쿵, 하고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파열음이 귓가를 난폭하게 때렸사옵니다.
보육실의 낡은 목제 문이 힘없이 부서져 나가며 매서운 칼바람과 함께 검붉은 그림자가 들이닥쳤지요. 뼛속까지 시려 오는 한빙증의 고통에 겨워 바닥을 뒹굴던 제 시야가 흐릿하게 번졌사옵니다. 그 지독한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는 사내, 디트리히 에스카르트 공작의 전신은 방금 전장이라도 치르고 온 듯 붉은 피와 검은 마기로 얼룩져 있었지요.
“하악, 후우…….”
그가 내뱉는 숨결마다 짐승의 르릉거림 같은 마력이 뿜어져 나왔사옵니다. 광기로 가득 찬 그의 붉은 눈동자는 이성을 잃은 야수와 다름없었지요. 그를 감싼 공기가 훅 끼쳐올 때, 쌉싸름한 야생 라벤더 향과 비린 혈향이 뒤섞인 기묘하고도 달콤한 향취가 제 코끝을 스쳤사옵니다.
이대로 가다간 그의 사나운 발톱에 찢기거나, 혹은 제 몸을 갉아먹는 한빙증의 냉기에 온몸이 얼어붙어 바스러질 것이 분명했사옵니다. 죽음의 공포가 목덜미를 서늘하게 적시는 찰나, 제 안의 생존 본능이 요동쳤지요.
저는 바닥을 기어 그의 가죽 장화 앞으로 다가갔사옵니다. 그리고 사르르 떨리는 손가락을 뻗어, 그의 단단하고 차가운 손목을 필사적으로 움켜쥐었지요.
“살려…… 주세요, 각하…….”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사옵니다.
제 손끝이 그의 살결에 닿는 찰나, 차갑게 얼어붙어 가던 제 심장 중심부에서부터 형언할 수 없이 따스한 온기가 폭발하듯 터져 나왔지요. 그것은 마치 꽁꽁 얼어붙은 겨울 호수 위로 봄날의 따스한 햇살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리는 듯한 감각이었사옵니다.
파아아앗―!
제 손끝에서부터 시작된 맑은 민트색과 부드러운 연분홍색의 온기 파동이 디트리히의 몸을 감싸고 있던 기괴한 검붉은 마기를 집어삼키기 시작했지요. 사나운 불꽃처럼 넘실거리던 그의 광기가 거짓말처럼 사그라졌사옵니다. 얼음산이 녹아내리듯 그의 거친 숨소리가 잦아들고, 빳빳하게 굳어 있던 단단한 어깨가 스르르 풀리는 것이 손끝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졌지요.
“……윽.”
디트리히가 나지막한 신음을 흘리며 무릎을 꿇었사옵니다. 저를 내려다보는 그의 붉은 눈동자 속에서 광포한 안개가 걷히고, 맑고 투명한 이성의 빛이 되살아나고 있었지요.
제 몸을 지배하던 극심한 한빙증의 통증 역시 순식간에 씻겨 내려갔사옵니다. 뼛속까지 스며들던 지독한 오한이 사라지고, 그의 품에서 흘러나오는 정제된 마기가 제 혈관을 타고 흐르며 온몸을 노른자처럼 따스하게 데워 주었지요. 이리도 안온하고 달콤한 구원은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사옵니다.
그의 손을 쥔 채 멍하니 숨을 몰아쉬는데, 제 눈앞의 허공에 파스텔톤의 반짝이는 빛무리와 함께 익숙한 사각형의 반투명 창이 떠올랐사옵니다.
[영혼 보육 대장 - 특별 관찰 대상 활성화] * 대상: 디트리히 에스카르트 (인간 / 고대 마수 인도자의 혈통 潛) * 상태: 마기 과포화로 인한 정신 붕괴 직전 (레티샤의 온기 접촉으로 일시적 정화율 42% 달성) * 특이 사항: 순수한 고대 마기의 혈통을 이어받아 마수들을 정복하고 지배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님. 레티샤의 정화 마력과 결합 시, 마기 정제율이 비약적으로 상승함.
‘고대 마수 인도자의 혈통……?’
제 눈을 의심했사옵니다. 그저 마기의 저주에 걸려 미쳐가는 불쌍한 북부의 공작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의 핏줄 속에 그런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니요. 게다가 저의 정화 마력과 그의 마기가 상호작용하여 서로를 구원할 수 있다는 사실이 영혼 보육 대장의 푸른 글씨로 명확히 새겨져 있었사옵니다.
