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하하…… 하하하!”
제갈풍의 광소가 차가운 정청의 바닥을 긁었다. 비틀린 웃음소리 사이로 흘러나오는 것은 짙은 살기와 조소였다. 그는 사지가 억세게 붙잡힌 와중에도 고개를 치켜들며 백령과 혜린을 차례로 노려보았다.
“맹주께서 너희 같은 하찮은 후기지수들의 장난질을 모를 것 같으냐? 이미 늦었다. 그분의 직속 최정예 살수 부대인 혈위대(血衛隊)가 이미 이 낙양 분타를 겹겹이 포위했다. 너희는 이 정청 밖으로 단 한 발짝도 살아 나가지 못할 것이다!”
그의 호언장담이 끝나기 무섭게, 정청 문틈을 타고 스산한 피비린내가 밀려들었다.
바람이 차가웠다. 정청 내부의 촛불이 일제히 흔들리며 어둠을 넓혔다. 제갈가의 호위 무사들이 주춤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 무기를 쥔 그들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무림맹주 맹진태의 사검(私劍)이라 불리는 혈위대의 명성은 가히 공포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남궁혜린이 검자루를 쥐어짜듯 움켜잡았다. 그녀의 하얀 손등에 푸른 힘줄이 돋아났다. 백령은 그녀의 시선이 흔들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호흡이 가빠지며 그녀의 검기 끝에 붉은 반점이 찰나의 순간 피어올랐다 사라졌다.
‘천화심법의 부작용이 전신으로 번지고 있군.’
백령은 속으로 냉소했다. 남궁세가의 비전 심법은 극양의 힘을 추구하지만, 그 이면에는 심맥을 태워버리는 치명적인 결함이 존재했다. 가문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억지로 경지를 끌어올린 혜린의 내력은 이미 한계에 봉착해 있었다. 검기에 섞여 드는 저 붉은 반점은 가문의 위선이 그녀의 육신을 갉아먹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백령은 혜린의 곁으로 부드럽게 다가섰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짚었다. 그의 손길을 통해 온화하고 맑은 순양기(純陽氣)가 조용히 흘러들었다. 인과경의 공명으로 구현해 낸 완벽한 정파의 기운이었다.
“남궁 소저, 마음을 가라앉히십시오. 적들의 허장성세에 흔들릴 이유가 없습니다.”
따스한 내력이 심맥을 타고 흐르자, 혜린의 가쁜 호흡이 가라앉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백령의 깊고 고요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추호의 흔들림도 없었다. 언제나 자신을 지켜줄 것만 같은 절대적인 신뢰감이 그녀의 전신을 감쌌다.
혜린은 검을 고쳐 잡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고맙습니다, 한 대협. 잠시 평정심을 잃었습니다.”
“우리는 함께입니다. 두려워할 것은 저들이지, 우리가 아닙니다.”
백령의 목소리는 누구보다 자애로웠으나, 그의 내면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타인을 오직 도구로만 보는 그의 이성은 이미 이 위기를 어떻게 이용할지 계산을 마친 상태였다. 혜린의 신뢰가 깊어질수록 천외인과경은 더욱 강한 정수를 그에게 제공할 터였다.
그때, 제갈휘가 휠체어의 바퀴를 굴려 백령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의 창백한 안색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지독한 심맥 질환으로 고통받는 와중에도, 그의 머리는 쉴 새 없이 회전하고 있었다.
“한 형, 저들의 포위망은 단순한 포위가 아니오. 혈위대의 진식은 사방을 완전히 차단하고 질식시키는 살진(殺陣)이오. 정면 돌파는 자멸을 의미하오.”
제갈휘의 목소리는 낮고 빨랐다.
“그렇다면 진식을 무너뜨릴 틈을 만들어야겠군.”
백령이 품속으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끝에 닿은 것은 차갑고 낡은 쇠붙이였다. 귀영문의 유산이자, 낙양 분타 지하 영맥을 공명시키는 열쇠인 녹슨 단검이었다.
그는 단검을 쥔 손에 극양의 순양기를 주입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진동이 단검 끝에서 시작되어 정청 바닥으로, 그리고 낙양 분타 지하 깊은 곳으로 뻗어 나갔다.
우구구구궁-!
지하 깊은 곳에서 거대한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진동이 울려 퍼졌다. 정청의 바닥돌이 들썩였다. 제갈풍의 안색이 순식간에 흑빛으로 변했다.
“이, 이 진동은 대체……! 지하 영맥이 어째서 공명하는 것이냐!”
“제갈 소저, 그리고 제갈 소협.”
백령이 단검을 쥔 채 정청의 가장자리를 가리켰다.
