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먼지가 휘날리는 구덩이 중심에서, 검붉은 연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남궁혜린은 검을 거둔 채 그 기이한 광경을 묵묵히 응시했다. 그녀의 고결한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백령은 슬그머니 손을 뻗어, 흙바닥 틈새에서 솟구치는 독기 어린 연기 속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손끝에 닿는 감각은 얼음처럼 차가웠으나, 그 이면에는 뼛속을 긁는 듯한 음침한 열기가 도사리고 있었다. 연기가 걷히며 드러난 것은 반쯤 부식된 황금빛 무사 패였다.
정파 무림의 정점, 무림맹주 맹진태의 신물(信物)이었다.
"이것은…… 맹주님의?"
혜린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정의와 공도를 부르짖는 무림맹주의 상징이 왜 이토록 불길한 사기(邪氣)를 풍기며 비검릉 외곽의 허름한 민가 지하에 매묻혀 있는가. 그녀의 머릿속을 스치는 의혹은 이미 단순한 의심의 단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백령은 무사 패를 조심스럽게 비단 천으로 감싸 안았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혜린을 안심시키기 위한 온화하고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남궁 소저, 이 일은 흘러가는 바람처럼 묻어두어야 합니다. 아직 우리는 진실을 감당할 힘이 부족하니까요."
"하지만 백령 소협, 맹주께서 만약……."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가문의 무게 속에서 이미 배우지 않으셨습니까."
백령의 나지막한 음성에 혜린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가문의 기대를 가차 없이 짓밟고 일어서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백령의 말 한마디에 관통당한 탓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백령을 향한 깊은 신뢰가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단단한 인과(因果)의 사슬이 되어 얽히고 있었다.
***
그날 밤, 낙양 분타의 동쪽 별채.
차가운 달빛이 창살을 통과해 방바닥에 격자무늬를 그렸다. 제갈가문의 천재 지략가이자 심맥의 고질병으로 평생을 고통받아 온 제갈휘는 얇은 장포를 어깨에 걸친 채 서책을 넘기고 있었다. 사락거리는 종이 소리만이 방 안의 정적을 깨뜨렸다.
똑, 똑.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백령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제갈휘는 서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차가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 늦은 시각에 남궁가의 호위 무사께서 내 처소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내공도 없는 병신에게 밤이슬은 썩 해롭소만."
백령은 대답 대신 품 안에서 비단 천에 싸인 무사 패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스르륵 풀리는 천 사이로 검붉은 연기에 그을린 황금빛 패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갈휘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팽창했다. 서책을 넘기던 그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허공에서 딱 멈췄다.
"이것은……."
"맹주 맹진태의 무사 패요. 오늘 비검릉 외곽 영맥의 붕괴지에서 직접 수습한 물건이지."
백령은 탁자 위에 놓인 등잔불을 조금 키웠다. 주황빛 불꽃이 무사 패의 검은 그을음을 비추자, 그 틈새에서 미세하게 요동치는 음산한 기운이 두 사람의 시선 사이에 머물렀다.
"맹주의 신물에서 풍기는 이 기운이 정파의 양기라고 생각하오?"
백령의 질문은 나직했으나 제갈휘의 가슴 깊은 곳을 사정없이 찌르고 들어갔다. 제갈휘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호흡이 조금씩 가빠지기 시작했다. 선천적인 심맥 질환 탓이기도 했으나, 눈앞에 놓인 충격적인 단서가 그의 냉혹한 호기심을 사정없이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마기(魔氣)…… 아니, 이것은 인위적으로 정제된 음독(陰毒)의 일종이군. 맹주가 이런 기운을 지니고 있었다니."
제갈휘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는 맹주 맹진태가 내리는 영약에 의지해 목숨을 연명하고 있었다. 그 영약을 복용할 때마다 느껴지던 기묘한 이질감과 심맥의 뒤틀림이 머릿속에서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백령은 제갈휘의 미세한 안면 근육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천외인과경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상대의 내력 분열 양상이 더욱 선명하게 잡혔다.
"맹주가 제갈 소협에게 내리는 영약, 그 약 향기 속에 섞인 미세한 독기가 이 무사 패의 기운과 닮아 있다고 생각하지 않소?"
"당신이 그걸 어떻게……!"
