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독인 대장의 가슴팍, 산산조각 난 벽령단 보관함에서 뿜어져 나온 유독 가스가 한백령의 심장부로 정통으로 날아들었다.

검붉은 기류가 공기를 찢으며 쏘아져 들어오는 궤적은 기괴하리만치 빨랐다. 숨을 들이쉬는 찰나의 순간, 지독한 유황 냄새와 썩은 피의 악취가 비강을 찔렀다.

이미 단전 내부에서 정파의 순양기와 사파의 독기가 들끓으며 충돌하고 있던 백령의 몸은 굳어 있었다. 가슴팍으로 쇄도하는 독무를 피할 도리가 없었다. 맥박이 요동치고 손끝이 차갑게 식어 내렸다.

"안 돼……!"

칼날 같은 비명이 지하 연무장을 찢었다.

남궁혜린이었다. 그녀의 신형이 허공을 가르며 백령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의 검 끝에서 뿜어져 나온 청청한 검기가 독무를 베어내려 했으나, 맹주의 직속 암살대인 묵영대주의 가공할 검격과 유독 가스의 기세는 상상을 초월했다. 혜린의 검기가 닿는 순간, 청색 빛무리 사이에 불길한 붉은 반점들이 핏방울처럼 돋아나며 부서졌다.

남궁가문의 비전 심법이 가진 치명적인 한계였다. 극양의 힘을 억지로 끌어 올릴 때마다 내장이 타들어 가고 피부 위로 붉은 반점이 솟구치는 역혈의 부작용. 혜린은 가문의 기대를 충족하기 위해 이 부서진 고리를 숨긴 채 검을 휘둘러 왔으나, 지금 이 순간 백령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치명적인 역혈 상태를 스스로 발동해 버린 것이다.

"하압!"

혜린의 입술이 터지며 선혈이 비산했다. 그녀의 전신을 감싼 검기가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그러나 완벽하지 못한 내공의 흐름은 그녀의 단전을 역류하며 심맥을 사정없이 짓밟았다. 그녀의 뺨과 목덜미 위로 기괴한 붉은 반점들이 순식간에 번져 나갔다.

"혜린 소저, 멈추시오!"

백령이 손을 뻗으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묵영대주의 검과 독인 대장의 독무가 동시에 혜린의 검막을 강타했다.

콰아아앙!

귀를 찢는 굉음과 함께 혜린의 몸이 뒤로 튕겨 나갔다. 백령은 황급히 신형을 날려 그녀의 허리를 안아 들었다. 품에 안긴 그녀의 몸은 마치 불덩이처럼 뜨거웠고, 맥박은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백령…… 소협…… 피하십시오…… 어서……."

혜린의 눈동자가 흐려지고 있었다. 그녀의 숨결이 닿은 백령의 옷자락이 검붉게 타들어 갔다. 전신으로 퍼진 역혈의 독기와 벽령단의 유독 가스가 그녀의 생명력을 급격히 갉아먹고 있었다.

"지하의 영맥이…… 완전히 미쳐 날뛰고 있습니다!"

저만치 뒤에서 제갈휘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그의 시선은 연무장 중앙에 박혀 있는, 귀영문의 유산인 녹슨 단검을 향해 있었다.

지하 영맥의 폭주에 반응하듯, 녹슨 단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안개가 낙양 분타의 지하 진맥을 일깨우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쇠붙이가 아니었다. 과거 귀영문이 멸문당하기 전, 이곳 지하 깊은 곳에 숨겨둔 사파의 영맥을 공명시키고 통제하는 유일한 열쇠였다. 단검의 균열 사이로 뿜어져 나오는 칠흑 같은 기운이 사방의 대기를 무겁게 가라앉히기 시작했다.

제갈휘는 품속에서 자신이 남몰래 제작 중이던 비검릉 봉인 해제용 영동 장치의 부품 도면을 움켜쥐었다. 도면에 그려진 기하학적인 문양들이 영맥의 요동과 완벽히 일치하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복잡한 계산이 빠르게 회전했다.

