뼛속까지 얼어붙는다는 것은 단순히 춥다는 감각을 넘어선 지옥이었다. 손끝에서부터 피가 얼어붙어 하얗게 변해가고, 심장마저 가느다란 고드름에 찔린 듯 욱신거리는 고통.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포 깊숙한 곳에서 서리가 서리는 느낌에 자꾸만 시야가 흐려졌사옵니다. 이대로 차가운 돌바닥에 쓰러져 영영 깨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지독한 유기의 공포가 다시금 발끝에서부터 감겨올 때였습니다.
스르륵, 중심을 잃고 무너지던 내 몸이 허공에서 멈추었습니다.
단단하고 거대한 팔이 내 허리를 단숨에 낚아채 품 안으로 끌어당겼기 때문이지요. 은은하게 퍼지는 깊은 침엽수림의 향과, 뺨을 스치는 서늘한 눈꽃의 체취. 하지만 그 이면에 숨겨진 것은 살이 델 것처럼 뜨겁고 거대한 열기였습니다. 오직 마기가 극도로 정제된 자만이 품을 수 있는, 폭풍 전야처럼 고요하고도 위압적인 온기였사옵니다.
“……이봐.”
낮고 가라앉은 사내의 목소리가 귓가를 낮게 울렸습니다.
그의 가슴팍에 뺨을 대고 손가락을 움켜쥐는 순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손끝을 타고 흐르던 차디찬 냉기가 봄눈 녹듯 사르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옵니다. 심장을 옥죄던 한빙증의 사슬이 툭, 투둑 끊어지며 온몸의 혈관으로 따스한 온기가 파스텔 톤 분홍빛 활력처럼 빠르게 퍼져 나갔습니다.
얼어붙었던 숨통이 트이자 나도 모르게 허억, 하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습니다. 가물거리던 시야가 서서히 맑아지며, 나를 내려다보는 남자의 얼굴이 똑똑히 눈에 들어왔지요.
밤하늘을 그대로 베어 물어 만든 듯한 칠흑 같은 머리카락. 그리고 그 아래로 서리 맞은 겨울 호수처럼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 디트리히 에스카르트 공작이었습니다. 그의 미간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고, 단단한 턱관절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사옵니다.
“공, 공작…… 각하…….”
내 목소리는 작게 떨렸습니다. 미처 다 가시지 않은 추위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위압감 때문이기도 했지요.
“감히 내 허락도 없이 영지에 들어와 마수를 숨기고, 이제는 내 품에 쓰러지기까지 하는군. 대담한 침입자이거나, 아니면 제국에서 보낸 아주 어설픈 세작이거나. 둘 중 어느 쪽이지?”
그의 음성은 차가운 얼음 송곳 같았으나, 그 품에서 전해지는 정제된 마기의 열기는 지독할 정도로 달콤했습니다. 마치 한겨울의 난로가 뿜어내는 붉은 화염처럼, 내 얼어붙은 영혼을 구원해 주는 유일한 동아줄 같았지요. 나는 살기 위해 그의 검은 모피 코트 자락을 더욱 필사적으로 거머쥐었습니다.
그때, 내 품 안에서 작은 털 뭉치가 꼬물거리며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캬아아악-!”
연분홍빛 벚꽃잎 같은 불꽃 스파크를 꼬리 끝에서 연신 튀겨대며, 모카가 디트리히를 향해 날카로운 앞발을 치켜세웠습니다. 제 조그만 몸집보다 수십 배는 더 큰 남자를 향해 온몸의 털을 빳빳하게 세우고 짖어대는 꼴이 가련하면서도 지극히 사랑스러웠지요. 모카는 디트리히가 나를 해치려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습니다.
“하, 요만치 작은 마수 녀석이 제법 사납군.”
디트리히가 핏, 차가운 실소를 흘렸습니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검붉은 마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며 모카를 향해 뻗어 나가려 했습니다. 북부 공작가의 핏줄을 흐르는, 땅을 뒤흔드는 파멸의 저주였습니다.
그 검은 마기가 허공을 가르는 순간, 내 눈앞에 은은한 라벤더색 빛무리와 함께 익숙한 반투명 창이 스르륵 떠올랐습니다.
