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먼지 섞인 폭풍이 지하 석실을 거칠게 휩쓸었다.

우르릉, 쾅!

남궁혜린이 한백령의 어깨에서 가만히 신형을 일으켰다. 평생 그녀의 명치를 옥죄던 가문의 억압이 서서히 걷힌 뒤였다. 맑고 정순한 기운이 그녀의 전신을 감싸고 있었으나, 눈앞에서 벌어진 돌발적인 격동에 그녀의 손은 본능적으로 검자루를 움켜쥐었다.

석벽이 무너져 내린 연무장 뒤편.

그 어둠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음습하고 비장했다. 제갈휘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해 있었다. 그의 시선은 무너진 틈새 너머, 붉은 혼탁함이 일렁이는 지하 비밀 시실로 향해 있었다.

"이럴 수가…… 저곳은……!"

제갈휘의 얇은 입술이 잘게 떨렸다.

그는 선천적인 심맥 질환 탓에 내공을 쓰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기의 흐름을 읽는 혜안만큼은 누구보다 탁월했다. 무너진 벽 너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단순한 지반 침하의 결과가 아니었다. 그것은 제갈가문이 대대로 숨겨온 은밀한 독기와 금기의 냄새였다.

백령은 소매 안에서 가볍게 진동하는 물건을 느꼈다.

귀영문의 유산인 녹슨 단검이었다.

낙양 분타 지하의 깊은 영맥을 강제로 깨우고 흐름을 바꾼 것은 바로 이 단검이었다. 사파의 어두운 유산이 정파의 심장부 아래 잠들어 있던 거대한 영맥의 자물쇠를 여는 열쇠가 된 셈이었다. 백령은 단검의 자루를 지그시 누르며 소매 속으로 깊숙이 밀어 넣었다. 영맥의 공명이 멈추자, 지반을 뒤흔들던 파동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혜린 소저, 몸은 어떠십니까."

백령이 온화한 목소리로 물었다.

혜린은 자신의 손끝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예전에는 검기를 끌어올릴 때마다 검날 주변으로 붉은 반점(赤斑)이 피어오르곤 했다. 그것은 남궁세가의 비전 심법인 천화심법이 지닌 치명적인 한계였다. 양기의 과부하로 인해 경맥이 타들어 가며 생기는 역혈의 증조이자, 그녀의 생명을 갉아먹는 족쇄였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그녀의 손끝에서 피어오르는 검기는 티 없이 맑은 순백의 빛을 띠고 있었다. 붉은 반점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백령이 천외인과경의 묘리로 그녀의 내력을 완전히 정화하고 바로잡아 준 덕분이었다.

"경맥이…… 마치 새로 태어난 것처럼 매끄럽습니다. 백령 소협이 아니었다면, 저는 평생 가문의 껍데기로 살다 쓰러졌을 것입니다."

혜린의 눈동자에 깃든 신뢰는 이제 꺾이지 않는 대수(大樹)와 같았다. 백령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으나, 그의 내면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신뢰가 깊어질수록 천외인과경에 각인된 정파의 순양기(純陽氣)는 더욱 정밀하고 강해질 뿐이었다. 타인의 감정은 그에게 오직 힘을 얻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다행입니다. 이제 저 너머를 확인해 봐야겠군요."

백령이 무너진 석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제갈휘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벽의 잔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백령이 그의 어깨를 가볍게 짚었다.

"제갈 소협, 직접 가시겠습니까."

제갈휘는 침을 삼켰다. 그의 굳게 닫힌 입술 사이로 거친 숨결이 새어 나왔다.

세 사람은 무너진 틈새를 지나 어두운 지하시실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사방의 벽에는 제갈가문의 고대 문양들이 기괴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실내 중앙에는 흑요석으로 깎아 만든 단단한 궤가 놓여 있었다.

백령이 손을 뻗어 궤의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는 먼지가 뽀얗게 쌓인 서첩 한 권과 붉은 인장이 찍힌 양가죽 문서가 들어 있었다. 백령은 서첩을 집어 들어 제갈휘의 앞으로 내밀었다.

제갈휘의 손이 서첩을 건네받았다.

종이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서첩의 첫 장을 넘기자마자, 제갈휘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의 흰 뺨이 분노로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이것은…… 장로들의……."

문서의 내용은 참혹했다.

