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황금빛 밀랍으로 봉인된 서첩이 탁자 위를 미끄러져 백령의 손끝에 닿았다.

제갈휘의 눈동자는 얼어붙은 호수처럼 차가웠고, 그 안에는 상대를 샅샅이 파헤치려는 집요한 감시의 시선이 서려 있었다. 백령은 서첩을 쥐지 않았다. 그저 손가락 끝으로 무림맹주 맹진태의 인장을 가볍게 쓸어내렸을 뿐이다. 손가락 끝을 타고 전해지는 가죽의 서늘함 뒤로, 제갈휘의 가쁜 숨소리가 방 안의 침묵을 두드렸다.

"맹주의 직인이 찍힌 극비 서첩이라."

백령의 목소리는 낮고 잔잔했다. 흔들리는 촛불이 그의 반쪽 얼굴에 어두운 그늘을 드리웠다.

"이토록 무거운 업(業)을 제게 넘기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장로님."

제갈휘는 마른기침을 터뜨렸다. 가슴을 움켜쥐는 그의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심맥의 고통이 밀려올 때마다 그의 내력은 갈가리 찢겨 흩어졌다. 백령은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며 천외인과경(天外因果鏡)의 공명을 유지했다. 제갈휘의 내면 깊은 곳에서 소용돌이치는 맹주를 향한 불신, 그리고 가문에 대한 억눌린 증오가 거울의 표면에 붉은 실핏줄처럼 새겨지고 있었다.

"너는 내 병증을 짚어내고, 맹주가 내린 약의 독기를 알아보았다."

제갈휘가 갈라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것이 우연이 아니라면, 너는 맹주의 눈을 피해 비검릉의 숨은 영맥을 조사할 유일한 적임자다. 만약 네놈이 맹주의 첩자라면 이 서첩을 쥔 순간 네 목숨은 무림맹의 법도에 의해 사라질 것이고, 진짜 기인(奇人)이라면……."

"새로운 길을 열어드리겠지요."

백령이 서첩을 품어 안았다.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더없이 온화했으나, 소매 속 왼손은 귀영문의 녹슨 단검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단검의 차가운 쇳내가 가슴속 독기를 사납게 깨웠다.

"그 시험, 기꺼이 받들겠습니다."

* * *

사흘 뒤. 낙양 외곽, 우거진 송림(松林) 사이로 짙은 안개가 내려앉아 있었다.

비검릉의 외곽 영맥이 흐른다는 협곡의 입구는 적막하기 이를 데 없었다. 흙먼지 냄새와 함께 비릿한 피비린내가 바람을 타고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백령의 곁에는 남궁혜린이 서 있었다. 그녀의 손은 장검의 손잡이를 단단히 쥐고 있었고, 미간은 찌푸려져 있었다. 가문의 무게를 짊어진 그녀의 어깨는 평소보다 더욱 경직되어 있었다.

"백령 소협, 이 향기는……."

"피의 냄새입니다. 그것도 아주 신선한."

백령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자욱한 안개 너머, 인적 없는 황량한 민가 한가운데에서 비명소리가 찢어지듯 울려 퍼졌다. 쇠붙이가 부딪치는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거친 웃음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사파의 잔당들이 숨어든 곳이다! 하나도 남기지 말고 도륙하라!"

우렁찬 호통 소리. 그러나 백령의 귀에는 그 목소리 이면에 숨겨진 기만함이 고스란히 들어왔다.

안개를 헤치고 나아가자, 붉은 가사를 걸친 무사들이 민가를 유린하는 광경이 드러났다. 그들은 사파 귀영문의 표식을 한 가짜 깃발을 흔들며, 죄 없는 촌민들의 목을 사정없이 베어 넘기고 있었다. 사파의 만행을 조작하여 무림맹의 토벌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이른바 '흑색작전'의 현장이었다.

"저들은…… 무림맹의 백호단(白虎壇) 소속 무사들입니다."