제갈휘가 급히 가슴을 움켜쥐며 백령을 노려보았다. 그의 눈에는 경계심과 지독한 의심이 서려 있었다. 타인의 호의를 결코 믿지 않는 괴팍한 지략가의 본성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백령은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제갈휘의 어깨를 짚었다. 순간, 백령의 단전에서 흘러나온 순양기(純陽氣)가 제갈휘의 차갑게 굳어가는 심맥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남궁혜린과의 인과를 통해 흡수한 극양의 정수였다. 완벽하게 정제된 정파의 기운이 온몸을 타고 흐르자, 제갈휘의 가쁜 호흡이 거짓말처럼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나는 그저 소협의 고통을 덜어주고 싶을 뿐이오. 무림맹이라는 거대한 기만 아래에서, 우리는 모두 도구로 쓰이다 버려질 운명이 아니던가."
백령의 목소리에는 깊은 슬픔과 자애로움이 묻어 있었다. 제갈휘는 어깨에 닿은 백령의 손길을 거부하지 못했다. 평생 자신을 억누르던 심맥의 통증이 이토록 깨끗하게 씻겨 내려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백령의 예민한 살수적 감각이 별채 밖의 미세한 움직임을 포착했다.
지붕 위 기와가 아주 미세하게 떨리는 소리. 그리고 문창살 너머 어둠 속에서 숨을 죽이고 있는 자의 기척이 느껴졌다.
제갈가문의 원로들이 제갈휘를 감시하기 위해 붙여놓은 첩자였다. 그들은 제갈휘가 맹주의 비밀을 캐내거나 가문의 통제를 벗어나는 것을 억제하려 하고 있었다.
백령은 제갈휘의 귓가에 담담하게 속삭였다.
"소협의 서재에는 쥐새끼가 참으로 자주 드나드는 모양이오. 가문의 어른들께서는 소협의 일거수일투족이 그리도 궁금하신가 보군."
제갈휘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식어내렸다. 그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머리 좋은 허수아비로 살라면서, 목줄은 한 치도 늦추지 않는군."
제갈휘는 소매 안에서 아주 작은 은침 세 개를 꺼내 들었다. 무공은 없었으나, 독문 약초를 다루는 지식과 기계 장치를 다루는 솜씨만큼은 일류였다. 그는 탁자 아래에 설치된 은밀한 도르래 장치를 발끝으로 가볍게 건드렸다.
스윽.
창문 틈새로 소리 없이 작은 화살 한 발이 날아갔다.
"컥……!"
짧고 억눌린 비명이 어둠 속에서 울려 퍼졌다. 화살에 묻은 극독이 첩자의 숨통을 단숨에 끊어놓은 것이 분명했다. 제갈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가문의 통제에 대한 그의 뿌리 깊은 증오가 행동으로 표출된 순간이었다.
"쥐새끼 한 마리를 치웠군."
제갈휘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백령은 그 모습을 보며 내심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고, 제갈휘 스스로 가문의 속박을 깨부수도록 유도한 계획이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제갈휘는 책상 서랍 깊은 곳에서 두꺼운 종이 뭉치를 꺼냈다. 그것은 제갈가문의 장로들이 그에게 보낸 협박 편지들이었다. '가문의 영광을 위해 맹주의 뜻을 받들라'는, 허울 좋은 명분으로 가득 찬 강요의 서신들.
지익.
제갈휘는 촛불의 불꽃에 편지를 가져다 대었다. 불길이 허공을 가르며 타올랐다. 붉은 화염이 그의 창백한 얼굴을 기괴하게 비추었다.
"이따위 껍데기들……."
백령은 타오르는 불꽃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제갈휘의 곁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리고 그의 마른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가문의 명예라는 기만 아래에서, 우리는 얼마나 더 스스로를 깎아내야 하는지 모르겠소. 정파의 의기(義氣)라는 것이 결국 이토록 가혹한 사슬일 뿐이라니."
백령의 목소리에는 진심 어린 안타까움이 담겨 있었다. 제갈휘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평생을 '제갈씨'라는 성씨의 무게에 짓눌려, 무공도 익히지 못한 채 머리만 쓰는 도구로 살아온 그였다. 그 누구도 자신의 고통을 이토록 깊이 이해해 준 적이 없었다.
"백령 형……."
제갈휘의 눈빛에서 독기가 조금 가시고, 대신 깊은 신뢰와 동질감의 빛이 차올랐다.