[영혼 보육 대장 - 특별 경고 페이지] ▶ 대상: 디트리히 에스카르트 (인간 / 마수의 인도자 혈통) ▶ 상태: 극심한 마기 과부하 및 역류 (오염도 87%) ▶ 증상: 왼쪽 어깨 하단부터 심장 부근까지 찌르는 듯한 극통, 만성 불면증, 폭주 직전의 신경 쇠약. ▶ 솔루션: 정제된 마력의 순환 유도 및 마수와의 정서적 교감 촉진. (※ 경고: 현재 상태로 마법을 무단 방출할 경우, 심장에 가해지는 반동이 3배로 증가함.)
눈앞에 선명하게 떠오른 회계 장부 형태의 시스템 UI를 바라보며, 나는 마른침을 삼켰습니다. 이 남자는 나를 당장이라도 베어버릴 수 있는 무시무시한 권력자였지만, 동시에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시한폭탄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디트리히가 칼집에서 검을 반쯤 뽑아 들며 나를 차갑게 내려다보았습니다. 서슬 퍼런 검날이 내 목덜미에 닿는 촉감은 소름 끼치도록 차가웠지요.
“말해라. 네 정체가 무엇인지.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 요새의 거름으로 써 주마.”
공기마저 얼려버릴 듯한 살벌한 마법 위압이 지하실 전체를 짓눌렀습니다. 기사들은 숨도 쉬지 못하고 뒤로 물러섰고, 유리엘은 구석에서 식탁보를 뒤집어쓴 채 덜덜 떨며 울먹이고 있었사옵니다. 일촉즉발의 상황.
하지만 나는 그의 위협에 굴하는 대신, 그의 손목을 향해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습니다. 그리고 보류 중이던 건강 진단 데이터를 머릿속으로 빠르게 정리하며, 단호하고 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습니다.
“각하, 지금 칼을 뽑으실 때가 아니옵니다. 왼쪽 어깨 밑에서부터 가슴뼈 안쪽까지, 마치 불타는 바늘 수천 개가 동시에 찌르는 것처럼 욱신거리지 않으십니까?”
“……뭐?”
디트리히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습니다. 뽑히던 검이 멈칫하며 검집으로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다시 들어갔지요.
“밤마다 서리가 내리는 고통에 잠을 이루지 못하시고, 마기를 억누르려 할 때마다 목구멍 끝까지 피비린내가 치밀어 오르실 텐데요. 지금 제게 마력을 쓰시면, 그 반동으로 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겪으실 것입니다. 제가 틀렸습니까?”
침묵이 지하실을 무겁게 내려앉았습니다.
디트리히의 푸른 눈동자에 서린 서늘한 광기가 가라앉고, 그 자리에 깊은 경악과 의혹이 차올랐습니다. 그의 가슴팍이 크게 들썩였습니다. 자신이 평생 숨겨왔던, 오직 자신만이 알고 있던 저주의 고통을 처음 보는 약한 여자가 손가락 하나 대지 않고 정확히 짚어냈으니 그럴 만도 했지요.
“……네년이 그걸 어떻게 알지? 황실의 정보원들이 내 신체 상태까지 캐낸 건가?”
그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낮고 살벌해졌지만, 그 기세에는 아까와 같은 무자비한 위압감 대신 떨쳐낼 수 없는 혼란이 묻어나고 있었습니다.
나는 떨리는 숨을 고르고, 내 품에서 낑낑거리는 모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달콤한 바닐라 향이 감도는 모카의 부드러운 털을 만지자, 내 마음도 한결 차분해졌사옵니다.
“저는 세작이 아니옵니다. 그저…… 버림받고 상처받은 아이들을 돌보는 보육사일 뿐이지요. 제 눈에는 보입니다. 각하의 몸을 갉아먹고 있는 그 아픈 마기들이 얼마나 괴롭게 울부짖고 있는지요.”
디트리히는 한참 동안이나 나를 빤히 바라보았습니다. 그의 눈빛은 깊은 밤의 바다처럼 어두워 그 속을 도저히 가늠할 수 없었지요. 하지만 이내 그가 쥔 검자루에서 힘이 서서히 빠지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흥,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가 뚱한 표정으로 툴툴거리며 내 허리를 받치고 있던 손을 툭 놓았습니다. 허나 완전히 무심하게 던져버린 것은 아니어서, 나는 가볍게 바닥에 발을 디딜 수 있었지요. 그의 손길이 떨어지자마자 다시 서늘한 공기가 뺨을 스쳤지만, 다행히 아까처럼 전신이 마비되는 한빙증의 발작은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그의 정제된 마기를 잠시 접촉한 것만으로도 내 체온이 일시적으로 안정된 덕분이었습니다.
“따라와라.”
디트리히가 검은 모피 코트를 펄럭이며 지하실 한쪽에 마련된 커다란 작전 테이블로 걸어갔습니다.
