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붉은 안개가 지하 창고의 바닥 타일 틈새를 뚫고 솟구쳤다.

피비린내가 사방을 메웠다. 벽면에 부착된 정파의 황색 부적들이 스스로 불타오르며 검붉은 재를 뿌렸다. 바닥에 쓰러진 남궁상의 시신은 이미 검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백령 소협! 이것은……!"

남궁혜린이 검을 고쳐 쥐며 외쳤다. 그녀의 목소리에 미세한 떨림이 서려 있었다.

한백령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붉은 안개의 흐름을 쫓고 있었다. 혈무살진(血霧殺陣). 무림맹이 은밀히 운용하는 자폭용 살진이었다. 증거를 인멸하고 침입자를 몰살하기 위해 설계된 정파의 추악한 이면이 눈앞에서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쉬익!

안개가 살아 있는 뱀처럼 남궁혜린의 발목을 향해 뻗어왔다.

"물러서십시오."

한백령이 혜린의 어깨를 짚으며 신형을 날렸다. 그의 신형이 허공에서 꺾였다. 귀영문의 비전 보법인 유영보(幽影步)였다. 극도로 억제된 파공음이 지하실을 울렸다.

타격은 간결했다.

그는 소매 안에서 묵직한 철편을 꺼냈다. 진법의 기점이 되는 네 모퉁이의 부적을 향해 철편이 백광을 그리며 날아갔다.

콰아아앙!

폭음이 지하실을 흔들었다.

부적이 터져 나가며 붉은 안개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그러나 진법의 핵심은 아직 살아 있었다. 남궁상의 시신에서 흘러나온 혈류가 진안(陣眼)을 향해 흐르고 있었다.

"혜린 소저, 검을 가문의 천화심법(天華心法)으로 운기하십시오. 저 붉은 안개의 중심을 꿰뚫어야 합니다."

한백령이 차분하게 지시했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남궁혜린은 이를 악물었다. 그녀가 백색 검신을 치켜들었다. 검 끝에서 푸른 검기가 일어났다. 그러나 그 순수한 푸른빛 사이로 기이한 붉은 기운이 섞여 들기 시작했다.

한백령의 예리한 눈이 그녀의 목덜미를 포착했다.

하얀 피부 위로 미세한 붉은 반점들이 돋아나고 있었다. 그것은 내공이 순리대로 흐르지 못하고 역류할 때 발생하는 치명적인 징후였다. 갈라진 반점들은 마치 핏방울이 맺힌 것처럼 붉었다.

'남궁가의 심법은 강맹함을 쫓느라 맥을 옥죄는구나.'

백령은 그 모습을 뇌리에 깊이 새겨두었다. 천외인과경을 다루는 그에게 타인의 무학적 결함은 가장 가치 있는 정보였다.

"하압!"

혜린이 검을 휘둘렀다.

푸른 검강이 붉은 안개의 중심을 갈랐다. 굉음과 함께 진법이 완전히 붕괴했다. 사방으로 흩어지는 잔해 속에서 혜린은 크게 비틀거렸다. 그녀는 검을 지팡이 삼아 바닥을 짚었다. 입가로 흘러내리는 한 줄기 선혈을 급히 소매로 닦아내는 그녀의 손끝이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 * *

사흘의 시간이 흘렀다.

낙양 분타의 후원에 위치한 외진 연무장. 달빛이 차갑게 내려앉은 그곳에서 은은한 파공음이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휘익. 붕.

남궁혜린은 홀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녀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가문의 기대, 후계자라는 무거운 멍에, 그리고 지난 사흘간 자신을 압박해 온 장로들의 차가운 시선이 그녀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검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그녀의 호흡은 가빠졌다.

"흐윽……."

혜린은 결국 검을 멈추고 주저앉았다.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어깨가 미세하게 들썩였다. 천하제일 가문의 소장주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열여덟 소녀의 나약함이 달빛 아래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사락.

마른 풀잎이 밟히는 소리가 고요한 연무장에 퍼졌다.

혜린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검을 치켜세웠다. 눈가에 맺힌 눈물을 거칠게 닦아내는 그녀의 눈동자에 경계심이 가득했다.

그러나 나타난 이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그녀의 검 끝이 힘없이 내려앉았다.

"백령 소협……."

한백령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따뜻한 차가 담긴 찻잔 두 개가 들려 있었다.

"밤바람이 차갑더군요. 잠이 오지 않아 거닐다 보니 검명(劍鳴)이 들려 발길을 옮겼습니다."

