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안개는 살아 움직이는 뱀처럼 허공을 똬리 틀었다. 그 중심에서 피어오른 거대한 외눈이 한백령의 전신을 샅샅이 훑었다. 맹진태의 영적 시선(靈的 視線). 살죽을 저미는 듯한 안광이 정청의 대기를 얼려 붙였다.
“네놈이로구나. 내 사냥개들을 물어뜯은 쥐새끼가.”
고막이 아닌 뇌리를 직접 흔드는 음성이었다.
한백령은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미동조차 없는 그의 눈동자가 허공의 환영을 마주했다. 뺨을 스치는 음습한 바람이 기괴한 마기를 품고 있었으나, 그의 입꼬리는 완만하게 호선을 그렸다.
그는 허리를 굽혔다. 혈위대장의 투구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안개를 향해, 손을 뻗었다.
파스스스.
한백령의 손끝이 환영의 중심을 꿰뚫었다. 그의 단전에서 흘러나온 정순한 순양기(純陽氣)가 안개를 지워 가기 시작했다. 맹진태의 안광이 일순 격렬하게 흔들렸다.
“감히 내 영맥에 손을 대다니…….”
“맹주님.”
한백령의 목소리는 고요했다. 물을 가르는 배처럼 부드러웠으나, 뼈를 찌르는 한기가 서려 있었다.
“사냥개를 보냈으면 뼈가 부러질 각오는 하셨어야지요. 머지않아 그 목덜미를 직접 뜯어 갈 터이니, 부디 영약을 가득 삼키고 기다리십시오.”
한백령의 손아귀가 강하게 쥐어졌다. 순양의 내력이 폭발하며 붉은 안개를 완전히 소멸시켰다.
지독한 침묵이 정청을 지배했다.
제갈휘는 휠체어 바퀴를 잡은 손가락 끝을 바르르 떨었다. 그의 안색은 종잇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맹진태가 복용하는 가문 특제 벽령단의 부작용과 그 가짜 내공의 약점을 짚어낸 한백령의 혜안에 소름이 돋은 탓이었다.
“한 대협…… 방금 그것은 맹주의 주술이 맞소. 이 깊은 낙양 분타까지 그의 감시가 미치고 있었다니.”
제갈휘가 품 안에서 가죽 지도를 꺼냈다. 그가 남몰래 제작 중이던 비검릉 봉인 해제용 영동 장치의 부품 도면이었다.
“이것이 필요할 것이오. 맹주의 이목을 피하려면, 비검릉의 결계를 강제로 비틀어 열어야 하오.”
한백령은 도면을 받아 들지 않았다. 대신 가슴팍에서 낡고 녹슨 단검 한 자루를 꺼내 보였다. 귀영문(鬼影門)의 사나운 유산이자, 과거 멸문당한 사파의 마지막 흔적이었다.
“이것이면 충분하네.”
제갈휘의 눈이 크게 장대해졌다.
“그 녹슨 고철이……?”
“단순한 고철이 아니지.”
한백령은 단검을 바닥의 귀퉁이, 영맥의 중심이 흐르는 지맥의 균열에 깊숙이 꽂아 넣었다.
서릉릉릉!
대지가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녹슨 단검의 표면을 따라 붉고 어두운 사파의 독기가 스며 나오며 낙양 분타 지하의 봉인된 영맥을 공명시키기 시작했다. 본래 무림맹의 정순한 기운으로 잠겨 있던 지하의 빗장이 사파의 흉포한 살기로 인해 역으로 풀려나가는 광경이었다.
쿠구구구구!
바닥 벽돌들이 좌우로 갈라지며 아래로 향하는 거대한 석조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하 깊은 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눅눅하고 피비린내가 섞여 있었다.
“가세.”
한백령이 앞장섰다. 남궁혜린이 그 뒤를 따랐고, 제갈휘는 무사들의 부축을 받으며 휠체어와 함께 계단 아래로 내려섰다.
지하로 내려갈수록 공기는 무거워졌다. 벽면에 박힌 야광석들이 희미한 푸른빛을 발하고 있었으나, 그것만으로는 사방에 깔린 어둠을 다 걷어내지 못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그들의 눈앞에 거대한 지하 공동이 나타났다. 사방에 무너진 비석들과 부러진 무기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과거 무림맹이 귀영문을 비롯한 사파 무리들을 학살하고 그들의 흔적을 봉인해 둔 비검릉(祕劍陵)의 외곽 구역이었다.