남궁혜린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녀의 검 끝이 바르르 떨렸다. 정의를 가르치던 무림맹의 검이 향한 곳이 무고한 민초들의 목덜미라는 사실이 그녀의 세계를 사정없이 흔들고 있었다.

"위선(僞善)."

백령이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슬픔과 분노가 기묘하게 섞여 있었다. 물론, 철저히 연출된 감정이었다.

"정파의 의기라는 것이 고작 이런 피칠갑 위에 세워진 누각이었단 말입니까. 혜린 소저, 저들을 가만두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저들은 맹의 무사들……."

"지금 저 무고한 피를 흘리게 두는 것이 남궁의 검입니까?"

백령의 단호한 일침이 남궁혜린의 심장을 찔렀다. 그녀의 눈에 서려 있던 망설임이 일순간 타오르는 분노로 화했다.

"……아닙니다."

스릉!

청아한 검명과 함께 남궁혜린의 신형이 안개 속으로 쏘아져 나갔다. 푸른 검기가 반원을 그리며 민가를 덮치던 무림맹 살수의 목을 단숨에 베어 넘겼다.

"무엇이냐! 어떤 놈이 맹의 공무를 방해하느냐!"

적들의 대장이 소리치며 철퇴를 휘둘렀다.

전투가 시작되었다. 백령은 남궁혜린의 뒤를 따르며 품속에서 정교하게 정제된 순양기(純陽氣)를 끌어올렸다. 혜린의 신뢰를 통해 얻은 완벽한 정파의 기운이었다. 그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백색의 웅혼한 기운이 살수들의 가슴을 정확히 꿰뚫었다.

파각!

뼈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무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나자빠졌다.

백령은 철저히 혜린의 사각을 보좌했다. 그녀가 가문의 검법을 펼치며 전진할 수 있도록, 측면에서 밀려드는 적들을 묵묵히 쳐내고 있었다. 혜린의 검은 매서웠으나, 마음의 동요 때문인지 초식의 연결이 미세하게 어긋나고 있었다.

"소저, 뒤를 조심하십시오!"

백령의 외침과 함께, 안개 속에서 은밀하게 잠행해 오던 살수 대장이 남궁혜린의 등 뒤를 향해 비수를 날렸다. 비검(飛劍)의 속도는 번개 같았고, 혜린은 앞선 적의 철퇴를 막아내느라 방어할 여력이 없었다.

그 순간, 백령은 망설임 없이 몸을 날렸다.

그는 충분히 비검을 쳐낼 수 있는 내공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안광 속에는 차가운 계산이 번뜩였다. 타인을 오직 도구로만 보는 사파의 본성이 그의 신체를 기이하게 비틀었다.

푸학!

날카로운 쇠붙이가 백령의 어깨와 등줄기를 깊숙이 가르고 지나갔다. 붉은 선혈이 안개 덮인 허공에 점을 찍으며 흩뿌려졌다.

"아아아윽!"

백령이 나직한 신음을 흘리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의 등 뒤로 붉은 피가 가사처럼 번져 나갔다.

"백령 소협!"

남궁혜린의 눈동자가 거대하게 찢어졌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단단하게 차오르던 이성이 툭,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몸을 던진 사내. 가문의 그 누구도, 무림맹의 그 어떤 대협도 자신을 위해 피를 흘려준 적은 없었다. 오직 눈앞의 이 사내만이 그녀의 방패가 되어 주었다.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 존재하던 마지막 정서적 빗장이 완전히 부서져 내렸다.

웅웅웅!

백령의 가슴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천외인과경이 미친 듯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거울의 표면이 백색의 광채로 터져 나갈 듯 눈부시게 빛났다.

[인과율의 공명이 극점에 도달합니다.] [남궁혜린의 절대적인 신뢰와 의리가 각인됩니다.] [남궁가문 비전 오의 — '천화낙검식(天華落劍式)'의 정수를 흡수하여 시전자의 내공에 온전히 귀속합니다.]

