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허벅지를 찢고 들어온 청강검의 차가운 쇠붙이 감각이 척수를 타고 뇌를 찔렀다.

빗물이 상처를 헤집으며 붉은 핏물을 씻어 내렸지만, 지독한 고통마저 씻어내진 못했다. 한백령은 젖은 흙바닥을 구르며 신형을 바로 세웠다. 발끝이 닿은 곳은 더는 물러설 곳이 없는 천길낭떠러지였다. 절벽 아래로는 검푸른 안개가 삼킬 듯 입을 벌린 채 세차게 휘몰아치는 강물을 감추고 있었다.

"사파의 잔당 놈이 질기기도 하구나."

빗줄기를 뚫고 들려오는 목소리는 오만했다.

황색 도포를 걸치고 검을 비스듬히 뉘어 잡은 사내들이 수풀을 헤치며 나타났다. 그들의 가슴팍에는 무림맹의 상징인 금빛 태극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무림맹 산하 집법당의 토벌대장, 방무덕이었다. 그의 검날에는 한백령의 몸에서 흘러나온 선혈이 빗물과 함께 넘쳐흐르고 있었다.

한백령은 이를 악물었다. 입 안 가득 고인 비린 피를 바닥에 뱉어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정파 놈들의 위선에 대한 증오가 들끓었다.

"우리가 사파라는 이유로 멸문당해야 했다면."

한백령의 목소리가 빗소리에 섞여 낮게 가라앉았다.

"정의를 부르짖으며 어린아이들의 목까지 베어 넘긴 너희는 무엇이냐?"

방무덕은 코웃음을 쳤다. 그의 눈빛에는 추호의 흔들림도 없었다. 도리어 살기 띤 안광이 빗속에서 번득일 뿐이었다.

"천하의 대의를 위해 삿된 싹을 잘라내는 것은 의기(義氣)다. 사파의 주둥이에서 대의를 논하는 것만큼 가소로운 일도 없지. 순순히 목을 내놓아라. 그것이 네놈이 지은 죄업을 터럭만큼이라도 씻는 길이다."

의기라 했다.

한백령의 눈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귀영문의 수백 명 동문이 비명을 지르며 불타 죽을 때, 저 정파의 무사들은 법도를 읊조리며 칼춤을 추었다. 살려달라 애원하던 어린 사제들의 목을 치며 그들이 내뱉은 단어가 바로 대의였고 의기였다.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불덩이가 치밀어 올랐다. 타인을 믿었던 어리석은 결말이 이토록 참혹했다. 사파 귀영문의 후예로서 살아남은 대가는 오직 죽음뿐인가.

한백령은 품속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손끝에 닿는 것은 차갑고 투박한 쇠붙이였다. 배신당해 처참하게 찢겨 죽은 사형이 마지막 순간 자신의 가슴에 찔러 넣어 주었던, 녹슨 단검이었다.

'백령아, 살아라. 살아서 이 가증스러운 세상을 무너뜨려라.'

사형의 마지막 유언이 이명이 되어 귓가를 때렸다. 단검의 자루를 꽉 쥐는 순간, 한백령의 가슴뼈 깊은 곳에서 기이한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웅 하는 기괴한 이음과 함께, 단전 근처에 박혀 있던 정체불명의 기운이 요동쳤다.

그것은 귀영문의 비전도, 강호의 상식적인 내공도 아니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멀어지며, 심안(心眼) 너머로 거대한 청동 거울의 형상이 떠올랐다. 거울 표면에는 붉은빛의 실선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고, 그 중심에 사형의 녹슨 단검이 공명하듯 붉은 빛을 토해내고 있었다.

[천외인과경(天外因果鏡)이 시전자의 감정과 공명합니다.]

뇌리를 때리는 서늘한 목소리였다.

[인과(因果)의 고리를 감지했습니다. 배신과 원한, 그리고 깊은 결속.] [상대와 맺은 감정적 결속의 깊이만큼, 그들의 무학적 정수와 기운을 흡수할 수 있습니다.] [축적된 업보(業報)를 위력으로 치환합니다.]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오는 정보는 마법과도 같았고, 지독히도 명확했다.

이 거울은 타인과 맺은 감정의 깊이에 비례하여 힘을 주는 기연이었다. 의리든, 애정이든, 신뢰든 상관없었다. 그 결속이 진실할수록 상대의 모든 힘을 내 것으로 빼앗아 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업보를 적을 멸하는 파괴력으로 바꿀 수 있었다.

그러나 화려한 힘의 이면에는 칠흑 같은 심연의 대가가 도사리고 있었다.

[경고: 인과를 맺은 대상을 기만하거나 배신하여 관계가 파탄 날 경우, 흡수한 모든 내공이 역류하여 심맥이 파손되는 인과 반사(因果 反射)의 제약이 따릅니다.]

한백령의 입꼬리가 해괴하게 비틀려 올라갔다.