[천외인과경이 공명합니다.] [제갈휘와의 인과율이 상승합니다.] [제갈가문의 지략 체계와 기계 진법의 정수가 시전자의 단전에 각인됩니다.]
백령의 뇌해 속으로 기이한 진법의 흐름과 수리적 계산 방식이 흘러들어왔다. 가슴 깊은 곳에서 쾌감이 솟구쳤으나, 백령은 겉으로 슬픈 미소를 유지할 뿐이었다.
그때, 백령의 시선이 제갈휘가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던 책상 위의 가죽 주머니로 향했다. 주머니 틈새로 삐져나온 양피지 도면이 눈에 들어왔다.
기이한 톱니바퀴와 기계 장치들이 촘촘하게 그려진 도면이었다. 그것은 무림맹 지하 깊숙한 곳에 위치한 비검릉의 봉인을 해제하기 위한 영동 장치의 부품 설계도였다.
백령은 은밀하게 그 도면의 형상을 뇌리에 새겨넣었다. 머릿속에서 귀영문의 유산인 녹슨 단검의 형상이 떠올랐다. 녹슨 단검의 손잡이 끝에 새겨진 기묘한 문양과 이 영동 장치의 핵심 홈의 규격이 자석처럼 완벽하게 맞물려 떨어졌다.
'이것이었군.'
귀영문의 녹슨 단검이 단순한 유물이 아니라, 비검릉 지하 영맥을 공명시키고 제어하는 열쇠라는 사실을 확신하는 순간이었다. 제갈휘가 제작 중인 이 영동 장치야말로 그 열쇠를 꽂아 넣을 자물쇠였다.
제갈휘는 백령의 시선을 눈치채고, 가죽 주머니를 소중하게 품에 안았다.
"이것은 내가 무림맹을 뒤흔들기 위해 오랫동안 설계해 온 장치요. 비검릉의 문을 열 수 있는 유일한 열쇠지."
그는 백령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더 이상 의심이 없었다. 오직 자신을 알아주는 유일한 이해자를 향한 열망만이 가득했다.
"백령 형, 어쩌면 우리는 같은 길을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소. 나와 함께 비검릉의 지하로 내려가 맹주의 그 추악한 위선을……."
동맹을 선언하려던 제갈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쾅!
밀실의 두꺼운 목문이 거칠게 부서지며 나가떨어졌다. 자욱한 먼지 속에서 서늘한 살기와 함께 장포를 입은 무인들이 들이닥쳤다.
"제갈휘! 감히 가문의 눈을 피하고 첩자까지 살해해?"
제갈가문의 정예 호위 무사들과 장로의 심복들이 검을 뽑아 든 채 방 안을 포위했다. 칼날들이 달빛을 받아 서슬 퍼런 빛을 뿜어냈다.
백령은 제갈휘의 앞을 가로막아서며, 허리춤의 검자루를 천천히 움켜쥐었다. 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사파 귀영문의 비정한 살기가 차갑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무례하도다!"
제갈산(諸葛山)이라 불리는 장년의 무인이 도를 치켜들며 포효했다. 그는 제갈가문의 집법처(執法處) 소속 고수로, 장로들의 충직한 사냥개였다.
"가문의 은혜를 원수로 갚는 패륜아를 처단하라!"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네 명의 무사가 사방에서 짓쳐들었다. 좁은 밀실이 서슬 푸른 도광(刀光)으로 가득 찼다.
백령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검이 칼집을 벗어났다.
순양의 백광이 어둠을 갈랐다.
파공음이 고막을 찢었다.
첫 번째 무사의 목이 날아갔다.
선혈이 벽을 붉게 물들였다.
"막아라!"
제갈산이 다급히 외쳤다.
장로의 심복이 도를 휘둘렀다.
백령의 신형이 흐려졌다.
그림자가 비틀리며 파고들었다.
정파의 검강 뒤에 숨은 살수술.
푸스스.
심장이 꿰뚫린 자가 쓰러졌다.
단 한 호흡 만에 두 명의 고수가 바닥을 뒹굴었다. 백령의 검 끝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가 달빛을 받아 검붉게 빛났다. 그의 손길은 거침없었고, 궤적은 자비가 없었다. 겉으로는 남궁가문의 수려한 검법을 흉내 내고 있었으나, 그 기저에 깔린 것은 오직 효율적인 살상만을 목적으로 하는 귀영문(鬼影門)의 사나운 투로였다.
