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의 균열이 아가리를 벌리며 뿜어낸 녹색의 기류가 연무장 사방으로 끈적하게 흩어졌다.
무림맹의 추악한 이면이 마침내 지상으로 기어 나왔다. 오랜 세월 동안 어둠 속에 갇혀 있던 금기 독공 무사들, 즉 독인(毒人)들이 칠흑 같은 구멍 속에서 기괴한 관절음을 내며 솟구쳐 올랐다. 그들의 붉게 충혈된 눈동자에는 생명의 온기 대신 포악한 살기만이 넘실거렸다.
"이것들은 대체……!"
남궁혜린이 즉시 검자루를 고쳐 쥐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검치(劍齒)가 파르르 떨렸다. 가문의 가혹한 기대에 짓눌려 감정을 억누르며 살아온 그녀였지만, 눈앞에 나타난 괴물들의 형상은 본능적인 공포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제갈휘는 쿨럭이며 마른기침을 터뜨렸다. 선천적인 심맥 질환으로 인해 차가운 독기가 목구멍을 찌르자 단전이 뒤틀리는 통증이 밀려왔다. 그는 품에서 진법용 은침을 꺼내 들며 백령의 등을 응시했다.
백령의 시선은 고요했다. 그의 손은 이미 품속 깊은 곳, 귀영문의 유산인 녹슨 단검에 닿아 있었다.
지하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기류는 단순한 독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낙양 분타의 지하 영맥이 요동치며 뿜어내는 혼탁한 기운이었다. 그리고 백령의 품에 처박힌 녹슨 단검은, 그 영맥의 흐름을 지배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였다.
과거 사파의 은밀한 암살 문파였던 귀영문은 이 낙양 지하의 영맥을 다루는 비술을 지니고 있었다. 정파 놈들이 귀영문을 멸문시키고 그 터 위에 분타를 세웠으나, 정작 영맥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는 깨닫지 못한 것이다.
백령은 품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붉게 녹슬어 볼품없는 단검이 지상의 빛을 받자, 신기하게도 녹색 기류가 단검의 가느다란 홈을 따라 소용돌이치며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백령 형님, 그 단검은……?"
제갈휘의 예리한 눈동자가 좁혀졌다. 지략가로서의 본능이 백령의 손에 든 물건이 예사롭지 않음을 감지했다.
백령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신형을 낮추며 거대한 균열이 시작된 지반의 중심부로 도약했다. 그의 몸짓에는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스윽.
그가 녹슨 단검을 균열의 핵이 되는 검은 암반 사이에 깊숙이 찔러 넣었다.
쿠구구구궁!
단검이 박히는 순간, 사방을 뒤흔들던 괴음이 거짓말처럼 멈추었다. 요동치던 지반이 고정되고, 분출되던 녹색 독기가 단검을 중심으로 회전하며 지하 깊은 곳으로 다시 가라앉기 시작했다. 낙양 분타 지하의 영맥이 완전히 공명하여 백령의 통제 하에 들어간 것이다.
"영맥의 분출을 막았소."
백령이 단검 손잡이를 쥔 채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에는 정파의 대협다운 헌신적인 미소가 걸려 있었으나, 눈동자 속은 얼음 장판처럼 차가웠다.
"남은 것은 저 괴물들을 토벌하는 것뿐이오."
남궁혜린은 그 모습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에서 찌릿한 경외감을 느꼈다. 위기 상황마다 가장 먼저 앞장서서 길을 열어주는 사내. 가문의 가혹한 규율 속에서 누구도 자신을 보호해 주지 않았던 그녀에게, 백령의 존재는 이미 단순한 동료 그 이상이었다.
스스스스!
영맥의 흐름이 막히자, 지상으로 올라온 수십 명의 독인들이 일제히 포효하며 달려들었다. 그들의 손끝에서 검푸른 독액이 채찍처럼 허공을 갈랐다.
백령은 단전에서 순양기(純陽氣)를 끌어올렸다. 혜린과의 인과를 통해 흡수한 천화검강의 극양(極陽)의 정수였다. 사파의 독기를 완벽히 감추고 정파의 고수로 위장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혜린 소저, 우측의 퇴로를 차단해 주시오. 제갈 소협은 후방에서 저들의 관절을 묶어 주시오."
"알겠습니다!"
