍게 떨렸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혜린 소저."
백령의 목소리는 낮고 무게가 있었다. 그의 손바닥을 통해 온화하고 따뜻한 순양기의 내력이 그녀의 막힌 혈도를 타고 흘러들었다. 손목의 붉은 반점들이 서서히 옅어지며, 고통으로 일그러졌던 그녀의 미간이 부드럽게 풀렸다.
"가문의 허울 좋은 이름이 소저를 얽맨다면, 내가 그 사슬을 부수어 드릴 것입니다. 무림맹의 위선이 우리를 가로막는다면, 그 무덤을 파헤쳐서라도 길을 내겠습니다."
백령의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끝까지 함께 갈 것입니다. 약속하지요."
달콤한 거짓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만큼은 세상 그 어떤 진실보다 정교하고 거대했다.
[천외인과경이 깊은 공명을 시작합니다.] [남궁혜린과의 인과의 고리가 더욱 단단히 체결됩니다.] [순양기의 완성도가 극에 달합니다. 정파의 기운을 완벽하게 의태합니다.]
머릿속에 울리는 인과경의 음성과 함께, 백령의 단전에 고여 있던 순양기가 폭발적으로 팽창했다. 혜린의 눈동자에는 이제 깊은 구원의 빛이 서려 있었다. 그녀는 백령의 손을 마주 꽉 쥐었다. 가문의 억압 속에서 평생을 고립되어 살아온 그녀에게, 백령의 손길은 유일한 구명줄과 다름없었다.
"믿어요. 당신과 함께라면, 가문의 썩은 굴레 따위는 두렵지 않아요."
혜린의 목소리에는 단호한 결의가 실려 있었다.
그녀의 신뢰가 깊어질수록, 백령의 몸속에 깃든 힘은 더욱 예리하고 강력해졌다. 사파의 기운을 완벽하게 감춘, 정파 최고 고수의 기운이 백령의 전신을 감싸 안았다.
쿠구구구둥!
지하 제단이 완전히 개방되면서 생긴 영맥의 파동이 마침내 지상으로 솟구쳤다.
연무장 바닥의 석판들이 쩍쩍 갈라지며 엄청난 기류가 하늘을 향해 분출되었다. 지상에서 대기하고 있던 제갈연과 장로회의 무사들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이, 이게 무슨 해괴한 법력인가!"
제갈연이 노성을 질렀다.
그 파괴적인 영류의 중심에서, 한백령이 천천히 솟구쳐 올랐다. 그의 손에는 더 이상 녹슨 단검이 없었다. 오직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형체 없는 검기만이 허공을 찢을 듯한 예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맹주의 친필 파면장이라."
백령이 허공에 선 채 제갈연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음성에는 가벼운 조소가 섞여 있었다.
"위선으로 가득 찬 가짜 의기를 내세워, 가문의 어린 손들을 도구로 쓰는 자들의 명령 따위는 들을 가치가 없소."
"네 이놈! 감히 맹주님을 모욕하고 가문의 규율을 논하느냐! 저놈의 사지를 잘라라!"
제갈연의 명령에 철갑을 두른 장로회 직속 호위무사 수십 명이 일제히 허공으로 신형을 날렸다.
그들의 대도가 삼엄한 살기를 품고 백령의 전방위를 압박해 왔다. 사방이 칼바람으로 가득 찼다. 평범한 고수라면 뼈도 추리지 못할 가공할 초식의 그물망이었다.
그러나 백령의 눈에는 그들의 움직임이 둔하기 짝이 없었다.
제갈심산의 연산이 그들의 궤적을 이미 수십 수 앞서서 그려내고 있었다. 게다가 낙양 분타 하부 영맥의 힘을 손에 쥔 백령에게, 이 정도의 포위망은 종이호랑이에 불과했다.
백령이 천천히 오른손을 뻗어 허공을 가볍게 튕겼다.
파아앗!
대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검기였다. 극양의 순양기가 귀영문의 침투 살수술과 결합하여, 가장 치명적이고 정교한 파괴력으로 화했다.
무형검기가 허공을 종횡으로 갈랐다.
