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빗물에 젖은 나뭇잎들이 가쁜 숨을 몰아쉬듯 흔들렸다.

남궁혜린의 차가운 검 끝이 한백령의 목덜미를 겨눈 채 고정되어 있었다. 단 일 촌. 검날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검기는 한백령의 살결을 베어 물 기세로 번뜩였다. 빗물이 검신을 타고 흘러내려 한백령의 쇄골 위로 떨어졌다.

스스스스.

저 멀리 어둠 속에서 수십 개의 횃불이 비구름을 뚫고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가쁜 발소리와 쇠사슬이 부딪치는 소리. 남궁가문의 순찰대가 이곳을 향해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대답해라."

남궁혜린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눈동자가 한백령의 얼굴을 샅샅이 훑었다.

"방 조장의 단전은 정파의 정순한 내력에 의해 파괴되었다. 사파 귀영문의 마두가 행한 짓이라 하기엔 경력의 흔적이 너무도 맑아. 그대는 어찌하여 거짓을 고하는가?"

한백령은 숨을 들이켰다. 목덜미에 닿은 검날의 한기가 뼛속까지 시려왔지만, 단전 깊은 곳에 숨겨둔 사파의 마공은 뱀처럼 고요히 똬리를 틀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오직 억울함과 동료를 잃은 자의 절박함만이 떠올랐다.

그는 손가락을 미세하게 떨며, 방무덕의 피 묻은 가슴팍을 가리켰다.

"대소저……."

목소리가 빗소리에 섞여 갈라졌다. 한백령은 상체를 비틀어 방무덕의 으스러진 단전 부위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끝이 방무덕의 상처 가장자리를 조심스럽게 문질렀다.

"속으신 것입니다. 이 상처를 자세히 보십시오."

"무엇을 말이냐?"

남궁혜린의 미간이 좁혀졌다. 검 끝은 여전히 흔들림 없었으나, 그녀의 시선은 한백령의 손끝을 쫓았다.

"경력은 정순하나, 기맥의 흐름이 뒤틀려 있습니다. 겉으로는 화산(華山)의 매화검기나 남궁의 창공검결처럼 맑아 보이지만, 상처 깊은 곳의 살점은 안쪽으로 말려 들어가 있습니다. 이것은…… 경력을 회전시켜 침투시키는 사파 귀영문의 독문 수법, 귀영보(鬼影步)의 흔적입니다."

한백령의 눈이 젖은 흙바닥을 향했다. 자책감에 젖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귀영문의 마두는 정파의 무공을 흉내 내고 있었습니다. 방 조장님은 마지막 순간에 그 사실을 깨달으셨지요. 정파의 내부 배신자, 혹은 정파의 무학을 훔쳐 간 사파의 첩자가 배후에 있음을 직감하시고…… 제게 이 사실을 맹주부에 알리라 하셨습니다."

남궁혜린의 검 끝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녀는 상체를 숙여 방무덕의 단전을 다시금 확인했다. 한백령의 말대로였다. 파괴된 단전의 중심부는 정파의 기운으로 가득했으나, 그 주변부의 미세한 혈도들은 나선형으로 뒤틀려 파열되어 있었다. 평범한 정파의 경력으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뼛속까지 파고드는 음독한 회전 마력의 흔적.

그녀의 눈동자에 거대한 충격이 감돌았다.

정파 내부의 배신자. 혹은 정파의 무공을 완벽히 모방하는 사파의 괴물. 어느 쪽이든 무림맹의 근간을 흔들 만한 추악한 진실이었다.

바스락!

"대소저! 이쪽입니다!"

수풀을 헤치고 남궁가문의 호위무사들과 순찰대원 수십 명이 들이닥쳤다. 그들의 선두에 선 자는 장년의 집사, 남궁철이었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시신들과 그 사이에 주저앉아 있는 한백령을 발견하자마자 눈을 부릅떴다.

"귀영문의 생존자인가? 대소저, 물러서십시오! 이자는 위험합니다!"

남궁철이 검을 뽑아 들며 한백령에게 접근하려 했다. 무사들의 살기가 한백령의 전신을 압박했다.

그 순간, 남궁혜린이 검을 거두며 한백령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스릉.

그녀의 검이 검집으로 돌아가며 가벼운 마찰음을 냈다.

"멈추어라."

"대소저? 하지만 저자는……."

"이자는 의기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동도다. 화산파의 속가 제자이자, 방 조장을 구하기 위해 귀영문의 마두와 맞선 자다. 그 무공의 순수함은 내가 직접 검증했다."

남궁혜린의 목소리에는 거역할 수 없는 위엄이 서려 있었다. 그녀는 남궁철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더는 무례를 범하지 마라. 상처 입은 의로운 무사에게 검을 겨누는 것은 남궁의 도리가 아니다."

남궁철은 혜린의 기세에 눌려 슬그머니 검을 거두었다. 뒤에 선 무사들 역시 고개를 숙였다.