디트리히는 제 손목을 잡은 채, 마치 난생처음 보는 기이한 생명체를 보듯 저를 뚫어지게 응시했지요. 그의 커다란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사옵니다.
“그대…… 방금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지?”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위압적이었으나, 이전처럼 뼈를 깎는 듯한 살기는 느껴지지 않았사옵니다. 오히려 벼랑 끝에 선 자가 구원의 밧줄을 잡았을 때의 절박함이 묻어나는 듯했지요.
“저는…… 그저 살고 싶었을 뿐이옵니다, 각하.”
저는 잔뜩 젖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슬그머니 손을 빼려 했사옵니다. 전생의 기억 속에서 버림받고 상처 입었던 기억들이 떠올라, 타인과 너무 깊이 얽히는 것이 본능적으로 두려웠기 때문이지요. 도망치고 싶었사옵니다. 당장이라도 모카를 품에 안고 이 음산한 요새를 벗어나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숨어버리고 싶었지요.
하지만 디트리히는 제 손을 순순히 놓아주지 않았사옵니다. 오히려 손가락 사이로 제 손을 단단히 얽어매며, 더욱 깊숙이 제 품 안으로 파고들었지요.
“가지 마라.”
그의 입술이 제 귀밑머리에 닿을 듯 가까워졌사옵니다. 짐승처럼 으르렁대던 북부의 지배자가, 제 온기 앞에서는 한없이 굶주린 아기 고양이처럼 고분고분해지는 모습에 제 심장이 쿵쾅쿵쾅 요동치기 시작했지요.
“내 안의 어둠이…… 그대의 손길 한 번에 잠잠해졌다. 이 기적을 설명해 보아라, 레티샤.”
“그것은…….”
저는 마른침을 삼켰사옵니다. 제 능력을 솔직히 털어놓는다면 제국 감시단의 귀에 들어갈 위험이 있었고, 그렇다고 거짓을 고하기엔 그의 매서운 눈빛이 제 영혼까지 꿰뚫어 보는 듯했지요.
“각하의 몸에 흐르는 마기와, 제 몸속의 체온이 서로 맞물리는 상성을 지닌 듯하옵니다. 저는 능력을 쓸 때마다 전신이 얼어붙는 한빙증을 앓고 있으며, 오직 각하의 정제된 온기만이 저를 살릴 수 있사옵니다. 그리고 각하께서는…… 제 손길을 통해 마기의 광폭화를 가라앉힐 수 있지요.”
디트리히의 눈매가 가늘어졌사옵니다. 그는 잠시 무거운 침묵을 지키다, 이내 낮게 실소를 터뜨렸지요.
“서로가 서로의 유일한 해독제라니. 이 얼마나 지독하고 매혹적인 족쇄인가.”
그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며 저를 안아 올려 보육실 한편에 놓인 푹신한 소파에 눕혔사옵니다. 소파 옆 촛대에서 흘러나오는 따스한 살구빛 조명이 그의 수려한 콧날과 각진 턱선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지요.
“그렇다면 계약을 맺지. 레티샤.”
디트리히가 제 뺨을 쓸어내리며 속삭였사옵니다. 그의 거친 손가락 끝이 닿는 곳마다 찌릿한 열기가 피어올라 온몸을 간지럽혔지요.
“계약…… 이옵니까?”
“그래. 매일 밤, 아무도 모르게 이곳에서 만나 서로의 온기를 나누는 거다. 나는 내 안의 괴물을 잠재우고, 그대는 그 지독한 추위로부터 살아남는 거지. 어떤가?”
그의 제안은 저에게 있어 거절할 수 없는 달콤한 유혹이었사옵니다. 이 춥고 험난한 북부 영지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소중한 모카를 지키기 위해선 이 강력한 사내의 비호가 절대적으로 필요했으니까요.
“……좋사옵니다. 각하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사옵니다.”
제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디트리히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매혹적으로 올라갔사옵니다. 늘 얼음처럼 차갑게 굳어 있던 그의 얼굴에 피어난 미소는, 꼭 봄날에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복사꽃처럼 아름다웠지요.
“현명한 선택이군, 나의 보육사.”
은밀하고도 뜨거운 밀약이 성립된 바로 그 순간이었사옵니다.
두 사람의 호흡이 겹쳐지며 묘한 긴장감이 흐르던 보육실 내부로, 요새 외곽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날카로운 경종 소리가 고요를 사정없이 깨뜨렸지요.