그것은 제갈가문의 원로들과 무림맹주 맹진태가 체결한 극비 반역 협정서였다. 가문의 이익을 위해 낙양의 영맥을 무림맹에 바치고, 그 대가로 가문 내의 반대파를 숙청한다는 조항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무자비한 숙청 목록의 가장 첫 줄에는, 다름 아닌 제갈휘 자신의 이름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쓸모를 다한 지략가는 맹주가 하사한 영약의 농도를 조절하여 자연스럽게 심멸(心滅)에 이르게 한다.'

잔인한 문장이 제갈휘의 눈을 찔렀다.

그가 매일같이 맹주에게 받아 복용하던 심맥 영약은 생명 연장의 도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숨통을 서서히 조이고, 가문이 원할 때 언제든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기 위해 설계된 독약이었던 것이다.

"나는……."

제갈휘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평생을 가문을 위해 머리를 썼다. 내 몸이 이 모양이 되면서도, 제갈세가의 이름을 드높이기 위해 판을 짰단 말이다. 그런데…… 고작 이런 사냥개 대접이었단 말인가!"

분노가 그의 얇은 어깨를 사정없이 흔들었다.

평소 냉철하게 계산기만 두드리던 지략가의 가면이 처참하게 찢겨 나갔다. 배신감과 절망이 그의 심맥을 자극하자, 제갈휘는 붉은 피를 한 움큼 토해내며 바닥으로 쓰러지려 했다.

백령이 신속하게 움직였다.

그의 손가락이 제갈휘의 등 뒤 주요 혈도를 빠르게 짚었다. 정순한 순양의 기운이 제갈휘의 좁고 막힌 경맥 속으로 부드럽게 흘러들어갔다. 타들어 가던 심맥의 통증이 기적처럼 완화되었다.

"제갈 소협, 정신을 차리십시오."

백령의 목소리는 낮고 묵직했다.

"위선자들의 손에 놀아나 이대로 스러질 것입니까. 아니면 그들이 짜놓은 판을 스스로 뒤엎어 버리겠습니까."

제갈휘가 피 묻은 입술을 닦으며 백령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동자 속에서 형용할 수 없는 불꽃이 일었다. 평생 타인을 불신하고 의심해 왔던 사내가, 처음으로 자신에게 손을 내민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백령의 눈빛에는 동정이나 연민이 없었다. 오직 잔혹할 정도로 명확한 진실과 기회가 있을 뿐이었다.

"한백령……."

제갈휘가 주먹을 피가 나도록 꽉 쥐었다.

"그대의 말이 맞소. 나는 이렇게 개처럼 죽지 않을 것이오. 내 머리를, 내 지략을 그대에게 바치겠소. 저 추악한 가문과 무림맹을 통째로 불살라 버릴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리하겠소."

그의 목소리에는 뼈를 깎는 결의가 담겨 있었다.

[천외인과경이 공명합니다.]

백령의 뇌해 속에서 거울판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제갈휘가 바친 진정한 신뢰와 결속의 힘이 인과경에 기입되었다. 제갈휘는 무공은 없었으나, 기의 흐름과 천지 대세, 그리고 무공의 궤적을 연산하는 천재적인 두뇌를 지니고 있었다. 그의 복잡하고 정밀한 무도 연산력이 거울판을 통해 백령의 심상으로 흘러들어왔다.

콰아아앙!

백령의 단전 내에서 정체되어 있던 기운들이 폭발적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기의 흐름이 이전보다 배가된 속도로 경맥을 휘감았다. 가공할 만한 속도였다. 제갈휘의 연산력이 백령의 내공 순환 경로를 극도로 효율화시킨 결과였다. 이제 백령은 정파의 순양기와 사파의 부드러운 음기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동시에 극도의 속도로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좋습니다."

백령이 서늘하게 웃었다.

"그렇다면 우선, 제갈 소협을 옥죄던 가문의 썩은 가지부터 쳐내도록 하지요."

* * *

낙양 분타의 정청(正廳).

제갈가문의 원로장이자 이곳의 분타주 대리를 맡고 있는 제갈풍(諸葛風)은 초조하게 찻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지하 영맥의 요동이 멈춘 지 꽤 시간이 흘렀으나, 아무런 소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묵영대주가 일을 그르친 것인가……."

그가 중얼거리는 순간, 정청의 거대한 문이 거칠게 열렸다.

