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함께…… 비검릉의 밑바닥으로 내려가겠나."
제갈휘의 갈라진 목소리가 밀실의 탁한 공기 사이로 스며들었다. 평생을 의심과 계산 속에서만 살아온 책사의 입에서 나온, 목숨을 건 동맹의 제안이었다.
그러나 그 손이 한백령의 소매 자락에 닿기도 전이었다.
쾅!
두터운 철목으로 짜인 밀실의 문이 굉음과 함께 산산조각 나며 흩어졌다. 부서진 목편들이 칼날처럼 사방으로 날아들었다. 백령은 신형을 가볍게 뒤로 물리며 소매를 휘둘러 날아오는 파편들을 쳐냈다.
자욱한 먼지 구덩이 속에서 억센 기운을 뿜어내는 그림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문의 수치군, 제갈소저."
가장 앞장서 걸어 나오는 사내의 목소리에는 쇳소리가 섞여 있었다. 제갈가문의 직속 호위대장, 제갈동이었다. 그의 뒤로 검은 무복을 입은 사내 열두 명이 반월형의 진을 치며 밀실을 에워쌌다. 그들의 손에는 가문의 문양이 선명하게 음각된 철검이 쥐어져 있었다.
제갈동의 매서운 눈빛이 바닥에 쓰러진 제갈산과 제갈휘의 손에 들린 비검릉 도면으로 향했다.
"장로회에서 명하셨다. 가문의 비밀을 외인에게 누설하려 한 반역자 제갈휘를 압송하고, 그와 공모한 사파의 첩자를 현장에서 참하라."
그의 시선이 한백령의 얼굴에 가닿았다. 백령은 안색 하나 바꾸지 않은 채, 소매 속에 감추어진 녹슨 단검을 가볍게 매만졌다.
징-.
품 속의 단검이 낙양 분타 지하의 영맥과 공명하듯 미세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제갈휘가 쥐고 있던 도면 역시 푸른빛을 희미하게 뿜어내며 공명했다. 가문이 숨기고자 했던 비검릉의 열쇠가 바로 이곳에 모여 있었다.
제갈휘는 핏기가 가신 얼굴로 제갈동을 쏘아보았다. 그의 얇은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가문의 호위대가 어찌 맹주의 사냥개 노릇을 자처하는가. 장로들은 정녕 나를 저 지하의 제물로 바치고 구차한 비전이나 구걸하겠다는 심산이더냐!"
"닥쳐라!"
제갈동이 대도를 치켜세우며 사납게 포효했다.
"가문의 안위보다 높은 대의는 없다. 맹주님의 뜻이 곧 낙양의 법이거늘, 서자 주제에 감히 입을 놀리는구나. 저놈과 함께 당장 포박해라!"
흑의 무사들이 일제히 검을 세우며 좁혀왔다. 일촉즉발의 순간, 백령의 발끝이 가볍게 지면을 찼다. 그는 제갈휘의 앞을 가로막으며 차가운 순양기(純陽氣)를 전신에 둘렀다. 정파의 고수들이 사용하는 가장 순수하고 투명한 기운이 그의 손끝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제갈가문의 사적인 규율이 무림맹의 공의보다 앞설 수는 없는 법."
백령의 목소리는 잔잔했으나, 밀실 전체를 무겁게 누르는 위압감이 있었다.
"이곳은 낙양 분타. 맹의 정식 지휘 계통을 무시하고 사사로이 무력을 행사하는 것은 명백한 반역이다."
"반역을 논하는가, 정체 모를 놈이!"
제갈동이 무시무시한 살기를 뿜으며 도를 휘두르려던 그때였다.
"그 반역이라는 말, 내 귀에도 아주 잘 들리는군."
밀실의 깨진 벽 너머로 은색 비단 장포를 걸친 여인이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은은하게 빛나는 검집을 손에 쥔 채, 얼음처럼 차가운 안광을 흘리는 여인. 남궁세가의 장녀, 남궁혜린이었다.
그녀의 등장에 제갈동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남궁 소저…… 어찌 이곳에 계십니까?"
"내가 이곳에 있는 것이 이상한가?"
혜린의 걸음걸이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녀는 백령의 곁에 나란히 서서 제갈동을 내려다보았다.