한백령은 고개를 숙인 채, 입가를 가리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 정파 놈들의 그 알량한 '도리'와 '의기'라는 규칙. 그것만큼 다루기 쉬운 무기는 없었다.

위이잉.

그의 머릿속에서 청동 거울이 다시 한번 맑은 진동을 일으켰다.

[남궁혜린과의 인과(因果)가 깊어집니다.] [신뢰의 깊이가 더해져, 그녀의 단전에 깃든 정파 기운의 정수가 당신의 기맥으로 스며듭니다.] [내공의 순도가 상승합니다.]

단전 깊은 곳에서 정순한 도가(道家)의 진기가 솟구쳐 올랐다. 한백령은 그 기운을 억누르며, 겉으로는 여전히 상처 입고 쇠약한 청년의 모습을 유지했다.

"감사합니다…… 대소저. 제가 부족하여 방 조장님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한백령이 흙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피를 토해내는 시늉을 했다. 남궁혜린은 그 모습을 보며 가슴 한구석이 찌릿하게 저려오는 것을 느꼈다.

자신 역시 가문의 가혹한 기대와 무림맹의 위선적인 정치 싸움 속에서 늘 홀로 서 있어야 했다. 무림맹주 맹진태는 늘 정의를 가르쳤으나, 정작 위급한 순간에는 가문의 이득을 먼저 계산하라 다그치던 어른들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이 청년은 달랐다.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도 동료의 죽음을 자책하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다가가 한백령의 어깨를 짚었다.

"그대의 잘못이 아니다. 가자, 낙양 분타로. 그곳에서 치료를 받고, 이 일의 배후를 밝혀야 한다."

***

낙양 무림총맹 분타로 향하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장대비는 그쳤으나 흙탕물로 변한 산길은 발걸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한백령은 가벼운 내상을 입은 척하며 남궁혜린의 부축을 받았다. 그녀의 어깨가 닿을 때마다 은은한 매화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한백령은 혜린의 걸음걸이를 유심히 살폈다.

그녀는 꼿꼿하게 걷고 있었으나, 오른발이 지면에 닿을 때마다 미세하게 호흡이 흔들렸다. 검을 쥔 손가락 끝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가끔씩 기맥이 뒤틀리는 듯한 붉은 반점이 그녀의 손목 피부 위로 떠올랐다 사라졌다.

'창공검결의 역혈 현상인가.'

한백령은 단박에 알아챘다.

남궁가문의 가혹한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그녀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 비전 심법을 억지로 끌어올려 수련해 온 것이다. 그 결과로 단전에 쌓인 열독이 기맥을 갉아먹고 있었다. 정파의 천재라는 화려한 껍데기 속에 숨겨진, 썩어 들어가는 상처였다.

"소저."

한백령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가?"

"검을 쥐실 때, 억지로 내력을 뿜어내려 하지 마십시오. 기맥이 이미 붉게 물들고 있습니다."

남궁혜린의 신형이 굳어졌다. 그녀는 황급히 소맷자락을 당겨 손목을 가렸다. 그녀의 눈동자에 경계심과 당혹감이 동시에 스쳤다. 가문의 장로들조차 알지 못하는, 그녀만의 치명적인 비밀이었다.

"그대가 어찌 그것을……."

"눈에 보입니다. 대소저의 어깨에 놓인 짐이 너무나 무거워 보입니다."

한백령의 목소리에는 깊은 동정과 연민이 담겨 있었다. 그 눈빛은 너무도 맑고 따뜻하여, 거짓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천하의 남궁가가 요구하는 완벽함이, 때로는 스스로의 기맥을 억누르는 족쇄가 되기도 하지요. 남들이 보는 화려한 검기 뒤에서, 소저께서 얼마나 홀로 고통을 견뎌내셨을지…… 감히 짐작조차 하기 어렵습니다."

"……."

남궁혜린은 말을 잃었다.

늘 강해야 한다고, 남궁의 후계자로서 약한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고 훈육받아 왔다. 아버지는 그녀의 검이 흔들릴 때마다 채찍을 들었고, 무림맹의 어른들은 그녀를 가문의 세력을 과시하기 위한 도구로만 여겼다.

아무도 그녀의 아픔을 묻지 않았다. 아무도 그녀의 손목이 왜 붉게 물드는지 관심 두지 않았다.

그런데 처음 보는 이 청년이, 자신의 상처를 정확히 꿰뚫어 보고 위로를 건네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 깊은 곳에서 단단하게 굳어 있던 얼음벽이 쩍 하고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남궁혜린의 심리적 결속이 급격히 심화됩니다.] [천외인과경이 그녀의 무학 정수를 흡수합니다. '창공검결'의 핵심 구결이 당신의 심상에 각인됩니다.] [그녀의 업보와 고뇌가 당신의 내력으로 치환됩니다. 내공이 한 단계 격상됩니다.]

