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쿠릉, 쾅콰쾅―!

하늘을 뒤덮고 있던 몽환적인 분홍빛 장막 위로 참혹한 핏빛 균열이 쩍쩍 갈라졌다. 제라드 크로이츠가 제 광기를 이기지 못하고 깨부수어 버린 고대 제어 석판의 파편들이 날카로운 유성우처럼 사방으로 흩날렸다. 파편이 지나간 자리는 은밀하게 타오르는 검붉은 불꽃송이들로 얼룩졌고, 그 열기에 윈터헤이븐의 앞마당에 소담스럽게 피어 있던 민트빛 약초들이 힘없이 오그라들었다.

이성을 완벽하게 상실한 채 붉은 눈을 부릅뜬 거대 키메라들이 수십 마리나 떼를 지어 요새를 향해 수직으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녀석들이 뿜어내는 찢어지는 듯한 비명은 귀를 찌르고 들어와 뇌수를 뒤흔들 정도로 포악했다.

“레티샤!”

디트리히가 낮게 신음하며 나를 제 품속으로 더욱 깊숙이 끌어안았다. 그의 단단한 가슴팍에 뺨을 묻은 순간, 갓 구운 바닐라 빈처럼 달콤하면서도 지독하리만치 정제된 태고의 마기가 내 차가운 살결을 타고 부드럽게 흘러들었다. 얼어붙어가던 뼛속까지 봄날의 아지랑이 같은 온기가 스며들며 한빙증의 발작이 거짓말처럼 가라앉았소.

하지만 안도의 한숨을 내쉴 틈도 없었다. 그의 넓은 어깨 너머로 보이는 요새의 서쪽 성벽 일각이, 가장 거대한 키메라의 무자비한 돌격에 힘없이 허물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옵니다.

콰아아앙!

육중한 돌덩이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무너진 틈새로 끈적한 검은 마기가 안개처럼 스며들었고, 그 매캐한 냄새는 코끝을 찔렀다.

“으아아! 보육사 님! 괴물들이, 괴물들이 장벽을 부수고 들어와요!”

유리엘이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힌 채로 보육실 문틀을 붙잡고 부르짖었다.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빗자루를 꼭 쥐고 있는 그녀의 작은 어깨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심장 한구석에서 지독한 공포가 고개를 들었다. 머릿속 깊은 곳에 낙인처럼 찍혀 있던 전생의 유기 트라우마가 귓가에 차갑게 속삭이는 듯했소.

‘다 버리고 도망쳐. 어차피 넌 여기서도 버림받을 거야. 네 목숨이라도 건져야지.’

손끝이 머뭇거리며 요새 구석에 숨겨둔 보따리를 찾아 도망치고 싶다는 회피 본능이 나를 잠식하려 했다. 하지만 내 발목을 부드럽고 따스하게 감싸 안는 모카의 꼬리와, 내 품에서 삐약거리며 작은 날개를 바르르 떠는 아기 그리핀의 솜털 같은 감촉이 나를 붙잡았다.

이 무해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두고 나 혼자 비겁하게 도망칠 수는 없었다. 내 손으로 직접 온돌을 깔고, 따스한 수프를 끓여 먹이며 가꾸어 온 이 파스텔빛 안식처를 저 잔인한 위선자의 손에 파괴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단 말이오.

“디트리히, 저를 내려놓아 주셔요. 이제 움직일 수 있사옵니다.”

나는 그의 옷자락을 꼭 쥔 채 속삭였다. 디트리히는 못마땅한 듯 미간을 찌푸렸지만, 내 눈 속에 담긴 단호한 빛을 읽어내고는 천천히 나를 바닥에 내려놓아 주었다. 그의 손가락이 내 손끝을 스치며 마지막 온기를 불어넣는 것이 느껴졌다.

순간, 내 눈앞에 은은한 살구빛과 민트색이 교차하는 투명한 사각형 창이 활성화되었다.

[영혼 보육 대장 시스템 가동.] [윈터헤이븐 요새 전체 구역을 스캔합니다.]

‘2화에서 요새 도면을 분석할 때 발견했던 그 설계도가 필요해.’

나는 머릿속으로 요새 지하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고대 대피 방어벽 설계도를 간절히 호출했다. 일전에 요새의 낡은 도면 뒤편에서 우연히 발견했던, 잊혀진 고대 에스카르트 가문의 피난처이자 비상 통로. 복잡하고 기하학적인 룬 문자로 가득 찬 그 설계도가 내 시야에 3차원 입체 홀로그램처럼 선명하게 구현되었다.