"이, 이놈……! 정파의 고수가 어찌 이리 비정한 검을 쓴단 말이냐!"
제갈산이 이마에 식은땀을 흘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의 눈에 서린 것은 단순한 경계심이 아닌, 죽음에 대한 원초적인 공포였다.
백령은 대답하지 않았다. 시선을 미세하게 움직여 제갈휘의 상태를 살폈다. 제갈휘는 가슴을 움켜쥔 채 격렬하게 기침을 토해내고 있었다. 격동하는 기운과 살기에 자극받아 그의 고질적인 심맥 질환이 도진 탓이었다. 입가로 흘러내리는 검붉은 혈흔이 그의 창백한 안색과 대조를 이루며 처연함을 더했다.
백령은 신형을 날려 제갈산의 어깨를 검으로 꿰뚫었다.
푸학!
"아아악!"
제갈산의 비명이 밀실을 울렸다. 백령은 그의 단전을 가볍게 걷어차 무공을 폐한 뒤, 제갈휘의 곁으로 착지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자신의 손바닥을 제갈휘의 등에 대었다.
웅웅웅.
따스하고 정순한 순양기(純陽氣)가 제갈휘의 뒤틀린 심맥으로 흘러들어갔다. 타들어 가던 심장의 통증이 가라앉자, 제갈휘는 꺼질 듯한 숨을 내쉬며 백령의 장포 자락을 움켜쥐었다. 그의 손가락 끝이 파르르 떨렸다. 가문조차 자신을 도구로 보아 죽이려 드는 이 순간, 유일하게 자신을 구원해 주는 백령의 손길은 그에게 있어 신앙과도 같았다.
[천외인과경이 격렬하게 진동합니다.] [제갈휘의 영혼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원한과 신뢰가 공명합니다.] [인과의 결속이 한층 더 견고해집니다.]
백령은 내심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제갈휘가 자신에게 품는 감정이 깊어질수록, 그가 지닌 지략과 비검릉에 대한 지식은 고스란히 백령의 영양분이 될 터였다.
백령은 쓰러진 제갈산을 싸늘하게 내려다보았다.
"누구의 명인가."
제갈산은 피를 토하며 광기 어린 웃음을 흘렸다.
"크흑…… 하하핫! 제갈휘, 네놈이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장로님들의 손바닥 안이다. 그리고…… 무림맹주께서도 이미 네놈의 반역을 눈치채셨다."
제갈휘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게 무슨 소리냐."
"네놈이 매달 복용하던 특제 벽령단(碧靈丹)…… 그것이 단순한 심맥의 영약이라 생각했더냐? 맹주께서 가문의 장로들과 거래하여 네놈에게 내린 것은, 비검릉의 봉인을 유지하기 위한 인간 제물의 껍데기를 만드는 섭혼의 음독이다!"
밀실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제갈휘의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평생 목숨줄이라 믿고 삼켰던 약이, 실상은 자신을 무림맹주 맹진태의 꼭두각시이자 비검릉의 산 제물로 만들기 위한 덫이었다는 진실.
"그, 그럴 리가……."
제갈휘가 절망 섞인 신음을 뱉어냈다. 그의 손에 들린 비검릉 봉인 해제용 영동 장치의 도면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백령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맹주 맹진태의 위선이 상상 이상으로 깊고 추악함을 깨닫는 동시에, 머릿속의 판이 더욱 거대하게 맞춰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장원의 저편, 어둠이 짙게 깔린 낙양 분타의 중심부에서 거대한 폭음이 울려 퍼졌다.
쿠르릉!
대지가 요동치고, 검붉은 밤하늘 위로 불길한 뇌전(雷電)이 내리쳤다. 제갈휘가 품고 있던 도면과 백령의 소매 속 녹슨 단검이 동시에 공명하듯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비검릉의 봉인이…… 흔들리고 있다."
제갈휘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림맹주 맹진태가 마침내 비검릉 지하의 영맥을 강제로 개방하려는 움직임을 시작한 것이 분명했다.
백령은 바닥에 떨어진 도면을 주워 품에 넣고, 제갈휘를 부축해 일으켰다. 그의 눈동자에는 정파의 대협으로서의 비장함과, 사파의 이단아로서의 잔혹한 투지가 동시에 일렁이고 있었다.
천하를 뒤흔들 거대한 음모의 아가리가 마침내 그들의 발밑에서 완전히 열린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