스산한 울음소리가 사방에서 환청처럼 들려왔다.
“이곳은…….”
남궁혜린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해골들과 썩어 문드러진 의복들은 한눈에 보아도 정파의 것이 아니었다. 사파의 기운을 머금은 비참한 죽음의 흔적들. 그것은 남궁가문을 비롯한 무림맹의 명문정파들이 ‘정의’라는 허울 좋은 명분 아래 저지른 참혹한 학살의 증거였다.
“우리가…… 우리 가문이 이들을 지옥으로 밀어 넣은 것입니까?”
남궁혜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죄책감이 그녀의 심상을 흔들자, 그녀의 검 끝에서 흘러나오던 불꽃같은 검기에 이상 변화가 일어났다.
치익, 치이익.
정순해야 할 천화검강의 불꽃 사이에 검붉은 반점 같은 기운이 섞여 들기 시작했다.
“으윽……!”
남궁혜린이 가슴을 움켜쥐며 비틀거렸다.
그것은 남궁가문의 비전 심법이 가진 치명적인 결함이었다. 가문의 명예와 기대에 짓눌려 억지로 끌어올린 극양의 내력은, 심상의 미세한 흔들림에도 역혈(逆血)을 일으켜 내장을 태워 버리는 부작용을 낳았다. 검기에 섞인 붉은 반점들이 점차 그녀의 목덜미까지 타고 올라왔다.
한백령은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가문의 위선에 짓눌린 천재. 그리고 그 대가로 얻은 파멸의 씨앗.’
한백령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그는 천천히 걸어가 남궁혜린의 떨리는 어깨를 짚었다. 남궁혜린은 고통 속에서도 그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구원이라도 바라는 듯 그의 소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혜린 소저.”
한백령의 목소리는 따스했다.
“가문의 죄가 그대의 죄는 아니네. 그들이 저지른 업보를 그대가 온몸으로 짊어질 이유는 없네.”
동시에, 한백령은 단전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천외인과경(天外因果鏡)을 가동했다.
위잉-.
머릿속에서 투명한 거울이 회전하는 소리가 들렸다. 남궁혜린이 한백령을 향해 품은 절대적인 신뢰와 유대감이 인과경의 공명을 유도했다.
백령의 손바닥을 통해 지극히 정순한 순양기(純陽氣)가 흘러들어 갔다.
남궁혜린의 체내에서 미쳐 날뛰던 역혈의 기운이 백령의 순양기와 접촉하자마자 눈 녹듯 가라앉기 시작했다. 검기에 섞여 있던 붉은 반점들이 정화되어 사라졌다. 그녀의 막힌 혈도가 뚫리고, 단전의 내력이 이전보다 한층 더 맑고 단단해졌다.
“아…….”
남궁혜린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고통이 사라진 자리에는 오직 한백령의 따스한 기운만이 가득했다. 그녀의 눈에 고인 눈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가문의 억압 속에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온전한 이해와 구원이었다.
[인과의 깊이가 더해집니다.] [남궁혜린과의 신뢰 결속이 심화되었습니다.] [천화검강의 극양(極陽) 정수가 복제 및 동화됩니다.]
머릿속을 울리는 천외인과경의 명징한 기운에 한백령은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신뢰란 참으로 나약하고도 유용한 도구로군.’
남궁혜린은 한백령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나직하게 속삭였다.
“한 대협…… 오직 대협만이 저를 숨 쉬게 만듭니다. 이 검으로, 가문의 더러운 업보를 반드시 끊어내겠습니다.”
그녀의 눈빛에는 이제 한백령을 향한 광신에 가까운 신뢰가 깃들어 있었다.
바로 그 순간, 지하 공동 전역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주변에 널려 있던 사파 고수들의 녹슨 무기들과 유품들이 공명하기 시작했다. 과거 무림맹에 의해 억울하게 죽어간 원혼들의 한 서린 기운이, 한백령이 지닌 귀영문의 독기와 천외인과경의 인과 공명에 반응한 것이었다.
파앗!
사방에서 뿜어져 나온 음습하고 강력한 음기(陰氣)가 한백령의 전신으로 빨려 들어왔다.
천외인과경은 상대의 업보와 원한 역시 위력으로 치환하여 흡수하는 능력. 멸문당한 사파인들의 원울이 백령의 체내로 밀려들며, 그가 지닌 순양기와 결합했다.