[고대 대피 방어벽 설계도 분석 완료.] [마력로와 연결된 방어벽 시스템을 활성화합니다. 대가로 사용자의 체온이 급격히 저하됩니다.]

으스스한 한기가 다시금 발끝에서부터 타고 올라왔지만,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버텼다. 내 등 뒤에는 나를 지켜보는 디트리히의 뜨거운 시선과 그의 마기가 든든한 방패처럼 버티고 있었으니까.

“유리엘! 아이들을 데리고 요새 지하 3번 비상 통로로 대피하세요! 어서요!”

내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유리엘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이내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네, 네! 보육사 님만 믿을게요! 얘들아, 언니 손 꼭 잡아!”

유리엘은 품에 겁에 질린 아기 그리핀을 안고, 뒤따라오는 어린 마수들을 차례로 이끌며 지하 계단 아래로 신속하게 뛰어 내려갔다. 모카는 내 어깨 위에 잽싸게 올라타, 제 보드라운 꼬리로 내 목덜미를 휘감으며 갸릉거렸다. 녀석의 꼬리 끝에서 톡톡 터지는 미약한 불꽃 온기가 한빙증의 냉기를 조금이나마 덜어주어 숨을 쉬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그사이, 성벽을 부수고 들어온 거대 키메라 두 마리가 끔찍한 포효를 지르며 요새 마당으로 육중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사자의 몸뚱이에 산염소의 머리가 솟아 있고, 꼬리는 살아 움직이는 독사로 이루어진 흉측한 형상이었다. 녀석들의 입에서 흘러내린 보랏빛 타액이 닿는 곳마다 파릇파릇하던 잔디가 순식간에 검게 녹아내렸다.

“하찮은 피조물들이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발을 들이느냐.”

디트리히가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칠흑 같은 마기가 순식간에 수십 개의 거대한 사슬 형상으로 변해, 선두에 서 있던 키메라의 목덜미를 휘감아 땅바닥에 거칠게 처박아버렸다.

쿵―!

대지가 비명을 지르며 흔들렸다. 그러나 제라드가 제어 석판을 깨부순 탓에, 키메라들은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 제 목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나는데도 붉은 눈을 번뜩이며 다시 일어섰다. 오히려 더 미쳐 날뛰며 디트리히를 향해 날카로운 앞발톱을 휘둘렀다.

“디트리히! 녀석들을 요새 지하 통로 입구로 유인해 주세요!”

나는 허공에 띄워진 설계도 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외쳤다. 디트리히의 붉은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으나, 그는 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날렸다.

“알겠다. 절대로 내 시야 밖으로 벗어나지 마라, 레티샤.”

디트리히는 유연한 동작으로 뒤로 물러서며, 키메라의 이목을 지하 통로 입구 쪽으로 완벽하게 끌어당겼다. 흉포한 괴수들은 그의 뜨겁고 순수한 마기 냄새에 굶주린 야수처럼 침을 흘리며, 어두컴컴한 지하 통로를 향해 무작정 돌진해 들어왔다.

지하 통로 내부로 진입하는 순간, 차갑고 습한 공기가 피부를 스쳤다. 하지만 이곳은 더 이상 버려진 폐허가 아니었다. 내가 그동안 깔아둔 구들장 온돌 마력로의 열기가 지하 파이프를 타고 흐르며, 사방의 벽면이 부드러운 살구빛과 연분홍빛 마력으로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소.

키메라가 좁고 구불구불한 지하 통로 깊숙이 들어서자마자, 나는 설계도상의 제어 룬을 손가락으로 강하게 내리눌렀다.

[고대 방어벽 제1격벽, 즉시 폐쇄합니다.]

고고고궁―!

키메라의 바로 뒤쪽에서 육중한 돌문이 순식간에 내려앉아 퇴로를 수직으로 차단했다. 깜짝 놀란 키메라가 뒤를 돌아보며 방어벽을 들이받았지만, 고대의 마력으로 강화된 벽은 미세한 먼지 하나 흘리지 않고 굳건히 버텼다.

“지금이옵니다! 격벽 제3조작, 압착 기동!”

나는 통로 곳곳의 보이지 않는 마력 흐름을 조작하듯 허공에 대고 손가락을 우아하게 휘둘렀다. 통로의 벽면이 기계적인 마찰음을 내며 유기적으로 움직였고, 키메라의 거대한 덩치를 좁은 골목 사이에 가두어 버렸다. 녀석은 날개를 제대로 펴지도 못한 채 벽 사이에 끼어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버둥거렸다.