혜린의 검이 칼집을 벗어나며 붉은 검강을 뿜어냈다. 천화검강(天華劍罡)의 화려한 불꽃이 어두운 연무장을 붉게 물들였다. 그러나 검을 내뻗는 그녀의 하얀 손목 위로 미세한 붉은 반점들이 돋아났다. 가문 비전 심법의 한계로 인한 역혈(逆血)의 부작용이었다.
백령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신형을 날려 혜린의 옆자리로 파고들며, 자신의 순양기를 그녀의 검세에 부드럽게 흘려보냈다.
화아악!
순양기가 더해지자 혜린의 검강이 두 배로 치솟았다. 그녀의 안색이 한결 편안해졌다.
"고맙습니다, 백령 형님!"
"한눈팔지 마시오!"
백령의 외침과 동시에 제갈휘가 소매를 털었다. 십여 개의 은침이 허공을 가르며 독인들의 무릎과 어깨 관절에 정확히 박혔다.
탁! 탁! 탁!
"이십 보 앞, 독인들의 보법이 엉켰습니다! 지금 쳐야 합니다!"
제갈휘의 지략은 전장 전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혜안은 적들의 미세한 빈틈을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았다.
백령의 신형이 바람을 타고 짓쳐 들어갔다.
전투는 가혹하고 빨라야 했다. 문장은 극도로 짧아졌다.
백령이 손을 뻗었다. 순양기가 폭발했다. 독인의 목뼈가 부러졌다. 콰직! 혜린의 검이 대각선으로 그어졌다. 붉은 검강이 독인의 상체를 갈랐다. 서걱! 휘가 던진 침이 독인의 명치를 꿰뚫었다. 큭! 독인 세 명이 동시에 바닥에 처박혔다.
백령은 정파의 화려한 초식 속에 사파 귀영문의 비정함을 숨겨두었다. 그의 움직임에는 낭비가 없었다. 적의 숨통을 끊는 가장 효율적인 궤적만을 그렸다.
순양기의 뜨거운 열기가 사방으로 퍼지며 독인들이 뿜어내는 검은 독기를 태워 없앴다. 혜린의 검세와 휘의 진법, 그리고 백령의 자비 없는 살수술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들어갔다.
"크아아아!"
마지막 남은 독인 세 명의 머리가 백령의 손끝에서 동시에 터져 나갔다.
퍼억!
사방이 고요해졌다. 연무장 바닥은 검푸른 독혈과 독인들의 사체로 가득 찼다. 완벽한 대승이었다. 단 한 명의 인명 피해도 없이, 무림맹의 금기 무사들을 완전히 진압해 낸 것이다.
제갈휘는 턱끝까지 차오른 숨을 몰아쉬며 백령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 속에는 짙은 경탄과 복잡한 감정이 얽혀 있었다. 백령이 보여준 무공은 분명 정파의 순양기였으나, 적을 처단하는 그 비정한 효율성과 사공(邪功)의 흐름을 단박에 간파해 내는 안목은 결코 평범한 정파 무인의 것이 아니었다.
'이 사람은 위선을 떨지 않는다.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오직 확실한 결과를 만들어낸다.'
지독한 의심으로 똘똘 뭉쳐 타인의 호의를 믿지 않던 제갈휘였다. 그러나 백령이 보여준 압도적인 실력과 비정한 일조는 그의 차가운 이성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가문의 허수아비로 살아가며 쌓인 울분이, 백령이라는 거대한 존재를 보며 기묘한 동경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스릉.
백령은 아무런 감흥도 없다는 듯 검을 거두었다. 그의 내면에서는 천외인과경이 제갈휘와의 인과가 한층 더 깊어졌음을 알리는 가느다란 공鳴을 울리고 있었다. 책사의 신뢰를 얻은 대가로, 백령의 단전에 서려 있는 내공의 깊이가 한 층 더 단단해졌다.
"이 괴물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확인해야겠소."
백령이 쓰러진 시신들 중 유독 덩치가 크고 화려한 가죽 장포를 걸친 독인 대장에게 다가갔다.
시신은 이미 부패가 시작되어 고약한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그러나 백령의 예리한 후각은 그 지독한 악취 사이로 흘러나오는 묘한 향기를 잡아냈다.
지극히 맑고, 머리를 서늘하게 식혀주는 약향(藥香).