뎅―! 뎅―! 뎅―!
비상 상황을 알리는 거친 종소리와 함께, 요새 정문 쪽에서 수십 명의 군마가 들이닥치는 말발굽 소리가 얼어붙은 대지를 흔들었사옵니다.
“각하! 큰일났사옵니다!”
보조 보육사인 유리엘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빗자루를 꼭 쥔 채 보육실 문을 벌컥 열어젖혔지요. 그녀의 온몸이 눈보라에 젖어 파르르 떨리고 있었사옵니다.
“제, 제국의 공식 특별 마수 검열단이…… 지금 요새 정문을 부수고 들어왔사옵니다! 마수를 즉시 도살하겠다며 군사들을 풀고 있사옵니다!”
유리엘의 비명 같은 외침에 제 심장이 다시금 나락으로 뚝 떨어졌사옵니다.
아직 보육원의 모든 마수들이 안전하게 숨지 못했고, 모카 역시 제 품 안에서 덜덜 떨고 있는 이 위급한 상황에, 제국의 잔혹한 칼날이 기어코 윈터헤이븐의 목덜미를 겨누며 들어선 것이었사옵니다.
“안 돼……!”
제 품 안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던 모카가 꼬리의 불꽃을 바르르 떨며 제 깃을 파고들었사옵니다. 녀석의 작은 몸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떨림이 제 심장으로 고스란히 전해졌지요. 갓 구워낸 달콤한 바닐라 슈의 향기가 모카의 보드라운 털끝에서 희미하게 풍겨왔으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달콤함마저 슬픈 안개처럼 보육실 안을 채우고 있었사옵니다.
쿵, 쿵, 쿵!
거칠고 무거운 군화 소리가 대리석 복도를 타고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사옵니다. 제국의 군홧발은 마치 평화로운 봄날의 꽃밭을 짓밟으러 온 난폭한 멧돼지 무리 같았지요.
저는 본능적으로 뒤걸음질을 쳤사옵니다. 전생의 그 외롭고 쓸쓸했던 유기 트라우마가 머릿속을 스치며, 당장이라도 모카를 품에 안고 보따리를 싸서 요새 지하의 어두운 구석으로 도망치고 싶다는 회피 본능이 고개를 쳐들었지요.
‘아아, 어찌하여 제게는 이토록 가혹한 운명만 기다리는 것인지요. 이제 겨우 살 만한 내 집을 찾았다 생각했거늘…….’
제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는 것을 눈치챈 디트리히가, 제 손목을 쥐고 있던 손에 꾹 힘을 주었사옵니다. 그의 손바닥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묵직하고 따스한 온기가 제 얇은 핏줄을 타고 흐르며, 도망치려던 발걸음을 단단히 붙잡아 주었지요.
“내 등 뒤에 있어라, 레티샤.”
디트리히의 목소리는 북부의 만년설보다 더 차갑고 단호했사옵니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부서진 문틀 너머의 어두운 복도를 노려보았지요. 그의 전신에서 다시금 검붉은 마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으나, 이전처럼 광기에 휩싸인 폭주가 아니었사옵니다. 제 정화 마력과 결합되어 한층 더 예리하고 정제된, 오직 아군을 지키기 위한 수호의 장막이었지요.
그때, 제 눈앞의 허공에 연분홍빛과 민트색의 반짝이는 파스텔톤 입자들이 흩날리며 새로운 시스템 창이 번쩍였사옵니다.
[위기 감지! 영혼 보육 대장의 특수 방어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 요새 3D 간이 입체 지도가 시각화됩니다. * 특이 사항: 보육실 바닥 카펫 아래에 고대 에스카르트 가문이 새겨둔 '고대 대피 방어벽 설계도'의 마력 연결선이 흐릿하게 감지됩니다. 아직 완벽히 해금되지 않았으나, 특정 마력 자극 시 임시 방어 격벽을 작동시킬 수 있습니다.
‘바닥 아래에…… 비밀 장치가?’