가장 강력하고 포악하다던 제국의 비밀 병기가, 내 손가락 놀림 몇 번에 좁은 쥐구멍에 낀 생쥐 꼴이 되어버린 순간이었소. 저 위에서 기고만장하게 웃고 있을 제라드가 이 모습을 본다면 거품을 물고 쓰러질 것이 분명했다.

“모카! 준비되었느냐?”

내 어깨 위의 모카가 “캬아앙!” 하고 씩씩하게 울부짖으며 앞으로 날렵하게 뛰어내렸다.

동시에, 통로 천장의 좁은 틈새에서 대기하고 있던 아기 그리핀이 힘차게 날개치며 내려앉았다. 그리핀의 작은 부리 끝에 서린 은은한 바람의 마력이 키메라의 시야를 가리기 위해 날카로운 바람 칼날을 사방으로 뿜어냈다.

슈우욱, 슈욱! “끼에에엑!”

눈이 멀어 마구잡이로 고개를 흔드는 키메라의 뒷목에, 검붉은 마기가 뭉쳐 있는 정체불명의 돌기가 솟아 있는 것이 보였다. 바로 키메라의 핵심 약점이자, 마력의 흐름이 집중되는 결절이었소.

[영혼 보육 대장 시스템 분석 완료.] [대상: 타락한 키메라.] [약점: 뒷목의 마력 핵. 충격 가할 시 즉시 무력화 및 마기 정화 가능.]

“모카, 바로 저기란다! 불꽃을 모으렴!”

내 외침에 응답하듯, 모카의 꼬리 끝에 달려 있던 작은 불꽃이 갑자기 신비로운 푸른색으로 변하며 무서운 기세로 팽창했다. 상태창 구석에 굳게 잠겨 있던 ‘전설의 신수 유전핵’이 아주 미세하게 공명하며 뿜어낸, 극도로 순수하고 뜨거운 신수의 불꽃이 지하 통로를 환하게 비추었다.

슈우우― 콰앙!

모카가 쏘아 보낸 푸른 불꽃 탄환이 키메라의 뒷목 약점에 정확히 내리꽂혔다. 이어서 아기 그리핀이 날카로운 발톱으로 그 자리를 사정없이 내리찍었다.

퍼어엉!

가장 강력하고 흉포하다던 제국의 키메라가, 단 한 번의 제대로 된 반격도 해보지 못한 채 보랏빛 연기를 뿜으며 바닥으로 힘없이 쓰러졌다. 녀석의 몸에서 흘러나온 검은 연기는 요새의 따스한 온돌 마력에 닿자마자 눈 녹듯 정화되어, 달콤한 솜사탕 같은 냄새를 풍기며 스러졌다.

“해냈어요! 우리가 해냈소!”

나는 모카와 아기 그리핀을 품에 꼭 껴안았다. 아이들의 복슬복슬한 털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한빙증의 고통을 씻은 듯이 날려 보내 주었다.

그러나 승리의 여운을 만끽하기도 전에, 지하 통로 입구 쪽에서 차갑고 잔인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터벅, 터벅.

흙먼지를 헤치고 나타난 것은, 온몸에 피칠갑을 한 채 미친 사람처럼 기괴하게 웃고 있는 제라드 크로이츠였다. 그의 손에는 은빛으로 빛나는 고대 장궁이 들려 있었고, 활시위에는 검은 독기가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저격 마법 화살이 먹여져 있었다.

“하하…… 하하하! 내 평생의 걸작들이, 이런 쥐새끼 같은 보육사 년과 똥개 같은 마수 놈들에게 당하다니…….”

그의 목소리는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패배감과 절망으로 완전히 뒤틀린 광신의 목소리였소. 디트리히가 그를 저지하기 위해 마기를 끌어올리며 다가서려 했지만, 제라드는 이미 이성을 잃고 오직 나만을 노리고 있었다.

“너만 없었어도…… 너만 죽으면 이 모든 치욕은 사라진다!”

피이이잉―!

시위를 떠난 검은 화살이 공기를 찢는 굉음을 내며, 내 이마를 향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직선으로 날아들었다. 너무나 빠른 속도에 몸이 굳어 움직일 수 없었다. 내 이마 바로 앞까지 육박한 화살 끝의 검은 독기가 살갗을 아리게 찔러왔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