"낙양 분타의 수색과 치안은 남궁세가와 내가 위임받은 임무다. 제갈가의 호위대가 맹의 허락도 없이 분타의 지하 밀실을 파괴하고, 맹의 의협을 핍박하는 행위를 내 어찌 묵과하겠는가."
그녀가 검을 가볍게 비틀어 쥐었다. 그 순간, 검신을 따라 흘러나오는 푸른 검강 사이에 미세한 붉은 반점들이 점점이 박혀 있는 것이 보였다.
백령의 눈이 가늘어졌다. 남궁세가의 비전 심법이 지닌 한계와 역혈의 징후. 그녀의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뜨거운 열기가 육체를 갉아먹고 있는 증거였다. 백령은 그 붉은 반점을 눈에 담으며, 천외인과경의 인과를 더욱 깊게 엮을 준비를 마쳤다.
제갈동은 침을 삼키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남궁세가의 권위는 제갈가문의 일개 호위대장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제갈가 내부의 징벌 조치입니다. 남궁세가가 관여할 바가 아닙니다."
"가문의 일이라?"
백령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온화하지만 서늘한 대협의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렇다면 그 가문의 일이라는 명분 아래, 맹주가 내린 비검릉 외곽 조사의 서첩을 강탈하려 한 것도 가문의 뜻인가?"
백령의 폭로에 제갈동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를……!"
"남궁 소저."
백령이 혜린을 돌아보며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저들의 품을 수색해 주십시오. 이들이 지닌 물건 중에는 맹의 법도를 위배하고 사사로이 독물을 유통하려 한 증거가 있을 것입니다. 제갈산이 언급했던 '벽령단'의 실체와, 가문의 음독이 그 안에 숨겨져 있을 터입니다."
혜린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검을 거두고 품을 열어라. 거부한다면 맹의 이름으로 즉시 참하겠다."
"이, 이럴 수가…… 감히 제갈가를 수색하겠다는 말이냐!"
제갈동이 발악하듯 대도를 휘둘렀다.
스어억!
그러나 혜린의 검은 그보다 훨씬 빨랐다. 푸른 검선이 대기의 어둠을 가르고 지나갔다. 단 한 초 만에 제갈동의 대도가 허공으로 날아갔고, 그의 어깨에서는 붉은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크아악!"
신음하며 무릎을 꿇은 제갈동의 품에서 작은 칠칠한 목함과 서첩 몇 장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백령은 주저 없이 다가가 그것들을 거두어들였다. 목함을 열자, 기이한 향기와 함께 검붉은 광택을 띠는 환약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겉으로는 심맥을 안정시키는 영약처럼 보였으나, 그 기저에 흐르는 독기는 비검릉의 마기와 일치했다. 제갈휘를 섭혼의 꼭두각시로 만들려던 가문의 추악한 음독이었다.
"이것이 제갈가가 숨기려던 진실이군."
백령이 차갑게 읊조렸다.
혜린은 바닥에 뒹구는 제갈가 무사들을 차가운 시선으로 훑어보았다.
"맹의 장원 안에서 음독을 소지하고 가문의 사적인 원한으로 동료를 살해하려 했다. 증거는 명백하다. 이들을 모두 지하 감옥에 구금하라."
남궁세가의 무사들이 밀실 안으로 들이닥쳐 제갈동과 그의 수하들을 거칠게 결박해 끌고 갔다. 순식간에 상황이 정리되었다. 압도적인 신분적 우위와 철저한 명분을 앞세운 백령의 지략이 만들어낸 완벽한 제압이었다.
사방이 다시 고요해졌다.
제갈휘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자신의 목숨줄이자 족쇄였던 벽령단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서린 절망은 이내 깊은 분노와 허망함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가문은…… 처음부터 나를 인간으로 보지 않았던 거군."
그의 목소리가 젖어 들었다. 평생을 가문의 부흥과 자신의 생존을 위해 머리를 짜내며 살아왔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차가운 제물의 운명이었다.
백령은 그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제갈 형."
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다정했고, 따뜻했다. 가식으로 점철된 구원자의 손길이었으나, 벼랑 끝에 선 제갈휘에게는 그것이 세상의 유일한 구원줄처럼 느껴졌다.