“이 분타의 지하에는 과거의 영맥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 공명은 좁은 관문으로 통하는 통로를 열어줄 것입니다. 제갈 소협의 지략이라면, 그 통로를 이용해 저들을 유인할 수 있겠지요?”
제갈휘의 눈이 번쩍였다. 그는 즉시 백령의 의도를 간파했다. 분타의 지형지물과 지하 영맥의 변동을 결합한다면, 혈위대의 거대한 진식을 무력화하고 좁은 협도로 그들을 유인해 각개격파할 수 있었다.
“가능하오! 동쪽의 화단 뒤편, 지하 영맥의 분출구와 연결된 좁은 협곡형 통로가 있소. 그곳이라면 저들의 수적 우위는 무용지물이 될 것이오.”
“좋습니다. 남궁 소저, 저와 함께 선두를 서 주십시오. 제갈 소협은 후방에서 무사들을 지휘해 적들을 협도로 유인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혜린이 힘차게 대답했다. 그녀의 눈빛에는 백령을 향한 맹목적인 믿음이 서려 있었다.
백령은 소매 속에서 단검의 진동을 조율하며 정청의 문을 박차고 나갔다.
쿠웅!
문이 열리자마자 붉은 안개와 함께 혈위대의 무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갑주를 입고 얼굴을 가린 기괴한 투구를 쓴 자들이었다. 그들의 몸에서는 정파의 내공이 아닌, 음습하고 흉포한 마기(魔氣)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무림맹주 맹진태가 뒤에서 부리는 살수들의 본질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침입자들을 말살하라.”
혈위대장의 차가운 명령과 함께 수십 명의 살수들이 일제히 쇄도했다.
“가십시다!”
백령이 신형을 날렸다. 혜린이 그 뒤를 바짝 따랐다.
파아앗!
혜린의 검 끝에서 화려한 청색 검강이 뿜어져 나왔다. 남궁세가의 천화검강이었다. 그러나 검강의 가장자리에 붉은 반점이 다시금 선명해지며 그녀의 어깨가 굳어졌다. 내력의 역류가 그녀의 심맥을 찌른 것이다.
“큭……!”
혜린의 신형이 무너지는 찰나, 혈위대원의 검이 그녀의 목덜미를 겨냥했다.
그 순간, 백령의 신형이 유령처럼 그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서걱!
백령의 손에 들린 녹슨 단검이 회색의 궤적을 그리며 혈위대원의 목을 갈랐다. 피가 비산하기도 전에, 백령은 혜린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수십 장 뒤로 물러섰다.
“남궁 소저, 검의 기운을 억지로 누르려 하지 마십시오. 가문의 규칙이 당신을 얽맨다면, 그 규칙을 깨부수면 됩니다. 내력을 제 손길에 맡기십시오.”
백령은 그녀의 단전에 직접 순양기를 불어넣었다. 천외인과경을 통해 흡수했던 남궁의 정수와 백령의 순양기가 융합되어, 혜린의 체내에서 폭발적인 조화를 이루었다.
혜린의 눈동자가 깊은 청색으로 물들었다. 검기 끝을 더럽히던 붉은 반점이 순식간에 정화되며, 티 없이 맑은 극양의 검강이 대기를 가르며 솟구쳤다.
“아아……!”
혜린은 깨달았다. 가문이 강요하던 무리한 심법의 굴레에서 벗어나, 백령의 도움으로 진정한 검객으로서의 힘을 각성한 것이다. 그녀의 가슴속에서 한백령이라는 존재는 이미 단순한 동료를 넘어선, 구원자이자 삶의 이정표로 자리 잡았다.
[천외인과경이 공명합니다.] [인과의 결속이 깊어집니다. 남궁혜린의 무학적 정수가 극대화되어 시전자의 단전에 흡수됩니다.]
머릿속에 울리는 기이한 비음과 함께 백령의 단전이 요동쳤다. 더 강해진 힘이 그의 전신을 타고 흘렀다.
“협도로 유인해라! 쏴라!”
후방에서 제갈휘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갈가의 무사들이 일제히 화살과 암기를 쏘아 올리며 혈위대의 진형을 흔들었다. 지하 영맥의 진동으로 인해 바닥이 갈라지자, 혈위대의 일사불란하던 움직임에 균열이 생겼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제갈휘가 설계한 좁은 돌벽 사이의 관문으로 밀려 들어갔다.
“지금입니다, 한 형!”
제갈휘가 외쳤다.
“남궁 소저, 저를 따르십시오.”
백령의 신형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전투는 가혹했다. 좁은 관문공간에서 혈위대의 수적 우위는 완전히 상쇄되었다.
백령의 검이 춤을 추었다. 가볍게 휘두른 검이 적의 가슴을 뚫었다. 비명은 길지 않았다. 적들의 목이 허공을 날았다.