백령은 혜린의 옆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녀의 검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검이 울고 있더군요."

"……검이 운다니요. 제 실력이 부족하여 검끝이 흔들린 것뿐입니다."

혜린은 고개를 돌렸다. 가문의 엄격한 규율 속에서 자란 그녀에게 약함을 보이는 것은 금기였다.

백령은 그녀의 곁에 가만히 앉았다. 그의 시선은 허공의 달을 향해 있었다.

"남궁가의 검법은 천하에서 가장 찬란하고 강맹합니다. 하늘을 찌르는 기세가 일품이지요. 하지만……."

백령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혜린을 돌아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깊은 동질감과 슬픔이 서려 있었다. 연기였다. 그러나 너무나도 완벽한 위선이었다.

"하늘을 찌르기 위해 스스로의 맥을 꺾어야 한다면, 그것은 검을 쥐기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가문의 이름을 지키기 위한 것입니까?"

혜린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가문은 제게 완벽함을 요구합니다. 단 한 번의 실수도, 단 한 줄기의 흔들림도 허용되지 않아요. 저는…… 그 기대를 저버릴 수 없습니다."

"강해져야 한다는 강박이 도리어 맥을 막고 있습니다. 소저의 검에 섞인 붉은 반점은 내공이 갈 길을 잃고 살을 찢고 나오는 증좌입니다."

백령은 품에서 낡은 서첩 하나를 꺼냈다. 그것은 귀영문의 비전 중 하나인 '유수보맥결(流水補脈訣)'의 구결을 그가 정파의 언어로 윤색해 적어둔 것이었다.

"이것을 보십시오."

혜린은 의아한 눈빛으로 서첩을 받아들었다. 그 안에는 기이하리만치 부드럽고 유연한 운기법이 적혀 있었다.

"남궁가의 심법이 강(剛)이라면, 이것은 유(柔)입니다. 부러지지 않는 나무는 폭풍에 꺾이나, 물결을 타는 풀잎은 살아남는 법이지요. 억지로 힘을 쥐어짜지 마십시오. 흘려보내야 비로소 온전해집니다."

"이것은…… 가문의 무학이 아닙니다. 어디서 이런 것을……."

혜린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백령을 바라보았다.

백령은 쓰라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과거 저 역시 가문의 무거운 짐을 지고 홀로 울던 적이 있었습니다. 멸문당한 제 문파의 선배들이 남긴 유일한 유산이지요. 소저를 보니, 마치 과거의 제 처지와 닮아 보여 차마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묵직한 진심이 묻어나는 듯했다. 타인을 오직 도구로만 보는 차가운 이성을 철저히 감춘 채, 그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구원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혜린의 눈가에 다시금 눈물이 고였다. 가문의 그 누구도 자신을 이렇게 따뜻하게 위로해 준 적이 없었다. 그들은 오직 결과만을 요구했을 뿐이었다.

"백령 소협…… 저를 위해 이 귀한 비전을……."

"소저의 검이 진정으로 자유로워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혜린은 서첩을 가슴에 꼭 안았다.

[천외인과경이 공명합니다.] [남궁혜린과의 인과 결속이 깊어집니다.] [결속도: 45% -> 60%]

백령의 머릿속으로 기이한 이계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동시에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기운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혜린이 서첩에 적힌 구결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심법을 운용하자, 그녀의 단전과 백령의 단전이 가상의 선으로 연결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스으으으.

남궁가의 가혹하고도 찬란한 비전, '남궁천화검강(南宮天華劍罡)'의 정수가 백령의 단전으로 은밀히 흘러들어왔다. 백령은 내면에서 솟구치는 가공할 내공의 확장을 느끼며 숨을 죽였다.

그녀의 신뢰가 깊어질수록, 그녀의 무학은 백령의 것이 되었다.

'완벽하다.'

백령은 속으로 냉소했다. 정파의 의기(義氣)라는 가식적인 끈이, 결국 자신에게 천하제일 가문의 비전을 고스란히 바치고 있었다.

* * *

다음 날 아침.

낙양 분타의 대연무장은 수많은 무사들로 북적였다.

분타주 남궁철을 비롯한 가문의 장로들과 방계 무사들이 서슬 퍼런 눈으로 연무장 중앙을 주시하고 있었다. 사흘 전 지하 창고에서 일어난 혈무살진의 사건을 두고, 그들은 남궁혜린에게 책임을 묻고자 모인 자리였다.

"후계자라는 자가 사파의 끄나풀과 내통하여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고, 종국에는 비밀 지령까지 누설되게 만들다니! 이 일을 어찌 책임질 것인가!"