인과 반사라. 신뢰를 저버리면 파멸한다니, 이 얼마나 사파의 암살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성스러운 제약인가.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벼랑 끝에 선 그에게 제약 따위를 가릴 여유는 없었다. 가슴속에 품은 사형의 유품, 그리고 그 사형이 자신을 살리기 위해 바쳤던 목숨의 무게. 그것이 천외인과경을 격동시키는 거대한 인과의 불씨가 되었다.

스스스스.

녹슨 단검에서 시작된 붉은 기류가 한백령의 손목을 타고 올라와 단전으로 가라앉았다. 순식간에 메말라 가던 단전에 가공할 만한 내공이 차올랐다. 그것은 평생을 수련해도 얻지 못할, 사형이 가졌던 정순한 사파의 마공(魔功)이자 그가 지녔던 삶의 정수였다.

"무엇을 꾸물거리느냐! 잔당 놈의 목을 쳐라!"

방무덕이 살기등등하게 외치며 신형을 날렸다.

그의 신형이 허공을 가르며 청강검이 한백령의 목덜미를 향해 짓쳐 들어왔다. 검 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기가 빗줄기를 가르며 날카로운 파공성을 내 질렀다.

한백령은 피하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방무덕을 응시했다. 그의 검은 눈동자 깊은 곳에서 청동 거울의 붉은 실선이 기괴하게 회전했다.

치밀어 오르는 업보의 힘이 전신을 관통했다.

검이 닿기 직전이었다.

한백령의 신형이 아지랑이처럼 흔들렸다.

귀영보(鬼影步).

사형의 정수가 담긴 보법이 극성으로 펼쳐졌다. 방무덕의 청강검이 허공을 갈랐다. 사방으로 흩어지는 빗방울 사이로 방무덕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어디를 보느냐."

귀신 같은 목소리가 방무덕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방무덕이 급히 신형을 돌려 대수(大袖)를 휘둘렀으나, 이미 늦었다.

한백령의 오른손이 방무덕의 가슴팍을 향해 뻗어 나갔다. 손끝에는 붉은빛의 살기가 벼려져 있었다. 천외인과경이 삼켜낸 사형의 업보와 내공이 한데 뭉쳐 폭발적인 파괴력을 형성했다.

쾅!

둔탁한 파열음이 숲을 흔들었다.

방무덕의 가슴뼈가 무참히 으스러졌다. 등 뒤로 붉은 혈안(血眼)의 형상이 일어났다가 사라졌다. 방무덕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허공으로 날아가 거대한 참나무 둥치에 처박혔다.

"커흑……!"

방무덕이 피를 토해내며 주저앉았다. 그의 안광이 빠르게 흐려졌다.

단 일격이었다. 무림맹의 일류 고수가 손가락 하나 제대로 쓰지 못하고 무력화되었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무림맹 무사들이 일제히 뒷걸음질을 쳤다. 그들의 얼굴에는 방금 전까지 가득했던 오만함 대신, 형언할 수 없는 공포가 들어차 있었다.

"이, 이놈이 사술을……!"

한 무사가 검을 부들부들 떨며 소리쳤다.

한백령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빗물에 젖은 머리칼 사이로 투명한 안광이 번뜩였다. 가슴속 천외인과경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흡수한 힘은 완벽히 그의 뼈와 살에 녹아들었다.

이것이 기연의 힘인가.

가슴속에 도사린 한 줄기 냉혹함이 머리를 차갑게 식혔다.

타인의 신뢰를 얻으면 얻을수록 강해진다. 그렇다면, 저 가증스러운 정파 놈들의 신뢰를 통째로 훔쳐내면 어떻게 되는가? 정의를 숭상하는 위선자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그들의 신뢰를 빨아먹고 마침내 그 가죽을 벗겨내 버린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잔혹하고 완벽한 사파의 복수였다.

한백령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살려…… 도망쳐라!"

무사들이 혼비백산하여 등을 돌리려 했다.

"늦었다."

한백령의 신형이 다시 한번 허공에 번졌다.

빗속을 가르는 칼날의 궤적이 붉은 선을 그리며 허공을 수놓았다. 비명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가차 없는 살수(殺手)의 손길이 무림맹 무사들의 목덜미를 차례로 끊어 놓았다. 풀잎 위로 빗물보다 붉고 뜨거운 피가 흩뿌려졌다.

마지막 무사가 바닥에 쓰러지자, 사방은 다시 거친 빗소리만이 가득 찼다.

한백령은 붉게 물든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서 천외인과경의 붉은 실선들이 재배치되며 새로운 형태를 그리려 하고 있었다.

이제 시작이었다. 이 더러운 무림맹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그들의 심장부로 걸어 들어가리라. 누구보다 의롭고, 누구보다 헌신적인 대협의 모습으로 위장하여.

스스스.

한백령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의 얼굴에서 피도 눈물도 없는 사파 살수의 표정이 순식간에 지워졌다. 그 자리를 채운 것은 가혹한 운명에 맞서 싸우다 상처 입은, 굳건하고도 애처로운 정파 후기지수의 얼굴이었다.