음양이 조화를 이루었다.
서걱.
백령의 체내에서 무언가 깨어지는 소리가 났다. 내력의 순도가 폭발적으로 상승하며 사파의 독기와 정파의 순양기가 완벽하게 융합되었다. 이제 그는 정파의 고수로도, 사파의 마두로도 완벽히 위장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했다.
“이것이…… 비검릉의 힘인가.”
제갈휘가 경악어린 눈으로 백령을 바라보았다. 백령의 주위로 푸르고 붉은 기류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저 안쪽이네.”
한백령이 공터 중앙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거대한 청동 문이 서 있었다. 문 표면에는 복잡한 정파 비전 결계의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고, 그 중심에는 무림맹의 인장이 붉게 빛나고 있었다.
“결계의 중핵이군. 저것을 파괴해야 비검릉의 기록 보관소로 갈 수 있네.”
제갈휘가 휠체어에서 몸을 일으키려 버둥거렸다.
“내가 부품을 조립해 결계를 비틀어 보겠소. 시간이 조금 필요한데…….”
“그럴 시간은 없네.”
한백령이 남궁혜린을 바라보았다.
“혜린 소저, 나와 함께 저 위선의 문을 부수세.”
“기꺼이 그리하겠습니다.”
남궁혜린이 천화검을 뽑아 들었다. 이제 부작용이 완전히 사라진 그녀의 검강은 눈이 멀 정도로 찬란한 붉은빛을 발했다.
한백령 역시 손을 뻗었다. 그의 손끝에서 정순한 순양의 검기가 뿜어져 나왔다.
두 개의 검강이 허공에서 교차했다.
콰아아앙!
지하 공동이 무너질 듯한 폭음이 울려 퍼졌다.
남궁혜린의 천화검강과 한백령의 순양검기가 하나로 뭉쳐 청동 문을 정면으로 타격했다. 무림맹주가 직접 걸어 두었던 비전 결계는, 가문의 부작용을 극복한 후기지수의 힘과 천외인과경의 기운 앞에 허무하게 조각나 흩어졌다.
쿠구구궁!
청동 문이 무너지며 그 안의 비밀 방이 드러났다.
방 중앙의 석대 위에는 가죽으로 제본된 두꺼운 일지가 놓여 있었다.
한백령이 천천히 걸어가 일지를 집어 들었다. 먼지를 털어내자 표면에 적힌 글자가 보였다.
[낙양 정벌 및 사파 색출 일지]
그 안에는 과거 무림맹이 귀영문을 비롯한 사파 가문들을 학살할 때, 죄 없는 부녀자와 아이들까지 어떻게 고문하고 참수했는지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맹주 맹진태의 친필 서명과 직인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정파의 의기(義氣)라는 이름 아래 감추어져 있던, 가장 추악하고 비열한 학살의 역사였다.
“이것이…… 저들이 숨기려 했던 진실이로군요.”
남궁혜린이 일지를 바라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피가 베어 나올 듯 힘이 들어갔다.
“맹진태…… 이 위선자 늙은이를 반드시 처단해야 합니다.”
제갈휘 역시 일지의 내용을 확인하고는 이가 갈리는 소리를 냈다.
“이 일지가 세상에 공개되는 날, 무림맹의 명분은 완전히 땅에 떨어질 것이오.”
한백령은 속으로 차갑게 웃었다.
‘이것으로 무림맹의 목줄을 쥐었다.’
그가 일지를 품 안에 넣고 몸을 돌려 탈출하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쿵!
지하 깊은 곳에서 정체불명의 육중한 울림이 전해졌다.
바닥에 새겨진 마법 문양들이 일제히 붉은빛을 발하며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위이이이잉-!
“이건……!”
제갈휘가 비명을 질렀다.
“영구 함정이 가동되었소! 일지를 건드리면 발동하는 무림맹의 자멸 진식(自滅 陣式)이오!”
화르륵! 화르르륵!
그들이 들어왔던 청동 문의 출구 너머로, 수십 장 높이의 거대한 불타는 장벽이 솟구쳐 올랐다. 단순한 불길이 아니었다. 내력을 태워 버리는 극독의 마기를 품은 화염 장벽이었다.
출구가 완전히 봉쇄되었다.
사방의 벽면이 무너지며 천장에서 거대한 암석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숨이 막힐 듯한 열기가 지하 공동을 가득 채웠다.
한백령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