저는 얼른 고개를 숙여 수수한 양모 카펫이 깔린 보육실 바닥을 내려다보았사옵니다. 영혼 보육 대장의 안내에 따라, 카펫 모퉁이 너머로 아주 미세한 황금빛 실선들이 마법 진형을 그리며 얽혀 있는 것이 제 시야에만 선명하게 비쳤지요. 2화에서 요새 도면을 훑어볼 때 얼핏 보았던 비밀 격리 벽의 설계도가 바로 이곳과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옵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저 장치를 가동하기에는 마력이 턱없이 부족했사옵니다. 저 장치를 활성화하려면 제 체온을 극도로 깎아내는 보육 대장의 정밀 솔루션을 실행해야만 했지요. 한빙증의 고통이 다시 찾아올 것이 뻔했지만, 제 품 안에서 낑낑거리는 모카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빗자루를 쥐고 떨고 있는 유리엘을 보니 도저히 발을 뺄 수 없었사옵니다.
“유리엘, 내 뒤로 와요. 모카를 꼭 안아주고 있어요.”
저는 비장한 각오로 입술을 깨물며 모카를 유리엘의 품에 안겨주었사옵니다. 겁쟁이 유리엘은 힉, 하고 숨을 들이켜면서도 제 지시에 따르기 위해 빗자루를 가슴에 꼭 품은 채 모카를 소중히 받아 안았지요.
“레티샤 님…… 무, 무서워요…… 하지만 저도 같이 지킬래요!”
작고 가녀린 소녀의 용기에 제 마음 한구석이 찌릿하게 아려왔사옵니다.
바로 그 순간, 복도 모퉁이를 돌며 횃불의 붉은 불빛들이 보육실 안으로 들이닥쳤사옵니다. 철갑옷이 부딪치는 불쾌한 쇳소리와 함께, 검붉은 제국의 망토를 두른 군사들이 보육실 입구를 완전히 포위했지요.
그들의 중심에서 걸어 나오는 사내, 제국 특별 마수 검열단의 단장인 ‘바실리’가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검 자루를 툭툭 치며 음산하게 웃었사옵니다. 그의 이마에 새겨진 교단의 신성 문양이 횃불 빛에 반사되어 기괴하게 번뜩였지요.
“에스카르트 공작 각하. 오랜만에 뵙는군요.”
바실리는 디트리히를 향해 예의를 갖추는 척 고개를 까딱였으나, 그의 비열한 눈동자는 이미 보육실 내부를 탐욕스럽게 훑고 있었사옵니다. 특히 유리엘의 품에서 꼬리를 바르르 떨며 불꽃 스파크를 미세하게 튀기고 있는 모카를 발견한 순간, 그의 입꼬리가 잔인하게 비틀려 올라갔지요.
“역시 쥐새끼가 냄새를 제대로 맡았군. 북부의 가문이 마수 말살령을 어기고, 요새 깊숙한 곳에서 더러운 마수의 새끼를 기르고 있다는 밀고가 사실이었어.”
바실리가 검을 반쯤 뽑아 들며 한 걸음 내딛자, 디트리히가 그 앞을 가로막으며 대지를 얼려버릴 듯한 목소리로 경고했사옵니다.
“내 영지다, 바실리. 검을 더 뽑는다면 제국의 법령보다 내 검이 네 목을 먼저 벨 것이다.”
“하하, 공작 각하. 황제 폐하의 직속 명령을 거역하시겠다는 겁니까? 이 더러운 짐승 놈들은 발견 즉시 도살하는 것이 제국의 율법입니다!”
바실리의 서슬 퍼런 외침과 함께 제국의 군사들이 일제히 무기를 겨누었사옵니다.
일촉즉발의 위기 속에서, 저는 바닥에 새겨진 고대 마법 진형의 황금빛 실선을 필사적으로 응시했사옵니다. 이 장치를 가동하려면 디트리히의 폭발적인 마기를 이 바닥의 연결선으로 유도해야만 했지요.
저는 떨리는 걸음을 옮겨 디트리히의 단단한 등에 제 이마를 살포시 기대었사옵니다. 그의 등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열기가 제 뺨을 타고 흘러내렸지요.
“각하…… 제 손을 다시 한번 잡아 주세요. 그리고 각하의 마력을 바닥 아래로 거칠게 내리꽂으셔야 하옵니다.”
제 귓속말에 디트리히의 어깨가 굳어졌사옵니다. 하지만 그는 단 한 마디의 의문도 제기하지 않은 채, 제 손을 뒤로 뻗어 거칠게 맞잡았지요.
동시에 바실리가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군사들에게 손짓했사옵니다.
“저 더러운 다람쥐 마수 놈의 목을 치고, 배후에 있는 보육사 년도 반역죄로 체포해라!”
제국의 검날이 유리엘과 모카를 향해 사정없이 허공을 가르는 바로 그 찰나였사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