'이 단검이 영맥의 쐐기였단 말인가? 그렇다면 저 자가 가진 힘의 근원은 대체…….'

제갈휘의 의문이 채 깊어지기도 전에, 묵영대주가 검을 고쳐 잡으며 다가왔다.

"잔말은 끝이다. 반역자 무리들을 모두 참하라!"

묵영대원들의 검끝이 차가운 살기를 뿜어냈다.

백령은 품에 안긴 혜린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전신에 돋아난 붉은 반점들이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가문의 무게에 짓눌려 평생을 고통받았을 그녀의 내면이, 지금 이 순간 백령이라는 존재를 구하기 위해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배신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타인을 도구로만 보던 백령의 심장 안쪽에 묘한 파문이 일었다. 진정한 신뢰를 거부하던 그의 영혼 위에, 혜린이 보여준 목숨을 건 헌신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이것이…… 네가 내게 준 인과인가.'

백령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의 단전 깊은 곳에서, 차갑게 식어 있던 천외인과경(天外因果鏡)이 거대한 빛을 발하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거울의 표면이 혜린의 일그러진 얼굴을 비추었다. 그녀가 맺은 절대적인 신뢰와 유대감이 인과경의 고리를 따라 백령의 내력과 연결되었다.

스으으읍.

백령이 혜린의 단전 부근에 손을 얹었다.

"내게 맡기시오."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혜린의 귓가를 울렸다.

그 순간, 천외인과경이 격렬하게 진동했다. 백령은 인과경의 힘을 전동하여, 혜린의 전신 내부를 잠식하고 있던 붉은 반점과 엉킨 역혈의 독기를 고스란히 자신의 몸으로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아, 아아……!"

혜린의 입에서 고통 섞인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이내 그녀의 표정이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피부를 뒤덮고 있던 기괴한 붉은 반점들이 눈에 띄게 옅어지며, 백령의 손바닥을 통해 그의 팔을 타고 올라갔다.

역혈의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다. 뜨거운 쇳물을 혈관에 들이붓는 듯한 가공할 고통이 백령의 전신을 엄습했다. 살가죽이 찢어지는 듯했고, 단전이 수백 조각으로 부서지는 착각이 들었다.

그러나 백령은 신음조차 내지 않았다. 그의 입술은 굳게 다물려 있었고,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묵영대주를 응시했다.

혜린은 고통 속에서도 자신을 지탱하는 백령의 따뜻하고 견고한 품을 느꼈다. 그녀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던 가문에 대한 공포, 열등감, 외로움이 백령의 무거운 기운에 쓸려 내려갔다. 그녀는 백령의 품에 완전히 자신을 맡겼다.

[완전한 동조를 감지합니다.] [인과의 결속이 극에 달했습니다.]

머릿속에서 인과경의 차가운 목소리가 울렸다.

혜린의 순수한 동조와 절대적인 신뢰가 완성되는 순간, 천외인과경은 아무런 인과 반사의 부작용 없이 남궁가문 무학의 정수를 정제하기 시작했다.

백령의 몸으로 들어온 역혈의 독기와 붉은 반점이 인과경의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정화되었다. 정제된 기운은 이내 가공할 순양기(純陽氣)로 승화되어 그의 단전을 가득 채웠다. 남궁가문 비전 검강의 최고 한계, 그 누구도 도달하지 못했던 완벽한 극양의 정수가 백령의 혈맥을 타고 흘렀다.

화아아악!

백령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온 기세가 연무장 전체를 뒤흔들었다.

그의 피부 위에 잠시 돋아났던 붉은 반점들이 완벽하게 사라졌다. 대신 그의 눈동자에서 타오르는 청청한 안광은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깊고 정순했다.

혜린의 내공 상처가 신화처럼 완치된 순간이었다. 그녀의 호흡은 평온해졌고, 단전은 이전보다 훨씬 더 견고한 기운으로 가득 찼다.

동시에 백령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그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기가 허공을 갈랐다. 남궁혜린이 펼치던 검강과는 격이 달랐다. 붉은 불순물이 완전히 배제된, 세상에서 가장 정순하고 눈부신 백색의 순양검강이 그의 손가락 끝에서 길게 늘어났다.