눈빛은 맑게 깨끗해졌고, 구부정했던 어깨는 올곧게 펴졌다. 상처 입은 허벅지를 감싸 쥔 손끝에 핏기가 사라지며, 고통을 인내하는 대협의 풍모가 고스란히 묻어났다.

바로 그때였다.

저 멀리 수풀 너머에서 수십 개의 횃불이 장막을 뚫고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서늘하고도 거대한 검기(劍氣)가 대기를 짓누르며 접근해 오고 있었다.

"방 조장! 어디 계십니까!"

여인의 맑고도 서슬 퍼런 목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울려 퍼졌다.

남궁가문의 대소저이자, 무림맹 후기지수의 우두머리 중 하나인 남궁혜린이었다.

한백령은 쓰러진 무림맹 무사들의 시체 앞에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자신의 가슴팍을 검날로 살짝 그어 붉은 피가 흘러내리게 만들었다.

처연한 눈빛이 횃불이 다가오는 어둠 속을 향했다. 사파의 이단아가 쳐놓은 거대한 덫의 첫 번째 고리가,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내려 하고 있었다.

스스스스.

수풀이 갈라지며 푸른빛 창포검을 쥔 무사들이 요람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 선두에 선 여인, 남궁혜린의 안색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빗물에 젖은 앞머리가 그녀의 이마를 가렸으나, 그 아래로 번뜩이는 안광만큼은 숨기지 못했다.

"방 조장!"

그녀의 시선이 바닥에 쓰러진 무림맹 무사들의 시신에 닿았다.

참혹한 광경이었다. 일격에 뼈가 으스러지고 목덜미가 잘려 나간 시체들. 남궁혜린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검을 쥔 그녀의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려 들어갔다.

"이, 이럴 수가…… 모두 당했단 말인가?"

뒤따라오던 무사들이 비명을 삼켰다.

남궁혜린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였다. 마침내 시체들 한가운데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한백령에게 멈추었다.

한백령은 억지로 숨을 몰아쉬었다. 어깨를 파르르 떨며, 가슴의 상처를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핏물이 손가락 사이로 울컥 배어 나왔다.

"소협!"

남궁혜린이 신형을 날려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은은한 매화 향기가 비린 피비린내를 덮었다. 그녀가 급히 한백령의 맥을 짚었다. 차가운 기운이 그의 손목을 타고 흘러들었다.

그 순간, 한백령은 단전의 마공을 깊숙이 감추고, 오직 정순하게 다듬어 둔 기운만을 표면으로 끌어올렸다.

"콜록!"

한백령이 가짜 내력을 토해내며 흑색에 가까운 피를 한 모금 뱉었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안에는 동료를 구하지 못했다는 자책과 슬픔이 가득 담겨 있었다.

"내가…… 조금만 더 빨랐어도."

갈라진 목소리가 빗물에 젖어 들었다.

"방 조장님이…… 나를 피신시키려다…… 그 귀영문의 마두(魔頭)에게……."

남궁혜린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그녀는 한백령의 맥박을 통해 그가 진실로 심각한 내상을 입었음을 확인했다. 정파의 기운을 담은 맥결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게다가 눈앞의 청년은 자신도 치명상을 입었으면서도, 쓰러진 동맹의 시신을 가슴으로 감싸 안고 있었다.

'가문의 어른들은 늘 이득을 따지라 하셨거늘.'

남궁혜린의 가슴뼈 깊은 곳에서 정파의 위선적인 훈육에 대한 회의감이 고개를 들었다. 목숨을 걸고 의기를 증명한 이 낯선 청년의 모습은, 그녀가 평생 가슴에 품어왔던 '진정한 협(俠)'의 형상과 닮아 있었다.

위이잉.

한백령의 심상 속에서 청동 거울이 맑은 소리를 내며 회전했다.

[인과(因果)의 실타래가 연결됩니다.] [대상: 남궁혜린. 신뢰도의 싹이 움틉니다.] [천외인과경이 그녀의 무학적 기조를 탐지하기 시작합니다.]

성공이었다.

그녀의 마음속에 깃든 가문에 대한 피로감과 고독을 정확히 파고들었다. 한백령은 고개를 숙인 채, 입가를 가리며 비정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나 남궁혜린은 상체를 숙여 방무덕의 시신을 살피다, 문득 손길을 멈추었다.

그녀의 눈빛이 급격히 서늘해졌다.

"잠깐."

남궁혜린이 방무덕의 으스러진 가슴팍을 가리켰다.

"방 조장을 죽인 손길은…… 귀영문의 보법이 아니야. 이건 완벽하게 정순한 정파의 경력을 뒤집어쓴 살수의 수법이다."

그녀가 고개를 천천히 돌려 한백령을 응시했다.

검은 빗줄기 너머로, 그녀의 검 끝이 한백령의 목덜미를 향해 미세하게 누워졌다.

"소협. 그대는 방금 귀영문의 마두라 했나? 그렇다면 어째서 방 조장의 단전은 정파의 내력에 의해 파괴된 것인가?"

폭풍우 속에서, 차가운 살기가 두 사람 사이를 가로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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