백령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시신의 품을 거칠게 뒤졌다.
"이 냄새는……."
제갈휘가 다가와 냄새를 맡더니 안색을 굳혔다.
"벽령단(碧靈丹)이 아닙니까? 맹주께서 가문의 핵심 인물들에게만 하사하시는 만독불침의 영약……."
"그렇소."
백령이 독인 대장의 품에서 뿜어져 나오는 약향의 근원을 응시했다.
그것은 맹주 맹진태가 복용하는 가문 특제 벽령단이 분명했다. 독인들이 이 약의 기운을 통해 이성을 잃지 않고 통제받고 있었음을 뜻했다. 무림맹의 수장이 뒤에서 직접 이 추악한 독인들을 부리고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남궁혜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맹주께서…… 직접 이런 괴물들을 키우고 계셨단 말인가요? 무림의 정의를 수호한다는 분이?"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정파의 위선이 가혹한 현실이 되어 눈앞에 드러난 순간이었다.
"정파의 의기란 결국 이런 추악함을 감추기 위한 껍데기에 불과하오."
백령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의 비정한 한마디는 혜린과 휘의 가슴에 날카로운 쐐기처럼 박혔다. 정파의 시스템 자체를 뒤흔들 수 있는 결정적인 단초를 쥔 것이다.
백령은 독인 대장의 가슴팍에 박혀 있는 작은 한철 보관함으로 손을 뻗었다. 맹진태의 더 깊은 비밀이 그 안에 숨겨져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때였다.
타각!
죽은 줄 알았던 독인 대장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움직이며 보관함의 잠금장치를 눌렀다.
"백령 형님, 피하십시오!"
제갈휘의 비명이 연무장에 울려 퍼졌다.
동시에 보관함 내부에서 응축되어 있던 칠흑의 유독 가스가 맹렬한 기세로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단순한 독무가 아니었다. 맹진태의 극독과 벽령단의 약력이 뒤엉켜, 닿는 모든 생명체의 심맥을 즉사시키는 절독(絶毒)이었다.
검은 독기가 화살처럼 일직선으로 뻗어 나와 백령의 가슴팍을 향해 날아들었다.
스아아아!
백령의 순양기가 본능적으로 요동쳤으나, 가공할 속도로 비산한 독기는 그의 호신강기를 무참히 찢어발기며 심장부를 향해 정통으로 처박혔다.
백령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 그의 단전에서 기이한 역류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흑색의 독무가 순양기의 막을 찢었다.
핏빛 연기가 폐부로 스며들었다.
"백령 형님!"
남궁혜린의 비명이 무너져 내리는 연무장에 메아리쳤다. 그녀의 백청색 검이 허공을 갈랐으나, 독무의 장벽에 가로막혀 불꽃만 튀겼다. 그녀의 하얀 눈자위가 붉게 충혈되었다. 다급하게 앞으로 뻗은 손끝이 떨렸다. 가문의 인형으로 살아온 그녀에게 처음으로 생긴 마음의 기둥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그녀의 전신을 지배했다.
제갈휘 역시 이빨을 악물었다. 그의 창백한 안색이 분노와 자책으로 일그러졌다. 자신이 조금 더 일찍 경고했더라면, 저 대협이 독을 뒤집어쓰지는 않았을 터였다.
"침착하십시오! 심맥을 닫아야 합니다!"
제갈휘가 소매를 털어 은침 세 개를 날렸다. 은침은 백령의 견정혈(肩井穴)과 대추혈(大椎穴)에 정확히 박혔다. 독기의 확산을 찰나의 순간 동안 지연시키기 위함이었다.
그 순간, 백령의 심상 내부에서 거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징-.
단전에 자리 잡은 천외인과경(天外因果鏡)이 폭발적으로 진동했다. 거울의 표면에 제갈휘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의심으로 가득 차 타인을 도구로만 보던 책사가, 백령을 향해 완전한 신뢰와 자책의 감정을 품은 순간이었다.
[인과(因果)의 고리가 깊어집니다.] [대상: 제갈휘. 신뢰도 극치 도달.] [제갈가(諸葛家)의 비전 심득인 대연신공(大衍神功)의 정수를 흡수합니다.]