"이, 이것은…… 남궁가문의 진천검강(震天劍剛)? 그것도 이토록 순수한 기운이라니!"

제갈휘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의 이지적인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평생을 남궁가문의 검을 보며 자라온 그였기에, 지금 백령이 보여주는 기운이 가문의 가주조차 도달하지 못한 경지임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백령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겨우 이 정도인가, 무림맹의 암살대라는 자들의 수준이."

그의 목소리에는 사파의 비정함과 거침없는 오만함이 묻어났다.

묵영대주는 본능적인 공포를 느꼈다. 눈앞의 청년은 방금 전까지 기운이 뒤엉켜 죽어가던 자가 아니었다. 지금 그의 앞에 서 있는 존재는, 마치 천하를 발아래 두고 내려다보는 거대한 괴물 같았다.

"죽여라! 모두 쳐라!"

묵영대주의 절박한 비명과 함께 수십 명의 암살대원이 백령을 향해 쇄도했다.

백령의 신형이 움직였다.

그의 보법은 귀영문의 독문 보법이었으나, 그 위를 덮은 것은 눈이 시리도록 푸른 순양의 검기였다.

스아아아!

백령이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검강이 허공을 횡하로 가르자, 일진광풍이 일며 쇄도하던 암살대원들이 일제히 뒤로 날아갔다. 그들의 검이 맥없이 부러지고, 가슴팍의 호심경이 산산조각 났다. 단 한 초 만에 십여 명의 일류 고수들이 피를 토하며 바닥에 뒹굴었다.

"괴물……!"

묵영대주가 검을 떨구며 비틀거렸다. 그는 더 이상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하고, 신형을 날려 어둠 속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남은 대원들도 부상당한 동료들을 챙길 겨를도 없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백령은 그들을 굳이 쫓지 않았다. 그의 목적은 이들을 몰살하는 것이 아니었다. 맹주 맹진태에게 자신의 압도적인 힘과 위협을 각인시키는 것, 그리고 무림맹의 심장부를 안에서부터 부수기 위한 초석을 다지는 것이었다.

지하의 요동이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연무장 중앙에 박혀 있던 귀영문의 녹슨 단검은 깊은 영맥을 완전히 깨운 채, 은은한 검은 광채를 내뿜고 있었다.

백령이 다가가 단검의 자루를 쥐었다. 그의 손길이 닿자, 단검은 마치 주인을 알아본 듯 가볍게 진동하며 그의 소매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낙양 분타 지하의 거대한 영맥이 이제 백령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된 것이다.

"혜린 소저."

백령이 뒤를 돌아보았다.

남궁혜린은 완전히 정화된 몸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평생 가문의 굴레처럼 따라다니던 고통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맑고 투명한 피부와 정순한 기운이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그녀는 백령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더 이상 가문의 후계자로서의 의무나 억압이 없었다. 오직 자신을 구원해 준 사내를 향한, 목숨보다 깊은 신뢰와 애정이 깃들어 있을 뿐이었다.

"백령 소협…… 고맙습니다."

혜린이 천천히 다가와 백령의 어깨에 가만히 머리를 기대었다. 그녀의 입가에 평생 지어본 적 없는 맑은 미소가 번졌다.

백령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 안았다. 비록 타인을 도구로만 보는 차가운 이성을 가졌을지언정,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녀가 전해주는 온기가 나쁘지 않았다. 인과경의 거울이 두 사람의 깊은 결속을 축복하듯 은은하게 빛났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우르릉, 쾅!

갑작스러운 영적 충격이 지하 공간 전체를 강타했다.

백령과 혜린이 서 있는 곳 바로 뒤편, 제갈가문의 비밀 지하시실로 통하는 거대한 돌벽이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단순한 붕괴가 아니었다. 무너진 벽 너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제갈휘가 숨겨둔 또 다른 거대한 비밀의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제갈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들어갔다.

"이럴 수가…… 저곳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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