남궁철이 가혹한 목소리로 포효했다.

혜린은 연무장 한가운데 서서 묵묵히 그 비난을 받아내고 있었다. 그녀의 곁에는 한백령이 고요히 서 있었다.

"장로님, 혜린 소저는 가문을 위협하는 음모를 막아냈을 뿐입니다. 어찌 공을 과로 돌리려 하십니까?"

백령이 정중하지만 뼈가 있는 목소리로 반박했다.

"입을 닥쳐라! 어디서 근본도 모르는 낭인이 감히 남궁가의 가사에 끼어드는가!"

남궁철의 기세가 폭발했다. 그의 주위로 강맹한 진기가 휘몰아쳤다.

"혜린, 네가 진정 가문의 후계자 자격이 있다면, 오늘 이 자리에서 네 검으로 증명해라. 만약 천화검강을 완벽히 현현하지 못한다면, 소장주의 직위를 폐하고 규율관의 처분을 받게 하겠다!"

그것은 억지였다. 혜린의 나이에 천화검강을 완벽히 현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남궁철은 이번 기회에 그녀를 끌어내릴 심산이었다.

혜린은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그녀의 손끝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어젯밤 백령이 건네준 '유수보맥결'의 가르침이 그녀의 전신에 흐르고 있었다.

강하게 쥐려 하지 마라. 흘려보내라.

혜린은 심호흡을 했다. 단전에서 일어난 진기가 평소와 달리 부드럽고 막힘없이 경맥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매번 검을 쓸 때마다 그녀를 괴롭히던 가슴의 통증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쉬이이익!

그녀가 검을 휘두르자, 은은한 백색의 검기가 피어올랐다.

남궁철은 코방귀를 꼈다.

"겨우 그 정도 검기로 무얼 증명하겠다는……."

그 순간이었다.

혜린의 검 끝에서 피어오르던 백색 검기가 순식간에 응축되며, 투명하고도 찬란한 검강(劍罡)으로 변모했다.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검강은 그 어떤 불순물도 섞이지 않은, 남궁가 역사상 가장 순수하고 완벽한 형태의 '천화검강'이었다.

파아아앗!

찬란한 빛이 연무장을 가득 메웠다.

검강이 스치고 지나간 연무장의 바닥 돌판들이 종이처럼 부드럽게 잘려 나갔다. 그 위력과 정교함은 이미 일류 고수의 경지를 아득히 초월해 있었다.

"어…… 어찌 이런 일이……!"

남궁철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가문의 장로들 역시 믿을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열여덟의 나이에 이토록 완벽한 천화검강을 완성한 천재는 남궁가 역사상 단 한 명도 없었다.

혜린은 검을 거두며 백령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깊은 감사와 존경이 담겨 있었다.

"증명은 끝났습니다, 장로님."

혜린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을 띠고 있었다. 연무장에 모인 무사들은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압도적인 재능 앞에서의 침묵이었다.

백령은 겉으로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대견하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서는 사나운 뱀의 독기가 차갑게 요동치고 있었다.

'남궁가의 천재라…….'

그녀가 강해질수록, 그녀의 신뢰가 깊어질수록, 천외인과경을 통해 백령이 휘두를 수 있는 힘의 크기는 상상을 초월하게 될 것이었다. 정파의 심장을 도려낼 날카로운 검이 마침내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과연, 소문대로 장하군."

연무장의 입구에서 나지막하면서도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십 명의 무림맹 정예 무사들이 양옆으로 갈라지며 길을 열었다. 그 사이로 휠체어에 앉은 청년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단정한 백색 장포를 입고 있었으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지독한 병색을 감추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의 깊고 가라앉은 눈동자만큼은 그 어떤 고수보다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무림맹의 장로이자 최고의 책사, 제갈휘(諸葛輝)였다.

제갈휘는 휠체어 바퀴를 직접 굴리며 연무장 중앙으로 들어섰다. 그의 시선은 완벽한 검강을 보여준 남궁혜린을 스치듯 지나쳐, 그녀의 뒤에 고요히 서 있는 한백령에게 멈추었다.

제갈휘의 입가에 얇은 미소가 걸렸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낙양 분타에 이토록 기이한 인재가 숨어 있을 줄은 몰랐군."

제갈휘의 시선이 백령의 전신을 샅샅이 훑었다. 마치 백령의 가슴속 깊이 숨겨진 사파의 독기와 천외인과경의 존재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한, 지독하게 의심스러운 눈초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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