한백령의 단전에서 폭발적인 진기가 휘몰아쳤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여전히 고요했고, 오직 안타까움만이 서려 있었다.

"무리하지 마십시오. 소저의 검은 남을 지키기 위한 것이지, 스스로를 파괴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남궁혜린은 고개를 저으며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그대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나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이것이 남궁의 이름을 짊어진 자의 운명이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짙은 체념이 깔려 있었으나, 한백령을 바라보는 눈빛만은 이전과 달리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

낙양 무림총맹 분타의 지하는 거대한 미로와 같았다.

정파의 온갖 영약과 무구들이 보관된 이곳은 철저한 삼엄함 속에 통제되고 있었다. 한백령은 부상을 치료한다는 명목 하에, 남궁혜린의 특별한 배려로 지하 객사 인근의 약재 창고 근처에 머물 수 있는 권한을 얻었다.

"이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게. 정파의 명의를 불러 그대의 내상을 살피도록 하겠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대소저."

한백령은 공손히 포권을 취했다.

남궁혜린과 무사들이 자리를 비우자, 그의 눈빛은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 다정한 청년의 가면이 벗겨지고, 사파 귀영문의 비정한 살수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소리 없이 움직였다. 귀영보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 극의의 보법이 어두운 복도를 타고 흘렀다.

그의 목적지는 약재 창고가 아니었다. 그 너머, 과거 무림맹이 사파 세력들을 토벌하고 빼앗은 전리품들을 봉인해 둔 '사물고(邪物庫)'였다.

철컥.

삼중으로 채워진 자물쇠가 그의 손끝에서 허무하게 풀려나갔다. 살수 시절 익혔던 개물술(開物術)은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퀴퀴한 먼지 냄새와 함께 사악한 기운이 풍기는 창고 내부로 들어선 한백령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지하 영맥의 기운이 미세하게 요동치는 구석진 선반 위.

그곳에 먼지가 가득 쌓인 채 방치된 낡은 목상자가 있었다. 상자를 열자, 붉은 녹이 슬어 볼품없는 단검 한 자루가 모습을 드러냈다.

귀영문의 신물, '귀영단검(鬼影短劍)'이었다.

과거 귀영문이 멸문당할 때 정파 놈들이 마공의 흉물이라며 회수해 간 유산이었다. 그들은 이 단검이 낙양 분타 지하에 흐르는 거대한 영맥을 공명시키고 제어하는 열쇠라는 사실을 꿈에도 모른 채, 그저 흔한 사파의 무기로 치부해 이곳에 처박아 둔 것이었다.

한백령은 손가락 끝으로 단검의 날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스스스.

그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사파의 마공이 녹슨 단검의 표면으로 스며들었다. 순간, 붉은 녹이 떨어져 나가며 단검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고향을 찾은 맹수처럼, 단검은 그의 내력과 완벽히 공명하고 있었다.

그는 단검을 품속 무복 안쪽에 은밀히 장착했다.

'이것으로 첫 번째 열쇠는 손에 넣었다.'

무림맹의 심장부를 안에서부터 부수기 위한 첫 번째 위업이 달성되는 순간이었다.

그때였다.

복도 끝에서 가벼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한백령의 청각이 극도로 예민해졌다.

남궁혜린이었다. 약재를 챙겨 그가 머무는 객사로 돌아온 그녀가, 그의 기척이 사라진 것을 눈치채고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한 소협? 어디 계십니까?"

그녀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한백령은 급히 사물고의 문을 닫고 복도로 나서려 했다.

바로 그 순간, 예측하지 못한 변수가 발생했다.

위이잉!

품속에 숨긴 귀영단검이 한백령의 단전에 깃든 사파의 마공과 갑작스럽게 공명하며, 제어할 수 없는 검푸른 광채를 폭발적으로 뿜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단검에 깃들어 있던 귀영문의 원혼과도 같은 기운이, 남궁혜린에게서 흡수한 정순한 정파의 기운과 격렬하게 반응한 결과였다.

"앗……!"

한백령은 급히 내력을 끌어올려 광채를 억누르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사물고의 틈새를 뚫고 흘러나온 검푸른 마기가 복도를 가득 메웠다.

모퉁이를 돌던 남궁혜린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이 기운은…… 귀영문의 마공?!"

그녀의 신형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본능적으로 가문의 비전 심법을 끌어올린 그녀의 전신에서 푸른 호신강기가 뿜어져 나왔다.

화르륵!

그녀의 호신강기와 한백령의 품속에서 터져 나온 검푸른 광채가 허공에서 거칠게 충돌했다. 콰과광! 하는 파공음과 함께 지하 창고의 벽면이 갈라지고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남궁혜린의 검이 다시금 그 칼날을 드러내며 한백령의 심장을 향해 뻗어왔다.

"그대…… 정체가 무엇이냐!"

검푸른 마기와 정순한 청강이 뒤엉키며 폭풍을 일으키는 지하의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잔인하게 얽혀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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