"정파의 의(義)가 그대를 버렸다면, 그대가 그 의를 다시 세우면 되는 법이오. 가문의 위선에 굴복하지 마시오. 나와 함께 이 썩어빠진 맹의 실체를 세상에 드러냅시다."
제갈휘는 백령의 손을 바라보았다.
'이 사내를 믿어도 되는가?'
그의 머릿속에서 수만 가지의 계산식과 의심이 소용돌이쳤다. 그러나 백령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깊고 투명했다. 맹목적인 정파의 위선자들과는 달랐다. 백령은 가문의 규칙이나 맹의 억압에 얽매이지 않고, 오직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 순간, 제갈휘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거대한 균열이 일어났다. 평생을 옭아매던 가문의 도덕과 규율을 스스로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 백령처럼 강하고 자유로운 존재가 되어, 자신을 억누르던 세상을 제 손으로 뒤엎어버리고 싶다는 어두운 갈망이 싹텄다.
"……좋다."
제갈휘가 마침내 백령의 손을 잡았다.
"내 지략과 비검릉의 모든 지식을 네게 주마. 그러니 가문과 맹주를 파멸시켜 다오."
두 사람의 손이 맞닿은 순간.
쿠구구궁!
백령의 단전 내부에서 천외인과경이 미친 듯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맑고 차가운 거울의 표면에 제갈휘의 심상이 투영되었다.
[인과의 사슬이 단단히 얽혀듭니다.] [제갈휘의 영혼이 지닌 신뢰와 갈망을 흡수합니다.] [제갈가문 고유의 극의, '제갈심산(諸葛心算)'의 무학 패턴을 획득합니다.]
머릿속이 기이할 정도로 맑아졌다. 백령의 안광이 푸르게 빛났다.
단순한 내공의 증폭이 아니었다. 그의 뇌 내부에서 수만 가지의 정보가 실시간으로 분류되고, 상대의 근육 움직임 하나만으로 초식의 궤적과 내력의 흐름을 수치화하여 예측하는 기이한 연산 능력이 눈을 떴다. 사파의 비정함과 제갈가의 지략이 그의 뇌리 속에서 하나로 융합되는 순간이었다.
백령은 내심 냉혹한 미소를 지었다.
'어리석은 책사 놈. 네가 나를 도구로 쓰려 하듯, 나 역시 너를 무림맹의 심장부를 찌를 창끝으로 쓸 뿐이다.'
인과경의 결속은 강해졌으나, 백령의 심장은 여전히 차가운 얼음과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낙양 분타의 정문 방향에서 웅장하고도 위압적인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뿌우우우-.
장중한 음성이 낙양의 밤하늘을 갈랐다. 그와 동시에 수십 마리의 준마가 바닥을 울리며 분타의 연무장으로 진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백령과 혜린, 그리고 제갈휘의 시선이 일제히 지상으로 향했다.
"이 기운은…… 장로회의 전령인가?"
혜린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들은 급히 지하 밀실을 벗어나 연무장으로 향했다. 연무장에는 횃불을 밝혀 든 수백 명의 맹의 무사들이 삼엄하게 경계를 서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황금빛 비단으로 수놓아진 장포를 입은 노인이 오만한 기세를 뿜으며 서 있었다.
제갈가문의 대장로이자, 무림맹주 맹진태의 최측근인 제갈연이었다.
그의 손에는 맹주의 직인이 선명하게 찍힌, 황금색 서첩이 들려 있었다.
"맹주의 친필 지령이다!"
제갈연의 벼락같은 목소리가 연무장을 뒤흔들었다.
"낙양 분타주와 남궁혜린, 그리고 외인 한백령은 들으라. 너희는 가문의 규율을 어지럽히고 맹의 기밀을 사사로이 탐하여 반역을 도모했다. 이에 맹주님의 권한으로 낙양 분타의 모든 직위를 박탈하고, 한백령을 대역죄인으로 규정하여 즉시 체포한다!"
그가 치켜든 파면장 위로 맹주의 붉은 인장이 피처럼 붉게 빛나고 있었다.
제갈휘의 눈동자가 다시금 분노로 타올랐고, 혜린의 손은 검자루 위에 굳어졌다.
백령은 그들의 앞에서 한 걸음 나아가며, 홀로 가만히 입꼬리를 올렸다. 마침내 맹주 맹진태의 추악한 이빨이 완전히 드러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