그 테이블 위에는 윈터헤이븐 요새의 지도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습니다. 제국의 마수 말살 정책으로 인해, 사방에서 감시의 눈길이 좁혀오는 위태로운 상황. 이 요새는 겉보기에는 얼어붙어 버려진 폐허 같았지만, 에스카르트 공작가에게는 마지막 보루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네가 정말로 무언가 볼 줄 아는 보육사라면, 이 쓸모없는 요새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지 증명해 봐라.”
디트리히가 지도 위를 툭툭 치며 말했습니다.
그의 묵인 하에, 나는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습니다. 낡고 먼지 쌓인 양장 가죽 도면이 눈에 들어왔지요. 세월의 흔적으로 누렇게 바랜 종이 위에는 요새의 구조가 복잡하게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때, 내 시야가 다시 한번 파스텔 톤 라벤더색으로 물들었습니다. [영혼 보육 대장]의 시스템이 내 시선을 유도하며 도면의 특정 부분을 반짝이는 분홍빛 선으로 그려내기 시작했사옵니다.
‘어머나…… 이건?’
내 손가락이 나도 모르게 도면의 구석진 모퉁이로 향했습니다.
단순한 벽면인 줄 알았던 곳, 도면의 찢어진 틈새와 겹쳐진 종이 결 사이로 기묘한 문양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일반적인 눈으로는 도저히 찾아낼 수 없는, 마력으로 직조된 고대의 표식이었지요.
사락, 사락.
나는 도면의 이중으로 겹쳐진 가죽 뒷면을 조심스럽게 들추었습니다. 그러자 낡은 종이 뒤편에 숨겨져 있던, 붉은 잉크로 정교하게 그려진 지하 통로가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것은…….”
디트리히의 눈이 가늘어졌습니다. 그 역시 처음 보는 구역인 듯, 그의 시선이 내가 가리킨 곳에 고정되었지요.
“윈터헤이븐 요새 지하의 고대 대피 방어벽 설계도이옵니다, 각하.”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설명했습니다.
“제국의 감시단이 들이닥치더라도, 이 지하 대피로를 통하면 마수들과 함께 안전하게 영지 외곽으로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이 구역은 고대 결계로 보호받고 있어, 외부에서는 마기의 기운을 전혀 감지할 수 없도록 설계되어 있사옵니다.”
공작조차 미처 알지 못했던 요새의 숨겨진 비밀 방어벽.
그것은 이 얼어붙은 영지에서 마수들과 내가 버려지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하고도 완벽한 낙원의 첫 단서였습니다. 내 갈망이 실현될 수 있는 열쇠가 바로 내 손끝에서 밝혀진 것이지요.
디트리히는 한참 동안 설계도를 내려다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그의 눈동자에 서린 불신이 가시고, 대신 기묘한 탐욕과 집착이 깃들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내게로 성큼 한 걸음 다가왔습니다.
은은한 침엽수 향이 코끝을 찌르는 순간, 그의 커다란 손이 내 목덜미의 옷깃을 거칠게 낚아챘습니다.
“틀림없는 진짜군. 내 요새에 이런 곳이 숨겨져 있을 줄이야.”
그의 얼굴이 내 코앞까지 다가왔습니다. 차가운 숨결이 입술에 닿을 듯 가까웠지요.
“하지만 이 설계도가 진짜라고 해서 네 목숨이 완전히 보장된 것은 아니다.”
그의 시선이 지하실 저편, 어둡고 깊은 공동을 향했습니다. 그곳에서부터 쿵, 쿵, 하고 심장을 울리는 거대한 진동과 함께, 쇠사슬이 끊어질 듯 요동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광폭화에 휩싸인 다른 마수들의 끔찍한 포효 소리였습니다.
“당장 3일을 주지.”
디트리히가 내 옷깃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속삭이듯 낮게 읊조렸습니다.
“3일 안에 요새 지하에서 날뛰는 저 괴물들을 전부 진정시켜라. 만약 실패한다면, 이 설계도와 함께 너를 저 방어벽 깊은 곳에 영원히 매장해 버릴 테니.”
그의 서리 서린 푸른 눈동자가 내 영혼을 꿰뚫어 보듯 빛났습니다.
나를 살려줄 유일한 온기이자, 언제든 나를 무자비하게 짓밟을 수 있는 북부의 지배자. 그의 가혹한 제안 앞에서, 내 가슴은 두려움과 기묘한 해방감으로 동시에 요동치기 시작했사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