머릿속이 차갑게 식어 내렸다. 천 개의 눈이 한꺼번에 뜨인 듯, 전신의 혈로와 독기의 이동 경로가 극도로 선명하게 그려졌다. 제갈휘의 천재적인 지략과 연산 능력이 백령의 뇌리로 고스란히 이식된 것이다.
백령은 이를 악물었다. 신음조차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다.
그는 대연신공의 극의를 발휘하여 전신의 혈도를 삼십육 개로 분할했다. 들이닥친 절독을 한곳으로 몰아넣기 위함이었다.
스스스스.
순양기가 검은 독무를 억누르며 단전 한구석으로 압착했다. 그러나 독기는 정파의 기운으로 쉽게 소멸시킬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그것은 맹주 맹진태가 벽령단의 약력을 뒤틀어 만든 가공할 만한 ‘벽령혈독(碧靈血毒)’이었다.
‘이것은…….’
백령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독기의 중심부에서 맹진태의 기운이 느껴졌다. 단순한 독이 아니라, 독을 마신 자의 생사여탈권을 맹주가 직접 쥐게 만드는 예속의 주술이었다. 맹진태는 이 독으로 금기 무사들을 조종해 온 것이 분명했다.
문제는 그 독기가 백령의 단전에 자리 잡은 사파의 본원, 귀영문의 음한한 내력과 반응하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정파의 기운인 순양기로 위장하고 있던 흐름이 깨어지려 했다. 사파의 독문 무공과 벽령혈독이 융합하며, 억눌려 있던 귀영문의 살기가 기어 나오려 요동쳤다.
"커흑……!"
백령의 입술 사이로 검붉은 피가 한 줄기 흘러내렸다.
"백령 소협!"
남궁혜린이 독무를 뚫고 다가와 그를 부축했다. 그녀의 손길을 통해 따뜻한 진기가 전해졌으나, 그것이 오히려 단전 내부의 충돌을 부추겼다. 정파의 진기와 사파의 독기가 백령의 몸을 전장으로 삼아 날뛰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였다.
쿠릉, 쿵!
연무장 중앙에 박혀 있던 귀영문의 녹슨 단검이 크게 흔들렸다. 단검의 표면에 미세한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영맥을 억누르던 봉인의 매개체가 백령의 내력 요동에 반응하여 붕괴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럴 수가…… 지하의 영맥이 다시 요동칩니다!"
제갈휘가 함몰된 구멍 아래를 내려다보며 경악했다.
지하 깊은 곳에서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거대한 녹색 광망이 솟구쳐 올랐다. 낙양 분타 전체를 삼켜버릴 듯한 영맥의 폭주였다.
그리고 그 빛의 장막 너머로, 독인 대장의 가슴팍에 있던 보관함이 완전히 깨어지며 한 장의 핏빛 가죽 지도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지도에는 맹주 직인과 함께 ‘비검릉(祕劍陵) 진혈(眞穴)’이라는 글자가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지도가 아니었다. 비검릉의 진짜 입구를 열 수 있는 봉인 해제의 열쇠였다.
"저것을…… 잡아야 하오."
백령이 피 섞인 목소리로 나지막이 뱉었다. 그의 시선은 허공에 떠오른 핏빛 지도를 향해 있었다.
단전은 붕괴 직전이었고, 발밑의 영맥은 폭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위기이자, 무림맹의 심장부를 단숨에 도려낼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스스슥!
바로 그 순간, 무너져 내리는 지하의 어둠 속에서 수십 개의 검은 그림자들이 번개처럼 솟구쳐 올랐다. 독인들이 아니었다. 맹주의 직속 암살대인 ‘묵영대(墨影隊)’의 무사들이었다. 그들의 신형이 핏빛 지도를 향해 쇄도했다.
"맹주의 물건에 손을 대는 자는 멸족이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백령을 향해 가공할 검기를 날렸다.
내력이 뒤엉킨 백령은 피할 수 없었다. 혜린이 검을 치켜세웠으나, 묵영대주의 검격은 그녀의 한계를 아득히 초월해 있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백령의 눈동자에 드리운 찰나였다.
그의 단전 깊은 곳에서, 천외인과경이 차갑게 식어 내리며 완전히 새로운 인과의 길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흡수한 사파의 독기와 정파의 순양기, 그리고 제갈휘의 대연신공이 뒤얽혀 기이한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백령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냉혹한 사파의 이단아다운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