서늘했다. 바람이 멈추었다. 검날이 쪼개졌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백령의 무형검기는 호위무사들의 대도를 종잇장처럼 잘라내고, 그들의 어깨와 허벅지의 혈도를 정확히 꿰뚫었다.
"콰학!" "크아아악!"
비명소리가 연무장을 가득 메웠다.
철갑을 입은 무사들이 피를 토하며 낙엽처럼 지상으로 추락했다. 단 한 초였다. 제대로 된 검 한 번 휘두르지 않고, 오직 손가락 끝의 튕김만으로 장로회의 정예 호위대를 전멸시킨 것이다.
제갈연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무, 무형기(無形氣)……! 일개 외인이 어떻게 이런 정종(正宗)의 가공할 내력을 지닐 수 있단 말이냐!"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비틀거렸다. 맹주 맹진태가 내린 파면장을 쥔 그의 손이 사정없이 떨렸다.
백령은 바닥에 내려앉으며 제갈연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의 발걸음 소리가 제갈연의 심장을 옥죄는 고문처럼 울려 퍼졌다.
"제갈 장로."
백령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돌아가서 맹주에게 전하시오. 낙양의 영맥은 이제 무림맹의 것이 아니라고."
백령의 눈동자에 스친 것은 정파의 온화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밤의 어둠보다 깊고 잔인한, 사파의 뱀과 같은 독기였다. 제갈연은 그 안광에 압도되어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뒷걸음질 쳤다.
완벽한 승리였다. 맹주의 특사 세력을 압도적인 무력으로 짓눌러 분타의 주도권을 완전히 가져온 순간이었다. 제갈휘와 남궁혜린의 얼굴에 경외심이 어린 안도가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그 통쾌한 승리의 여운은 오래가지 않았다.
쿠구구구궁!
갑자기 발밑에서 고막을 찢는 듯한 괴음이 다시 한 번 울려 퍼졌다.
영맥이 완전히 각성하면서 낙양 분타 하부의 지반이 한계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지하 제단이 있던 자리로부터 거대한 균열이 지상 연무장 한복가운데를 갈라놓았다.
"조심하십시오!"
제갈휘가 소리치며 뒤로 물러섰다.
연무장 바닥이 통째로 함몰되며 깊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칠흑의 구멍이 아가리를 벌렸다. 그 구멍은 단순한 지반 붕괴로 생긴 것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동안 무림맹이 낙양 분타 지하 깊은 곳에 봉인해 두었던, 역사 속으로 사라진 줄 알았던 금기의 영역이 세상 밖으로 드러난 동굴이었다.
쏴아아아-.
그 구멍 내부로부터 소름 끼치도록 차갑고 끈적한 녹색의 기류가 흘러나왔다.
코를 찌르는 악취와 함께, 썩은 살이 타들어 가는 듯한 독기가 연무장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백령의 미간이 처음으로 깊게 좁아졌다.
"이 냄새는……."
그 독기는 사파의 평범한 독공이 아니었다. 과거 무림맹이 정적들을 소리소문없이 제거하기 위해 은밀히 육성했다가, 도덕적 비난을 피하기 위해 지하 깊은 곳에 폐기하고 봉인했다던 금기 중의 금기였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기괴한 마찰음이 들려왔다.
스스스스……. 사사삭.
인간의 비명도, 짐승의 울음도 아닌 기괴한 숨소리가 거대한 구멍 밑바닥에서부터 메아리쳤다.
이윽고, 먼지 구덩이 속에서 정체불명의 형체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온몸에 썩어 문드러진 가죽 장포를 걸치고, 피부가 녹색으로 변해 버린 괴인들이었다. 그들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채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손끝에서는 맹독의 기운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과거 무림맹이 비밀리에 부리던, 그리고 완전히 인형처럼 개조되어 봉인되었던 '금기 독공 무사(毒功 武士)'들이었다.
그들의 기괴한 시선이 일제히 지상의 백령 일행을 향했다.
지하의 봉인이 깨어짐과 동시에, 잠들어 있던 무림맹의 추악한 원죄가 마침내 지상으로 기어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백령은 검자루 위에 손을 얹으며, 얼음처럼 차가운 안광으로 밀려드는 어둠을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