백령은 겉으로는 대협의 전술을 펼치며 무사들을 구하는 영웅의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그의 실전은 비정하기 짝이 없었다. 귀영문의 살수술이 그의 검끝에 녹아들어 있었다. 단 한 치의 낭비도 없는, 오직 죽음을 위한 궤적이었다.
“이놈들……!”
혈위대장이 분노하며 대검을 내리쳤다. 묵직한 마기가 대기를 찢으며 백령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백령은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의 눈동자에 기이한 거울의 형상이 비쳤다. 천외인과경의 진정한 힘이 깨어났다.
스우우우-!
혈위대장의 대검에 서려 있던 영적 마기가 백령의 손바닥으로 빨려 들어갔다. 인과경이 그 악업과 마기를 강제로 흡수하여 백령의 기운으로 변환시킨 것이다.
흡수된 마기는 귀영문의 비전 보법인 ‘귀영신보(鬼影神步)’와 융합되었다.
파앗!
백령의 신형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수십 개의 잔상이 혈위대장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기동력이 한계를 넘어 신화적인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어, 어디냐!”
혈위대장이 허공을 향해 대검을 휘둘렀다.
스윽.
백령은 이미 그의 등 뒤에 서 있었다.
“가짜 정의의 최후는 늘 이렇더군요.”
백령의 목소리가 귀가에 속삭여졌다.
서걱!
백령의 단검이 혈위대장의 목덜미를 정확히 그었다.
투구가 바닥에 떨어지며 검붉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 나왔다. 대장의 죽음에 남은 혈위대원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제갈휘와 남궁혜린의 지휘 아래, 제갈가 무사들이 남은 자들을 순식간에 섬멸해 나갔다.
전투가 끝난 낙양 분타의 앞마당은 피비린내와 정적만이 가득했다.
살아남은 젊은 후기지수들과 제갈가의 무사들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백령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에는 경외감과 함께 깊은 혼란이 서려 있었다. 자신들을 공격한 자들이 다름 아닌 무림맹주 직속의 혈위대라는 사실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기 때문이다.
백령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의 옷자락에는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았다. 그는 슬프고도 가라앉은 눈빛으로 쓰러진 시신들을 내려다보았다.
“이것이…… 우리가 평생을 바쳐 충성하고자 했던 무림맹의 진실입니까?”
백령의 목소리가 사방을 무겁게 짓눌렀다.
“맹주께서는 가문의 비밀을 덮기 위해, 그리고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힘없는 후기지수들과 가문의 어린 무사들을 사지로 몰아넣었습니다. 정파의 의기(義氣)라는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이들이 소모품처럼 버려져야 합니까?”
그의 말은 뼈를 찔렀다.
제갈가의 젊은 무사 하나가 검을 떨어뜨리며 흐느꼈다.
“우리는…… 우리는 그저 가문을 지키고 싶었을 뿐인데…….”
제갈휘가 휠체어 위에서 차갑게 덧붙였다.
“정파의 명분은 이미 썩었다. 저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우리 모두를 죽여서라도 비밀을 묻을 자들이다. 살고 싶다면, 그리고 진정한 정의를 원한다면 이제 선택해야 한다.”
혜린이 백령의 곁에 서서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저는 한 대협과 뜻을 함께하겠습니다. 가문의 위선에 눈감고 꼭두각시로 살 바에는, 스스로의 검으로 길을 개척하겠습니다.”
젊은 무사들의 눈빛이 흔들리다가, 이내 뜨거운 결의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하나둘씩 백령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한 대협을 따르겠습니다!”
“우리에게 길을 보여주십시오!”
사파의 비정한 실리와 생존의 본능이, 정파의 무너진 허울 속에서 젊은 지수들을 완전히 하나로 묶어세우는 순간이었다. 백령은 그들을 내려다보며 속으로 차갑게 미소 지었다.
‘완벽하다. 무림맹의 근간이 밑바닥에서부터 썩어 들어가고 있군.’
그는 그들의 맹세를 받아들이며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바닥에 굴러다니던 혈위대장의 투구 내부에서 기이한 붉은 안개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치이이익-!
안개는 허공에서 뭉쳐지며 기이한 환영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거대한 눈동자의 형상이었다. 소름 끼치도록 차갑고 탐욕스러운 기운이 정청 앞마당을 가득 채웠다.
무림맹주 맹진태의 영적 시선(靈的 視線)이었다.
환영 속의 눈동자가 서서히 회전하며 백령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백령의 뺨을 스치는 차가운 바람결에 맹진태의 음성이 뇌리를 때리는 듯 전해졌다.
“네놈이로구나. 내 사냥개들을 물어뜯은 쥐새끼가.”
공기가 얼어붙었다.
백령의 시선이 환영과 마주쳤다. 그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