쾅!

문틀이 비명을 지르며 쪼개졌다.

제갈풍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고 들어선 것은 다름 아닌 한백령과 남궁혜린, 그리고 휠체어에 앉은 제갈휘였다. 제갈휘의 무릎 위에는 붉은 인장이 찍힌 양가죽 문서가 올려져 있었다.

"이게 무슨 무례인가!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제갈풍이 호통을 치려 했으나, 혜린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검을 반쯤 뽑아 들었다.

스릉!

맑고 투명한 순양의 검강이 정청의 대기를 차갑게 얼려 버렸다. 남궁세가의 후계자가 뿜어내는 압도적인 기세에 제갈풍은 숨을 턱 막혔다.

"제갈풍 원로장."

제갈휘의 목소리가 정청을 울렸다. 평소의 유약함은 온데간데없고, 칼날처럼 날카로운 지략가의 위엄이 가득했다.

"이것이 무엇인지 설명해 보시겠습니까."

제갈휘가 손가락으로 양가죽 문서를 가리켰다.

제갈풍의 눈이 문서의 붉은 인장에 닿는 순간, 그의 안색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 들어갔다. 그것은 결코 세상 밖으로 나와서는 안 될 비밀 협정서였다.

"너, 네놈이 어떻게 그걸……!"

"가문을 배신하고, 무림맹주와 결탁하여 낙양의 영맥을 팔아넘기려 한 죄. 그리고 가문의 후계자인 나를 독살하려 한 죄. 이 서첩과 문서에 장로들의 직인이 똑똑히 찍혀 있소."

제갈휘가 차갑게 읊조렸다.

"이, 이건 모함이다! 어디서 가짜 문서를 가져와서……!"

제갈풍이 다급히 외치며 제갈가문 호위 무사들을 부르려 했다.

"무사들은 들으라! 저 배신자들을 당장 처단하라!"

그러나 정청 밖에서 대기하던 제갈가문의 무사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의 시선은 이미 제갈휘에게 향해 있었다. 제갈휘가 가문의 비전 신물인 '청강령(靑鋼令)'을 높이 치켜들었기 때문이다. 무너진 지하시실 궤 안에서 문서와 함께 찾아낸 가주 대리의 상징이었다.

"가주의 명령이다. 가문을 더럽힌 반역자들을 전원 구금하라."

제갈휘의 단호한 명령에 무사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존명!"

무사들이 제갈풍을 비롯한 원로들의 사지를 억세게 붙잡았다. 순식간에 권력의 판도가 뒤집힌 것이다. 제갈풍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허우적거렸다. 남궁혜린의 검강이 그의 목덜미를 스치며 미세한 흠집을 냈다.

"움직이면 벱니다."

혜린의 짧고 단호한 경고에 제갈풍은 몸을 굳혔다.

백령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며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제갈가문의 억압 원로들을 완벽히 퇴출하고, 낙양 분타의 실권을 제갈휘의 손에 쥐어주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제 낙양의 영맥과 무림맹의 한 축이 백령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통쾌한 승리였다. 위선자들의 교활한 수법을 역이용해 그들을 스스로 파멸로 몰아넣은 것이다.

포박당한 제갈풍이 바닥에 무릎을 꿇려지며 씩씩거렸다.

그의 입가에서 비틀린 웃음이 새어 나왔다.

"크하하…… 하하하!"

제갈풍이 광소를 터뜨렸다. 그의 눈에 광기가 서려 있었다.

"제갈휘, 이 잔머리만 굴리는 애송이 놈이 겨우 이 정도로 이긴 줄 아느냐? 착각하지 마라."

제갈풍이 고개를 들어 백령과 혜린을 차례로 노려보았다.

"맹주께서 너희 같은 하찮은 후기지수들의 장난질을 모를 것 같으냐? 이미 늦었다."

백령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제갈풍이 백령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조소했다.

"맹주께서 직접 움직이셨다. 그분의 직속 최정예 살수 부대인 '혈위대(血衛隊)'가 이미 이 낙양 분타를 겹겹이 포위했다. 너희는 이 정청 밖으로 단 한 발짝도 살아 나가지 못할 것이다!"

그 순간, 정청 밖의 공기가 기이하게 무거워졌다.

스산한 피비린내가 바람을 타고 정청 내부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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