머릿속을 때리는 차가운 전율과 함께, 남궁혜린이 평생을 바쳐 연마해 온 검법의 모든 결이 백령의 단전으로 흘러들었다. 이전에 흡수했던 순양기가 용솟음치며 새로운 오의와 결합했다. 그의 체내에서 사파의 독기와 정파의 순양이 기묘한 조화를 이루며 폭포수처럼 요동쳤다.

"내…… 내 이놈들을 단 한 놈도 살려두지 않겠다!"

남궁혜린이 폭포 같은 기세를 뿜어내며 검을 휘둘렀다. 그녀의 검 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반점 섞인 검기가 적들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백령은 바닥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빛은 이미 죽은 자의 그것처럼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혜린 소저, 물러서십시오."

백령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흐트러졌다. 그의 손이 남궁혜린의 검 손잡이 위를 덮었다. 혜린은 자신도 모르게 검의 소유권을 그에게 넘겨주었다. 온전한 신뢰의 증거였다.

"이 검은, 위선을 베는 검입니다."

백령이 혜린의 검을 쥐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의 등 뒤에서 흘러내린 피가 대지를 붉게 적셨으나, 그의 발걸음은 추호의 흔들림도 없었다.

살수 대장이 이를 갈며 철퇴를 치켜들었다.

"되먹지 못한 의원 놈이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백령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검을 비스듬히 눕혔을 뿐이다.

스아아아!

백령의 검 끝에서 피어오른 기운은 남궁혜린의 그것과 완전히 같았다. 아니, 더 웅혼하고 순수한 백색의 순양기였다. 천화낙검식의 초식이 그의 손끝에서 완벽하게 구현되었다.

스윽.

백령의 신형이 허공에서 사라졌다.

"무, 무엇이……!"

살수 대장이 경악하기도 전에, 하늘에서 수십 개의 백색 검화(劍花)가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남궁가문의 비전 오의가 백령의 사파적 살수 본능과 결합하여, 가장 치명적이고 비정한 궤적을 그리며 낙하했다.

서걱! 서걱! 서걱!

대기를 가르는 소리는 고요했으나, 그 결과는 참혹했다.

살수 대장의 사지가 순식간에 절단되며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그의 목덜미를 백령이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백령은 혜린이 다가오기 전, 극히 찰나의 순간에 귀영문의 은밀한 수법을 전개했다. 소매 속에서 흘러나온 흑색의 독기가 살수 대장의 상처를 파고들었다. 뼈와 살이 소리 없이 녹아내리는 사파의 비기였다.

"아…… 으아악!"

살수 대장의 몸이 흔적도 없이 부스러져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무림맹의 흔적도, 사파의 흔적도 아닌, 그저 자연의 먼지로 돌아간 것처럼 완벽한 인멸이었다.

남궁혜린은 넋을 잃은 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백령이 보여준 검로의 아름다움과 그 이면에 숨겨진 비정한 결단력에 압도된 탓이었다.

"백령 소협……."

혜린이 비틀거리며 백령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손이 백령의 상처 입은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저 때문에…… 이런 상처를……."

"소저가 무사하시다면, 제 몸의 상처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백령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자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의 눈동자에는 오직 그녀만을 걱정하는 빛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의 내면에서는 천외인과경이 가져다준 새로운 힘의 포만감에 소름 끼치는 희열이 일고 있었다.

그때였다.

스스스스…….

전투가 끝난 민가의 깨진 돌바닥 틈새, 깊은 땅굴의 어둠 속에서 기이한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지독하게 차갑고 사악한 연기였다. 그 연기는 마치 살아 숨 쉬는 뱀처럼 허공을 맴돌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무언가를 서서히 드러냈다.

안개가 걷히며 모습을 드러낸 것은, 황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나야 할 무림맹주의 무사 패였다.

하지만 그 무사 패의 표면은 검붉은 독기로 검게 그을려 있었고, 그 중심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정파의 양기가 아닌, 소름 끼치는 마(魔)의 숨결이었다.

백령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무림맹주 맹진태의 상징이 왜 이곳, 비검릉의 외곽 영맥 깊은 곳에서 사악한 연기를 뿜으며 존재하는가.

또 다른 음모의 서막이 그들의 발밑에서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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